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V] Sal Ena
”Begin Again” - Bellara/Rook
로그/안티바의 까마귀/성별 비특정 루크
DA:I - Trespasser과 DA:V 사이의 시간대를 다룹니다. DA:V의 가벼운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DA:Vows and Vengence의 내용을 일부 참고했습니다.
벨라라의 과거는 100% 선동과 날조입니다.
베일 점퍼들은 펜하렐Fen‘harel과 그의 하수인들이 전 엘프 사회를 혼란에 빠트리던 시절을 어젯밤의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한다. 베일 점퍼이기 전에 그들 중 다수는 데일스 엘프였고 일부는 도시 엘프였지만, 그들 중에서 고대의 엘프 왕국이 재건될 것이라는 풍문에 마음이 동하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다. 돌아올 엘브헤난Elvhenan이 ‘남겨진 엘프’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을 만큼 지혜로운 그들에게조차 인간의 왕국들을 불태우겠다는 약속은 달콤하게 들렸다.
그러니 많은 엘프들이 자진해서 ‘공포의 늑대’를 추종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추종자들 대부분은 공포의 늑대를 참칭하는 자가 정말 신화 속의 그 에바누리스Evanuris와 동일 인물인지도 알지 못했다. 알았더라 하더라도 그들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수백 년을 이어져 온 가난과 억압에 대해 보상받을 수만 있다면 무시무시한 공포의 늑대의 힘을 빌리는 것쯤 감수할 만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그 대가로 그들은 화살통 속의 화살처럼 소모되었다.
이것이 벨라라 루테어가 스무 살에 외톨이가 된 경위이다.
그녀에게는 젊은 엘프 역사가이자 고고학자, 그리고 엘루비안 연구자로서 다져진 입지가 있었다. 그러나 평판은 루테어 부족을 지키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녀는 에바누리스를 신뢰하지 않을 만큼은 현명했지만 동포를 설득해 알라산 숲에 남게 할 만큼의 달변가는 아니었다.
오직 한 사람, 세상에 단 하나 남은 그녀의 혈육, 시리안 루테어만이 그녀의 말을 들었다. 그는 내심 공포의 늑대를 따르고 싶어하는 듯했지만, 결국엔 사랑하는 누이를 위해 남기로 했다. 적어도 일주일 전까지는 그랬다.
시리안이 사라졌다. 하늘이 무너진다면 이런 기분일까?
벨라라는 홀로 알라산 숲을 수색했다. 스트라이프와 이렐린은 시리안의 일이 아니어도 이미 너무 바쁜 사람들이었다. 어느 데일스 부족이라도 사정은 비슷할 것이 분명했다. 많은 부족이 내전을 겪거나, 뿔뿔이 흩어지거나, 혹은 더 깊은 숲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세상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숲을 드나드는 외부인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다.
숲은 그 어느 때보다도 붐볐지만 도움을 구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가 마주치는 외부인은 하나같이 그녀의 사람들에 대한 존중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가 없는, 탐욕스럽고 뻔뻔스러운 치들이었다. 성기사단, 도굴꾼들, 혈마법사들. 그녀의 입장에서는 없느니만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령 그녀가 그들에게 문명인다운 의사소통을 시도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을 찾습니다. 이름은 시리안 루테어. 저랑 닮았고, 나이는 십대 후반이에요. 그리고 제 남동생이고요….”
반응 1: 무시. 짐승의 울음소리나 새의 지저귐을 들은 것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지극히 무리 동물적인 행위다. 서열이 높은 개체는 낮은 개체를 무시할 권리가 있다.
반응 2: 성희롱. “예쁜이, 혼자 다녀?” 가슴과 엉덩이를 훑는 시선, 휘파람 소리, 경박한 웃음소리. 어렵지 않게 머리 속에서 떠올릴 수 있다. 그만큼 자주 겪는 일이다. 망할 솀런 새끼들.
반응 3: 거절. 위의 두 유형에 비해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꺼져, 뾰족귀”에서부터 “미안하게 됐수다”까지. 그나마 성공적인 의사소통 시도라고 할 수 있지만, 별 의미는 없다.
