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노치카]이치카의 다이어리

칠드런 레코드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하아... 하아..."

갑자기 뛰는 탓에 거칠어진 숨을 정돈하며 자판기에 동전 몇 개를 투하한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입으로 숨을 쉬어버렸는지 목이 아플 정도로 마르다. 여름의 더운 공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전력 질주를 했으니 당연한 거겠지. 수분 보충엔 최고인 포카리스웨트 하나랑 키사라기씨가 뭘 좋아할지 몰라 코카콜라 하나를 뽑아 들었다. 마찬가지로 전력 질주한 사람에게 탄산이 웬 말이냐 싶지만, 왠지 코카콜라랑 키사라기씨랑 닮았단 생각이 들어서 뽑고 말았다. 빨간 저지가 그런 생각을 한 가장 큰 원인이겠지. 바꾸자고 하면 새로 뽑아드리는 수밖에.

자판기를 뒤로하고 키사라기씨가 앉아 있는 의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눈앞에서 긴급 이송 침대가 덜컹덜컹 큰소리를 내며 빠르게 지나갔다. 저 침대 위의 소년, 괜찮은 걸까... 적어도 저기 앉아있는 키사라기씨는 괜찮지 않은 모양이다. 같이 전력 질주한 나도 지치긴 했어도 멀쩡히 걸어 다니는데 키사라기씨는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좀만 더 걸었다간 다리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될 것만 같다. 힘내라는 뜻으로 그와 닮은 코카콜라를 내민다.

"키사라기씨. 콜라 드실래요?"

"오오! 콜라!!! 고마워!!! 너 좋은 녀석이구나!!!"

"네?! 아, 네..."

누가 모모 오빠 아니랄까 봐 리액션이 대단하다. 탄산이라 걱정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맘에 든 모양이다. 다행이네. 허겁지겁 캔을 따고 콜라를 마시는 키사라기씨의 옆에 앉아 나도 포카리스웨트를 한 모금 들이켰다. 너무 말라 쩍쩍 갈라지던 목에 수분이 가해지니 좀 살 것 같다. 키사라기씨도 콜라로 좀 살아난 것 같고.

자, 그럼 상황 정리 좀 하자. 제대로 앞뒤 판단도 못 하고 그저 일이 흘러가는 대로 뛰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럼 우선 유원지 때부터 차근차근 되짚어보자. 일단 우리는 유원지에서 해 질 녘까지 놀다가 다들 즐거운 마음으로 유원지를 빠져나왔다. 집에 가던 길에 우연히 일사병이나 열사병으로 쓰러진 듯한 소년과 그 보호자로 보이는 알비노 청년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때, 에네가 갑자기 '지금의 사람을 쫓아 가줄래요?!'라고 외쳐서 키사라기 남매와 모모한테 붙어있어야 하는 키도까지 출격하게 되었다. 거기다 구급차가 길을 꺾어 들어가서 놓칠뻔하자, 내가 반사적으로 능력을 사용해서 위치를 알려주었더니 「구급차의 위치 좀 계속 알려주세요!」라는 말을 들어버려 얼떨결에 나까지 동행하게 되었지... 그렇지만 내 능력은 어디까지나 구급차 위치를 알 수 있을 뿐이지, 인간이 차를 따라잡게 할 순 없어서 결국 놓치고 말았다.

뭐, 구급차를 계속 본 덕분에 내가 병원 이름을 외웠고, 그 병원까지 찾아오는 건 가능했지만. 겨우 도착한 병원에서 이 대소동의 원인인 에네는 「잠깐 저 사람과 단둘이 있게 해주세요」라며 알비노 청년과 함께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키사라기씨와 함께 전혀 모르는 소년의 진료실 앞에서 대기 중인 상황.

에네가 그 알비노인 청년과 아는 사이인 건 확실한 것 같은데... 구급차를 쫓을 때 목소리에 간절함이 서려 있었고, 알비노 청년을 보는 눈빛에는 애틋함, 그리움이 섞여 있었으니 틀림없다. 아는 사이라면 그 청년은에네를 만들던 곳에 소속된 사람일까. 난에네가 그곳이 싫어서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저 청년을 대하는 걸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에네는 대체 왜 키사라기씨한테 온 걸까. 남의 과거를 캐내는 취미 따윈 없지만 궁금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정말 영문을 모르겠네에... 하아..."

"영문을 모르는 건 이쪽이에요, 정말... 하아..."

"우오와아!!"

"아, 얘기 끝났어요?"

"응..."

어느새 다가온 알비노 청년은 여전히 멍한 눈을 한 채 내 옆에 앉았다. 덕분에 키사라기씨는 엄청나게 놀란 모양이다. 얼마나 놀랐으면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로 벌떡 뛰어올랐다.

"어, 언제부터 있던 거야. 너!"

"방금부터 있었는데요."

"미안해요... 나..."

알비노 청년은 키사라기씨에게 혼났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약간 우울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느리고 둔한 어조고, 표정 역시 아까의 멍한 표정에서 초조함이 조금 덧붙여진 것밖에 변화가 없다. 감정 표현이 서툰 걸까? 아니, 그냥 둔한 것 같다. 알비노 청년은 뭔가 더 말하려고 입을 꼬물거리지만, 말이 느린 것이 답답했는지 키사라기씨가 말을 채간다.

"에? 아아, 아니, 네가 아니라 이 안에 있는 녀석 말이야."

"음? 뭔가요. 주인."

키사라기씨는 알비노 청년에게 휴대폰을 돌려받고는에네를 가리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 아까까지만 해도에네의 눈빛 속에 깃들어있던 애틋함과 그리움은 눈을 씻고 쳐다봐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두 사람은 아는 사이일 테고, 그럼 감동의 재회라도 하고 온 줄 알았는데. 감동의 재회는커녕 한바탕 말싸움하고 온 듯한 표정이다. 알비노 청년의 둔함을 보면 일방적으로 공격당했을 듯하지만.

"아니, 뭔가요 라니. 결국, 이 사람 누구냐고. 너랑 아는 사이인 거 아냐?"

나도 궁금해하던 것을 키사라기씨가 묻자 왜인지에네는 부웅하고 진동기능을 떨면서 날카롭게 키사라기씨를 노려보았다. 그에 키사라기씨는 겁을 먹었지만 반대로 나는 오히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에네를 알게 된 지 이제 겨우 이틀이지만 지금까지 밝게 웃거나 제멋대로인 모습밖에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눈빛은 그것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것이라서 마치에네가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대체 무엇이 에네를 이렇게 만든 것일까. 에네는 이번엔 볼을 가득 부풀린 채 화난 어조로 말을 툭툭 뱉어냈다.

