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척(리뉴얼)
미래전쟁교단의 벡스 기술을 이용한 최첨단 예측 시스템. 광고의 핵심 문구였다. 날씨, 주식, 부동산, 당신의 삶을 이루는 전반을 예측해보십시오. 에녹은 코웃음을 쳤다. 돈에 미쳐있으나 어떻게 돈을 벌어야하는지 모르는 천박한 이들이나 이런 애플리케이션에 목을 멜 것이다. 선봉대 측은 약간 다르게 생각했다. 미래전쟁교단, 벡스. 두 광고 문구에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있었다. 사람들은 끝없는 밤을 겪으며 벡스에 대한 병적인 공포심을 드러냈다. 미래전쟁교단은, 공식적으론 없어진 단체이다. 그들 뿐만이 아니라 의회 자체가 없어지다시피 했지만. 에녹은 이 사건의 조사를 제의받은 워록 중 하나였다. 다른 이들은 이번 사건이 입맛이 썩 좋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민간인 자경단과 선봉대 중 어디에서 이 사건을 맡을지 약간의 다툼이 있었고, 선봉대가 민간인 측에서 거의 뺏듯이 사건을 가져왔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들 그렇게 수군거렸다. 에녹은 알 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 것을 신경 쓰기에 요 며칠 간 일이 꼬일대로 꼬였기 때문이다. 간단한 선봉대 임무라고 생각하고 정찰을 나갔는데, 빛의 군체 기사가 이끄는 정예 군단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같이 간 임시 화력팀원들은 실력이 끔찍했다. 공격, 방어, 치유, 지휘, 심지어 부활까지. 에녹 혼자서 해내야했다. 거의 혼자서 그 병력을 막아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것 뿐이 아니었다. 실력은 끔찍하던 팀원들은 인성도 그만큼 끔찍해서, 선봉대에다가 엉터리로 보고를 하는 바람에 에녹은 해명을 하러 계속 여기저기 불러다녔다. 그에게는 다른 임무가 필요했다. 쉽고, 깔끔하며, 자신이 올바른 곳에 몸 담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줄 임무가. 에녹은 제의를 수락했다. 그는 나조-4라는 엑소 여성과 짝을 지어 예측 시스템 개발 사무실을 습격했다. 나조-4는 실천의 세력 워록으로 아직 가마우지 인장은 받지 못했다. 나조의 지휘 아래에서 에녹은 퇴로를 차단하고, 정말로 벡스 기술을 사용했는지를 확인했다. 그 동안 나조는 사람들을 심문하며 미래전쟁교단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알아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미래전쟁교단을 비롯한 의회 진영이 사라지자 슬금슬금 기어나온 다단계 사기꾼들이었다. 벡스 기술은 커녕 황금기 때의 고장난 일기예보 시스템을 기반으로 만든 허접한 애플리케이션이었다……. 선봉대나 자경단으로 갈 것도 없이, 나조는 자신의 권한으로 민간인 수사기관에 핵심 인물들을 넘기고 남은 인원은 강제해산했다.
밤 길 조심해.
젊은 사기꾼이 눈을 무섭게 뜨며 말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젊은 사기꾼은 아마, 비수호자일 것이고, 그 협박을 받은 에녹은, 수호자니까. 나조는 에녹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위로였을까? 에녹은 듬직하게 웃으며 별 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산된 사람들은 경찰 측으로 인도했다.
간단한 일이었네요, 다행이.
나조가 개발이 중단된 애플리케이션을 비롯해 각종 증거들을 모아 물질 전송으로 수사기관 측에 보내며 말했다.
이르긴 하지만, 식사나 같이 하시겠습니까.
시간은 오후 5시였다. 에녹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녁 식사는 경비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선봉대 돈을 뜯어먹겠습니까?
에녹은 픽 웃었다. 뒷정리까지 끝나고, 경찰들에게 간단히 인수인계까지 마친 뒤, 나조와 에녹은 적당한 식당으로 향했다. 그들은 끊임없이 말했다. 대화 내용은 썩 실속이 없었다. 음식을 먹을 때는 말 수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침묵이 흐르게 두지 않았다. 나조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첫인상과 다르게 약간 허당이기도 했고, 하는 말을 들어보니 워록으로 실력도 괜찮은 여자인 것 같았다. 에녹은 나조가 자신의 인맥이 되었으면, 하고 내심 바랐다.
