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과 유희

상아색이 산화하는 햇빛을 받으며, 금빛 머릿결이 반짝였다. 오드리는 이제 막 목욕을 마치고, 느긋한 오후의 태양에 잘 데워진 안락의자에 눕듯이 기대어있었다. 요즘 인기 있다는, 마탑에서 발명된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어떤 연주자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가운 뒤로 느껴지는 푹신한 감촉이 느긋한 휴식을 종용하고 있었다. 행복하다고도 평할 수 있는 오후 2시 즈음의 여유. 평온한 하루에 무료함 마저 느낄 즈음,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침실 탁자에 놓인 가십지를 물끄럼 바라보고 있던 오드리는 노크와 함께 들어온 하인에게 몸단장을 준비하라 일렀다.

승전의 열기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 희망에 올라타 생존을 위한 축제가 각지에서 열리는 것은 당연했다. 오드리는 그 열기를 타고 유랑하는 것을 썩 즐겼다. 가십지의 소식은 무료함을 달래기에 딱 적당한 거리였다. 거울 속, 평소처럼 푸른빛 물방울들이 자신을 감싸고 치장하는 것을 작은 하품과 함께 바라보다, 마차에 올라탄다. 멀어져 가는 저택과 바뀌어가는 풍경, 그 스쳐 지나가는 것들을 한 쌍의 루비가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 발걸음이 향하는 것은 일상의 무의식이었을지, 혹은 이제는 변모한 짙은 외로움인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본인도.

시종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사뿐히 발을 디뎠다. 양옆으로 활기찬 웃음소리들, 상인들의 호객행위. 저 멀리, 거리의 끝자락에 지평선 아래로 내려가는 해가 반쯤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해를 밀어올리는 분수대의 끝자락이 보였다. 아직 사람들이 많이 나와있지 않은 거리를 활보하기엔 딱 좋은 시간이었다. 오늘따라 운이 좋다는 작은 감상을 남기며, 마침 눈에 들어온 곳으로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갔다.

분수대 앞에는 사람들이 여럿 멈춰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주가 넷이서 분수대 앞에서 꽤 괜찮은 합주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조금 떨어진 곁에서 간이 무도회장처럼 춤을 추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휘황찬란하고 아름다운 연회장과 이 거리를 비교한다면 회장이라고 부르기에도 애석한 버석거리는 바닥 타일, 장신구라고는 드물게 몇이 쓰고 있는 화관이 전부인 수수한 옷차림의 시민들, 보란 듯이 웃고 떠들고 아무도 속내를 가리지도 않는 터무니 없는 솔직함 들⋯. 그것들을 보면서 오드리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변덕이 마음을 어지럽힌 탓인지, 그 광경을 생각보다 오래 바라보고 있던 오드리는 지척에서 들리는 목을 가다듬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 루비에 비친 것은 꽤 허우대 멀쩡한 어떤 남자였다. 준수한 외모와 체격, 땅거미가 지고 부서진 햇빛의 잔재에 비춘 그 모습이 꽤나 흥미를 일궜다.

“귀하신 분께 춤을 청해도 될까요?”

동작은 익숙하지만 얼굴을 붉히는 모습. 오드리는 오른손에 부채를 쥐고 펼친 채 입가를 가볍게 가렸다. 변덕으로 시작했으니 무료한 일상에 한번쯤은 모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왼손을 가볍게 들어 그 손에 사뿐히 올렸다. 손끝에 닿자 조심스럽게 제 손을 쥐는 것은 크고 투박하지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남자가 손을 잡고 뒷걸음으로 군중 속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안내했다. 부채를 접어 허리춤에 달아두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이윽고 너른 공터의 한구석에 자리 잡아 서서 몸을 밀착하자, 오드리는 마치 작은 바람처럼 남자에게 속삭였다.

“한번, 실력을 볼까요?”

속삭임을 들은 남자는 열띤 욕망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그 시선이 마주치자 멋쩍게 웃었다. 바람 같은 속삭임을 들은 남자가 긴장했는지 마름침을 삼키는 것을 보석이 따라 바라보고 있었다. 목울대가 내려간 모습을 확인하면,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가씨.”

확답을 받자, 잘 짜인 각본처럼 음악이 마침 새로 시작됐다. 조금 빠른 템포의 음악과 함께 품에 들어간 남자의 고동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어둠이 내려앉아 별들이 레이스 자락처럼 내려와 있었다. 함께 춤을 추는 또 다른 사람들, 점점 환호하는 이름 모를 관객들, 누구나 웃고 떠드는 평화롭지만 동시에 열기가 충만한 공간. 주변의 전등에 비춘 그 광경을, 오드리는 어떤 마음으로 보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본인 스스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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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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