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fido

2부 10화

아페의 사과, 헤일로 은퇴 계획

만찬이 끝나고 시도폰이 직접 수행단을 축성했다. 한 사람씩 나와서 시도폰이 읽어주는 콘피테오르를 따라 읽으면 축성이 끝나는, 아주 간단한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축성을 받을 사람은 이번에 북부 기사단에 입단하게 되는 이들이었고, 두코는 어느새 장난기를 싹 걷어낸 폰의 얼굴을 보고 ‘애들은 정말 빨리 변하는구나. 저런 표정을 짓게 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라고 생각했다.

“다음은 네 차례야 두코.”

자신의 오른쪽에 있던 아이가 축성을 받고 돌아와 두코에게 속삭였다. 콘피테오르가 적힌 석판을 사이에 두고 폰과 두코가 마주 섰다. 역대 집행자들은 자신만의 축성 구절을 만들었다. 앞서 읊은 사람이 있어 두코는 구절이 낯설지 않았지만, 막상 제 입으로 읊으려니 긴장되는 건 사실이었다. 시도폰이 어떤 마음으로 이 구절을 만들었는지는 직접 읽어야 알 수 있었으니까.

“[우리가 가는 길을 푸른 불꽃이 지킬 것이니, 두려워 말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

“[우리가 가는 길을 푸른 불꽃이 지킬 것이니, 두려워 말고 나아갈 수 있게 해주소서.]”

순간, 두코는 자신이 불 속으로 뛰어들었나 하는 착각에 석판에서 눈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콘피테오르를 읊자마자 제 몸을 따뜻한 불꽃이 감쌌다. 한겨울에 초여름의 따스함을 느낀 두코가 폰을 넋 놓고 바라보았고, 폰은 슈바헨이 고개를 돌린 틈에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어때? 괜찮지?’라고 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두코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고, 뒤돌아서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차례로 아이들이 축성을 받았고, 아페는 퍽 기분이 좋았는지 혼자서 실실 웃다가 서둘러 입꼬리를 내리곤 했다. 그는 종종 주먹을 꼭 쥐었다가 펴길 반복했지만, 작은 손이 긴 소매에 가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런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코지만 미묘한 기분으로 동떨어져 있었다. 폰과 떨어져 있은 지 3년이 되었지만, 여태까지는 폰이 잠시 어딘가로 떠나 있을 뿐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이렇게 축성을 받고 나니 자신과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는 걸 코지는 실감해버렸다.

‘독립한 자식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코지에겐 자식이 없었지만, 가장 적절한 표현을 꼽자면 그 말일 것 같았다. 시원섭섭한 기분이었다. 무심코 옆을 돌아본 코지의 시선엔 행복하게 고기를 먹고 있는 두코가 있었다. 입맛이 없냐며 묻는 두코에게 고개를 저은 코지는 다시 나이프와 포크를 집었다.

‘그래도 똑같이 웃는 걸 봐서 안심되네, 걱정했는데.’

당장 같이 있는 시간을 즐기면 되고, 나중에 폰이 남부로 왔을 때 재밌게 또 놀면 되는 거다. 편지도 꾸준히 쓸 테니까, 코지는 편안한 마음으로 식사를 즐겼다.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끼고 있었지만, 밤이라 그런지 다들 신경 쓰지 않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투두둑 떨어지는 빗소리를 등지고 아페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홀로 있던 아페가 씻고 온 두코를 어색하게 맞이했다. 그제 서야 아페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두코는 입을 달싹거렸지만, 말을 꺼내는 건 아페가 빨랐다.

“지금이 이걸 말씀드리기에 적절한 시기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오늘을 놓치면 너무 늦게 말하게 될 것 같아서….”

망설이는 아페에게서 심상찮은 것을 느낀 두코가 무심코 그를 노려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점점 심각해지는 두코의 표정에 아페는 겨우 울음을 참으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미들 부인이 자신이 주도한 제방 사업에 참여하다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정말 죄송하다고,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건 절대로 고의가 아니었다고. 고해하듯이 말끝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붙이는 아페를 두고, 두코는 어떤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단칼에 아페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아페의 말마따나, 제 어머니가 봉사활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거기서 죽을 일은 없었을 테니까.

“…일단 울음은 그치세요. 숨쉬기 힘드시잖아요.”

우느라 달아오른 얼굴로 아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쉽게 멈출 울음이 아니었다.