"사람을 착각했어요. 이런 녀석 몰라요. 달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이제 빨리 돌아가죠."

"너, 너 말이야... 뭐, 사람을 착각했다면 어쩔 수 없지만─"

"잠깐만요, 키사라기씨. 에네, 정말 그냥 돌아가도 괜찮아? 좀 더 얘기해보지 않아도 돼? 착각한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에네가 착각했을 리가 없다. 먼저 이렇게 특징이 두드러지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헷갈릴 리가 없다. 무엇보다 애틋함과 그리움이 담긴 눈빛을 할 정도로 소중한 사람을 잘못 볼 일도 없지 않은가. 동시에 그와 반대되게 나타난 지금의 반응. 단지 착각한 것뿐이라면 그저 아쉬워할 뿐, 이렇게까지 날카로운 반응은 나오지 않을 거다. 이 사람은에네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다. 하지만...

"...괜찮아요. 그만 가고 싶어요."

내 질문에 에네는 단지 슬픈 눈빛을 한 채 어렵사리 괜찮다고 대답했다.

"저기... 미안해요. 그 아이가 화내고 있는 거, 아마 내 탓이라고 생각해."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아이 방금' 계속 만나고 싶었어'라든가, '죽었다고 생각했어'라든가, 뭔가 울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줬는데. 나, 전혀 의미를 알 수 없어서 그... 뭔가 그 아이를 착각하게 해버렸다고 생각해."

청년의 입을 열고 말을 끝낼 때까지 시간은 체감시간으로 1~2분 정도. 원래부터 말하는 속도가 느린 편인 듯한데 거기다 기가 죽어서 그런지 청년의 말투는 0.5배속은 한 것처럼 느릿느릿했다. 그래도 말의 의미는 확실히 전달받았다.

착각하게 해버렸다? 아니, 그건 아니다. 에네가 착각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고... 설마에네를 잊어버린 건가? 추측이 거기까지 도달하고, 에네를 바라보자 에네는 이미지 컬러였던 파랑을 벗어던지고 귀 끝까지 빨개진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야, 너, 어째─"

"우와아아아! 우와아아아!!! 이제!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 걸지 마!!!"

순식간에 주변이 얼어붙는다. 청년은 어깨를 움찔거렸고, 에네와 오래 지낸 키사라기씨도 상당히 놀랐는지 경직되었다. 나 역시 아무 말도 못한 채 휴대폰 안에서 머리를 부여잡고 정신없이 움직이는 에네를 바라볼 뿐이다. 이 정도의 과격한 반응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에네는 문득 이 분위기를 눈치챈 듯 행동을 멈추더니, 식은땀이 매달린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지었다.

"잊어주세요? 주인."

이거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 생각을 하며 대답을 받은 키사라기씨 쪽으로 시선을 돌렸지만 키사라기씨는 입조차 열지 않는다. 다시 한번 분위기가 얼어붙으며 침묵이 내려앉자 에네는 더욱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다. 이거 어째 불안하다. 뭐라도 빨리 말하라는 뜻을 담아 키사라기씨를 지그시 바라본다.

"고장...?"

한다는 말이 왜 하필이면 고장입니까! 그리고 진짜 고장 난 기계 대하듯이 탕탕 두들기지 말아요!

"저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거 아니에요!"

고장이란 단어가 상당히 기분 나빴는지 에네는 부웅 진동을 한 번 내고선 어이없다며 아우성을 쳤다. 이건 솔직히 나도 어이없다. 가뜩이나 분위기도 안 좋은데 왜 고장이라 말한 건지... 에네는 그렇게 화를 내다가 갑자기 핫 소리를 내며 뭔가를 깨닫고는 표정을 고쳐잡고 얼버무리려 입을 열었다.

"따, 딱히 가끔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도 괜찮잖아요! 조금 옛날 아는 사람과 닮았던 거니까, 여러 가지... 그, 이상한 걸 말해버렸다고 할까, 기억났다고 해야 할까, 기대... 해버렸다고나 할까..."

"아니, 전혀 의미 모르겠는데. 요점은 그건가? 같은 종족의 동료를 닮았으니까 텐션이 높아졌다는 느낌이야?"

"아..."

나와 에네의 입에서 동시에 김빠진 소리가 새어 나온다. 아마 우리 둘 표정도 똑같겠지. 이런 건 보지 않아도 안다. 반면, 그런 걸 전혀 알 리가 없는 키사라기씨는 에네와 나를 번갈아서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평생 모르겠지. 분명 그럴 거다.

"아~ 정말 주인이 왜 인기 없는 건지 잘 알았습니다. 아마 평생 그대로겠죠. 좋다고 생각해요"

"응. 저건 아마 평생 못 고칠 거야. 할 말이 없네."

"에!? 나 그렇게 터무니없는 말 했었나!? 그것보다 나 왜 인기 없는 거야! 알려달라고!"

"아아... 가엾어라. 주인, 저희한테 너무 말 걸지 말아주실래요?"

"아니, 지금 가엾다고 말했잖아, 에네! 그 말이 진심이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어!"

"시끄러워요! 아무튼 나에게도 주인에게 말 못 할 만한 것 정도는─"

그 순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찰실 안쪽에서 철컹하고 큰 소리가 났다. 곧이어 달그락거리는, 아마 금속으로 된 수술 도구가 떨어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저쪽은 분명 알비노 청년이 데려온 소년이 있는 곳. 단순히 정신을 차렸다고 하기에는 소리가 과할 정도로 사납고 시끄럽다. 불길한 느낌이 엄습해온다.

"대체 무슨 일이?"

"읏!? 주인! 뭔가 위험해 보여요!"

"알고 있어!"

서둘러 복도를 넘어가 벌컥 진찰실 문을 열어젖히니, 체온계 등의 의료기구가 흩뿌려진 바닥에 소년이 쓰러져 있었다. 헝클어진 갈색 머리에 하얀 조끼, 체구로 보면 열 한 살 정도 될까. 꽤 준수하게 생긴 외모였지만 지금은 고통에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어떻게든 일어나려 애를 쓰고 있었다. 사고나 병의 후유증인 것인지 무릎을 세워도 잘 일어서지 못한다.

