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그 관에는 내가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어

모든 사람들이 에녹을 쳐다보았다. 마치, 장례식에 화려한 흰색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것 처럼. 사람들이 날 알지 못할 터인데, 어째서 저들은 나를 노려보고 있단 말인가? 에녹은 그러나 주눅들지 않은 발걸음으로 흰 꽃을 바치고 식장을 나섰다. 등 뒤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에녹은 애써 그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에녹은 인적사항이 적한 서류 한 다발과, 한 사람의 사진을 받았다. 사진이라. 이제는 사라진 줄 알았던 고대의 기술이었다. 홀로그램처럼 360도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훼손 되기는 쉬웠으며……. 이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에녹은 눈을 들어 울드렌을 보았다. 이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런 곳에 쓰기엔. 두 사람 간에는 거의 말이 없었다. 에녹은 이런 일에 유능했고, 울드렌 대공은 그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기밀을 들고 도망간 자다.

그 말로 모든 것은 끝났다. 에녹은, 배신자를 쫓아가서, 간단히 그의 우주선을 날려버렸다. 감상은 많이 남길 수 있었다. 그 자는 소행성대에서 은밀하게 움직이기 위해 작은 우주선을 택하였으나 작았기 때문에 출력이 한정이었다. 결과론적으로 에녹보다 그는 느렸다. 그렇게 배신자는 죽었다. 에녹은 장례식 앞 팻말에 쓰인 이름을 읽었다. 에녹. 더 이상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에녹.

까마귀가 에녹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에녹, 이건 네 이름이 아니다.

그래요……. 어쩌면 유가족 측에서 반발하는 의미로 내 이름을 적어놨는지도 모르죠.

아냐. 동명이인이잖아.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안 좋은 눈치를 받았던 에녹은 조심히 구석으로 자리를 피했다.

나는 저 사람을 죽였습니다.

에녹…….

인류를 위한 길이라곤 했지만, 뭔가 석연찮아서, 그걸 확인하기 위해.

에녹.

에녹이 구석에 서있는 것을 본 사람들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그를 외면했다. 유가족의 대표로 보이는 사람이 에녹에게 공손하나 단호하게 다가왔다.

어쩐 일이시죠, 수호자님?

에녹이 답하기 전에 까마귀가 끼어들었다.

고인께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 이가요? 당신들을요? 누구보다 수호자를 싫어하던 그 사람이?

뭐, 살다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발생하는게 아니겠나, 요.

대표는 에녹과 까마귀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들의 말이 거짓말인 것을 알아채고 밖으로 쫓아내려고 하는 것이었다. 대표도, 에녹도, 까마귀도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에녹과 까마귀는 밖으로 나왔다. 햇빛은 맑고 밝았고 직선으로 떨어져내리고 있었다.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까?

에녹이 따져물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어. 너, 그 기억 정확한거 맞아? 선봉대의 누가 네게 그런 일을 시키는데?

울드렌 소프. 울드렌 소프 대공님께서 그런 일을 시키셨다. 그런데 에녹은 선봉대 소속이다, 리프의 까마귀가 아니라. 그럼 이 기억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그 때의 네 이름이 뭐지?

저 사람의 무덤을 파봐야겠습니다.

에녹이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말했다. 말이 되냐고 일갈하려던 까마귀를 막은 것은 에녹의 눈빛이었다. 공허한 과거가 그의 눈빛을 잡아 희게 변색시키고 있었다. 까마귀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가진 과거의 망령과는 달랐다.

일단 준비를 하고 돌아오자고.

까마귀와 에녹은 잠시 헤어졌다가, 각각 삽 한 자루 씩을 들고 장례식장 앞에서 만났다. 다행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해가 마저 지기를 기다리고 두 사람은 말 없이 모르는 사람의 무덤을 파냈다.

뭘 원하는거지?

까마귀는 예의상 물었다.

분명 내가 아는 사람이 나오겠죠. 내가 이 사람을 죽였으니까…….

관에 삽을 끼워넣고 지렛대처럼 눌렀다. 에녹과 까마귀는 수호자였고, 몇 번 힘을 주니 관짝은 슬프게도 열렸다. 그 안에는 염한 사람이 고운 수의를 입고 누워있었다. 에녹은 그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 보았다. 이젠 더 이상 사람의 것이 아닌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에녹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요. 제가 모르는 사람입니다.

매미 허물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려고 하지 않는 에녹 대신, 까마귀가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직이서 한 사람이 삽을 들고 그들을 보고 있었다. 방금 묘를 파묻은 묘지기였다. 까마귀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묘지기는 가만히 그들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에녹은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관을 꺼냈다. 그리고 옆에 있는 묘지를 파 그쪽의 관과 바꾸어 묻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하지?

에녹은 엉성하게 마무리된 묘지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흙먼지로 엉망이었다. 날은 벌써 흐르고 흘러 풀벌레가 찍찍거리는 계절이 되었다. 에녹은 여느 때 보다 맑고 청명한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름답게 무덤을 지키고 서있는 나무들이 후덥지근한 바람에 흔들렸다.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요.

까마귀는 인상을 쓰고 각자 다른 것을 참배할 불운한 조문객들을 상상해보았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삽을 들처메고 자리를 떴다. 까마귀는 완전히 안보이게 되기 전 몸을 돌려 비석을 읽었다. 에녹, 여기에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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