그럼, 보고는 제가 해도 괜찮겠습니까?
에녹은 나조가 지위에 욕심이 있는 것을 눈치챘다. 에녹에게 지위는 별 소용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조에게 자신의 몫을 양보하기로 했다. 나조가 공손하게 감사를 표할 때, 그들의 등 뒤에서 종업원의 쨍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 손님! 손님, 엑소 남성 분!
에녹은 순간 나조를 쳐다보았다. 황급히 시선을 떨구었다. 나조는 어정쩡하게 뒤로 돌다 굳어버렸다. 종업원은 그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어물거리다가 용건으로 바로 넘어갔다.
그……. 결제, 문제가 생겼는지……. 잠깐 카운터로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네에, 예, 결제 문제면 가야죠.
나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종업원을 따라갔다. 에녹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이 자신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했다. 이기적이었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에녹은 자신의 이기심을 못 본 척 했다. 별 문제가 아니었는지, 나조는 곧 나왔다.
괜찮아요?
네, 뭐, 법인명으로 결제한게 워낙 오래간만이라서 오류가 났습니다.
에녹은 더 묻지 않았다. 나조는 에녹을 따라 걸으며 제대로 결제된 것이 맞는지 데이터패드로 이것저것 확인했다. 소방차와 경찰차가 지나갔다. 에녹은 멍하게 차가 흘러가는대로 시선을 돌리다가 문득 깨달았다. 여긴 에녹이 사는 동네다.
나조 씨, 죄송합니다. 저희 동네까지 오게 해버렸네요.
에녹의 말에 나조도 퍼뜩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는 것으로…….
에녹 씨, 그런데 저기, 불 난 것 아닙니까?
나조가 한 곳을 가리켰다. 정말로 거무틔틔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에녹이 사는 단지였다. 두 사람은 걸음을 빨리 하여 점점 희미해지는 연기를 향해 갔다. 건물이 다가오면서, 에녹은 뛰기 시작했고, 나조도 그를 따라 뛰었다. 경찰과 소방관들이 단지 마당에서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었다. 에녹은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다녀오십시오.
에녹의 표정을 보고 나조가 부드럽게 말했다. 위로는 되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층으로 올라가자, 복도 끝에서 경찰이 한 젊은이를 체포해 끌고가고 있었다. 젊은이는 에녹을 보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곧 자기가 이겼다는 듯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경찰과 함께 계단으로 내려갔다. 복도는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에녹은 자신이 집 주인인 것을 증명하고서야 경찰들을 지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경찰 한 명이 그의 옆에 서서 피해 상황 등에 대해 친절히 설명해줬지만 그의 이야기는 에녹의 귀를 스쳐지나갔을 뿐이다. 집 현관은 새카맣게 탔다. 신발장에 별다른 것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집 안에 조심스럽게 들어가보았다. 경찰은 복구할 때 까지 묵을 곳이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집 안은 피해가 없었으나, 연기며 검댕, 재 때문에 난장판이었다. 에녹은 일단 필요한 것들 중 깔끔한 것들을 챙겨 집을 나왔다.
에녹 씨.
나조가 경찰과 이야기를 하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묵을 곳이 필요하시다고요. 어디로 가실겁니까?
글쎄요. 아마 비어있는 여관이나…….
에녹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피곤했다. 피곤해 죽을 것 같았다. 지금 머리에 방아쇠를 당기고 고스트에게 몇 일 뒤 부활시켜달라고 부탁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되어있지 않을까.
하룻 밤 정도는 저희 집에서 묵으셔도 됩니다. 원하시면 더 묵어도 상관 없고요. 손님 방이 따로 있으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안은 감사합니다만.
에녹은 곧 그녀가 트랜스 여성임을 기억해냈다.
나조 씨는……. 이렇게 급작스럽게, 괜찮으신지.
괜찮습니다, 형제여. 같은 방을 쓰는 것도 아닌데. 하루 저희 집에서 쉬면서 다음 날 묵을 곳을 찾아보시는건 어떠신지.
나쁘진 않았다. 에녹은 이 거리 저 거리를 전전할 기력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물론 나조의 제안을 거절할 기력도 없었다. 그래서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조는 놀랍게도 바로 옆 동네에 살고 있었다. 비슷한 느낌의 거리를 걸으며 에녹은 지친 마음을 어느정도 위로받았다.
문 여는 것만 주의해주십시오.
