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1부 14화

각성(2)

‘내가 뭘 보고 있는 걸까.’

카리타스는 이 풍경을 본 적이 있다. 다만 현실이 아니라 꿈, 단순한 꿈이라기보다는 돌이켜보니 예지몽이었던 그것을 통해. 눈과 같이 하얀 자작나무들이 빽빽하게 서서, 갈색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자신을 바라본다. 갈색 눈이란 것은 아주 자주 보았지만, 저것은 익숙한 색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면 당시의 저는 혼자 있었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곁에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찾고 있던 그때완 다르게…, 다르게?

“시도폰?”

아까까지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로 갔지? 카리타스는 주위를 둘러봤지만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들과 환자들만 마주할 뿐, 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인원이 부족해서 사제들도 무장하고 전투에 참여한다는 말은 베론에게 들었지만, 아직 예비 사제도 되지 않은 아이들까지 동원한다고는 듣지 못했다.

“거기서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한 사제의 말에 반쯤 빠져나간 오른발을 집어넣었다. 신전을 둘러싼 보호막을 발동시킨 사람은 나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데에는 많은 사람의 신성력이 필요하므로 내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순간, 이 막에 엮인 모든 이들은 이변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마침 그 소리를 듣고 프라이에가 뒤돌았다.

“프라이에! 폰이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아!”

“뭐라고? 아까까지 거기 있었잖아.”

두코는 이상한 일이라며 무기를 내려놓으려다 재빨리 전투태세로 돌아갔다.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악마의 기운이 눈바람을 뚫고 신전을 향하고 있었으니까.

‘어디로, 어디에 가 있는 거야.’

초조한 카리타스의 마음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악마들의 속공이 시작되었다. 최전선에 나간 기사들이 창과 칼을 들었다. 방패가 세워지고 발은 눈 속에 뿌리를 내렸다.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누군가의 기도가 끝나는 동시에 악마의 주둥아리가 베론의 칼에 꿰였다.

“다행히 비행형 개체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방심해선 안 돼!”

그의 지휘로 기사단은 악마들의 다리를 공격해 기동성을 낮추고 머리를 신성력으로 지졌다. 백금빛으로 타오른 머리를 재생시키지 못한 악마들이 바닥에 피를 토하며 진흙처럼 변했고 기사단은 질척거리는 대지를 밟으며 다음 악마를 맞았다.

깨끗했던 순백의 눈에 검붉은 핏물이 스며들어 기사들의 갑옷에 자국을 남겼다.

소형 악마들이 기사단의 다리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가 신전으로 내달렸다. 그들의 목표는 당연하게도 가장 높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는 위험인물, 카리타스였다.

“보낼 리가 있겠냐고!”

시원하게 달려나가 단검으로 그것들을 베어버린 두코는 속도를 더 올렸다. 하나, 둘, 셋-. 세 마리씩 한 번에 해치운 두코 옆엔 경쟁하듯 네 마리를 베어버린 오드샤가 있었다.

“좀 하는데?”

“그런 말 들으려고 한 거 아니니까 신경 꺼.”

“그러시겠지요~.”

두코가 말을 늘어뜨리며 다른 곳으로 달려나가자 오드샤는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뒤를 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엔 커다란 멧돼지와 같이 생긴 악마가 보호막을 들이받고 있었다.

신전을 지키기 위해 보호막 외부에 서서 전투를 벌이던 기사단을, 악마가 기어코 뚫고 들어온 상황이었고 베론을 비롯한 기사들은 이미 맡은 악마들이 있어 전열에서 이탈할 수 없었다.

짐승이 화났을 때나 들리는 소리와 보호막이 충격에 진동하는 소리가 동시에 크게 울리자, 아이들은 무섭다며 비명을 지르거나 울기 시작했고 보호막을 유지하고 있는 사제들은 그 소리를 견디며 기도를 유지했다. 중앙의 카리타스는 이에서 뻐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이를 물고 버티며 눈으로는 시도폰을 찾았다.

