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x테라] 조별과제

조각 by P_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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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 화이트 X 테라 엘레이건

언제나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있는 애였다. 햇빛을 받으면 흰 머리카락이 연한 노란빛으로 물들고, 자색 눈동자는 언제나 반쯤 접혀 웃기 바쁜 피곤해 보이는 남자애. 어쩌면 ‘피곤해 보인다’라는 감상은 제게만 유효할지도 모른다고 테라는 생각했다. 관심이 없어도 우연히 수업이 겹치면 ‘일라이 화이트’라는 이름이 귀에 박히도록 들렸다. 각각이 다른 목소리들이 그를 찾고 그의 이름을 불러대니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강의실이 온전히 본인의 것이 아니기에 학생들이 ‘일라이 화이트’의 주위에 몰리며 떠드는 걸 말릴수는 없었지만, 그 소란스러움에 짜증을 표할 권리는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물론 ‘소란스러움에 짜증을 낼 권리’는 그녀 스스로가 자신에게 허락해준 권리었고 테라는 그것을 훌륭히 행사했다. 그녀는 때때로 두꺼운 책 몇 권을 책상위에 소리나게 내려두거나, 일부러 큰 소리를 내며 소란스러움을 지적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그녀에게 불편함을 토로했지만 그 불만들을 잠재운건 언제나 일라이 화이트였다.

이런 상황들이 일상이 되었을 때 쯤, 그녀는 당연하게 북적였던 그의 주변이 어느순간부터 비기 시작하는 것을 인지했다. 몰려다니며 노는 일이 질린 모양이지. 테라에게는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덕분에 빈 자리도 많이 생겨 편한 자리에 앉을 수 있게 되었으니까. 하필이면 그 빈자리 옆이 ‘일라이 화이트’인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수업이 몇 개 겹치니 일라이 옆에 앉아있는 시간도 늘었다. 이상하리만치 그녀가 생각하는 쾌적한 자리에 일라이가 앉아있었고 그 주변은 늘 비어있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처음에는 두 사람 중 누구도 인사를 건네지 않았다. 처음부터 인사를 나누던 사이가 아니었으니 당연했지만 그럼에도 삭막하다 싶을 정도로 둘 사이에는 대화가 없었다.

“안녕.”

먼저 말을 걸기 시작한건 일라이 쪽이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수업을 준비하기 위해 책을 펼치던 테라가 고개를 돌려 일라이를 바라보았다. 초목처럼 푸른 테라의 눈동자가 그의 자안에 시선이 잠깐 꽂혔다가 돌아갔다.

“안녕.”

건조하고 단조로운 인사. 그 무난한 인사에 일라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그러고보니…테라는 펜을 들고 공책에 ‘조별과제’라는 글자를 적어나갔다. 일라이라는 ‘타인’이 제게 인사를 하고나니 그제서야 떠오른 단어였다. 이 강의에는 조별과제가 있었다. 그것도 바로 저번주에 고지한 조별과제가. 2인 1조로 짜서 주제를 정하고 발표를 하라고 했었지. 얘는 짝이 있을까? 친구가 많으니 당연히 있겠지만…, 물어보는건 손해를 보는 일이 아님을 알기에.

“너 짝 있니? 없으면 나랑 조별과제할래?”

“조별과제?”

“모르는거 아니지? 데이먼 교수님 수업 2인 1조로 발표하는 조별과제 있잖아. 나는 짝을 구해야하는 상황이거든. 그러니까 짝 없으면 나랑 같이하자고. 어때? 나 그래도 성적이 나쁜 편은 아닌데.”

“…그래.”

“그래.”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렇게 주변에 친구가 많던 애가 아직도 짝을 구하지 못했나? 뭐, 그녀가 알 바는 아니었다.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일도 제게는 벅찬 일이었고 타인의 상황을 고민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은 성격도 아니었으므로.

테라는 조별과제 파트너를 구했다는 생각에 기분 좋게 펜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잊은 것이 기억난 듯 속으로 작은 탄성을 내지르다, 일라이의 눈 앞에 제 휴대폰을 내밀었다.

“전화번호 줄래?”


