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3화

각성(1)

보호소로 가는 마차에서 프라이에는 반쯤 죽은 사람처럼 두코의 어깨에 기대어있었다. 마차 입구에 앉아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멀미는 여전한지 눈을 꼭 감은 채로.

“확실히 길이 좀 험하긴 하다.”

“자주 왔다 갔다 한 거로 아는데 정비를 안 한 걸까?”

“기사단 인원수가 적으니까 정비하러 나오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어.”

차례대로 두코, 폰, 카리타스의 말이었다. 베론이 카리타스에게 이곳에선 굳이 말에 탈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 카리타스는 냉큼 마차에 올라타 폰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폰도 카리타스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바로 공간을 만들었으니 카리타스가 억지로 끼어 앉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프라이에에게만 억겁의 시간이 흐른 뒤, 일행은 보호소에 도착해 일정 설명을 듣고 각자의 자리로 이동했다. 두코와 프라이에는 건물 보수, 폰과 카리타스는 아이들 돌봄 쪽으로 빠졌고 보호소 내부로 이동한 폰은 오드샤와 마주치자마자 팽-하고 고개를 돌렸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드샤도 아이들 돌봄으로 배정을 받았고 이들은 아이들에게 글자 읽고 쓰는 방법을 알려주게 되었다. 폰은 지루하다며 조금 가르치다가 제 또래 아이들을 꾀어서 놀자판을 벌일 뻔했지만, 비소를 은근하게 보여주는 오드샤를 발견하곤 놀라운 집중력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막판에 가선 조금 풀어지긴 했지만.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이다. 다들 나와서 요리와 배식을 돕도록.”

헤일로 대리로 일행을 통솔하게 된 베론이 교실 문을 두드렸다. 수행단은 일제히 대답하며 자리를 정리했고 폰은 아이들을 놀아주다 풀린 머리카락을 다시 묶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뭐해?”

“아, 누가 나 보는 것 같아서.”

카리타스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고 폰도 시선의 정체를 알지 못한 채 문밖으로 나왔다. 긴 앞머리에 시선을 감춘 누군가는 그들이 나가며 닫아버린 문을 빤히 바라보다가 강하지만 날카로운 필체로 쓰인 자신의 이름으로 시선을 옮겼다.

‘솔라? 좋은 이름이네. 몇 살이야? 아하 나랑 동갑이구나. 잘 부탁해!’라고 말하던 씩씩한 아이는 글자를 배울 생각이 없다는 자신에게, 이름이라도 쓸 줄 알면 좋다며 노트를 찢어 그 위에 글자를 끄적였다. 느닷없이 건네진 종이를 얼떨떨하게 받아들자 아이는 왜 글자를 배우려고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알아서 뭐하게? 그거 안다고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머리만 아프고….”

이유를 대긴 했지만, 딱히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하진 않았다. 아이가 착하다고 한들 교회에서 나온 사람들은 이런 불성실한 말들을 아주 싫어했으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왜 좋아하는 거야? 다들 이렇게 말하면 싫어하던데.”

“그야 나도 공부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알아두면 친구들이랑 같이 책 읽고 이야기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한테 글자도 가르쳐 줄 수 있으니까 배웠어.”

“너는 남을 도와주는 걸 좋아하는구나. 난 그렇지 못해서.”

“엇, 우울한 소리. 나는 남한테 도움받고 살아왔으니까, 다른 사람들도 그런 도움으로 일어설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그리고 지금 내 앞에는 네가 있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폰이 솔라를 가리켰다. 결국, 솔라는 반짝반짝한 기세에 눌려 시도폰의 이름을 제 손으로 쓰고 말았고, 내친김에 다른 사람 이름도 써보자며 시도폰이 불러주는 이름들을 천천히 받아썼다.

“둘 다 C로 시작하면서 발음이 다르네?”

“아 그건….”

솔라가 시도폰과 카리타스의 이름을 번갈아 보다가 무심코 의문을 던지자 폰이 잽싸게 낚아챘다. 코지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어떻게든 끄집어내어 열과 성을 다해 설명했고 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솔라가 글자에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에 집중한 나머지, 폰은 자신이 오드샤에게 경쟁심을 느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다.

베론의 외침에 ‘시간이 빨리 가버렸네….’라며 아쉬워하던 폰은 솔라에게 내일도 이어서 할 거라며 엄포를 놓았고 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기다란 앞머리를 늘어뜨렸다.