두코의 단검이 악마를 베었지만, 그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보호막에 달려들었고 멀리 있던 프라이에가 자신의 두꺼운 랜스를 명중시키자 반응을 보였다.

“프라이에! 피해!”

비명과 같은 두코의 외침에 프라이에는 도망갈 곳을 찾았지만, 신전은 이미 사방이 악마로 포위된 상황이었다. 허리에 꽂힌 랜스 때문에 덜거덕거리면서도 악마는 프라이에를 향해 돌진했고, 프라이에는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았다.

“멍청하긴. 눈을 왜 감는 거냐!”

“오드샤?”

오드샤는 입을 쩍 벌린 악마에게 자신의 칼을 물렸다. 머리를 베어내고자 오드샤는 검에 힘을 실었지만, 악마는 날을 짓씹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사이에 정신을 차리고 랜스를 뽑아 든 프라이에는 그대로 악마의 눈으로 그것을 휘둘렀다. 뒤늦게 칼을 뱉어낸 악마는 그대로 오드샤에게 머리가 잘렸고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에 두 사람은 눈을 찡그렸다.

“도와줘서 고마워.”

거친 숨을 뱉으며 프라이에는 신성력으로 악마를 처리했고 마찬가지의 상태였던 오드샤는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둘 다 괜찮아? 소형 악마들은 내가 다 처리했는데 중형 악마들은 이것만으로는 무리일 것 같네.”

두코가 제 단검 두 개를 내려다보며 아쉬워했다. 신성력을 다룰 수 있게 된 사제들은 자신에게 편한 형태로 신성력을 구현할 수 있는데, 두코는 아직 그런 것을 할 줄 몰랐으니 온전히 자신이 가진 무기만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우리가 배운 건 신성력으로 악마의 재생을 늦추는 방법뿐이었으니까.”

프라이에는 낮게 중얼거리곤 본진으로 돌아가자고 덧붙였다. 아이들을 비롯한 그 자리의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었지만, 악마들의 물량 공세는 끝이 없었다.

신전에서 거리를 두고 진을 쳤던 기사단은 어느새 보호막에 반쯤 닿은 채 악마와 맞섰고 눈밭은 흰색을 보기 힘들 정도로 인간과 악마의 피로 물들었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기사의 시체가 악마들에게 잡아먹혔고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 위로 악마들이 쏟아졌다. 주인을 잃은 갑옷과 무기는 그대로 눈 속으로 파묻혔다.

“부단장님, 카푸트가…!”

공중에 흩뿌려지는 피가 눈과 섞여서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와중에, 보호막은 계속되는 공격으로 옅어졌다가 진해지기를 반복했다. 보호막을 전개하기 위해 기도하고 있던 카리타스는 자꾸만 땅으로 떨어지려는 손을 힘주어 잡아 올렸다. 간신히 후들거리는 다리로 버티는 건 카리타스뿐만이 아니었다.

“헉…. 도대체 언제까지 달려드는 거야…. 윽.”

“니옌 자매님!”

이미 신성력을 너무 많이 소모한 사제는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거나 주저앉아서 숨을 골랐다. 다시 일어선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쓰러지는 사제들의 모습에 보호소 아이들은 울지도 못하고 덜덜 떨면서 서로를 껴안을 뿐이었다. 그러던 중 솔라는 아이들 사이에서 바깥을 바라보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시도폰! 너 거기에서 뭐 하는 거야?”

카리타스는 솔라의 말을 듣자마자 그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었다. 베론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했는지 그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시도폰은 검을 들고 있었다.

기사들 사이에서 작은 몸으로 날래게 악마의 움직임을 저지하고 적은 신성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모범적인 기사의 자세였으나 시도폰은 아직 약했다. 악마를 멈추게 하는 것도 잠시였고 충분치 못한 신성력은 그것의 재생을 더디게만 할 뿐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마찬가지로 폰을 발견한 두코와 프라이에, 오드샤는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지만, 쿵-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깃털들이 하늘에서 떨어졌고 아이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비행형 개체까지 왔다고? 몇 마리야 저게다….”