“저도, 신전에 왔으니까, 사람들한테 잘 보이려고 했던 건데, 괜히 부인을 끌어들여서 죄송해요.”

숨죽여 울던 와중에도 아페가 사과를 멈추지 않자, 두코는 소리 내서 울어도 괜찮다며 아페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비가 제법 많이 내리니 이렇게 하면 맞은편 방에서도 들리지 않을 거예요.”

제 품에서 들리는 소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두코는, 어머니가 이렇게 자신을 안아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같은 생각을 하다가 창밖을 보았다. 세찬 비가 창문을 때리고 긁어내렸다.

‘오늘은 눈이 아니라 비가 내리네, 특이하게.’

어느새 잦아든 울음소리에, 두코는 팔에서 힘을 풀었다. 아페는 두코의 눈치를 보다 떨어졌다가 제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된 두코의 옷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 제가 빨아올게요. 이리 주세요.”

“아니, 잠시, 잠시만요 제 옷은 제가 벗을 테니까.”

아페는 두코의 옷을 당기다가 손을 놓았다. 그러자 두코는 ‘옷 기장이 길어서 당신께서 이걸 세탁하시긴 어려울 겁니다. 나중에 제 부탁이나 하나 들어주세요.’라며 옷을 갈아입었다. 잠들기 전까지 이것저것 이야기하던 두 사람 중 아페가 먼저 곯아떨어졌고, 후련해진 표정으로 잠든 아페를 보던 두코도 곧 눈을 감았다.


“코지…. 처음 카리타스가 대련했을 때랑 상태가 비슷한 거 같아.”

대인 검술 훈련 첫날, 연단 위에서 수행단 아이들의 훈련을 참관하던 폰이 중얼거렸다. 그 말대로 코지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영 엉성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프라이에도 동의하며 걱정을 덧붙였다.

“근데 코지 말이야, 싸우는 것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다? 그나마 카리타스는 상대방을 이기고 말겠다-라는 투지라도 보였는데. 코지는 동기 자체가 없는 것 같은 표정이야.”

“나 혼낼 땐 되게 전투적이어서 몰랐어. 저렇게 물리적으로 싸우는 건 성격상 안 맞나 봐.”

턱을 괴고 코지의 대련을 지켜보던 시도폰은, 코지가 유독 왼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어색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공격을 알아채는 것 자체는 빠르게 하는 편이었는데, 알아채고 나서 곧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잠깐 굳어버리는 것이었다.

‘설마 올리비아한테 당했던 기억 때문인가?’

폰은 코지의 행동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고자 단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자 훈련을 하던 이들이 시도폰을 쳐다보았고, 의도치 않게 주의를 끌어버린 폰은 코지에게 다가갈 수 없었다. 어떻게 이 시선을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던 폰은 경로를 틀어 그대로 헤일로 쪽으로 걸어갔다.

갑자기 제게 다가오는 폰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헤일로는 사정을 듣고 고민을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물론 자세하게 올리비아와 있었던 일을 설명하진 않았고, 코지가 왼쪽 옆구리를 다친 적이 있어서 좌측 공격에 빠릿빠릿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었다.

“그런 거라면 역시 반복 학습이 좋습니다. 생각도 하기 전에 기계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몸이 되면 되니까 말입니다. 그나저나 이번에도 다른 아이들을 봐주실 수 있으십니까?”

“…매년 하는 거였군요, 그거.”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시도폰은 헤일로를 따라다니며 대련 중인 아이들을 관찰하고 고쳐야 할 점이라든가 강점 같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헤일로는 ‘이 중에 당신께서 이끌어야 할 아이들이 나올 테니까 잘 봐두십시오.’라며 시도폰에게 부담을 주곤 했다.

‘의외로 아페 님은 즐거워하시는 것 같네.’

아페의 대련 상대는 아페 또래인 거주관의 아이였다. 궁에서 검술을 배운 적은 없었다지만 기본적인 대련의 기술은 익힌 적이 있는지 동작은 깔끔한 편이었다. 얼마 후, 훈련이 끝나고 녹초가 된 아이들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대련에 이긴 쪽이 진 쪽과 함께 마실 물을 가져와서 나눠마셨지만, 아무도 본관을 나가려고 하질 않았다.

“자, 다들 정신 차리고 빨리 씻으러 가라. 땀이 식으면 그게 더 위험해.”

프라이에가 아이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외쳤다. 잠깐 쉬었다고 다리에 힘은 생겼는지 금방금방 아이들이 두 발로 일어섰지만 제대로 걷느냐고 하면, 그런 건 또 아니었다.