일라이 화이트는 생각했던 것 보다 성실한 학생이었다. 주제선정부터 자료조사, PPT를 만드는 모든 과정이 편안했고 심지어 발표를 맡는 과정도 순탄했다. 심지어 과제를하기 적절한 카페 또는 비어있는 강의실, 학교 시설 등을 파악하고 있어 장소를 정하는데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점이 테라의 마음에 쏙 들었다. 사람들과 많이 어울리게 되면 이런 장소 정도는 흔하게 찾을 수 있는 모양이지. 그녀는 일라이와 조별과제를 준비하며 이전에 겪어왔던 조별과제 빌런들을 떠올렸다. 어쩌면 일라이 화이트와 조별과제를 할 수 있게된 것은 그녀가 이전부터 쌓아온 불행에 대한 보상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테라는 지금의 파트너가 마음에 들었다.

“궁금한거 물어봐도 돼?”

발표대본을 확인하고 피드백을 받기 위해 카페에서 만난 어느 날이었다. 느닷없는 그의 질문에 자판을 두들기던 테라는 바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일라이를 보았다. 적당히 소란스러운 대화들이 뭉치가 되어 백색소음처럼 공간을 채우고 있는 카페. 그 사이를 지나가는 잔잔한 재즈음악을 들으며 테라는 머그컵을 찾아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셨다. 과제와 관련해서는 서슴없이 질문하던 일라이였다. 그러니 허락을 구하는 저 질의는 ‘과제 외의 것’일 확률이 높았다. 커피를 마시며 테라는 습관적으로 눈을 도록 굴렸다. 일단 들어나 볼까.

“뭔데.”

“나랑 이렇게 과제하는거 불편하지 않아?”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더 설명해보라는 뜻이었다. 머그컵을 내려놓은 그녀의 손이 곧 그녀의 볼 위로 얹어져 턱을 괴는 자세가 되었다.

“별건 아니고-, 요즘 내 소문이 흉흉해서. 먼저 제안할 때도 솔직히 놀랐거든.”

분명 일라이 자신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제게 전달해주는 것처럼. ‘소문’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지만 정작 소문의 주인인 본인도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 것 같다고 테라는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어느순간부터 그의 주변에 사람이 없었던 이유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녀의 귀에 들릴 리 만무한 안좋은 소문이 그에게 타격을 입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뭐…어쩌라고? 지루한 표정을 짓던 테라는 다시 시선을 노트북에 두었다. 쓸데없는 질문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바쁘게 손을 움직이면서.

“그래? 나는 들은 적 없는 것 같은데…만약에 들었더라 하더라도 내가 그런 말을 믿고 네게 조별과제 파트너를 제안하지 않을 필요가 있을까? 마침 같이 할 파트너가 없었고 그게 우연히 너였을 뿐인 걸. 개인적으로 너는 괜찮은 조별과제 파트너고 나는 지금 이 상황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는 중이라…솔직히 잘 모르겠네. 무슨 대답을 바라는건진 모르겠는데 나는 일단 화이트 네가 불편하지 않아.”

“…….”

“그리고 동급생으로서 주제넘은 조언을 좀 하자면, 그런 소문을 퍼트린 쪽이나 그걸 믿고 너를 멀리하는 쪽이나 좋은 친구들을 사귄 건 아닌 것 같으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보는게 좋을 것 같아.”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음만이 둘 사이를 맴돌았다. 씁쓸하고 고소한 커피내음, 향을 비집고 들려오는 백색소음과 잔잔한 재즈음악이 공간을 뒤덮으며 화음을 맞추는 것 같았다. 일라이는 침묵했다. 그리고 그 침묵은 꽤 길었다. 그는 자색 눈을 깜빡이며 노트북에서 시선을 뗄 줄 모르는 테라를 보았다. 넘치도록 넘실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이 일순 흔들렸다. 곧 제 눈앞에 내밀어진 종이 뭉치들에 일라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뭐해? 멍때리고. 이 자료좀 봐줘. F부분에 대한 자료로 쓸 생각인데 적절한지 체크만.”

“어, 응. 그래.”

“우리 발표일까지 얼마 안남은거 알지? 집중 해줄래?”

그는 끄덕이며 자료를 살폈다. 따뜻하다. 입에 호선을 머금은 일라이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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