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군체는 사랑을 싣고~

(잔잔하고 감동적인 음악이 흐른다)

디어는 받은 꽃다발을 말리려 벽에 잘 걸어두었다. 나름 신경을 써서 배치를 해놓았다. 노란색 프리지아였는데, 프리지아의 화사한 빛깔은 디어의 고풍스러운(정확히는 촌스럽고 할아버지같은) 취향에 다소 죽은 감이 있었다. 디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좀 정리해보았다. 물건 몇 종류를 치운다 해서 집 전체의 고루함이 가시지는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디어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이리저리 물건을 움직여보며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때, 디어의 등 뒤에서 툭, 하는 둔중한 소리가 났다. 꼭 벌레가 떨어진 것 같았다. 디어가 뒤돌아보자, 그곳에는 웰시코기 만한 군체 애벌레가 위협하듯 고개를 들고 꿈틀거렸다.

아니, 꽃을 왜 뒤집어 놔?

군체 애벌레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지구의 식물을 즐기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봉변이람. 아, 잠깐.

디어는 군체 애벌레가 뭐라 하던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내려놓았던 보조무기를 들고 은은하게 웃으며 군체 애벌레를 겨냥했다.

잠깐, 잠깐 잠깐! 다짜고짜 폭력이라니 이거 너무하잖아.

디어는 공이를 당겼다.

우와악! 잠깐, 진짜 잠깐! 살려줘!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군체 애벌레가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소원을 들어줄게!

소원?

그제야 디어가 듣는 시늉이라도 해보였다. 군체 애벌레는 랩을 하듯 빠른 속도로 쨍알거렸다.

그래, 소원. 너와 내가 계약을 맺는거지, 그럼 내가 아주 가벼운 소원을 하나 들어줄게. 그 정도의 초인과성은 네게도 내게도 그렇게 큰 해가 되지 않아요.

넌 군체 애벌레지 아함카라가 아니다.

그렇지. 하지만 이 몸은 벌-레-신 의 일부거든?

디어는 허옇고 주름진 애벌레를 내려다보았다. 그다지 위엄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허나 디어는 늙은 수호자였다. 군체의 벌레신들에 대해선 들어본 바가 있었다. 아마 많은 수호자들이 그에 대해 들었을 것이고, 몇몇은 그에 빠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기도 했다.

세계 평화.

디어가 말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왜 소원이 이뤄지지 않았지?

뭔 소원을 빌었는데?

세계 평화.

진심인가?

군체 애벌래가 바닥에서 파닥거렸다. 곧 웃음소리가 뒤따랐다. 디어는 어디서 저 벌레가 웃는지 몰라 가만히 총을 든 채 서있었다.

못 이뤄준다면 더 이상의 협상은 없다, 벌레.

워, 잠깐, 빛의 운반자. 세계 평화는 너무 넓고 광범위해. 이를테면 시부 아라스가 군대를 이끌고 태양계를……. 아니, 우주 전체를 지배하면서 폭력으로 너희를 억압해 갈등을 사전에 차단해버리는 것도 평화야. 일단 싸우지는 않잖아?

빛이 승리하고 군체, 벡스, 어둠의 군단, 피라미드 등이 다 사라진 태양계를 원한다.

그래 좋아. 근데 군체한테 군체를 박멸하라고 시킨다고?

협상 결렬이군.

제발! 이봐, 너무 조급하잖아. 어둠이 없으면 너도 아쉬울게 있지 않나?

순간적으로 테오……. 혹은 스라소니가 떠올랐다. 디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군체 벌레를 두고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뭘 끌고 옮기는 소리를 냈다. 5분 뒤, 그는 전자레인지를 들고 왔다.

뭔데? 만찬이라도 같이 하- 으아아악!

디어는 냅다 벌레를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엄청 껴! 애벌레는 섬세하게 다뤄달라고!

여기가 이제 네 감옥이다.

야! 장난 까?

천박한 본성이 나오는군. 가자. 선봉대에게 잡혀서 실험 재료로 쓰이기 싫으면 조용히 해.

디어가 전자레인지를 번쩍 들고 밖으로 나갔다. 벌레는 자기가 움직이고 있다는걸 알아차렸는지, 곧 말하는 것을 멈췄다. 누가 보면 전자레인지를 수리하러 가는 사람인 줄 알 것이다.

새벽제비는 수척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전자레인지를 든 디어가 서있었다.

고맙네. 전자레인지 좀 바꾸려고 했는데.

아니야. 주려는거 아니네.

디어는 새벽제비를 살짝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식탁 겸 상판으로 쓰는 긴 바 테이블에 전자레인지를 놓고, 문을 열었다.

수제비 반죽인가?

