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퀘스트

[남의 자컾] 혼합 소프트콘 (1천원)

나는 초코가 더 좋은데.

새벽제비는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게 정말 어둠이면 어쩔건가?

까마귀가 기억을 되찾은 것이, 사바툰과 어둠의 영향때문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그러게. 디어는 어쩔 생각이었을까? 그는 그 질문을 새벽제비 편에 띄우면서 어떤 답을 찾고 있었을까.

아니 뭐……. 자네, 아나 브레이 생각나나? 아나스타샤 말이네.

디어가 뭐라고 말하던 새벽제비는 흥미가 떨어진 듯 양말을 벗고 엄지발가락을 살폈다. 발톱은 까맣게 죽고 흔들렸다. 새벽제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나 브레이도 자신의 과거를 찾았지. 더 옛날로 가면 펠윈터 경도,

발톱 빠지겠는데.

펠윈터, 아나, 그리고 까마귀까지. 까마귀는 워낙 유명인사였지 않나. 리프의-

디어는 잠시 말을 멈췄다.

각성자 왕자 아닌가. 조금만 노력하면 자신의 과거를 알 수 있었을걸세. 글린트도 그의 과거를 모르고 부활시키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글린트가 알려줬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새벽제비가 디어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절뚝거리며 짐꾸러미로 가 깨끗한 손수건을 꺼냈다. 디어는 입을 달싹거렸다. 답을 모르겠다. 까마귀가 울드렌일 때의 기억을 찾은 것이 정말 어둠 때문이면 어떡하지. 물론, 디어는 암흑기를 겪었다. 물론, 똑같이 암흑기를 겪고서도 디어와 달리 빛만이 진리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디어는 그렇지 않았다. 디어는 어느 편이였냐면……. 빛은 항상 옳지 않다는 편이었다. 오시리스의 이단적인 책과는 궤를 달리 했다. 빛이 문제가 아니라 빛을 휘두르는 사람 문제였다. 아무리 찬란한 빛이라도 전쟁군주 같은 사람들 손에 들어가면 변질되어버린다. 어둠도 같지 않을까……. 수호자들이 유로파에서 영혼을 어둠으로 물들이고 왔을 때 디어는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도 어둠은 아니라고 봐.

디어가 중얼거렸다.

그런가. 그럼 나 발톱 좀 뽑게 소독약이 어디있는지 찾아줘.

좀 진지하게 들어주지 그랬나.

진지하게, 뭐 어떻게?

됐네! 어휴.

디어는 툴툴거리며 짐을 뒤졌다. 소독약은 결국 나오지 않아 새벽제비의 발톱은 발가락에 조금 더 오래 붙어있을 수 있었다. 다음에 올 때 소독약을 사오마고 약속을 한 뒤, 디어는 새벽제비의 좁은 집을 나섰다. 고작 6평, 8평 정도 하는,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곳에 이삿짐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적은 짐꾸러미를 늘어놓았다. 몇 시간이면 다 정리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왜인지 짐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아. 항상 여기 왔다갔다하는 것 같아서.

스라소니가 멋쩍게 말했다.

아이스크림 먹을까?

디어의 뜬금없는 제안에 스라소니는 잠시 눈을 끔벅거리다 곧장 디어에게 달라붙었다. 디어는 바닐라와 초코가 반반 섞인 혼합 소프트콘 두 개를 사들고 길거리 벤치에 앉아있는 스라소니에게로 갔다. 잠시 두 사람은 먹느라 말이 없었다. 소프트콘은 쉽게 녹았고, 두 사람은 끈적한 아이스크림이 손에 닿지 않게 하려고 애를 썼다. 콘 부분을 와작거리며 먹는 스라소니에게 디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둠을 통해 과거를 알 수 있다고 하네.

스라소니는 먹는 것을 멈추지 않고 디어를 쳐다보았다.

그냥, 그냥 참고하라고.

디어는 아무도 혼내지 않았는데 변명처럼 덧붙였다. 스라소니는 흐음, 하고 소리를 내고 다시 열심히 소프트콘을 먹었다.

왜 갑자기 어둠을 말해, 영감?

역시, 귀찮은 소리였나?

디어가 텅 빈 웃음소리를 냈다.