"어, 어이, 너 뭐 하는 거야!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자라니까..."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걱정되는 마음에 뻗어본 손은 거칠게 뿌리쳐진다. 나이는 어려도 힘에 감정을 실은 것인지 뿌리쳐진 손이 제법 아파져 온다. 하지만 아픔 같은 건 소년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자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소년의 얼굴은 대량의 눈물로 흠뻑 젖어있었다. 흐려진 눈동자 속에 맺힌 증오감은 깊고도 짙어서 어두운 칠흑의 색을 띠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왠지 예전의 내 눈동자와 닮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 뭐야... 방해... 하지 마!"

겨우 일어난 소년은 휘청거리며, 그래도 똑바르게 진찰실 밖으로 향했다.

"아니, 잠깐 기다리라니까! 마음대로 나가면 위험해!"

"아직 몸이 다 낫지도 않았잖아. 일단 진정하고..."

"히요리... 히요리가 있는 곳에 가지 않으면..."

마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제지하는 우리들을 무시한 채 소년은 잠꼬대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기어코 방을 나갔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어벙하게 있던 것도 잠시, 황급히 소년의 뒤를 쫓아가자 이번에는 알비노 청년과 마주한 소년이 보였다. 알비노 청년을 차분히 노려보는 눈동자의 색깔이 아까보다 더 짙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없었으면 이런 일에는..."

원망스러운 것인지, 슬픈 것인지. 원통한 것인지, 괴로운 것인지. 소년은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 순간에도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어두웠다. 알비노 청년이 무언가를 한 것일까. 부정이나 긍정조차 하지 못한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알비노 청년을 보면 무언가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뭐,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는 거지만. 불현듯 떠올린 기억에 팔을 꾹 잡았다.

"이제 됐어. 내가 갈 거야... 가지 않으면..."

"잠, 기다려!"

날카롭게 쏘아 붙인 후 소년이 뛰는 순간 반사적으로 그 뒤를 쫓는다. 그렇다 해도 유원지에서 나온 후 전력 질주까지 한 상태라 체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어 속도는 빠르지 않다. 게다가 밤이 되어 찾아온 어둠은 내 시야에서 소년을 자꾸 몰아내고 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소년 역시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 아까까지만 해도 일어서는 것조차 버거워하던 애다. 그렇다면 얼마 못 가 쓰러지고 말겠지. 그랬다간 소년이 다치고 말겠지만, 그것보단 저 몸 상태로 병원 밖을 나가는 것이 더 안 좋다. 병원 건물에서는 비록 벗어나고 말았지만 조금씩 거리는 좁아지고 있다. 이제 조금만 더... 소년을 붙잡을 명목으로 손을 앞으로 뻗는다.

"앗!"

왼발 끝에 딱딱한 느낌이 들더니 한순간 시야가 크게 기울어지며 몸이 아래로 빠르게 떨어진다. 급히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이미 늦었는지 콰당 이라는 좀 부끄러운 소리를 내며 차가운 땅바닥과 마주한다. 소년을 잡으려던 손이 바닥에 쓸려 얼얼하게 아파져 왔다. 지면과 박치기를 한 무릎도 마찬가지다. 유원지에 전력 질주까지 한 후 다시 전력 질주를 한 대가가 이거인가. 그래도 어제 맞은 총보다는 덜 아프다. 대신 상처가 벌어졌는지 팔도 약간 아파져 오지만. 그 사이 소년은 정신없이 달려 기껏 가까워졌던 거리를 처음보다 더 벌리고야 말았다. 이대로라면 놓치고 만다!

"기다, 읏!"

급하게 일어섰지만, 발목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통증에 다시 주저앉고 만다. 손으로 발목을 어루만지니 살짝 부어오른 게 아무래도 삔 것 같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더 부을 것 같다. 그야 어쩔 수 없다. 유원지에서 논 후에 전력 질주, 조금 쉰다 싶었더니 또 전력 질주를 했으니.... 부끄러운 얘기지만 내 체력은 결코 좋은 편이 아니다. 부은 발목에 손을 갖다 대며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이런 급할 때에 이게 대체 무슨 시츄에이션일까. 일어서지도 못한 채 멍하니 어둠 속으로 사라져만 가는 소년을 바라본다. 저 속도대로라면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저 상태로 그냥 나가버리면... 아니, 그냥 나가버려도...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애당초 저 소년이랑 나는 아무 관계도 아니다. 얼굴을 본 것도 오늘이 처음이고, 이름이나 나이, 그 무엇도 모른다. 그런 관계이면서 내가 바닥에 넘어지고, 다치면서까지 저 소년을 도와야 할 이유가 있나? 게다가 스스로 도움받는 것을 거절하고 있는데? 어차피 이런 늦은 시간이라면 지나가던 순경한테 인도받아 집이나 병원으로 다시 돌아갈 것이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저 소년을 도울 사람은 있을 거다. 굳이 내가 도울 필요는 없다. 내가 도와줄 이유 따윈─

「당신들 뭐야... 방해... 하지 마!」

「히요리... 히요리가 있는 곳에 가지 않으면...」

「당신 때문이야... 당신만 없었으면 이런 일에는...」

「이제 됐어. 내가 갈 거야... 가지 않으면...」

─증오감에 짙은 암흑색을 띠고 있던 소년의 흐린 두 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대체 무슨 생각하는 거야, 나는!"

입술을 깨물고 오른쪽 무릎을 세워 다시 일어난다. 입에서 비릿한 맛이 감돌았지만 지금 그딴 거 신경 쓰이지도 않다. 그 눈동자는 내가 저 소년만 할 때... 그래, 이 능력을 얻은 직후의 눈빛과 똑같다. 상처받고, 괴롭고, 증오스럽고, 원망스럽고, 슬프고 또 슬픈 바로 그때의 그 눈이다. 그런데 나는... 나란 녀석은 대체 무슨 이기적인 생각이나 하고 앉아있는 건지. 자신을 향한 분노에 강하게 땅을 차고 일어나 뒤늦게 절뚝거리며 소년의 뒤를 따라가지만 이미 격차는 크게 벌어져 있었다. 이런 스피드로는 놓치고 만다.

내가 소년을 잡을 수 없다. 그렇다면... 눈에 힘을 집중시키자 어둠 너머, 병원 정문 근처에 익숙한 두 얼굴이 여유롭게 서 있다. 키도와 모모.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빠른 스피드로 모모에게 전화를 건다.

“아~ 여보세요, 이치카쨩? 에네쨩의 용무는 다 끝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지금 그쪽으로 남자애 한 명이 달려가고 있어! 걔 좀 막아줘!"

“에? 남자애라니? 아... 그러고 보니 누가 달려오고 있는 거 같기도... 으음, 어두워서 안 보여!”

"분명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으니까 막아줘! 부탁이야! 제발..."