두코는 믿을 수 없다며 중얼거렸지만 그런다고 해서 검은 새들이 보호막을 향해 돌진하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오드샤를 비롯한 예비 사제들이 화살의 형태로 신성력을 구현해 새들을 맞추었지만, 독수리만 한 몸집의 새들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신전에 선 사제들은 하나둘 쓰러져, 결국 카리타스만 힘겹게 중앙에 버티고 서 있는 상황이 되었고 새들이 한 번씩 부딪힐 때마다 그의 몸은 크게 휘청거렸다. 하지만 카리타스는 입술을 깨물고 버텼다.


“하….”

당장이라도 폰에게 신전으로 돌아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겨우 눈을 떠서 폰이 있는 곳을 바라보면 그 아이는 아직 거기서 버티고 있었다. 어떻게든 기사들을 돕고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신성력을 활용하는 방법도 내가 알려 준 대로 착실하게 따르는 모습이었으니 평소 같았으면 멋있다고 잔뜩 칭찬해줬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만하고 빨리 신전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 쿵쿵거리는 소리가 신전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나만 버티고 있으면 이곳은 안전할 테니까. 입이 바싹 마르고 피 맛이 느껴지는 것 같지만, 갈비뼈가 부서진 것처럼 욱신거리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후들거리지만, 그래도 버틸 테니까 제발 돌아오기만 하면 좋을 텐데.

다시금 쿵-하는 소리가 나고 내 몸은 갈대처럼 휘청였지만, 이번엔 누군가 받쳐주어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솔라가 나를 등진 채 받쳐주고 있었다. 괜찮냐고 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아니었지만, 신벌을 받을 때의 딱 두 배만큼의 고통이었지만 그걸 말해봤자 무엇하겠나. 끊이지 않는 고통에 점차 정신이 혼미해졌다.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리면 전부 끝나겠지. 악마들은 나부터 물어뜯고 사제들을 물어뜯고, 그다음은 아이들 차례일 거다.

보호막으로 사용하던 신성력을 내 몸에만 두르고 탈출하고 싶었다. 얼토당토않은 생각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될 리가 없지. 내가 무너지면 폰이 돌아올 곳이 없어진다.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나는 버텨야 한다. 서 있는 것이 고작인 다리에 억지로 힘을 준다.


“당신 뭐야? 잠깐!”

경계에서 버티던 기사 중 하나가 오드샤를 지나쳐 잽싸게 신전으로 뛰어들었다. 이미 기절한 사제들의 몸을 거리낌 없이 타고 넘어온 그는 검을 휘두르며 주위 사람을 물렸다. 아이들은 찍소리도 하지 못하고 피범벅이 된 그를 피해 신전의 가장자리로 피했다.

마침내 그가 솔라와 마주 볼 정도로 가까이 왔을 때 나는 그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평소에도 인간은 죽음을 무서워한다. 일상과 주변 사람들을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그 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무서워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저 사람은 지금 몇 명의 동료를 떠나보냈을까. 오늘 죽은 기사와 사제는 모두 몇 명이었을까. 앞으로 살아남을 동료들은 몇 명이나 될까. 아마 그런 고민이, 악마 떼와 함께 덮쳐왔을 거다.

동료와 악마의 피를 철갑옷에 끼얹은 그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두려움이 가시지 않는지 다리를 연신 떨어댔다. 신전 바깥에서 버티고 있던 오드샤는 당장이라도 그를 베어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다가왔지만, 한발 늦었다.

“이거 놔!”

솔라가 그에게 인질로 잡혔다. 나를 지탱해주던 힘이 하나 쑥 빠져버렸지만 나는 저항할 길이 없었다. 나는 그를 내보낼 수도 없었고 나가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를 원망하는 마음보다는 내가 어찌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더 컸다.

“미카 당신, 지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쓰러져 있던 사제 중 한 명이 간신히 기운을 차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여전히 검을 들고 주위 사람들을 위협하던 그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놀라 칼을 떨어트릴 뻔했다. 저 검은 누굴 베려고 들고 온 것일까.

