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1
재혁윤슬
아름다운 정원이 펼쳐진 대저택. 5월을 맞이해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정원사는 손을 다치지 않게 장미의 가시를 하나씩 톡톡 다듬고 있었고, 많은 하녀들은 머리수건을 뒤집어쓴 채 계절에 맞게끔 집안의 장식을 바꾸고 있었다.
“얘, 오늘 새 하인이 온다지 않아?”
“아마 지금쯤 집사님이 도련님께 소개해드리고 있을거야. 남자애라 잘됐지.”
“안 그래도 마굿간 쪽에 일손이 모자란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어린 하녀들이 속닥거리며 커다란 바구니에 바스락거리는 흰 린넨을 담았다.
“그런데 이 시점에 웬 하인이래?”
“너 그거 몰라? 왜, 어디 가문에 사생아 말야.”
최근 일간지에서 재밌는 소문이 떠돌았다. 모 가문에 사생아에 대한 소문. 도의적인 책임으로 몇 년간 데리고 있었으나 적자의 것을 탐낸다는 이유로 내쳐졌다는 이야기. 잘 나가는 귀족 집안에 사생아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뜨거운 감자였으나, 그 사생아가 제 위치에 만족하지 못해 결국 배다른 형제의 것을 탐내다 쫓겨났다는 이야깃거리는 그보다 더 못한 처지에 놓인 이들에게 퍽 재미난 것이었다.
“어머. 그럼 오늘 온다던 하인이...”
“진짜인지는 모르는데, 아마도 그렇다는 분위기야. 들고 온 추천서가 그 집에서 보낸 거였거든!”
**
재혁은 드물게 기분이 좋았다. 한 때는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던 이가 지금은 허름한 옷차림을 한 채 제 앞에서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니. 재혁은 잠시 상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잘난 집안의 사생아, 고작 사생아인 주제에 저보다도 뛰어난 성적을 거두어 아니꼽기는 했다. 그래도 실력 하나는 제법 좋았는데...
“배윤슬이라. 아주 잘 알지.”
윤슬의 어깨가 굳었다. 윤슬도 짐작했으리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때 동문이었던 이를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다니. 그는 수치침에 하순을 지긋이 깨물었다. 윤슬을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이 꽤 불쾌했지만 이제는 그의 고용주이니 이전처럼 쳐다보지 말라며 한소리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사. 얘한테는...”
끈덕한 시선이 윤슬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내려갔다. 꼭 잡아먹힐 것만 같은 감각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윤슬은 어쩌다가 이 집안으로 오게 되었는지, 잠시 제 기구한 팔자에 볼 안쪽 살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첫날부터 사고를 치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었기에.
“메이드 복을 주는 게 낫겠어.”
검은 머리에 희끗한 흰 머리가 듬성듬성 난 집사는 잠시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재혁을 보았으나, 이내 도련님의 명령이니 별 수 있겠냐는 생각에 알겠다는 대답했다. 윤슬에 대해서는 집사도 익히 아는 바. 또래에 아카데미에서 수학했던 친구를 보니 괜히 장난을 치고 싶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사용인 입장으로서는 주인의 말에 토를 달 수는 없는 법. 그는 곧이어 윤슬에게 메이드 복 한 벌을 가져다 주었다.
“아무래도 하녀들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윤슬 도련... 큼, 흠. 자네에게는 조금 짧을수도 있겠네.”
“...감사합니다.”
집사가 물러가 보겠다며 완전히 방을 나서자, 재혁은 윤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희게 질린 손으로 메이드복을 꽉 쥐고 있는 꼴이 꽤 우스웠다.
“우리가 이런 인연이 다 있다, 그치?”
사람 좋은 듯한 미소를 환히 띄고 윤슬을 살짝 내려다봤다. 재혁은 그의 시야 안에 가득차는 윤슬이 꼭 궁지에 몰린 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따지자면 쥐보다는 고양이 같은 면이 있지만. 아카데미에서도 도도하게 혼자 다니곤 했다. 장난삼아 말을 걸면 귀찮다는 듯 적당히 대답하는 모습에 더 거슬리게 만들고 싶어지기도 했다.