그런데 오늘은 왜 날 기다리고 있었나? 보통 이러진 않잖나?

그냥.

스라소니가 입을 비죽거렸다. 콘 부분을 감싸고 있던 싸구려 포장지를 벗겨 스라소니는 조심조심 찢어냈다. 디어의 손에는 아직 소프트콘이 남아있었다. 애를 써도 녹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고, 녹은 아이스크림이 손바닥을 끈적이게 하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스라소니는 어디가서 어둠의 힘을 손에 넣고 왔다. 디어는 스라소니를 호되게 혼냈다. 스라소니는 쓸쓸하게 말했다.

내가 수호자가 되기 전엔 뭐였을까.

말문이 막혔다.

고깃덩어리였겠지? 차가운.

스라소니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디어는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고 스라소니는 그런 디어를 두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할 일 없으면 선봉대 정찰이라도 도우려믄.

디어가 스라소니에게 웃어보였다. 스라소니는 다시 흐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의외의 반응에 눈이 살짝 커진 디어를 재미있다는 듯 스라소니가 쳐다보았다.

꼰대, 아이스크림 흐른다.

정말이었다. 디어는 허둥거리며 옷에 진 얼룩을 휴지로 닦아냈다. 스라소니는 대충 손을 흔들며 탑의 마당 쪽으로 걸어갔다. 정말로 선봉대 일을 할 생각인가. 테오가 그랬다면. 테오가 그렇게 자신의 말을 듣고 선봉대에 복무하러 갔다면, 디어는 기뻤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둠이던 빛이던 사실은, 나까지 잊고, 네가, 마음대로 살았으면,

목울대가 아팠다. 소독약을 사야했다. 새벽제비는 발톱을 뽑을 생각이다. 디어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그는 일단 남은 아이스크림을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이삿짐은 총 세 보따리였다. 디어의 손에 두 보따리, 새벽제비의 손에 한 보따리. 새벽제비는 많이 쇠약해져있었다. 그의 몸 안에 병이 똬리를 틀었다는데 솔직히 믿기지는 않았다. 그냥 고스트가 없어서 쉽게 지치는 것이겠지. 새벽제비가 좋아하는 음식을 좀 먹이고 영양제나 좀 먹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그는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짐 정리하고 뭐 먹을까.

디어랑 새벽제비는 대충 그런 얘기를 하며 보따리를 들고 집 호수를 찾고 있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하긴, 새 이웃이 온다는데 궁금하겠지. 디어는 살짝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는 남자를 보았다. 인사라도 할 생각이었다만, 남자의 얼굴을 보자 불현듯 백 몇년은 잊고 있었던 이름이 떠올랐다.

테오?

남자는 그들을 조금 더 쳐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왜 그러나?

새벽제비가 문을 열며 별 것 아닌 듯이 물었다.

아, 아니네. 그냥 뭔가……. 그리운 느낌이…….

방금 무슨 이름을 중얼-, 아악!

새벽제비는 짐을 떨어뜨리고 깨금발로 겅중겅중 뛰었다. 맨발을 그대로 현관문에 찧은 것이다. 디어와 새벽제비는 온통 다친 곳에 정신이 팔려 하려던 말을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보따리를 대충 풀어놓고, 필요한 가구와 생필품들을 확인한 뒤, 재정 상태를 점검하고 나서야 디어는 내일 마저 돕겠다고 말하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운 집에 들어오고 나서야 테오를 닮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럴 리 없지. 그 녀석이 사라진지가 얼마인데.

면도칼을 살결 사이에 슥 밀어넣는 느낌이 들었다. 디어는 가만히 서있다 불을 켰다. 몇 시간 뒤, 디어는 선봉대에서 연락을 받았다. 새로운 빛 하나를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런데 그냥 새로운 빛이 아니었다……. 과거에 테오라 불리던 수호자가 되돌아왔다. 마치 방금 부활한 수호자처럼 그는 아무것도 기억을 하지 못했다. 선봉대 측에선 테오를 부상당한 상태와 같다고 판단하였고, 그 부상을 잘 아물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디어를 뽑았다.

테오에 대해 아는 것은 없소. 있다고 해도 먼 옛날에 다 버렸소.