‘내일이 기다려지는 건 오랜만이네. 간만에 말이 통하는 애가 왔어.’

하지만 저 아이도 자신이 글을 싫어하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된다면 등을 돌릴 것이다. 솔라는 책장에 빼곡히 꽂혀있는 전경(典經)을 잠깐 스치듯 흘겨보았다. 글을 알게 되면 가장 먼저 읽게 될 글은 저것이 될 거다. 지금 당장 말로만 들어도 재미없는 교리를 몇 시간이고 자리에 앉아 책으로 봐야 한다니!

솔라는 이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글을 읽지 못한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믿지도 않는 신을 예찬하는 거로 평생을 보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방을 나가는 시도폰을 몰래 지켜보던 솔라는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하는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추울 텐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람. 신전 쪽 사람들이니까 좋은 옷 입었겠지.’

그러면서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솔라는 살짝 문을 열고 나가 부엌으로 향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소란한 부엌에선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나고 있었고, 불 앞에 있으니 따뜻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솔라가 익히 아는 사람이라, 솔라는 안심하며 방으로 돌아왔다.

보호소는 고아와 환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고 사제들이 그곳에 주기적으로 들르긴 하지만 종교적인 장소의 역할은 하진 못한다. 그래서 악마들의 기세가 등등해지기 시작했을 때 북부 기사단에선 미리 이곳 근처에 신전을 세워두었다고 한다.

“근데 거기 구색만 갖춘 곳이라 뭐가 있는 건 아니라고 하더라고. 긴급 상황엔 대피해서 버티기 위한 물자가 보관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언제 갱신되는지는 모른다고 하던데.”

폰은 솔라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카리타스에게 귓속말로 전달했다. 부엌에서 재료를 옮기는 동안에도 베론이 같은 공간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하는 건 아무리 폰이라고 해도 불가능했다.

“그런 곳을 사용할 일이 없어야 할 텐데.”

카리타스가 걱정하자 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시간엔 다 같이 보호소 본관 식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는데 앉을 자리가 없어, 기사들은 아이들을 식탁에 앉히고 자기들끼리 서서 식사를 시작했다. 프라이에는 제 뒤에 서서 묵묵히 수프를 떠먹고 있는 베론을 흘끔거리며 쳐다보았지만, 베론은 별 반응 없이 그 자리에서 식사를 마쳤다.


“음…. 응?”

수프를 마시다시피 먹어버리고 카리타스를 기다리던 시도폰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떨구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살짝 찡그린 눈으로 밖을 내다보는 그의 모습에 카리타스는 밖에 뭔가 있느냐고 물었지만, 시도폰은 고개만 갸웃거릴 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 눈에는 안 보이는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서.”

“어떤 기분인데?”

“뭔가가 바닥에서 끌어당기는 것 같은 느낌인데 진흙처럼 질척질척한 질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눈이 내려서 습해지니까 그렇게 느낀 거 아니야?”

카리타스의 말대로 창문 밖에선 요리시간쯤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본격적으로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시도폰은 엔간하면 카리타스의 판단을 신뢰하는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단호하게 그런 느낌은 아니라고 부정했다.

“보통은 네 말이 맞지만…. 뭐가 다른 거지? 더 찜찜하고 소름이 돋아.”

그때 갑자기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본관 문이 열리더니 기사 한 사람이 뛰어들어왔다. 허겁지겁 뛰어오느라 숨을 급하게 몰아쉬던 기사는 베론에게 당장 보호소로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고 보고했다.

“전원 집합! 보호소의 위치는 기사들이 알고 있으니 수행단과 보호소 아이들은 기사들을 따라 뛰어가도록, 환자는 기사단이 업고 간다. 카푸트, 먼저 가 있어라. 나는 마지막에 도착할 것 같으니 네게 잠깐 권한을 위임하겠다.”

“옙! 방금 들었다시피 전속력으로 우리는 신전을 향해 뛸 거다. 옆 사람, 뒷사람 잘 챙겨서 전속력으로 간다, 따라와!”

카푸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소식을 전한 기사를 지나쳐 달리기 시작했고 수행단 아이들은 입구에 가까운 순서대로 나가서 카푸트를 따라 뛰었다. 개중에 보호소 아이들 교육을 맡았던 수행단은 자신이 담당했던 아이들을 찾으려다, 나가는 아이들과 동선이 겹쳐서 넘어지기도 했다.