“으응~? 잘 모르겠지만, 알겠어! 남자애가 보이면 꼭 막을게!”

"고마워. 너만 믿을게, 모모!"

“응!”

자신만만한 모모의 목소리를 듣고 천천히 발걸음을 멈췄다. 숨은 가쁘고, 발목은 아프다. 오른쪽 다리에 체중을 싣고 서서 숨을 몰아쉬었다. 일단 병원 정문에 있는 모모에게 부탁해놨으니 안심이다. 이 방향에 빠져나갈 문이라곤 저거 하나밖에 없고, 키도도 같이 있으니 놓칠 위험은 적겠지. 몰아쉬는 호흡 중에도 안도의 한숨이 틈새를 비집고 빠져나온다. 이걸로 일단은 안심이다.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천천히 걸어가 키도랑 모모와 만난 다음 소년을 설득하도록 하자. 그러고 보니 키사라기씨랑 알비노 청년은 대체 뭐 하고 있길래 안 오는─

"으아아아아아!!!!!!"

"응?"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을 눈치챈 순간 눈앞에 거대한 물체 하나가 거대한 쿵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너무 놀라 뒤로 자빠지는 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이젠 엉덩이까지 얼얼하게 아파져 오지만 아픔보다 놀란 것이 더 심했기에 일어날 생각도 못 하고 눈만 껌벅였다. 내 눈앞에 떨어진 물체가 사람이라는 걸 알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반대로 그 사람이 바로 키사라기씨와 알비노 청년이라는 것은 빠르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여기로 떨어져 내려왔는지, 그 큰 소리를 내고도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키, 키사라기씨?"

"우... 우오에에에..."

"키, 키사라기씨!!!"

아침에 봤던 그것을 다시 한번 꺼내는 키사라기씨에게서 황급히 물러선다. 아까 내가 사주었던 콜라도 함께 빠져나온다. 으, 더러워...

"미안...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해서... 놀랐지..."

"그 눈... 너도 뭔가 있는 거냐. 뭐냐고 정말..."

"어? 너는 아까... 아, 괜찮아? 나 때문에 다친 거야?"

"아, 아니... 그냥 저 혼자 넘어진 것 뿐이에요."

"우움... 아프겠다. 일으켜 줄게."

알비노 청년이 내게 내민 손을 사양하지 않고 순순히 잡고 일어선다. 왼 발목이 여전히 시큰거려 작게 신음을 흘리자 알비노 청년이 나를 부축해 주었다. 그 순간 한쪽에서 진동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잘못 들은 것일까?

"잠깐! 그럴 때가 아니라구요? 저 아이 이제 밖으로 나가버린다구요!"

"히비야... 이대로라면 또 놓쳐버려!"

"아, 그거라면 내가 방금 전화로..."

알비노 청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나와 키사라기씨를 동시에 들어 올렸다?

"어?!"

자, 잠깐만?! 겉으로 보기엔 곱상한데 힘이 대체 얼마나 센 거야?! 아니, 힘이 세다고 해도 초등학생도 아닌 고등학생 두 명을 동시에 드는 게 가능하기는 한 거냐고!

"으아아아아!!! 무리무리무리!!! 이제 무리다! 진짜 좀 봐줘!"

"미, 미안. 안 할게..."

키사라기씨의 발악에 알비노 청년은 키사라기씨를 내려놓긴 했지만 난 여전히 들고 있었다. 오히려 한 사람이 줄어들자 안 그래도 자세가 불편했던 것인지 공주님 안기 자세로 바꾸었다. 응?

"자, 잠깐! 그러니까 전화를─"

급하게 외친 이 말은 허무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져버렸다. 아니, 내가 말을 두고 가버린 건가... 분명 나라는 사람 한 명을 들고 있음에도 알비노 청년은 엄청난 속도로 질주했다.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엄청난 속도라 칭하긴 했지만, 그 속도는 이미 오래전에 인간의 수준을 벗어난 수준이었다. 아마 비교하려면 제트코스터 정도는 되어야 할 거다. 적어도 체감 속도로는 그랬다. 아니, 실제로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올려다본 분홍색 눈은 반짝하고 빛나는 듯했다. 아까 키사라기씨의 눈을 운운하며 뭔가 있는 거냐는 말을 떠올렸을 때 알비노 청년이 멈추어 섰다.

"꺄아아아!"

"아, 미안해. 놀랐지?"

"괘, 괜찮..."

벌렁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느리게 대답한다. 엄청난 속도의 반동으로 하마터면 미사일처럼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지만 다행히도 알비노 청년이 나를 꽉 잡아주었기 때문에 날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격렬한 헤드뱅잉을 하고 말았지만... 지금 목이 굉장히 아프다. 목마저 삔 것은 아니겠지... 어제는 총알에 스치고, 아까는 발목을 삔 데다가 찰과상의 연속, 지금은 목이 남아나질 않는 다라.... 불행의 연속이다. 설마 불행이 모모에서 키사라기씨에게로, 그리고 이번엔 나에게 옮겨온 것은 아니겠지? 설마 싶지만, 만약 그런 거라면 빨리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주기를 바란다.

"당신 뭐야... 왜 따라온 건데!"

"히비야..."

"비켜! 지금 당장 히요리한테 가지 않으면..."

"혼자선 위험해... 같이 가."

알비노 청년의 느릿한 말에 소년은 다시 한번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눈물에 젖어도 눈은 여전히 분노와 증오를 드러내고 있었다.

"위험해? 지금 누구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됐는데! 됐으니까 비켜!"

소년은 그렇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는 알비노 청년을 밀치고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뒷모습에 알비노 청년을 올려다보니 약간 당혹스러움이 감도는 멍한 눈으로 소년의 등만 볼 뿐이었다.

"뭐해요? 안 쫓아가도 돼요?"

"히비야... 화내고 있어... 어, 어쩌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많이 격앙된 상태라서 그런 거예요. 일단 진정시켜야... 당신한테는 화만 낼 것 같으니까 제가 한번 얘기해볼게요. 괜찮죠?"

"응..."

내 말에 당혹스러움을 지운 알비노 청년이 다시 뛰어가려다가 멈칫하고는 어딘가에 시선을 빼앗긴 것처럼 눈을 한곳에 응시한다. 그가 보고 있는 곳에는 달리고 있던 소년이 어딘가에 부딪힌 듯 비틀거리고 있었다. 그다음 순간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모모가 나타나 소년을 꽉 붙잡았다. 소년은 난폭하게 발버둥 치지만 내 부탁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소년이 걱정된 건지 모모가 놓지 않고 힘껏 눌러버리자 어찌할 줄을 몰라 한다.. 그래도 어... 모모 품이 푹신할 테니 다치진 않았겠다. 덕분에 놓치지도 않았고.