갓 태어난 사슴처럼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떼 지어 나가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폰도 짐을 챙겼다. 저녁 시간 전까지 개인 훈련을 좀 할 생각이었으니까. 베론에게 듣기로는 피데이스는 또 보호소에 있는 모양이니 정말 오랜만에 혼자서 훈련을 하게 되었다.

시도폰은 제 방에 딸린 훈련장에서 몸을 풀고 창을 집어 들었다. 요즘 그가 연습하는 것은 다수의 근거리 적들을 공격하는 기술이었는데, 적당한 높이로 창을 크게 휘두르는 것이야 매번 하던 일이니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공격이 끝날 때까지 힘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기에, 시도폰은 바닥에 널브러진 나무 인형들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연속해서 3개의 나무 인형을 베는 건 가능했지만 네 번째 나무 인형이 다 베어지지 않고 반쯤 잘려있었다.

‘악마들이 이것들처럼 곱게 베이지도 않을 테니까 실전에선 두 마리 정도만 한 번에 죽일 수 있겠지. 그럼 광역 공격의 의미가 없잖아.’

이 고민을 피데이스에게 말한 적 있었지만, 그도 딱히 묘수를 떠올리지 못하고 연습밖에 답이 없겠다고 대답했다. 폰의 훈련을 보고 있다가 ‘첫 번째 대상이 맞는 걸 보고 다음 악마들이 피할 수도 있으니,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베어 버려야겠군요. 확실히 힘들겠어요.’라며 피데이스가 조언 아닌 조언을 주긴 했지만, 연습이 더 필요하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보고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야 하고, 한 번에 네 마리는 썰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만도 해.’

살짝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시도폰은 다시 나무 인형을 가져다 왔다. 다칠까 봐 물러나 있던 루카가 인형 세우는 걸 도우며 무리하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일 뿐 전혀 그럴 생각은 없었다. 최대한 빨리 기술을 성공시키고 싶었으니까.

 

얼마 전, 헤일로가 은밀하게 시도폰을 따로 불렀다. 수행단과 관련된 일인가 싶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단장실을 찾았던 시도폰은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선뜻 방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방에 있었던 사람은 헤일로, 베론, 슈바헨 세 사람뿐이었고 시도폰이 들어가자 문이 조용히 닫혔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시도폰이 자리에 앉고도 한참이나 적막이 계속되자 답답했던 시도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셋 중에 가장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은 베론이었다. 헤일로는 평소답지 않게 허탈한 표정으로 자신의 수염을 잠깐 쓸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조만간 기사단장 직을 내려놓게 될 것 같습니다. 아직 정식 기사 서임을 받은 건 아니시니 집행자께서 열여섯이 되기 전까지는 베론이 임시로 기사단장 직을 맡게 될 겁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시도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무슨…. 무릎이 예상보다 더 안 좋아지신 건가요?”

시도폰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헤일로를 내려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당신께서 기사단장이 될 때까지 현역으로 남고 싶었지만, 근래에 악마들이 자주 나와서 무리를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게 미안해할 일은 아니죠.”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침묵.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시도폰은 조심스레 은퇴식은 언제 할 것인지, 은퇴 후에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베론이 은퇴식은 수행단이 돌아가고 나서 4월 초쯤 하게 될 것 같다고 대답했고 헤일로는 ‘은퇴하면 농사나 짓고 살아야죠.’라고 이야기했다.

“농담이시죠? 단장님이 은퇴하셨다고 그런 평화로운 일에 만족하실 것 같지는 않은데요.”

“집행자께서는 저를 뭘로 보시는지…. 뭐, 저도 그런 삼삼한 일은 안 맞긴 합니다. 하지만 기사를 그만두겠다고 하면 그런 일이라도 해서 북부에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피데이스처럼 교관으로 일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단장직에서 은퇴하는 거지, 기사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잖아요.”

시도폰의 주장에 헤일로가 부정하려 했지만, 슈바헨이 시도폰의 편을 들고 나섰다.

“이번만은 집행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슈바헨님, 저는 자주 옳은 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어이없어하는 시도폰의 옆에서 베론도 조용히 말을 거들었다.

“동의합니다. 애초에 농사를 지어보신 적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감으로 거기에 뛰어들겠다고 자꾸 그러시는 겁니까?”