나조가 자신의 집 문을 열며 주의사항을 얘기했다.
꼭 노크 먼저 해주시고, 안에서 문을 열면 그 다음에 들어와주세요.
당연하죠.
그건 기본적인 예의기도 했다. 집은 많이 어두웠다. 에녹이 신발장에서 조금 헤메자, 나조가 사과하며 불을 켜주었다.
제가 불빛에 예민해서.
나조는 덧붙였다.
눈에 해당되는 파츠는 없지만, 그래도 시각 시스템은 존재한답니다.
에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알 수 없는 고충이겠거니, 하고 있는 그대로 그 자리에 두기로 했다. 그것이 에녹의 최선이니까. 현관문은 많이 좁았다. 집도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에녹의 집 보다 조금 작은 느낌이었다. 첫 인상은 “깨끗하다” 였다. 에녹도 제법 깔끔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의 집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깨끗했다. 감탄? 아니, 강박증이 있나 싶을 정도로 깨끗했다. 에녹의 표정을 보고 나조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운지 은근하게 자기가 집 관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말했다. 손님 방은, 무기질적일 정도로 깔끔한 거실과 달리, 포근하고 따듯한 느낌이었다. 나조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에녹은 단촐한 짐을 들고 얌전히 나조를 기다렸다.
여기서 주무시면 됩니다.
나조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있었다.
이쪽 서랍장을 여시면 샤워 용품들이나, 세척 용품……. 이런 것들이 있으니 사용하시면 됩니다. 부엌도, 설거지를 해놓는다는 조건 하에 사용하셔도 좋습니다.
너무 어지르지 않고 잘 쓰다 가겠습니다.
에녹이 짐을 내려놓는 것을 보고서야, 나조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문을 닫아주었다. 에녹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누웠다. 적당히 폭신한 것이 몸을 따듯하게 감싸주었다. 물론 기온에 비해서는 너무 더운 이불이었다. 피곤이 적당히 풀리자, 에녹은 비척비척 일어나 서랍을 열어보았다. 샴푸, 린스와 같은 용품이 가지런하게 늘어져있었다. 화장품도. 에녹은 이것들이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조가 여자니까, 당연히 여자 기준으로 되어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녹은 서랍을 닫았다. 할 것이 없었다. 에녹은 빵집에서 다음 날 먹을 것을 사올까 생각했다. 나조와 “친분을 다질” 수도 있겠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방문을 여니, 나조가 거실의 책장 앞에 서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산책 겸 아침에 먹을 것을 사올까 하는데, 혹시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나조는 에녹을 잠깐 쳐다보고 다시 책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뇨. 필요한 것은 없습니다. 벨 눌러주세요, 문 열어드리겠습니다.
에녹은 알겠다 하고 나조를 지나쳤다. 그러면서 책장을 슬쩍 훔쳐보았다. 인문학 서적이 대부분인 것 같았다. 그가 잘 모르는 분야이기에 그런가보다 했다. 밖으로 나오자 기분 좋게 따듯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문을 닫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건조하고, 따듯하고, 끝에는 먼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까지. 폐가 터질 만큼 공기를 가슴에 가득 담아넣었다 한번에 뱉었다.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잘 될거란 애매한 희망이 흘러들어왔다. 에녹은 데이터패드에 나조의 집주소를 입력하고 무작정 거리를 걸었다. 곧은 큰 길, 보랏빛 꽃이 흐드러지게 핀 가로수, 알 일도 없고 알 수도 없는 행인들. 에녹은 익숙함을 만끽했다. 그는 자신이 살던 동네에 맞는 걸음을 걸었다. 그렇게 닿은 곳은 아무 곳도 아니었다. 익숙하다고 ‘동네 빵집’ 이 있는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걷다 길을 잃은 것이었다. 데이터패드를 켜서 지도를 불러왔다. 에녹은 긴장하고 낯선 동네의 길을 더듬어 갔다. 그러나 그의 발은 낯선 곳에서 문득 익숙한 부분을 발견하였고, 그 때 마다 그 길로 들어서는 바람에 더 알 수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막다른 골목에서, 에녹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안 풀리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일단, 가게든 건물 경비실이든 찾아가서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마침, 철문이 하나 있었다. 에녹은 긴장한 몸짓으로 문을 열었다.
깜짝이야!
쨍한 목소리가 들렸다. 에녹은 한 사람과 부딛힐 뻔 했다.