언제였나. 한 번 윤슬이 크게 성적을 망치고 기존에 있던 반에서 학급이 떨어진 적이 있었다. 묘한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재혁에게 그의 실패란 꽤 기쁜 일이었음에도 불쾌했다. 윤슬이 제 실력을 한껏 발휘하고도 미끄러진 게 아니었기 때문에. 사생아라는 위치만 빼면 재혁 못지 않게 제법 가질 건 다 가진 주제에 만족하지 못하고 반항하는 모습이 저와는 달랐다. 아등바등 부모의 눈에 들고자 수면 아래로 헛발질을 해대는 재혁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그래도 재혁은 적자, 윤슬은 서자인데도 꼿꼿한 모습이 재수없었다.
“갈아입고, 다시 와. 내 방으로. 여기서 갈아입으라면 안 하겠지?”
윤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재혁은 봐준다는 듯 턱 끝을 까닥이며 파티션 너머를 가리켰다.
**
종아리까지 겨우 닿는 치맛자락을 움켜쥔 채 어정쩡한 자세로 나온 윤슬을 본 재혁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마!...세요.”
“야, 너 진짜 잘 어울린다. 완전 네 옷 같아. 응?”
허리를 접어가며 낄낄대던 재혁은 윤슬의 다리께를 훑어보았다. 가릴 수도 없건만, 괜히 더 내려가지도 않는 치마를 꾹꾹 내리는 윤슬의 손을 잡아챘다.
“더 짧아도 되겠는데. 그치? 내일은 이보다 한뼘은 더 올려서 와. 뭐 어때. 넌 이제 내 전속 하인인데.”
그러면서 은근히 윤슬의 허리께를 더듬는 손길에 윤슬은 긴장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뭘 그렇게까지 싫은 티를 내고 그러냐...”
“...도련님이라고 해서 하인에게 이러시면 안됩니다.”
“어어. 너는 안 그랬겠지만, 나는 그러는 놈이야. 특히 배윤슬이 내 침실에 있다? 가만 있으면 바보 아닌가.”
허리께를 지분대는 손이 점점 등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고, 윤슬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는 그 때─
“옷은 제대로 갖춰입어야지.”
재혁은 미처 여미지 못했던 뒷목 단추를 잠궈주고는 담백하게 몸을 물렸다. 묘한 긴장감에 숨까지 참고 있던 윤슬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윤슬은 그제야 재혁의 방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사용인의 하루는 바빴다. 재혁의 전속 하인이라고는 하지만 재혁의 방이 쓸데없이 컸기 때문일까. 각을 맞춰 옷을 개고, 침대보나 이불을 정리하고, 베개를 잘 두드려 솜이 뭉치치 않도록 펼쳐놓고. 책상 위의 물건이 원래 있던 자리 그대로 놓여있어야 했기 때문에 위치까지 기억을 해둬야 했다. 쓸고 닦고 정리하는데만 해도 시간이 금세 흘러갔다.
게다가...
“내가 치마 줄여오랬잖아. 어?”
일만 하면 다가 아니었다. 시시때때로 윤슬의 뒤에 붙어서서는 허리를 만져대질 않나, 귓볼을 문지른다던지, 급기야 치마 아래로 종아리를 툭툭 건들이기도 했다. 점점 대담해지는 손길에 윤슬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도련님이라고 이전처럼 성질을 부리거나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집구석 돌아가는 꼴 보니 자신의 집이나 이쪽 집이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내심 동정심이 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전처럼 마냥 매정하게 대할 수도 없었다.
“도련님. 여기서 치마가 더 짧아지면 허벅지가 드러나는데요.”
“그게 보고 싶은건데. 허벅지가 드러나서 민망해하는 표정이나, 거기에 높은 곳을 정리할 때마다 옷이 들릴까봐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라던지...”
“변태야?”
“방금 말이 좀 짧았다.”
“하... 너 나 좋아하냐?”
사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그냥, 정말 그냥 해본 소리였다. 윤슬의 곤란해하는 모습을 즐기는 재혁에게 시비를 걸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재혁의 표정이 굳어갔다. 이내 눈이 흔들렸다. 마치 사고를 쳐놓고 어머니가 추궁을 하니 큰일났다는 표정을 짓는 어린애 같이. 오히려 윤슬이 더 당황스러워졌다.