이 망할 놈의 집구석, 가구는 왜 필요하는건데?

새벽제비가 빽빽 투덜거렸다.

집은 코딱지 만한데 당췌 정리가 안 끝나!

그러게.

디어는 침대를 조립하고 있었지만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새벽제비는 침대도 책상도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썩어가는 나무상자와 짚단을 공동주택에 들일 수 없는 일이라, 디어는 새벽제비의 주장을 무시하고 선봉대에서 새벽제비에게 지급한 은퇴 자금에 자신의 돈을 보태서 가구를 조금 사들였다. 옷장, 침대, 책상, 책장. 책장은 중고로 들였다.

새벽제비. 스라소니가 말이네, 자기의 과거를 궁금해했어.

그거 알려주라고 자네를 그 애에게 붙인 것 아닌-, 아악!

새벽제비는 섣불리 책장을 들려고 하다 엄지발가락을 호되게 찧고 말았다.

자네는 무슨 엄지발가락에 원수를 졌나!

디어는 소리질렀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모르는 척 침대의 나사를 조였다. 새벽제비는 아이고 데이고 곡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뒹굴라지. 스라소니가 자조적으로 한 말이 어쩐지, 디어를 슬프게 했다. 빛과 어둠이 섞여 어떠한 슬픔을 만들고, 슬픔 위에 맨몸을 굴려 서글픈 무늬를 입은 느낌이었다. 아, 그 느낌을 알고 있었다, 그 우릇한 무늬, 그가 테오를 찾아다닐 때 그의 심장에 새겨진 것이었다.

까마귀에게 안부 전해줄 수 있나.

새벽제비는 까맣게 죽은 발가락을 보고 있었다.

그……. 까마귀, 대공일 때의 기억을 찾았잖나. 그거 정말 어둠과 관련이 있는건가?

새벽제비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정말 어둠과 관계있으면 어쩔건가?

그 말은 답변이었다. 군체의 체액이 묻은 방어구를 닦던 스라소니는 디어를 보더니 시큰둥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는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는 듯 방어구를 팽개치고 디어에게 왔다.

꼰대 양반, 오늘도 아이스크림이나 사주지?

왜?

나 선봉대 임무를 뛰고 왔거든. 착한 빛에게는 선물을 줘야지.

방어구나 잘 닦아.

디어는 가볍게 딱밤을 놓았다. 그에겐 가벼운 것이었지만, 제법 매웠는지 스라소니는 이마를 감싸쥐고 잔뜩 얼굴을 찌푸렸다. 디어는 아주 조금 미안해졌다.

방금 때린걸로 고급 아이스크림을 사줘야겠는데.

스라소니의 말에 디어는 똑같은 가게에서 혼합 소프트콘을 사왔다. 스라소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게 뭐 고급 아이스크림인데. 젤라또 이런거나 파르페 이런거나 얼마나 좋은게 많은데, 맛은 그럭저럭한 주제에 가격만 비싼 소프트콘이 웬 말이야? 우우-!

디어의 대답은 명쾌했다.

맛있잖나.

정말이지.

스라소니는 입을 댓발 내밀고선 소프트콘을 먹기 시작했다.

아, 맞아, 꼰대. 하지만 내가 어둠을 휘두르는게 싫잖아. 내가 기억을……. 찾았으면 해?

디어는 가만히 소프트콘을 바라보았다. 네가 원한다면 나까지 잊고 이 태양계를 떠나도 괜찮단다. 하지만. 내가 가진 마음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테오인지 스라소니인지도, 이제는 명확히 결론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앞으로 나가려면 디어 자신이 쌓아올린 탑을 무너뜨려야함을 왜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는지. 아니,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디어에게는 그 탑에 너무 공을 들였다, 테오를 잊는데, 그 감정을 잊는데……. 디어가 스라소니를 보았다.

네가 행복했음 해.

그 때, 네가 과거에 고깃덩어리였을거라는, 비웃듯이 한 말이 너무 가슴이 아팠어서, 네가 너무 불행해보였어서 그만 디어도 자학적으로 생각하고 만 것이었다.

그럼 다음엔 혼합 말고 초코맛으로 사줘. 혼합이 뭐야 혼합이.

그러마.

그렇게 디어는 소독약을 사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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