“뭐야, 단장님 농사 안 지어보셨습니까? 파종이 뭔지는 아시나요?”

거주관에서 생활하는 동안 이것저것 길러본 경험이 있었던 시도폰은 헤일로의 낙관을 하나하나 부쉈다. 그는 북부에서 잘 자라는 식생이 어떤 게 있는지, 물의 양은 얼마나 필요한지, 잡초는 어떻게 뽑아야 하는지 등등을 알아야 한다며 일장연설을 했고, 헤일로는 잠깐 위축되는 듯하다가 ‘그런 건 배우면 되는 겁니다!’라고 반박했다.

“그건 그렇죠.”

폰이 깔끔하게 인정하자 헤일로는 김이 샜는지 이마를 짚었다. 베론이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폰에게 눈빛으로 물었지만, 폰은 아직 할 말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단장님. 식물들은 단장님 명령대로 자라거나 버티지 못할 거랍니다. 인간만큼 말을 잘 알아먹는 종족도 없다고요.”

“허…. 일단 그것도 고려해보겠습니다.”

헤일로를 제외한 세 사람은 목적을 달성했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쭐거리는 시도폰과 그 뒤에서 그를 칭찬하는 슈바헨, 베론이 방을 나갔고, 적막해진 방에서 헤일로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농사를 짓고 싶다는 건 진심이 아니었다. 부상 때문에 은퇴가 앞당겨지기 전까지는, 기사단장을 그만두더라도 계속 기사단에 남아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누구도 허무하게 죽지 않도록, 주변 사람들과 함께 오래오래 살아서 언젠가는 악마가 사라진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가게 하고 싶었다. 헤일로는 자신의 무릎을 매만졌다. 젊었을 적엔 낮에 훈련하고 밤에 불침번을 서도 멀쩡했던 몸이, 이젠 조금만 오래 서 있어도 빨리 휴식을 취해달라고 아우성친다.

처음 베론에게 이 사실을 말했을 때, 그는 ‘그 몸으로 농사는 가능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생도 훈련이야 앉아서 시키셔도 괜찮으니 계속 기사단에 남아있으십시오.’라며 단호하게 헤일로의 전직을 막았다. 비슷한, 아니 오히려 저보다 더한 처지인 슈바헨을 찾아갔더니,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지만 그대는 이제 좀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늙은이도 부관의 제안이 썩 타당하게 들리는군요…. 신의 은혜로 얻은 육신을 소중히 하는 것은 신도의 의무이며 당신의 경험은 후임 기사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말하며 헤일로를 쫓아냈다. 마지막 희망을 안고 부른 시도폰도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 꾸짖지 않았다.

헤일로는 신의 품으로 돌아간 자신의 동기들을 떠올렸다. 혼자 살아남고 싶지 않아서 항상 그들의 앞에 섰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동기들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헤일로는 그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당시 평기사였던 헤일로는 같은 기수 중 유일한 생존자로서 부단장이라는 직함을 달았다. 직책을 거부하려던 헤일로에게 당시 단장이 했던 말이 지금의 헤일로를 만들었다.

‘네 뒤에 있는 기사들이 같은 일을 경험하지 않게 해라. 이 직책은 그러라고 주는 거야.’

그날 이후로 헤일로는 전술 훈련에 매진했다. 한 사람이 잘났다고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늦었다고 해서 포기할 순 없었다. 헤일로는 항상 기사들을 직접 교육했고 전투에선 절대로 그들을 앞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헤일로가 가르친 대로 정말 잘 싸워줬고, 서로를 의지했으며,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 노력해도 악마와의 전투가 끊이지 않아서 모두와 함께할 순 없었다. 그리고 헤일로는 한 명 한 명을 잃을 때마다 마음의 한구석이 썩어들어가는 기분이었기에 그런 날만은 슈바헨에게 양해를 구하고 술을 몇 잔 기울였다.