벨라라는 이미 저열한 인간 몇 명을 알라산 숲의 흑토로 만들었다. 그녀의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자들은 역설적으로 가장 정중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녀는 그들의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에 희미하게 서린 경멸을 읽을 수 있었다. 그녀에게 고귀한 혈통도, 높은 지위도, 두툼한 금화 주머니도 없다는 사실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경멸을. 그녀가 가진 것이라고는 영민한 두뇌와 개인적으로 연구 중인 고대 엘프 유물 몇 점이 전부였다. 하다 못해 엘루비안을 작동시킬 수만 있다면!
벨라라의 생각이 엘루비안에 닿자, 그녀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엘루비안에 대해 많이 알아냈다고 생각했었는데, 정작 그녀가 아는 것들 중 시리안을 찾는 데에 쓸모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충분히 똑똑하지조차 못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벨라라는 울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 역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 그녀의 하트 모양 얼굴의 뾰족한 꼭지점에 맺히고 방울져 떨어졌다. 울음을 참을 수도 없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계속 걸었다. 이토록 손쓸 수 없는 무력감에 비하면 그녀의 등 뒤를 쫓아오는 암살자쯤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세뇨라, 숲에 슬픈 보석을 떨어뜨리지 말아요.”
앳된 목소리였다. 시리안 또래… 아니, 더 어리다.
벨라라는 퉁퉁 부은 눈에서 눈물을 닦아냈다. 젖살이 덜 빠진 얼굴이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린애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벨라라는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받아요, 세뇨라.” 녀석이 흰 무명 손수건을 내밀었다. “까마귀에게 계약은 생명과도 같지만, 아름다운 여성의 미소에 바치지 못할 목숨이 대체 무슨 소용이겠나요?” 그녀가 눈물을 닦고 숨을 고르는 동안, 녀석은 레이피어 한 자루를 손에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그녀를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고마워.” 벨라라가 어색하게 감사를 표했다. “천만에요.” 녀석은 천연덕스럽게 받아쳤다.
벨라라는 머리를 식힌 후에야 꼬마 신사—혹은 숙녀—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특유의 억양, 밝은 은색의 레이피어, 실용성을 추구한 듯 묘하게 화려한 검은 옷. 녀석은 분명 안티바의 까마귀였다. 바깥 세계에 대한 견문이 넓지 않은 벨라라였지만, 안티바 사람의 바람둥이 기질에 들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언정소설에서 읽었다).
그런데, 왜 안티바의 까마귀가 여기에 있는 걸까? 여기에까지 생각이 닿자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벨라라는 궁금한 건 절대 참지 못했다. “날 어떻게 찾아왔어? 설마 내가 암살 대상이야?”
“이건 비밀인데…, 아니요.” 어린 까마귀가 씩 웃었다. “이제 가봐야 해요. 만나서 반가웠어요.” 녀석은 깜짝 놀랄 만큼 민첩하게 나무 위를 기어 오르더니, 나뭇가지 사이를 넘어 다니며 그림자 너머로 멀어져 갔다.
“이름이라도 알려 줘!”
“데 리바!”
“…그게 내가 벨라라에게 첫눈에 반한 순간이었지.” 루크가 갓 내린 에스프레소에 설탕을 한 스푼 얹으며 말했다. “암살 대상을 놓쳤다고 일주일 동안 지하 고문실에 거꾸로 매달리는 벌을 받긴 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어.”
“오.” 루카니스는 짤막한 감탄사를 뱉으며 자기 몫의 커피 잔을 홀짝였다.
“진위 여부가 의심스러운데.” 네브가 두툼한 사건 파일에 눈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암살을 시도할 거라면 동선을 예측하기 쉬운 협소한 장소가 좋지. 암살 대상이 숲에서 나올 생각이 전혀 없는 게 아니라면—”
그녀는 벨라라가 화들짝 놀라자 컵 속의 액체가 분수처럼 치솟는 꼴을 보며 말을 멈췄다.
“우리가 예전에 만난 적이 있었다고?”
벨라라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 다시 만났을 때에 한 번 더 반해 버렸지만 말야.” 루크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십 년이 지났지만 변함없이 아름답더라고. 나는 그동안 좀 컸으니까 벨라라가 못 알아보는 것도 당연하지.”
벨라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독서 클럽 회원들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핑크색으로 물들었다.
“루크, 제발….”
“이런 맛에 연하랑 사귀는 거 아니겠어?”
“루크!”
—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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