15
오버시어의 지원이라는 것은 화려했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의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쏴댈 탄약만 겨우 긁어모으던 환경이 열악해 비교되는 것이겠지. 마침내 워치 포인트-알파를 제외한 모든 워치 포인트를 밀어버렸을 때, 이구아수와 들개는 그리드 086에 정식으로 초대되었다. 모처럼 제공받은 숙소, 이구아수는 그 안에 들어가 가장 먼저 샤워실로 향했다. 그동안 씻기는 커녕 마실 물조차 부족해 얼굴엔 핏자국이 말라붙어있었다. 거진 삼 주 만에 보는 거울엔 웬 거지꼴의 인간이 있었다.
“꼬라지 하고는…”
얼굴은 핏자국 위로 먼지가 뒤엉켜 거무튀튀했고, 손에는 기름때가 가득했다. 작업 중 연료를 잔뜩 뒤집어 쓴 정비공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이다. 수도꼭지를 비틀어 손에 물이 묻자 그제서야 찝찝함이 느껴졌다.
*
샤워실 밖으로 나온 이구아수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브리핑을 확인했다. 오버시어의 조사에 따르면 레드 건은 기어코 기술연구도시의 점령에 성공했는지 바스큘러 플랜트를 건설하고 있었다. 화면상에 플랜트의 하부에 해당할 기둥이 선명했다. 그동안 워치 포인트들을 빠르게 처리한다고는 했지만 기한에 아슬아슬하게 못 맞췄다.
“야, 들개. 내일은 워치 포인트-알파로 돌아갈거다.”
상대는 대답이 없다.
“…자냐?”
먹고 싸우고 자고… 그동안 본 바로 저 녀석은 그 외 자유 행동이라고는 없었다. 어김없이 자고 있을 터였다. 마치 강화 인간이라는 것은 AC를 타고 싸우기만을 위한 존재라는 듯이 행동하는 놈의 생활 방식을, 강화 인간임에도 사람으로서 살기 위해 억지로 노력하는 이구아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젠 그저 ‘원래 이런 새낀가보지’ 하며 포기할 단계였다.
*
그들은 다시 중앙 빙원으로 되돌아왔다. 바스큘러 플랜트의 뿌리, 가장 낮은 위치의 기둥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여전히 거대해서 아이스 웜과도 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옆은 워치 포인트-알파, 대심도의 입구가 위치했다. 최심부의 기술연구도시에 있던 물건들을 해체해서 심도 바깥으로 꺼내고, 다시 그것을 바깥에 세우는 모양이었다. 이구아수는 헤드 브링어의 등판에 단 백팩을 흘겼다. 이번 일의 핵심은 이것이다.
“들개. 네가 잘 하는 거, 어디 한번 해 봐. 죽이진 말고.”
등에 이딴 걸 짊어지고 전위에 나서는 것은 사양이었다. 들개의 로더 4는 대답 없이 앞으로 나선다. 이러니 진짜 고용이라도 한 것 같다. 그가 MT 부대를 박살내며 정리하는 것을 보고, 짊어진 것을 내려놓았다. 원격으로 격발할 수 있는 폭탄이다. 그 스위치는 칼라에게 있었다.
“그딴 게 재미있기는 뭐가 재밌다는 거냐, 그 자식은…”
폭탄을 제공하고서, 스위치는 자신이 다루겠다며 한껏 웃던 그 얼굴이 선명했다. 결국 목숨줄은 그에게 없었다. 이구아수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들개가 정리한 구역에 하나씩 폭탄을 설치하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
“기다리고 있었다, G5, G13. 그동안의 소풍은 즐거웠나?”
루비콘 기술연구도시, 그 한가운데. 아직 해체 작업이 진행중인 바스큘러 플랜트 주위로 미시간의 라이거 테일과 MT부대가 진을 치고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그 사이 죽었는지 보이지 않는 MT와 얼굴도 여럿 보인다. 미시간은 날을 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둘을 환영했다.
“오랜만에 나쁜 소식을 하나 더 들려주지, 영감.”
“행운의 번호라고 했던 건 취소한다, G13! 올 때 마다 나쁜 소식만 전해주는 놈이 어딜 봐서 행운이냐?”
미시간이 웃는다. 말하지 않아도 그도 이미 바깥의 소식을 들어 알 것이다. 워치 포인트를 부수고 다니는 미친놈들에 대해선 이미 유명한 얘깃거리다.
“이미 오면서 폭탄을 설치해 뒀다. 사이좋게 지하에 묻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들 짐 빼지 그래?”