오드샤는 무심코 제 담당 아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싸늘한 시선을 마주했다. 그 아이는 오드샤를 모른 척하며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뛰어나갔다. 그대로 자신을 지나치는 아이를 붙잡지 못한 오드샤는 분한 듯 주먹을 꽉 쥐었고 다른 예비 사제들 무리에 섞여서 보호소를 나섰다.

“솔라는 어디 있지?”

“걔 밥 벌써 다 먹고 침실로 돌아간다고 했어! 어떡하지?”

폰의 말에 도망치던 한 아이가 대답했다. 그 말에 폰은 보호소 안쪽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카리타스는 베론에게 막혀 따라가지 못했다.

“제가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송구스럽습니다만 지금 갈 신전은 제대로 된 신전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작습니다.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 믿고 기다릴 테니 최대한 빨리 데려 와주세요.”

베론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폰을 쫓아 달렸고 카리타스는 카푸트 무리 말단에 따라붙었다. 살짝 고개를 돌린 카리타스는 제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베론의 등이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보며 세 사람이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빌었다.

“찾았다! 너 왜 여기서 혼자 있어? 다들 도망쳤는데. 자, 이리 나와.”

“무슨, 무슨 일인데?”

“사실 나도 잘 몰라. 일단 베론 님께서 전부 신전으로 대피해야 한다고 하셔서 지금 전부 그쪽으로 가고 있어. 근데 너만 없길래 데리러 온 거야.”

“…난 가기 싫어.”

솔라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폰은 당황하며 억지로 팔을 잡아끌어 당기려고 했지만, 바닥에 주저앉은 솔라가 책장을 잡고 버티는 바람에 폰의 힘만 빠져버렸다. 결국, 당기는 건 포기한 폰이 손을 놓고는 왜 나가지 않느냐고 물었고 솔라가 막 대답하려던 참에 베론이 두 사람에게 도착했다.

“여기서 뭣들 하는 거지, 실랑이할 시간 없다. 당장 나와.”

“싫습니다. 신전 사람들은 항상 자기들 말만 따르라고 하고 우리 의견은 들을 생각도 안 하잖아요. 무슨 일이 있는지 얘기해주지 않으면….”

솔라가 베론의 손을 쳐내며 반박하자 폰은 기겁했고 베론은 약하게 이를 갈았다.

“곧 알게 되겠지만 그렇게 궁금해하니 미리 알려주지, 악마의 습격이다. 경계를 넘어왔다는 보고를 막 받았지. 그대로 악마의 양분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당장 일어나.”

겁을 잔뜩 집어먹은 아이들의 표정에 베론이 살짝 표정을 풀긴 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폰은 솔라를 일으켜 세웠고 순순히 일어난 솔라는 폰과 함께 베론을 따랐다.

“무서운 사람이네….”

“아마 네가 방금 한 말도 들으셨을 거야.”

솔라가 폰의 귀에 속삭였다가 베론의 눈치를 보았지만, 그는 내려다보지 않고 묵묵히 카푸트 무리의 발자국 위를 밟았다. 점점 거세지는 눈을 뚫고 간신히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는 거리까지 다다랐으나, 그들이 도착한 신전은 아수라장이었다.

 다 낡아빠진 기둥과 간신히 얹혀있는 지붕으로 만들어진 신전엔 물이 얼어버린 분수대 외에는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베론은 폰과 솔라를 아이들 무리에 데려가고 기사들을 불러모았다. 카푸트는 모든 인원이 빠져나온 것을 확인했다고 보고 했고 다른 기사는 현재 악마들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전했다.

“경계를 넘었다고 하지 않았나?”

“예… 그래서 경계에서의 거리와 그것들의 속도를 생각하면 지금쯤 이곳에서 느껴져야 하는데 전혀 기운이 느껴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도 마찬가집니까?”

베론의 물음에 카리타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막, 폰을 혼내고 오느라 꼭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지만, 침착한 어조로 카리타스는 베론에게 감사를 전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베론은 대답했고 이어서 기사단에 보호소 사람들을 환자와 아이들로 나누고 체력을 비축하라고 명령했다.

악마들이 왜 멈추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습격하지 않는다면 이쪽은 전열을 정비할 수 있으니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것이 베론의 생각이었다. 다행히 신전 한 구석에 마련된 커다란 서랍장에는 담요가 잔뜩 쌓여있었고 수행단이 담요 배분을 담당했다.

기사들은 환자들을 위해 가벽을 세워 아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았고, 아이들은 북부의 한랭한 바람이 기둥을 휘감아 들어오자 빠르게 담요를 받아 둘렀다.