죄송합니다.
에녹은 반사적으로 사과했다.
어……. 어?
그 사람은 에녹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 오늘 저녁에 저희 식당에 오시지 않으셨나요?
에녹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 사람은 자신이 들고있는 봉투를 들어보였다. 봉투에는 커다랗게 상호명이 적혀있고, 그 밑에 촌스러운 마스코트가 그려져있었다. 에녹은 기억해냈다.
식당에서 결제 오류가 났을 때…….
네, 네! 남자 손님 두 분 중 한 분이시죠?
종업원이 재잘거렸다.
다른 한 분은 어디 계세요?
하하, 그 분이 정정하지 않으셨나요?
예?
그 분은 남성이 아니라 여성입니다.
아……. 하지만 그 분은 그런 말 안 하셨는데…….
종업원은 말을 끌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에녹은 이 문제로 씨름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에녹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이 곳 지리를 잘 아시면 저 좀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는 종업원에게 지도를 보여주었다. 종업원은 자신을 따라오라면서 쾌활한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에녹이 여러번 길을 잘못 들려고 하는 것을 종업원이 저지했다. 불쾌했다. 종업원 때문이 아니라 이 길이 불쾌했다. 이 기분을 어디서 느낀 적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서였을까.
근데 그 분 여자인거 확실해요?
종업원이 나조의 집 근처에서 물었다.
그러기엔 너무 남자같이 생겼는데.
에녹은 답하지 않았다.
헤헤, 너무 무례했나?
종업원은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그러나 에녹에게 사과하면 뭘 하는가? 에녹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괜히 이 문제를 꺼낸 것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이 문제는 한번 얘기해야 했다.
두 분께서 저희 가게에 또 온다면 서비스 드릴게요. 너무 화내지 마시구 또 와주세요. 그런 의미에서 손님 성함이 뭔가요? 식당에 오시면 이름 대주세요.
에녹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댔다. 누구인지는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뿐이었다.
아아, 그렇구나! 멋진 이름이네요.
지금 에녹은 다른 사람이었다. 에녹은 여유롭게 웃으며 종업원에게 인사했다. 다음 날 아침에 먹을 것은 결국 못 샀다. 다른 사람이 된 에녹은 나조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나조 씨.
그러나 문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녹은 집 안을 둘러보았다. 왜인지 빈 집 같았다.
나조 씨?
에녹이 큰 소리로 물었다.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에녹은 황급히 현관문을 닫고 나조의 방으로 달려갔다.
괜찮으십니까?
문을 두드려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에녹은 괜찮냐는 말을 몇 번 더 해봤지만, 안에서는 앓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문 열게요!
위급한 상황이라고 생각해 에녹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덮여있는 거울, 한색의 이불, 에녹의 관심분야가 꽂혀있는 책장, 급하지 않은 서류가 올라가있는 책상…….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고 있는 검댕과 재. 에녹의 방이었다. 에녹은 굳어 등 뒤를 쳐다보았다. 나조의 집이었다. 앞을 보았다. 에녹의 방이었다. 에녹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발이 한 쌍 보였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엑소의 발이었다.
문을 왜 그렇게 벌컥 여십니까?
나조가 다소 불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
그 곳은 나조의 방이었다.
죄송합니다, 앓는 소리가 들렸어요.
앓는 소리?
그래서 문을 두드렸는데, 앓는 소리는 계속 들리고 또…….
에녹은 입을 다물었다. 끔찍한 침묵이 감돌았다.
죄송합니다.
에녹이 한참 뒤에 중얼거렸다. 나조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으려했다. 에녹은 그걸 손으로 막았다.
잠시, 나조 씨. 궁금한게 있습니다.
뭐죠?
그 점원……. 종업원 기억나십니까?
나조는 또 말이 없었다. 그래서 에녹 혼자서 말을 해야했다.
호칭을, 정정하셨죠?
그걸 왜 궁금해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일단은 아닙니다. 안 했어요.
에녹은 문에서 손을 뗐다. 나조는 천천히 문을 닫았다. 끔찍한 날이었다. 에녹은 닫힌 문 앞에서 뭘 말하고 싶었는지 몰랐다. 그 종업원이 미안하다 말했노라고 얘기를 해야했을까?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내 이름을 대면 그 식당에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거란 이야기를 해야했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에녹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댔다. 근데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