미시간은 한껏 크게 웃었다. 칼라와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그럼에도 이구아수가 그의 웃음소리 만큼엔 위축되는 것은, 그동안 겪은 일이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저 망할 노친네는 늘 이구아수가 덤벼들 때마다 그를 제압하고 훈련을 추가시켰다. 그럴 때마다, 저리 웃었다.
“발람에 너무 오래 있긴 했지. 안 그러냐, 머저리들아!”
“?! 예, 그, 그렇습니다!”
“이 말을 언제 하시나 했습니다, 총대장!”
미시간의 말에 레드 건 부대원들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나, 그의 말에 찬동한다. 다시 그들은 떠들썩하게 웃는다. 하긴, 그동안 보여주었던 발람의 태도를 미루어 보면 당연했다. 발람은 코랄을 원해서 루비콘에 레드 건을 밀어넣은 게 아니다. 미시간을 사지에 몰아넣고, 그들이 코랄을 구해오든지 거기서 죽든지. 둘 중 하나를 강요했을 뿐이다. 어느 쪽이든 본사로서는 득이 되는 결정이었다. 미시간과 높으신 머저리들은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그래도 너희가 그럴 힘이 있는지 정도는 알아 봐야겠지! 한꺼번에 덤벼라, 이 머저리 자식들아!!”
미시간과 들개, 이구아수 세 명을 레드 건의 MT부대가 둘러쌌다. 그들은 일제히 방패를 들어 세운다. 이구아수가 익히 아는 그것이었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번엔 그의 옆에 볼타가 아니라 들개가 나란히 서있다는 것이었다.
“하…… 늘 나쁜 예감은 빗나가는 일이 없군. 어이 들개, 하던 대로 해. 라이거 테일만 부수면 된다.”
“알았다.”
다만, 그들이 움직이는 것보다 미시간이 둘 사이로 뛰어드는 것이 더 빨랐다. 라이거 테일은 가장 먼저 헤드 브링어를 걷어 찼다. 뒤로 밀려난 헤드 브링어가 MT 부대가 만들어놓은 원형 라인에 닿는다.
터엉—
“윽, 젠장!”
방패는 순식간에 뻗쳐나와 헤드 브링어를 밀쳐내 다시 원의 안쪽으로 던져넣었다. 헤드 브링어의 각부가 바닥을 갈아내며 구른다.
“이구아수, 오랜만에 하니까 감이 다 죽었나봐?”
등 뒤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방패로 밀쳐낸 그 놈이다. 이가 갈린다. 이래서 하기가 싫었던 거다.
“?! 무슨—”
갑작스레 단말마를 끝으로 통신이 끊기는 소리가 났다. 주변의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이구아수는 헤드 브링어의 카메라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들개가 파일 벙커를 들고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 웃던 놈은 방패 째로 꼬치구이가 되어있었다.
머리가 아파왔다.
“들개 이 머저리 새끼야, 지금 뭐 하는거야!!”
“뭐가 문제지?”
이 자식은 아직도 자기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건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래, 저 MT의 파일럿은 아직 살아있다, 다만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뭐가 문제긴, 뭐가! 이 씨ㅂ—”
그의 등 뒤로 육중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G13, 나 하나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나보군? 그 패기는 마음에 들었다, 머저리들아! 레드 건의 방식을 보여줘라! 즐거운 소풍의 시작이다!”
미시간이 웃으며 목청을 높인다. 그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통신을 타고 흘렀다. 이젠 돌이킬 수 없다.
“안 그래도 좀이 쑤시던 참입니다, 총대장!”
“와아아아아아——!!”
함성 소리와 함께 MT들이 일제히 방패를 내던지고 무기를 들어올린다. 그들을 둘러싸고 단지 밀어내기만 하던 원형진이, 이제는 총을 들었다. 이구아수는 재빨리 헤드 브링어의 부스터를 올렸다. 지금은 이 밖으로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어썰트 부스터를 이용해 헤드 브링어를 MT에 갖다 박는다. 이어서, 걷어찬다. 그것만으로 한 기는 박살이 났다. 그들이 오기 전에 죽은 이들과 이번 것으로 박살난 두 기를 포함해도 여전히 MT들은 서른 남짓이었다.
*
“헉…헉…… 드디어 쓰러졌다, 씨발…!!”
마침내. 엉망진창이 된 AC가 두 기 남았다. 미시간을 마침내 꺾어 보였다. 그들 뒤에는 MT들이 말 그대로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가 이겼으니까, 이제 다, 이 빌어먹을 땅굴 밖으로 꺼져———!!”
이구아수는 심도 한복판에서 승리의 포효를 지르고서,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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