“뭔데, 그 반응.”
“...어, 나 너 좋아하는데...”
급기야 윤슬의 얼굴마저 터지고 말았다.
**
도련님과 하인의 관계는 한층 어색해졌다. 재혁은 자신의 마음을 자각하고부터 못내 민망한지 이전처럼 윤슬을 따라다니며 히히덕대지 않았고, 윤슬은 자신의 업무를 하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집사가 맡기는 업무 외 일까지도 선뜻 맡으며 부러 재혁을 피해다녔다. 도무지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종아리께에 닿는 길이의 메이드복을 입으며 바삐 움직이는 윤슬이 빨래터에 앉아 떠드는 하녀들의 말을 들은 건 우연한 일이었다.
“들었어? 도련님한테 청혼서가 날아왔는데, 꽤 부잣집 아가씨인가봐.”
“하기야, 이 집안도 짱짱한데 아무 아가씨나 붙이시겠어?”
“일주일 뒤 쯤 인사하러 온다더라고. 청혼서 보냈다고 해서 바로 약혼하는 건 아니니까, 어르신들도 좀 지켜보고.”
그 이야기를 듣는 윤슬의 마음이 술렁였던건 왜일까. 어쩌면 윤슬도 내심은 재혁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항상 부모에게 맞추고자 속내를 감추면서도 뾰족한 가시를 내세우던 재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를 좋아한다는 그 얼빵한 표정이 스쳤다. 하녀들이 떠들 정도면 이 소식은 재혁도 진작에 들었을 것이다. 어쩐지 며칠 전부터 유독 기운 없어 보이는 꼴이더니. 윤슬은 혀를 쯧, 차고는 재혁의 방을 찾았다.
“도련님.”
며칠만에 마주한 윤슬의 모습에 재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미친...”
농담삼아 치마를 더 줄이랬더니, 정말로 그러고 나타났다. 민망하기는 한지 볼이 발간데, 이전처럼 치맛자락을 붙잡고 끌어내리는 모습은 아니었다. 허벅지가 훤히 드러난 모습에 재혁은 마른 침을 삼켜내었다.
“네가 줄여오라며. 보든가.”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있던 몸일 벌떡 일으켜 윤슬에게 성큼 다가갔다. 결코 하녀들처럼 작고 아담한 체구는 아닌 윤슬의 허리를 바싹 당겨 안아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살면서 미치게 갖고 싶은게 생겼다. 그게 이렇게 제 눈앞에 다가와주니 기껍지 않을 수가 있나. 재혁은 입술로 윤슬의 목덜미를 지분대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단단한 눈빛. 재혁과는 다른 눈빛이었다. 발 밑이 어지럽고 탄탄하지 못해 무른 건 재혁이나 윤슬이나 피차일반이었지만 윤슬은 달랐다. 푹 꺼지는 땅이라면, 거길 벗어나 탄탄하고 잘 마른 땅을 골라 설 줄 알았다. 중심을 잡을 줄 아는 이였다. 어쩌면 재혁이 윤슬에게 호감을 가졌던 건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 재혁은 늘 아슬아슬하게, 늪같은 자리에서 가라앉아가면서도 벗어나질 못했지만 윤슬은 그 집에 쫓겨나 재혁의 집에 오면서도 꼿꼿했다.
두 사람의 입술이 겹쳐졌다. 살짝 거칠어지는 호흡이 방을 채우고, 허리 아래로는 떨어지지 않았던 재혁의 가벼운 손길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두 사람의 몸이 책상 가까이 붙으며 덜컥, 독서대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달뜬 숨을 내쉬며 몸을 떨어뜨렸다.
“변태 새끼...”
샐쭉 웃는 윤슬의 미소에 재혁은 생각했다. 척척하고 마르지 않던 땅이 그제야 조금쯤 단단해졌다고. 제 목을 끌어안으며 다시금 입술을 겹쳐오는 윤슬의 등을 끌어안으며 재혁은 비로소 안정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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