"에? 저 애 누구?"

"걱정 마세요. 제 친구니까."

문득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된 모모를 자연스럽게 친구라 칭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러니저러니 하는 사이 모모를 꽤 맘에 들어 한 모양이다. 뭐, 괜찮지만. 내 말에 알비노 청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곤 소년과 모모를 향해 걸어갔다. 소년이 멈추어서 그런지 속도는 아까와 비교도 안 되게 안정적이다. 어쩌면 다친 나를 신경 써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치카쨩! 에? 그 사람은 누구... 앗, 아팟! 좀 날뛰지 말라니까!"

"미안해, 모모. 저기 일단 내려주세요."

내 말에 알비노 청년은 조심스레 나를 내려주었다. 아직도 왼 발목이 시큰거리긴 하지만 오른쪽에 체중을 실으면 버티고 서있을 만 하다.

"저기 사정은 모르겠지만 일단 진정해. 몸 상태도 안 좋은데 그렇게 날뛰면 더 안 좋아지잖아. 병원 측에서도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큰일이고..."

"에에!? 이 아이 환자야!?"

모모가 놀라면서 팔의 힘도 풀려버렸는지 소년이 푸핫 숨을 들이마시며 쏙 빠져나온다. 숨을 못 쉰 탓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소년은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진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모모를 노려봤다. 다만, 알비노 청년을 봤을 때와 같은 증오의 눈빛은 아니었다.

"뭐 하는 거야, 살찐 아줌마! 갑자기 나와서 훼방 놓지 마!"

"어~이! 헉헉... 다행히 걔 잡았구나..."

"주인, 너무 늦었다고요."

뒤늦게 찾아온 자신의 오빠를 보지도 못하고 모모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소년이 한 말의 의미를 뒤늦게 이해했는지 소년과 똑같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하, 하아!? 사, 살찐 아, 아줌... 뭘 말하는 거야, 너!?"

"그대로의 의미야, 뚱뚱보 아줌마! 서두르고 있다고 이쪽은..."

소년은 아까처럼 또 뛰어가려 하지만 그전에 화난 모모에게 후드를 붙잡혀 다시 이쪽으로 되돌아왔다. 그에 소년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것보단 화가 나 빨간 경고등이 된 모모의 얼굴이 훨씬 더 위협적으로 보인다.

"너, 너 말이야... 환자잖아!? 도망가다니 안 되는 게 당연하잖아! 그, 그리고 사, 사, 살쪘다니!"

"모모, 일단 진정해. 어린 애가 한 말이야."

"응? 뭐야. 얘가 모모한테 뭔가 말한 거야?"

"네. 뭐... 꽤 상처받을 말을 했죠."

"아~ 무슨 말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아이돌한테 살쪘다는 말은 절대 금기. 그것을 눈치챈 에네는 마치 탐정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키사라기씨는 여전히 이해 불가라는 표정을 짓고 있지만... 이것도 이해 못 하는 건가. 중증인데, 이거.

"아, 진짜..! 방해하지 말라니까! 그리고 나는 환자도 아니고 아무 데도 아프지 않아! 아줌마야말로, 그 젖소 같은 체형 의사한테 진료받는 게 어때!? 절대 병이야, 그거"

저게 병이라면 억지로 걸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무섭네. 어쨌든 소년이 모모의 가슴 근처를 가리키며 쏘아붙이자 '푸풋... 아, 실례'라는 에네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모모에게서는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사, 사람이 걱정해주는데! 이이!"

모모는 머리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살짝 울먹거리며 소년에게 돌진하려다가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후드가 붙잡혀 멈추고야 말았다. 분명히 키도겠지. 나이스, 키도. 고등학생이 초등학생한테 돌진한다는 건 결코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성의 끈이 완전히 끊긴 모모는 진정할 생각은 미처 못하고 키도에게 붙잡힌 채 발버둥을 쳤다. 아까 소년이 한 말에 이어 마치 미친 소처럼 날뛰는 모모의 모습은 이런 말 하기 미안하지만 정말로 한 마리의 소를 연상시켰다. 그것은 비단 나만의 일은 아니었는지 옆에서 키사라기씨가 풋하고 웃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모모의 타깃은 소년에게서 키사라기씨한테로 이동. 덕분에 모모가 쏘아붙이고, 키사라기씨가 사과하는 작은 헤프닝이 일어났다.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나는 두 사람이 알아서 헤프닝을 마무리하길 바라며 소년에게 다가갔다. 알비노 청년으로 추정되는 하나의 시선이 나에게 꽂히는 게 느껴졌다.

"저기 히비야라고 했지? 일단 진정하고, 무슨 일 때문에 그렇게 서두르는지 알려줄래?"

내가 상냥한 미소를 짓고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히비야는 다행히 도망가지 않았지만, 적의가 담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여자아이가 한 명, 죽었을지도 몰라. 내 소중한 사람이야. 그런데 나 혼자만 살았어. 그러니까 구하러 가지 않으면 안 돼."

히비야가 담담히 중얼거린 말에 일동 숨이 들이마신다. 히비야 때문에 날뛰던 모모조차도 발버둥을 멈추고 놀란 듯이 입을 반쯤 벌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의 내용이 히비야의 담담한 어조와 다르게 너무나 심각한 것이라... 자세한 사정까지는 모르더라도 히비야의 말투와 분위기에 사람 한 명의 목숨이 걸린 것쯤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도.

그렇지만 와닿지는 않는다. 히비야를 처음 봤을 때의 유원지 앞쪽에는 히비야말고는 아무도 쓰러져있지 않았다. 거기다 쓰러진 히비야에게도 겉으로 보이는 외상 같은 건 없어서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일사병이나 열사병 때문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이 한 명 죽었을지도 모른다니?

"죽었을지도 모른다니... 대체..."

"자, 잠깐... 뭔가 사고에 같이 휩쓸렸다는 거야? 그거라면 경찰이나 의사한테 먼저 말하는 편이 좋잖아. 너 혼자서 어딜 간다는 거야."

"사람에게 말해봤자 어차피 믿어주지도 않아. 맞다, 뭣하면 그 녀석에게 듣는 게 좋아. 계속 가만히 보고 있었으니까."

히비야가 다시금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알비노 청년을 가리키자 청년은 쭈뼛거리며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반응을 보니 히비야의 말이 맞긴 맞는 모양이다.