“당신도 저 악마들과 직접 싸워봤으면 나를 비난하지 못했을 겁니다! 안전하게 이런 곳에 처박혀서 남의 도움이나 받는 주제에 왜 나를 벌레 보듯이 하는 겁니까?”

주제에 기운은 남아있는지 그가 발악하는 소리는 쩌렁쩌렁 퍼졌고 안 그래도 힘든데 그 소리에 머리가 울려서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당신은 기사잖아요!"

누군가가 사람들 속에서 외쳤다. 기사를 비난하는 자, 기사의 탈주에 동요하여 이성을 잃은 자, 그저 두려움에 떨며 이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자 등등 많은 목소리가 뒤섞여 보호소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것을 통제할 만한 고위 기사나 사제들은 보호소 안에 있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든 민간인들을 보호하고자 자기 목숨을 바칠 기세로 싸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도 결국 인간이지 초인이 아니다. 언젠가 그들도 지칠 것이다. 그들마저 쓰러져 버리면 이 사람들과 폰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내가 이들을 지켜낼 수 있나?

손끝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점차 감각이 무뎌질 즘, 웅성거리던 군중을 뚫고 날카로운 비명이 내 귀에 내리꽂혔다.

익숙한 목소리의 낯선 톤.

이후로 보이지 않는 갈색 머리카락.

고통으로 울부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비명에 군중은 쥐 죽은 듯 조용해져 그 아이가 소리를 냈다면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신 악마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닥엔 새로운 피가 솟아나듯 흐르고 그것의 원천은 내가 익히 본, 어떤, 무언가.

입에서는 피 맛이 났다.

“시도폰!”

두코가 가장 먼저 움직였다. 폰을 두고 이리로 도망친 기사는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기도하던 손을 풀고 그의 등을 밀어서 넘어뜨렸다. 한심하게 자빠진 그를 내려다보는 내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풀려난 솔라가 뒷걸음질 치는 것은 보였다.

멀리서 보이는 폰은 의식을 잃은 것 같았다. 피가 줄줄 흘러나오는 몸을 두코가 전선에서 빼냈지만, 뒤따라간 프라이에가 어떻게든 신성력으로 상처를 치료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게 무용할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너를 위해서 버티고 있었는데…, 네가 이렇게 끝나버리면 아무 의미가 없어. 아냐, 미안해 나만 아니었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나 때문이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솔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지만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아일렌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와 폰은 함께 갈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나는 그걸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그 날의 꿈과 엮어서 폰이 신에게 힘을 받으리라고 예상한 것이다. 그래서 결정한 북부행이었는데.

그게 내 오판이었다는 걸, 이렇게 비싼 값을 치르고 알고 싶지 않았다. 신이 너에게 힘을 주려던 게 아니라 너를 가지고 나를 협박하고 싶었던 거구나. 내가 아무리 신벌을 받아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 이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겠다? 그리고 그 처음이 시도폰이라고?

천천히 팔을 벌려 신성력을 끌어모았다. 내가 서 있는 발판의 둘레에 새겨진 술식은 단순히 보호막만 전개하는 것이 아니었다. 유사시에는 신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문장이 작은 글씨로 끼어들어 있었다.

아무도 못 본 것 같기도 했고 나도 그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싶지 않아서 못 본 척했는데, 이젠 괜찮다. 자존심 같은 거야 아무래도 좋다. 술식을 사용한 사람 중 살아남은 이는 없었다고 하지만 이것 역시 문제 될 건 아니었다. 다시 손을 모으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당신의 충실한 종이 무릎을 꿇습니다. 오만과 무지를 내려놓고 어리석은 인간으로서 당신 앞에 회개하오니…,]

“안 됩니다!”

베론의 외침이 들렸다. 그는 이 술식을 알고 있었는데도 나에게 구태여 말해주지 않았구나. 술식을 끝맺으려던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무언가 내리꽂히는 느낌에 그대로 모든 근육이 멈췄다. 숨 쉬는 법도 잊은 나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속살거렸다.