새벽제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망친 빵반죽?

자네가 이런걸 잘 알지 않나.

제발. 이상한 것 주워서 나를 쓰레기 처리기사로 만들지 마. 자네가 항상 시작하는거 모르나?

디어는 모르는 척 눈을 굴리며 애벌레를 꺼내려고 했다. 손이 들어갈 곳이 없어 전자레인지를 거꾸로 하고 마구 흔드는 수 밖에 없었다.

살려줘! 나 멀미한다고!

애벌레가 빽 소리질렀다.

군체인가? 자네 미쳤어?

디어는 전자레인지를, 새벽제비는 디어를 잡고 뒤흔들었다. 툭. 다행이 벌레는 잘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야, 이 죽어가는 인간은.

당분간 너의 감시역이 될 사람이다.

디어, 거절하겠네.

군체 벌레가 한숨소리를 냈다.

이봐, 말은 맞추고 오는게 좋지 않겠어?

디어……. 감시역으로 충분하다면 전자레인지를 두고 가게. 군체 소세지를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먹으면 맛있겠군.

벌레를 왜 먹어.

못 먹을 것 같나?

디어는 새벽제비에게 고개를 저어보였다. 새벽제비는 아쉬운 듯이 뒤로 물러섰다.

자네의 괴식은 다음에 논하고, 지금은 군체 벌레에 대한 것이 먼저일세. 저 것이 나에게 계약을 맺을 것을 제안했어. 그것도 테오-스라소니를 두고.

허 참, 빛의 운반자여, 그쪽이 먼저 얼토당토 않은 “세계평화” 를 소원으로 빌었거든?

조용히 해라.

디어는 차분하지만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새벽제비는 스툴에 앉아 지겹다는 듯이 턱을 괴었다.

걍 쏴버려.

새벽제비가 다른 쪽 손으로 총모양을 만들어보였다.

아니면 빛으로 지져버리거나.

나는 이미 저 것과 말을 섞었고, 뭔가 일어났을까봐 걱정이 돼. 그게 테오, 지금은 스라소니지만, 그 녀석에게 영향을 줄까봐도…….

아니, 그 정도 헛소리는 괜찮거든?

군체 애벌레가 투덜거렸고, 새벽제비는 군체 애벌레를 들어 다시 전자레인지에 처넣었다. 새벽제비는 전자레인지의 문을 닫았다.

아마 큰 일은 없을거라 생각해. 하지만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

녀석의 고스트만 멀쩡했어도 이런 생각 안 했을거야.

고스트라…….

새벽제비가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당장 여기서 꺼내달라고 소리치는 군체 애벌레의 비명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방랑자가 자신의 고스트를 개조했더라지.

그 자는 아무래도…….

디어는 상상만해도 싫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수상하지.

냄새나잖나.

아. 냄새도 나고.

그런 이유였군, 새벽제비가 중얼거렸다. 새벽제비와 디어는 서로 마주보던 눈을 슬쩍 비꼈다. 그리고 전자레인지를 챙겼다.

잠깐 바깥바람 좀 쐬자고, 요즘 아파서 많이 못 나갔지?

디어가 새벽제비에게 어색하게 말했다.

아아 그래, 상쾌퀘한 저장고가 좋겠어.

상쾌야, 퀘퀘야.

그런거 따지면서 갈건가?

두 사람은 결정했다. 두 사람은 오랫만에 산책을 하며 저장고로 갔고 정말 우연히 저장고 안 쪽을 훔쳐보게 되었다…….

다행이야.

새벽제비가 속삭거렸다.

그러게. 아무도 없네.

디어도 속삭거렸다. 허공에서 고스트가 나타나 붉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자, 디어와 새벽제비는 훔쳐보지 않은 척 재빨리 자리를 벗어났다.

저거 고스트인가?

새벽제비가 물었다.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두 사람은 기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온 것이었을까, 그들은 붉은 눈의 고스트가 쫓아오지 못하도록(소용이 있는지는 몰라도) 저장고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디어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무래도 뭔가 획기적인게 필요해.

하는 짓을 보니까 아주 애송이 저리가라군.

전자레인지에서 꿍절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네들 도대체 언제 부활했나?

암흑기?

대답하지 말게, 새벽제비.

암흑기에 부활했는데도, 빛을 믿는단 말이야? 그것 참 대단하군.

전자레인지가 비아냥거렸다. 디어는 전자레인지를 주먹으로 한대 쳤다. 군체 애벌레는 곧 잠잠해졌다.

그 아이가 빛과의 연결이 불안전해서 그렇다면…….

새벽제비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디어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EDZ의 여행자의 파편이 실마리가 될 수-…….