"저기, 당신 쭉 보고 있었잖아? 아무것도 못 한다면 적어도 가르쳐 주지 그래."

"트, 틀려! 나도 구하려고 했었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어!"

알비노 청년이 그렇게 말하자 히비야 으득 이를 갈고는 다시 칠흑의 눈동자로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 시선을 차마 받을 수 없었는지 알비노 청년은 주눅이 들어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히비야는 다시 뭐라 쏘아붙이려 했는지 입을 열었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이제 됐어. 당신이 아무것도 못 한다면 나 혼자서 갈 거야. 방해하지, 마..."

"히비야!"

다시 달리려는 히비야의 어깨를 붙잡은 순간, 히비야의 몸이 크게 기울여졌다. 내가 잡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디에 걸렸기 때문도 아니다. 어떠한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거다. 반사적으로 히비야를 안아 든 나는 다시 한번 숨을 들이마실 수밖에 없었다.

붉은 눈.

아까까지만 해도 증오에 의해 칠흑빛이었던 소년의 두 눈이 피를 흘린 듯한 붉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건 나나 다른 메카쿠시단이 능력을 사용할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죽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아이.

혼자만 살아남았다고 하는 히비야.

사람에게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거란 말.

붉게 변하는 두 눈.

그리고 나의 경험.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에 심장이 한순간 크게 뛰어오르더니 이내 덜컹하고 내려앉는다. 분명 「그거」다.

"나이스 캐치네... 근데 어떻게 된 일이야, 이거? 분명히 병세 악화했어, 이 녀석. 확실히 사정은 위험하지만, 일단 의사랑 경찰에게 의뢰하는 편이 좋다니까."

"키사라기씨... 이 애... 병원이나 경찰에 데려가도 소용없을 거예요."

"시라키의 말이 맞아. 아마 의사도, 경찰도 도움이 안 되겠지. 아마 이 녀석의 현상에 관해선 가장 협력할 수 있는 건 우리다."

요동치는 가슴에 입술에 깨물자 비릿한 맛이 새어 나왔다. 키도도 씁쓸한 표정으로 말없이 히비야를 내려다본다. 이런 반응들에 모모와 키사라기씨는 잠시 멍한 반응을 보이더니 히비야의 두 눈을 보고는 깜짝 놀란다.

"어이, 이건..."

"아아,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이거 상당히 귀찮아."

말없이 히비야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히비야의 체온은 살아있다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뜨거웠다.

"어, 어떻게 할 거야, 이거... 이 녀석 괜찮은 거야!?"

"...저도 능력을 얻은 직후에는 정신을 잃었어요. 그렇지만 건강에는 아무 이상 없었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다만...."

"문제는 현재 이 녀석이 어떤 능력인지조차 모른다는 거겠지. 이대로 돌려보내는 건 위험하다. 아지트에 데리고 가자. 시라키, 그 애 들고 갈 수 있겠어?"

"응, 이라고 대답하고 싶지만 보다시피 이런 상태라서... 무리일 것 같아."

"알겠다. 그럼 이 애는 내가 들지. 키사라기. 카노에게 한 명분의 침대를 비워달라고 전해줘. 아아, 그거랑 마리가 겁내면 귀찮으니까 세토랑 같이 방에서 대기하라고 부탁해줘."

내 상태를 훑어본 키도는 이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선 모모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에 모모는 군인처럼 씩씩하게 경례하는 포즈를 지어 보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하하... 건실하네, 넌"

키도는 잠시 멍하게 있다가 드물게 웃었다. 나도 그 옆에서 살포시 미소 짓는다. 요동치던 가슴이 어느 정도 풀어진다. 이 애는 그때의 나처럼 혼자가 아니다. 도와줄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나 역시...

키도는 내게서 히비야를 받아서 들어 한 손으론 허리를 지탱하고, 히비야의 머리가 어깨에 기대지도록 하는 형태로 안아 들었다. 그제야 나는 나에게 난 상처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무릎과 손바닥에 가벼운 찰과상 정도지만 흙이 잔뜩 묻어있어 꽤 쓰렸다. 왼 발목은 아까보다 더 부어올랐고... 코앞이 병원이긴 하지만 이런 작은 상처를 치료할 만한 데는 아니기에 아쉬운 대로 흙만 털어내었다.

"오, 맞다. 너, 이름이 뭐야?"

"나, 나? ...코노하, 예요. 아마도."

자신을 코노하라 밝힌 알비노 청년이 느린 어조로 애매한 자기소개를 하자 또 진동 소리가 들렸다. 슬쩍 키사라기씨의 핸드폰을 능력을 사용해서 보니 에네가 또 화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겉보기엔 안 그런데 히비야한테도 그렇고, 에네한테도 그렇고 이래저래 미움 많이 받고 있나 보다.

"그런가. 코노하, 아까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 너네에게 일어난 「뭔가」에 대해서도 우리가 협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이 녀석은 안정될 때까지 돌볼게. 너도 이야기를 듣는 것만이라도 좋아. 함께 오지 않을래?"

키도의 말에 코노하는 지금까지 중 가장 진지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사람을 이렇게 쉽게 믿다니 순진한 사람이다. 그렇다고 거짓말한 건 아니지만. 뭐, 그렇게 따지자면 요즘 같은 시대에 초면인 사람을 돕는 우리들도 사람 좋지만. 하지만 역시... 다른 일도 아니고 이런 일은 못 본 채 넘어갈 수 없다.

"그래, 좋아. 그럼 가자. ...그나저나 배고프네. 카노 녀석에게 저녁 식사라도 만들게 할까..."

"카노의 요리라... 믿어도 돼?"

"그럭저럭 먹을 만 해. 어이, 키사라기. 카노에게 연락했나?"

"아뇨, 그게 카노씨 전혀 연락 안 돼서 지금 세토씨에게 전화 거는... 아! 여보세요, 모모입니다!"

방금 막 세토가 전화를 받았는지 모모는 허리를 쭉 펴고 씩씩하게 말했다. 동갑 아니면 한두 살 연상인데 너무 예의차리네. 나는 반말하는데 말이야.

"죄송해요, 조금 있죠. 집에 환자 한 명을 옮기게 되어서, 카노씨에게 침대의 준비를 시키려고... 에? 없어요? 어, 그러니까... 네, 알겠습니다! 아, 그거랑 밥 준비랑... 끝나면마리쨩이랑 같이 방에서 대기하라는 것 같아요! 그럼!"

뒤로 갈수록 점점 횡설수설한 전달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뜻은 제대로 전달이 된 것인지 모모는 뭔가를 해냈다는 표정으로 콧김을 흥하고 뱉었다.

