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라재현] 새벽의 연인

조각 by P_윰
3
0
0

넘실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 새벽녘을 닮은 보랏빛 눈동자. 운동선수인 직업에 비해 하얀 피부. 햇살 아래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재현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걸린 미소를 감출 수 없었다. 오랜만에 여유로운 주말이었다. 베란다 너머로 쏟아지는 여름의 햇살과 두 사람만의 공간에 휘날리는 시원한 바람은 특히 마음에 들었다. TV에는 고전적인 로맨스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왜, 왜요?”

침묵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해라 쪽이었다. 그는 자색 눈동자를 굴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물론 재현이 해라를 보기만 하는 행위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때때로 그의 얼굴을 구경하는 일을 좋아했으므로 해라의 입장에서 이 상황은 꽤나 익숙한 시추에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라는 매번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는 행위를 부끄러워했다. 언젠가는 재현을 이겨보겠다고 서로 눈싸움하듯 오랫동안 마주본 적도 있었으나, 언제나 패배하는 사람은 면역력이 부족한 해라였다. 물론 재현은 그것을 경쟁이나 승부로 취급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두 사람이 베트남을 여행하고 온 지 1년이 넘었다. 서로를 사기꾼으로 취급하기 바빴던 처음이 지나, 지금은 사생활을 일부 공유하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 연인으로 발전했다. 두 사람의 사생활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던 건 ‘동거’였다. 먼저 제안한 것은 재현이었다. 그녀는 당시 집에서 데이트를 자주하다 보니 동거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해라쪽에서 흔쾌히 동의했고, 그에 따라 시작한 동거는 재현에게 있어 굉장히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다.

한 집에서 두 사람이 함께하는 생활은 재현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의외로 두 사람의 생활습관이 잘 맞아 떨어진다거나, 성격이 비슷해서 부딪힐 일이 없는 등의 이유는 아니었다. 생활습관으로 따지면 방을 분리해서 사용해야할 정도로 정 반대였고, 성격 또한 결코 잘 맞아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현은 해라가 한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그 사실만으로 좋았다. 맞지 않는 부분은 합의할 수 있었고, 크고 작은 싸움이 잦았으나 화해가 빨랐다. 이전의 동거와는 달랐다. 타인을 탓하지 않고 제 모습을 돌아보며 진중하게 대화하고 또 맞춰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서로 의지가 되는 연애가 하고 싶다고 했었던가. 그가 바라는 연애의 방향이 그러하다면 이미 반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재현은 해라에게 안정감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냥. 너 예뻐서.”

태양이 저물듯 눈이 접히며 방긋 웃는 낯이 그려졌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던 그녀의 얼굴은 화려하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그런걸까. 해라는 재현의 표정 변화에 섣불리 눈을 떼기 힘들었다. 해라는 눈을 흘기며 그녀의 웃는 낯에 시선을 두다가 왼팔을 들어 제 뒷목을 쓸었다. 같이 산지 몇 달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연애를 한지는 1년이 넘은 사이임에도 그녀가 하는 말은 그에게 항상 낯설게 다가왔다.

그것은 재현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셀 수 없는 연애를 해왔고 다양한 유형을 경험 해 왔음에도 유독 해라가 제게 해주는 말에는 형언할 수 없는 울림이 있었다. 한때 재현은 울림의 원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보니 자기가 첫 연애라고 그랬던가. 그 전까지는 연애에 관심이 없었다고 했던가. 여자를 돌 같이 봤을 사내가 제게 사랑을 속삭이는 특별함이 마음을 울린걸까.

“……서.”

“응?”

“아무것도 아니에요.”

“뭔데? 너 내 욕했지.”

재현의 눈이 금새 가느다래졌다. TV 속 영화에서는 주인공 두 사람이 한창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사실 그가 그녀의 욕을 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연인인 ‘강해라’라는 사람은 의외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콩깍지가 씌이는 사람인 것 같았으니까. 그것도 매우 과하게.