EDZ가 왜 EDZ가 되었는지 알잖나.

유럽 데드 존. 여행자의 조각이 방출하는 힘 때문에 그 일대는 죽은 땅이 되었다. 디어는 곧 기억을 더듬어 몇 년 전에 있었던 붉은 전쟁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떤 이는 그 곳에서 빛을 되찾았네.

그래봤자 한 명, 그것도 자기 목숨을 건 도박이었는데, 자네는 그 아이를 군체의 도박에서 빼낸다면서 새로운 도박에 빠뜨리고 있네.

디어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뭔가가 막고 있어. 여행자? 아니면 그 보다 상위의 존재? 고난이 없으면 재미가 없다는 것 같은데.

자네는 내가 장난하는 것 같나?

자기는 곰곰히 새벽제비의 말을 곱씹고 있었는데 새벽제비는 갑자기 장난을 치고 앉았다. 디어는 인상을 확 찌푸리고는 전자레인지를 새벽제비에게 안기고 화난 걸음으로 격납고에 갔다. 30걸음 정도 걸었을까, 디어는 뭔가 깨닫고 뛰듯이 걸어 새벽제비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전자레인지를 뺐었다. 생각해보니 전자레인지는 자기 것이었다.

디어는 수호자라 여행자 조각 가까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조각을 어떻게 부숴야할지, 이 강력한 힘을 어떻게 가공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행자의 몸체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민간인도 다룰 수 있는 미약한 여행자 파편을 채집해 탑으로 돌아갔다. 격납고에서는 새벽제비가 철골 구조물에 대충 걸터앉아 있었다. 새벽제비가 디어를 보자 그는 머쓱하게 웃으며 그에게 갔다.

잘 다녀왔나보군. 여행자와의 결속은 체험하였나?

사과의 제스쳐였다. 디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고스트에게 부탁해 여행자 조각을 전송했다. 두 사람은 모두 실망해서 조각을 쳐다보았다.

라훌도 안 바꿔줄 것 같은데.

새벽제비의 말에 디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1000개 가져왔네.

뭐?

양화의 질화라 하지. 이건 그 중 하나네.

내 생각엔, 해독가 라훌에게 부탁해서 미광체로 바꾸는게 그 아이에게 득이 될 것 같은데.

그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아 디어는 가만히 여행자 조각을 내려보았다.

정말 쓸거면 내가 적임자를 알아.

밴시?

디어의 질문에 새벽제비가 미소를 지으며 손짓을 했다. 살짝 고개를 빼고 쳐다보니, 까마귀였다. 디어는 영 석연찮은 표정으로 젊은 수호자를 보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지?

자초지종을 듣고 까마귀가 새벽제비를 묘한 눈빛으로 보며 물었다.

나는 전령이고, 전령은 수많은 것들을 보고 듣기 때문이지. 괜찮아, 전생의 과오를 물으려는 것이 아니야.

어-, 그러니까.

까마귀는 불안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여행자 조각을 사용한 적 있었어, 그걸로……. 문을 열었지. 올바르지 못한 짓이었지만.

어떻게 사용했나?

우리 각성자들의 기술인데, 어둠과 빛의 결합으로-.

조금 이해하긴 어려운 기술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그건 수호자와 빛과의 결속에 대한 것이나, 고스트를 고치는 법과는 관계가 없었다. 실망한 디어의 표정을 보고 까마귀는 서둘러 말을 마무리했다.

1000개랬나? 내가 그걸 담을 상자는 구해줄 수 있다.

상자는 나도 구할 수 있네.

아니, 리프의 기술이야. 아무리 미약한 조각이래도 그만큼 모이면 안전장치를 두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럼…….

디어는 전자레인지를 까마귀에게 넘겼다.

이걸 여왕에게 갖다 줘라.

전자레인지를?

디어와 새벽제비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가운데에 낀 까마귀만 뭔지 몰라 당황해 할 뿐이었다. 디어는 군체 애벌레와 전자레인지를 진상하고 상자 1개를 받았다. 손해보는 교환이었지만, 일단 골칫거리를 제대로 처리한 것 같았다. 스라소니는 디어가 들고온 커다란 상자를 보았다.

꿈의 도시 다녀왔어?

별 것 아니지만, 선물이다.

오. 최고급 장비 들어있음 좋겠다.

스라소니가 상자를 열자, 아름다운 세공이 된 지나치게 튼튼한 상자 안에는 그냥 여행자 조각 1000개가 들어있었다. 스라소니는 가만히 그걸 내려보다 크게 웃었다.

꼰대 영감탱, 이게 뭐야! 귀엽게 진짜.

귀여워……? 디어는 중얼거렸지만, 스라소니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뭐, 이런 결말이면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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