"미안해, 키사라기. 그래서, 카노는 어딘가 가 있는 건가?"

"아, 네. 뭔가 오늘은 돌아오지 않는다며 어딘가로 가버린 듯해요"

"하아... 그 녀석은 정말 중요한 때에 쓸모가 없네..."

"뭐, 일단은 아지트로 돌아가는 데에만 집중하자. 어둡기도 하고, 이 근처 길이라면 알고 있으니 내가 앞장서도록 할게. 서두르자."

"시라키, 혹시 어둠도 투시하는 건가?"

"가능은 해. 다만 건물까지 투시해버리면 곤란하니까 적용 범위는 좁게 할 거지만."

"아니, 그걸로도 충분하다. 네 능력은 굉장히 활용할 폭이 넓네. 잘됐군. 그럼 잘 부탁한다."

"응. 맡겨줘."

그렇게 당당히 말했지만 삐어버린 왼 발목 때문에 몇 발짝도 못 가고 휘청거려버려서... 결국은 코노하씨에게 업힌 채 안내하게 되었다. 조금 쪽팔리지만, 나보다도 히비야가 먼저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저 애는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저 애가 얻게 된 능력은 대체 뭘까?

여러 의문이 떠올랐지만, 다시금 집어넣었다. 그것은 분명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아지트를 향해 깜깜한 어둠 속을 걸어갔다. 약간 붉은 기를 띠는 듯한 달이 그런 우리들을 비춰주었다.


"자, 다 됐어."

"고마워. 뭐랄까, 어제부터 신세만 지네."

"천만에. 단장으로써 단원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야."

키도는 어느 만화 주인공같이 멋진 미소를 짓고는 구급상자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구급상자를 여러 고서가 꽂혀있는 낡은 책장 위에 올려놓은 후 자연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안에는 우리가 먹은 7명분의 설거지가 산처럼 가득히 쌓여 키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 엄청난 설거지의 산의 7할 정도는 내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코노하씨의 짓이다. 코노하씨의 그 엄청난 힘은 밥심이었던 걸까...

그곳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아래로 향한다. 키도가 치료해준 발목에는 쿨팩을 댄 채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치료하는 김에 상처가 많이 나아진 팔에도 붕대를 새로 걸었다. 찰과상을 입은 손과 무릎은 심한 상처는 아니라서 그냥 약만 바르고 끝. 소독약 때문에 조금 따끔거리긴 하지만 넘어진 직후의 아픔보다는 덜하다.

"그렇게 다칠 정도로 필사적이었던 거야?"

"여동생 친구분은 이렇게 애를 써주셨는데 어디 사는 누구는 다리나 부들부들 떨고, 변태같이 하악하악거리고 있었다니... 반성 좀 하세요, 주인님!"

"어, 어쩔 수 없잖아!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이었고, 유원지 후에 전력 질주라니 지칠 수밖에 없잖아!"

"자자, 싸우지 마세요. 뭐... 저도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은 들긴 해요.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눈은 그냥 넘길 수 있는 만한 것이 아니라서..."

내 말에 짜기라도 한 듯이 두 사람 다 입을 다문다. 그에 나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상처를 매만진다. 한층 조용해진 실내에 똑딱똑딱 시계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쉼 없이 돌아가는 시곗바늘은 어느새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도 집에서 자기는 그른 것 같다. 하아. 작은 한숨이 새어 나온다.

"음냐... 이제 못 먹겠어요... 아, 역시 먹을래혀..."

그 와중에 설거지의 산의 원인 2할인 모모는 키사라기씨의 옆에서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눈치 없는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모모는 상당히 피곤했는지 배불리 밥을 먹고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뭐, 자는 것까지는 괜찮다. 유원지 뒤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으니 당연히 잘 수도 있지. 하지만 침을 흘리며 잠꼬대를 해대는 모습은 아이돌로서는 결코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만약에 모모의 광팬이 이것을 본다면 팬을 포기해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TV 속의 모습과 격차가 너무 크다. 우리 앞에서까지 이미지 관리 같은걸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바닥에서 이러는 건 좀...

"꿈속에서도 밥 먹다니 역시 여동생씨... 뭐랄까 먹고 바로 자는데, 이거 어떤가요. 주인."

"몰라. 소라도 되고 싶은 거 아냐?"

"말이 좀 심한 거 아닌가요..."

"아니, 그렇다 해도 말이야. 아까 뚱뚱하다던가 들어버려서 열 받았으면서 이러는 건... 대체 뭐야, 이 녀석."

뭐긴 뭡니까. 키사라기씨의 동생이죠. 그리고 세간의 최고 이슈를 몰고 다니는 초인기 아이돌. 하고 싶은 말은 조용히 삼켰다.

"뭐, 괜찮잖아. 지쳤을 테니까. 어이 키사라기, 일어나. 잘 거면 내 방에서 자라."

설거지를 마치고 이쪽으로 돌아온 키도가 기술이란 자수가 새겨진 앞치마를 벗으며 모모를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도 반응이 전혀 없자 깨우는 방법이 점점 과격해지더니 기어코 두 뺨을 찰싹찰싹 때리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뺨이 살짝 빨개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모는 '에아~, 의외로 잘 먹으시네요...'라며 아직도 행복한 꿈속을 헤매고 있는듯하다. 모모 강적이다.

"아~ 미안해. 그 녀석 한 번 자면 아침까지 안 일어나. 그냥 놔둬도 괜찮다고."

"그렇게 둘 수도 없잖아. 어쩔 수 없네. 옮겨줄까... 웃!?"

동생이란 사람이 잠꼬대하며 늘어져 있는 상황에 오빠라는 사람이 느긋하게 앉아있다니. 아니, 이게 진짜 친남매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반면, 우리의 책임감 넘치는 키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모모를 들어 올리다 뭔가에 당황한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의, 의외로... 있네, 키사라기..."

"도와줄게, 키도."

아까 히비야를 가뿐히 앉고 아지트로 돌아올 때와 달리 키도의 표정에는 버겁다는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남자와 여자라고는 해도 초등학생과 고등학생. 체격에 차이가 큰 만큼 당연히 몸무게 차이도 클 수밖에 없다. 거기다 모모 아까보니까 식성도 꽤 대단한 것 같고... 아니, 이 생각은 이쯤 해두자. 키도는 모모의 왼쪽을, 나는 오른쪽을 맡아 각자 팔 하나씩을 목에 두르고 동시에 일어섰다. 그 모습은 흡사 술에 취해 떡이 된 직장동료를 옮기는 상황 같았다. 발이 질질 끌려지는 모모를 겨우겨우 깔끔하게 정돈된 키도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짧게 한숨을 쉬며 허리를 쭉 폈다. 그 순간 키도와 서로 눈이 마주치자 뭔가가 통한 듯 동시에 웃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돌아온 거실에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키사라기씨가 앉아있었고, 그 맞은편인 내가 사라진 소파에는 코노하씨가 졸음에 완전히 KO패를 당한 채 쓰러져있었다.