“아니, 제가 누나 욕을 왜해요..!”

무던하고 덤덤했던 표정이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어가는 변화의 과정을 보며 재현은 소리없이 웃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이 변화하는 과정을 좋아했다. 무뚝뚝한 표정도 잘생겨서 볼 맛이 있었지만, 어떤 형태로든 덤덤한 얼굴에 다른 표정이 그려지는 것도 제법 사랑스러웠다. 그의 동료에게서 평소에 표정변화가 거의 없는 사람이라는 말과 해라 본인에게서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부터 그랬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인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 모든 것이 제게만 보여주는 얼굴이었다니! 그 사실을 알게되니 그가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을 지울수가 없어서 이런식으로 종종 그를 놀리는 것이 습관처럼 자리잡았다.

“너 예전에 기억 안나? 베트남 여행 갈 때 나한테 ‘아줌마’라고 놀렸던 거.”

해라는 재현의 말에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 마냥 몸을 움찔이다가 이내 재현을 안고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건 해라의 습관이다. 자신이 불리할 때 괜히 품으로 파고들듯 들어와 애교를 부린다. 그가 이럴때면 재현은 장난을 더 칠까 하다가도 그냥 웃고 넘어갈 수 밖에 없었다. 분명 자신이 첫 연애라고 했는데 이리 쉽게 말려드는 걸 보면 가끔은 해라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게 아닌지에 대한 가벼운 의심이 피어오르곤 했다. 사실 연애 해본 적 있는 거 아냐? 물론 강해라가 연애 경력 따위로 자신을 속일 이유는 없다.

사실 해라가 자연스럽게 스킨십을 하게 된지는 비교적 얼마되지 않았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처음 고백할 때 기세좋게 키스했던 건 어디가고, 연애를 하는 내내 작은 스킨십에도 부끄러워 눈도 제대로 못마주친 기간이 더 길었다. 말로 표현하고, 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가벼운 스킨십을 먼저 걸었던 건 재현 쪽이었다. 재현이 표현하고 해라가 받아주는 것. 그것이 어느정도 익숙해졌을 쯤 재현보다 해라가 먼저 표현하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의 손끝이 제게 먼저 닿아 오고, 단단하고 따뜻한 품을 먼저 허락할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음을 느꼈다. 재현은 이 감정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그의 변화에 발맞춰 함께 설렘을 느꼈다.

재현은 이 설렘이 좋았다. 가슴께가 간질간질하다가 구역질이 날 것처럼 울렁이는 마음. 쿵쿵거리는 불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그대로 다 토해낼 것 같은 감정을 그녀는 ‘사랑’이라고 정의했다.

“강해라씨가 또 끼를 부리네.”

재현은 팔을 들어 그를 감싸 안았다. 오른손이 조금 더 올라가 그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는다. 결국 재현은 늘 그랬듯 그를 놀리는 행위를 그만두었다. 대신 이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어떻게 사수해야 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도 알아볼 사람은 알아본다. 해라가 겉으로는 무감해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걸! 이미 해라의 팬은 그의 매력을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하튼 다른 사람들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 전에 제게 푹 빠져 벗어날 수 조차 없게 만드는 것은 그녀가 연애를 하는 동안 해결해야 할 평생의 숙제였다. 처음 좋아한 건 해라일지 몰라도 지금은 자신이 더 해라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 더 노력할 수 밖에.

“야, 강해라.”

“왜요?”

그녀의 부름에 해라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약간 굴리는 것이 아무래도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재현은 환히 웃으며 새벽을 닮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했다. 낮과 새벽이 마주하는 찰나, 낮이 입을 열었다.

“사랑해.”

“…저도요.”

“그거 말고.”

“……사랑해.”

낮이 웃었다. 그 이상의 것은 필요없다는 듯 환하게. 그녀를 마주보던 새벽 또한 미소지었다.

바야흐로 서로의 시간에 물들어가던 휴일이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