“이쪽에도 담요 좀 주겠니?”

사제의 말에 폰이 담요를 몇 장 들고 와 환자들에게 덮어주었고 눈을 반쯤 뜨고 있던 한 노파는 폰을 올려다보았다.

“신의 가호가 당신에게 깃들기를….”

폰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노파의 차가운 손을 맞잡고 당신도 안전하길 바란다고 대답했다. 카리타스는 신전 중간쯤 서성거리고 있었고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뒤로 조용히 다가간 폰이 살짝 어깨를 잡았고, 펄쩍 뛰어오른 카리타스는 뒤돌았다가 뻘쭘한 폰을 마주하곤 눈썹에 준 힘을 풀었다.

“미안, 신경이 좀 곤두서 있어서 그랬어.”

“아냐, 나야말로 이런 상황에서 장난쳐서 미안해. 근데 저기, 혹시 저쪽에 뭔가 있지 않아?”

“어디?”

폰이 손으로 가리킨 방향에선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리타스에게 폰은 무언가 설명하려고 했지만, 말로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든 느낌이라며 제 가슴만 퍽퍽 때릴 뿐이었다.

“뭔가 찜찜한 기분이야. 그때 기사가 뛰어들어 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

“설마!”

막 대답한 카리타스는 저릿하게 느껴지는 악마의 기운에 베론을 찾았고, 기사단과 몇몇 기민한 아이들도 방금 기운을 느낀 듯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카푸트는 신전 바깥 정원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을 내부로 들여보냈고 사제들은 기사와 조를 짜서 신전 바깥에 진을 쳤다. 기사들이 갑옷을 제대로 두르고 무기를 쥐어 들자, 어린아이들은 무슨 일이 생긴 거냐며 울먹거렸다.

“괜찮을 거야, 기사님들이 계시잖아.”

프라이에는 제 옆의 아이가 내민 떨리는 손을 잡아주었다. 바로 옆에 서서 검을 꺼낸 오드샤는 후방으로 가라는 베론의 말에 불만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반박하지 않고 자리를 잡고 섰다. 그 옆엔 두코가 섰고 환자들을 치료하던 사제는 아이들에게 보호 마법을 걸어주었다.

절그럭거리는 갑옷의 마찰음이 멈추었다. 전열 정비가 끝난 기사들은 미동도 없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리를 지켰고 그 뒤에 선 사제들도 긴장한 표정으로 치유 술식을 되뇌었다.

“당신께선 이쪽으로 오십시오. 보호 결계를 발동시킬 수 있을 겁니다.”

베론의 안내로 카리타스는 신전 중심부에 섰다. 동그란 발판의 가장자리에는 빼곡하게 글씨가 채워져 있었고 원래는 붉은색 물감으로 쓰여 있었을 글자들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검게 변해간 듯 보였다. 가만히 그것을 내려다보던 카리타스는 기시감을 느꼈다.

‘검붉은 동그라미.’

“뭐하시는 겁니까? 술식이 발동이 안 됩니까?”

“아, 아니요. 그저….”

베론이 그답지 않게 다급한 목소리로 재촉하자 카리타스는 고개를 들었다. 보호 술식을 발동시키는 것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 신전을 중심으로 반투명한 결계가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이것을 악마의 공격이 이어지는 동안 유지하는 것이 카리타스와 후방 사제들의 임무였다.

문득 반투명한 결계 너머로 흔들리는 것들이 있었다. 바람이 불었고 여러 무리의 나무들이 흔들렸다. 포근하게 내리던 함박눈은 어느새 가루눈으로 바뀌어 휘몰아쳤고 흔들리는 나무의 잔상처럼 날뛰었다. 그리고 그 너머로 달려오는 검은 것들이 조각난 가루눈을 더 잘게 짓밟으며 하얀 먼지를 일으켰다.

“전원 전투 준비! 보호 결계가 지키고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악마들이 이 신전을 넘어가게 둬선 안 된다. 우리는 신의 뜻에 따라 악마를 물리치고 사람들을 지킨다!”

기사들의 우렁찬 대답이 신전을 울렸다. 두코와 프라이에는 자신들의 무기를 힘주어 잡았고 보호소 아이들은 숨죽여 신에게 기도했다. 솔라가 담요에서 고개를 빼며 누군가를 찾았지만, 그가 찾는 이는 신전 내부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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