“멈추어라. 네 회개는 아직 충분하지 않으니.”

‘목소리가… 안 나와.’

성대의 떨림이 멈추어 아예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숨이 막힌 것처럼 목을 부여잡은 채, 꺽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했고 그의 목소리는 계속 내 머리를 휘저었다.

“네 역할은 저 아이를 여기까지 데려오는 것이었으니, 시키지도 않은 짓을 구태여 해서 나를 번거롭게 할 생각은 마라.”

“…하! 하아….”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숨을 고르는 동안 희미해진 보호막을 어떻게든 되돌려보려고 했지만 이젠 안 될 것 같았다. 신성력이라고는 조금도 남지 않았고, 손을 떨리고 있었으며, 시야까지 점멸하고 있었으니까.

“고개를 들어라, 새로운 …를 환영해야 하지 않겠느냐?”

강렬한 빛이 신전 바깥에서 내리쬐었다. 악마와 싸우는 동안 내리던 눈이 멈추고 흐린 구름의 살을 갈라 빛이 쏟아져 내렸다.

달려들던 악마도, 맞서던 기사들도 모두 그곳을 바라보았고 전투 내내 끊기지 않던 갖은소리도 뚝 끊겼다. 정적 속에서 어두운 구름을 가른 빛은 너무도 강렬해서 그 끝에 누가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빛을 타고 누군가 내려왔다. 무장도 제대로 하지 않고 길고 긴 천으로 몸을 휘감은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창을 한번 내지르는 것으로 악마들을 소멸시켰다. 방패조차 갖추지 않은 것은 그가 오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필요가 없어서였겠지.

그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와 폰의 등을 어루만지자 샘물처럼 솟아오르던 피가 멎고, 창백한 얼굴도 산 사람의 것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그 광경만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제야 태양과 같은 강렬한 빛에 환호를 보냈다. 아마 거기 있는 사람 중 대부분에게 성령의 모습은 빛으로만 보일 것이다. 모두가 머리를 조아려 빛을 주워섬겼다. 신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는 살아남았다.

나는 원 밖으로 나왔다. 성령이 내려온 순간부터 한낱 인간이 만든 보호막이란 아무 의미 없었으니까.

신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눈이 녹아 질어진 땅을 마구잡이로 밟았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눈이 아릴 정도로 찬란한 광채가 가는 길을 비춘다. 신은 폰이 이곳까지 와야 한다고 했지, 이유가 뭐였을까? 멀리 떨어진 폰의 몸이 황금빛에 감싸진 것처럼 보여서 불안했다.

신이 평범한 인간 하나를 살리기 위해서 성령을 내려보냈을 리 없었다. 폰이 필요해서, 그 아이에게도 나처럼 무언가를 시키기 위해서, 환영할 만한 무엇인가가 될 ‘폰’이 필요해서.

폰은 자작나무들에 둘러싸인 채 잠들어있었다. 빛이 폰을 비추자 그 아이만을 세계라는 무대 위에 세운 것처럼 보였다. 고작 그 거리를 뛰고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내 앞에 성령이 다가왔고 그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박하려던 나는 돌아가는 성령을 붙잡지 못하고 폰을 돌아보았다.

몇 년 묵은 먼지처럼 하늘을 빼곡하게 메웠던 구름은 어느새 걷혀 맑은 밤하늘을 드러냈다. 황량한 진흙탕에 악마의 재와 기사들의 시체, 그리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성흔만이 남았다.

그래, 신의 개가 불쌍하다고 한 이유가 있었다. 이거였구나.

한 발치 앞까지 다가가서 본 폰의 등엔 거친 천으로 쓸린 듯한 자국만 남아있을 뿐 피가 흐른다거나 여전히 어딘가가 찢어져 있지도 않았다. 손으로 그 상처 자국을 가려보았지만, 황금빛은 내 노력이 무색하게 잘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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