3년 전 집행자가 탄생한 그 전투에서 많은 기사가 죽었다. 온전한 신체가 남아있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헤일로는 그들을 전부 알아보았다. 어찌 모르겠나? 몇 년을 직접 가르쳤는데. 닳아있는 무기 단면이나 갑옷, 소지품 등등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아남은 기사들과 함께 시신을 모으고 그 조각 하나하나에 나무판으로 이름을 새겨서 달았다. 가족들에게 부고 소식을 알릴 때도, 묘지로 매장하러 갈 때도, 개인 물품을 태우러 갈 때도 헤일로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들을 지키지 못한 주제에 무슨 낯으로 슬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시도폰의 각성을 제대로 확인한 날, 푸른 불꽃에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던 그 순간, 헤일로는 기쁨과 슬픔이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로운 집행자가 나타났으니 앞으로 죽어갈 사람들은 분명 적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그의 보호 아래에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헤일로는 그런 기쁨도 잠시, 그날 희생된 기사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시도폰이 좀 더 빨리, 아니 꼭 시도폰이 아니더라도 집행자가 조금만 더 일찍 탄생했다면 아무도 죽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오래 그런 생각에 빠져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쨌든 자신은 기사단장이니까, 시도폰의 힘으로 더 많은 이들을 지키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 분명 그랬는데 무릎이 이렇게 빨리 닳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헤일로는 더는 싸우지 못하는 기사가 무엇하러 기사단에 남아서 식량을 축내냐는 생각 때문에, 농사를 짓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오히려 그들은 헤일로에게 남아있으라며 붙잡았고 전선에 서지 않고도 사람들을 지킬 방법을 알려주었다.

‘슈바헨 님을 제외하면 내가 선임인데 제법 기특한 말도 할 줄 안단 말이지.’

검집을 매만지던 헤일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예 간 줄 알았던 세 사람이 복도에서 서성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더 고민하기에도 뭐했다. 문을 열자 의자를 끌고 와서 앉은 슈바헨과 그 앞에서 고민하는 표정으로 서 있는 베론, 문을 등진 시도폰이 보였다. 세 사람은 놀란 표정으로 헤일로의 시선을 피했다. 시도폰이 베론의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뭐라도 말해보라는 듯 눈치를 주었지만, 베론도 머쓱한지 입만 벙긋거렸다.

“그… 은퇴하시고 나서 정 농사가 짓고 싶으시다면 저희가 도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결국, 하는 말이 저거였다. 개미 목소리만 한 베론의 말에 헤일로는 껄껄 웃다가, 농사짓는 건 포기했으니 노후를 제대로 책임져 달라고 말했다. 그렇게 헤일로의 농경 생활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으로만 남게 되었고, 헤일로의 안온한 노후를 위해 시도폰은 훈련에 매진하기로 했다. 지금도 다른 이들에 비하면 강하지만 헤일로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는 더 성장해야 했다.

땡그렁-소리와 함께 시도폰의 손에서 창이 떨어져 나갔다. 다행히 휘두르는 방향에 루카가 서 있진 않았지만, 멀리 떨어진 창을 헐레벌떡 주워오는 루카의 눈은 완벽한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미안, 다른 생각을 했나 봐. 가져다줘서 고마워.”

“집행자님, 주제넘은 의견일 수도 있지만 이제 쉬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내일 당장 전투에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니시니까….”

창을 쥐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걸 보니 잠시 쉬어줘야 할 것 같긴 했다. 시도폰은 고개를 끄덕이고 수건을 가져다 달라고 루카에게 부탁한 뒤 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루카는 이제 시도폰에게 바닥에 앉지 말라고 말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군말 없이 시도폰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오늘 훈련장을 쓰신다길래 미리 깨끗하게 닦아놨지. 그래, 그냥 이걸로 만족하자.’

몇 분 뒤, 시도폰이 일어나서 몸을 풀었다. 옆에서 같이 앉아있던 루카가 미적거리다가 일어나며 물었다.

“훈련을 더 하실 건가요? 저녁 일정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어요.”

“조금만, 조금만 할게. 그렇게 노려보지 마.”

“어휴, 제가 언제 노려봤다고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루카가 창을 든 시도폰에게서 멀어졌다. 나무 인형을 몇 개 더 가져오면 되냐고 물어본 루카는 시도폰이 ‘두 세트만 가져다줘, 살살 하려고.’라고 하는 말을 듣고 방을 나섰다.

‘다시 천천히 해보자. 루카 말 대로 시간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끼익-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벌써 들고 왔어? 빠르네.”

“미리 문 앞에 몇 개 쌓아뒀거든요. 아, 그리고 편지가 왔다고 하시는데요, 성녀님께서 보내신 거라고 하세요.”

기쁜 마음도 잠시, 시도폰은 자신이 지금 답장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손이든 몸이든 차게 식어버린 땀으로 젖어있었기에, 시도폰은 편지를 받아들지 않고 방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같았으면 바로 신나서 답장하시겠다고 하셨을 텐데, 오늘은 정말 훈련에 집중하고 싶으셨나 보네.’

남은 훈련도 다 끝낸 시도폰이, 깨끗이 씻고 저녁의 모든 일정까지 마무리했을 땐 이미 잘 시간이었다. 시도폰은 어깨를 주물렀다. 몸의 피로도 그렇지만 헤일로 때문에 가지고 있는 부담감이 정신을 알게 모르게 갉아먹었는지 평소보다 유난히 피곤했다.

‘이런 정신머리로는 답장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아.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쓰자.’

하지만 다음날은 아침부터 회의가 있어서 또 답장은 미뤄졌다. 회의가 끝나 서랍을 막 열려던 시도폰은 훈련장으로 오라는 헤일로의 부탁으로 방을 나섰다. 그런 식으로 답장이 밀리고 밀려, 나흘쯤 밀렸을 때였다.

“루카, 나 대신 편지 좀 써줄래?”

“제가요? 성녀님께요?”

“농담이야,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카리타스도 사람이야, 사람.”

책상에 한쪽 볼을 뭉갠 채 웅얼거리는 시도폰에게, 루카는 따뜻한 음료를 놓아주며 성녀님도 답장을 기다리고 계실 거예요-라고 말했다.

“…정말 그럴까?”

“당연하죠.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보세요?”

“아니, 그냥 궁금해서. 이건 잘 마실게.”

폰이 일어나 컵 손잡이를 잡았다. 루카는 편지 쓰는 데 방해하지 않겠다며 시도폰의 방을 나갔고, 폰은 미적거리다가 편지지를 한 장 책상에 펼쳤다. 망설이던 것과 다르게 폰의 손은 빠르게 편지지를 채워 나갔다. 무슨 내용을 쓸지는 고민할 필요 없었다. 공사다망한 하루가 매일 이어졌으니 편지에 쓸 소재는 넘치고도 남았다. 습관적으로 편지를 가득 채우긴 했지만, 시도폰은 빼곡하게 검은 글씨로 뒤덮인 종이를 앞에 두고 잠깐 생각에 잠겼다.

‘요즘도 바쁜 거겠지? 오랜만에 받는 편지에도 별로 특이한 이야깃거리는 없었어. 나한테 편지 보내는 게 즐겁지 않은 거면 어떡하지?’

마지막 생각 때문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시도폰은 힘없이 다시 의자에 앉았다. 만약 카리타스가 의무감으로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거라면, 자신은 카리타스에게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나? 고민하던 시도폰은 한숨을 쉬었다.

‘카리타스가 억지로 쓰고 있는 걸 알게 된다고 해도…, 차마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진 못할 것 같아.’

넉넉한 행간의, 한 장 분량의 편지라도 받는 게 좋았다. 계속 일상과 생각을 공유하고, 그렇게 서로를 계속 의식하고 싶었다. 편지지를 만지작거리던 시도폰이 서랍을 열어 편지지를 한 장 더 꺼냈다. 새로운 편지지에 질문을 한 문장 쓰고, 그걸 읽고, 그 위에 덧줄을 긋고, 또 그걸 반복했다. 수많은 문장이 지워졌고 마침내 까맣게 칠해진 것처럼 보이는 편지지가 완성되었다.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버려야겠네.”

시도폰은 벽난로에 그것을 던져넣고 다시 질문을 골랐다. 물어보고 싶은 건 명확했다.

‘너는 나랑 계속 연락하고 싶어?’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뒤엔 부차적인 질문들이 자꾸 따라붙어서 시도폰은 계속 줄을 그었었다.

‘나만 말하는 것 같아, 네 이야기는 왜 해주질 않아?’

‘나한테 물어보는 것도 솔직히 그게 정말 궁금한 건지 모르겠어. 그냥 편지를 채워야 하겠는데 할 말이 없어서 질문으로 때우는 거야?’

‘네 위치를 알고 있으니 바쁜 건 이해해 그래도 편지 쓰는 데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잖아.’

“엄청 구질구질하네, 나 왜 이래?”

불타고 있는 편지지를 세 장째 바라보던 시도폰은 아까 완성한 편지지만 봉투에 넣었다. 어떻게 해도 말이 곱게 나올 것 같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으니까.

‘올해는 남부에 내려가게 해달라고 말해볼까? 만나서 물어보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

물론 지금 일정상으로는 남부에 갈 일이 없었지만, 시도폰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며 루카를 불러서 편지를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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