"...전멸이네."

"그러네... 미안, 연일 방문해버린 데다가 동생이 민폐까지 끼쳐서."

"아니, 이쪽의 사정이다. 신경 쓰지 마. 그건 그렇고 이 상태라면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겠군."

그렇게 말한 키도는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이 한숨의 원인인 코노하씨는 이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쌕쌕 숨을 쉬며 잠을 잘 뿐이다. 이 사람은 여기에 온 이유를 까맣게 잊은 것일까.

"어라라, 가짜씨도 잘 취침하시는 것 같네요~ 제멋대로."

유리 테이블 위에 놓인 까만 휴대폰 안에서 이불에 파묻힌 에네가 얼굴만 쏙 빼놓은 채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런데 저 이불은 뭐지. 휴대폰 안에 이불을 깔 수도 있는 건가? 애초에 에네 프로그램인데 잘 필요가 있나?

"뭐야, 그 가짜씨라는 건?"

"음. 이 사람한테 붙인 별명입니다. 헷갈리니까 저는 이렇게 부를게요."

"아아, 아는 사람을 닮았다는 말인가. 애초에 네 아는 사람이란 건 대체..."

키사라기씨가 그렇게 말한 순간 에네는 날카롭게 시선을 쏘아댔다. 그 눈빛은 아까 병원 내에서의 노려봤던 것과 비슷해 보였지만 어딘가가 다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키사라기씨가 순순히 꼬리를 내리자 에네는 만족스러운듯 빙긋 웃었다. 그 웃음 한편에는 씁쓸함이 감돌고 있었다.

"알면 됐어요. 뭐, 알지 못하는 건 저지만요. 둔감한 주인에게도 제대로 이야기해드릴게요. 때가 되면..."

"뭐, 각자 개인사라는 게 있는 거니까. 그건 그렇고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

"글쎄...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부른 거였는데 말이지."

키도가 한숨을 내쉬는 순간 코노하씨가 주르륵 소파에서 미끄러졌다. 바닥과 혼연일체가 된 코노하씨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지만, 전혀 미동이 없다. 아까의 모모 같다. 모모와 달리 이쪽은 잠꼬대는 없지만. 숨만 안 쉬었으면 시체인 줄 알겠다. 이번엔 좀 더 강한 힘으로 흔들어보지만, 힘없이 머리가 흔들거릴 뿐 일어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까 키도처럼 뺨도 때려볼까 고민해보다가 역시 초면에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코노하씨를 깨우려는 내 노력을 모두 지켜본 두 사람도 표정을 보니 체념한듯싶다. 이런, 이런... 아무래도 이야기를 듣는 건 내일로 미뤄야겠다. 결국은 코노하씨가 떨어져 텅 빈 소파에 키도와 나란히 앉는다. 모모라면 모를까 이런 거구를 옮길 자신은 없으니까.

"그런데 그 녀석, 결국은 어떻게 됐어?"

"음? 아아, 히비야라고 했었나. 그 녀석의 눈에 떠오른 건 아마도 우리들과 같은 「능력」이 나타나는 징후다."

'그렇지?'하고 동의를 구하듯 키도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무언의 동의를 표했다. 어떠한 사건을 겪은 후 눈이 붉어짐과 동시에 정신을 잃는다... 소름 끼칠 정도로 그날과 동일한 전개다. 아지트로 옮겨진 후에도 히비야는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해서 상황을 전달받은 세토가 감시 겸 간호를 하고 있다는 게 현재 상황이다. 그렇다 해도 히비야에게 어떠한 능력이 생긴 이상, 이 상황이 불안정한 것은 변함이 없다. 이 고요한 밤 중의 평화가 마치 폭풍전야처럼 느껴진다. 나도 그때 쓰러지고 나서는 한 반나절 정도는 꼼짝없이 정신을 잃고 있었으니 아마 히비야가 일어나는 건 내일 정도겠지...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그때의 기억에 시선을 아래로 떨군다.

"그런가... 뭐, 세토가 병간호해 준다고 하면 뭔가 안심되는 느낌이 들어."

"아니, 그 녀석도 제대로 해주고는 있지만, 모자란 점도 있어. 아마 이제 잠들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키도는 낮게 킥킥 웃었다. 그것은 분명 오랜 시간 쌓아온 친구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세 사람의 관계는 단원이라는 것 말고는 잘 모르겠지만 딱 봐도 오랜 시간 동안 알아 온 관계라는 걸 알 수가 있다. 소꿉친구들만이 내뿜는 어떠한 분위기 같은 게 있으니까. 세트를 알게된지 하루밖에 안 되어 그냥 싹싹하고 건장한 소년 정도로만 인식한 나로서는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거다.

"저기. 너희 있지..."

"음? 뭐지?"

"왜 그러세요?"

말을 꺼내던 키사라기씨는 우리들의 시선을 받자 말문이 막혀 버린 듯 입을 꾹 다물었다. 이리저리 헤매는 시선, 말하기를 망설이듯 움찔거리는 입술에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눈」에 관련된 이야기구나. 그 순간 짧게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숨이 빠져나갔다.

다른 일도 아니고 여동생과 관련된 일이니 궁금해할 만도 했다. 투덕거리기는 해도 사이좋은 남매니, 궁금해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하지만 이건 상식 밖의 이야기. 그것도 제3자인 만큼 민감한 이야기의 화두를 꺼내는 게 망설여질 만도 하다. 그렇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또 이 일과 관련이 없지는 않은 이상 키사라기씨에게는 물어볼 권리는 있다. 만약 물어본다면 나는 거기에 답해줄 맘도 있다. 더는 이 일을 숨기기만 하는 것도 그만두고 싶으니까.

"궁금한 게 있으시면 망설이지 마시고 물어보세요. 전 괜찮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하지만 미간은 살짝 찌푸려져 있을 것이다. 아까 자신만만하게 독백하긴 했지만 역시 그때의 그 일은 내게 있어선 없어지지 않는 흉터 같은 것이라 조금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말에 키사라기씨는 잠시 눈빛을 흩트리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뗐다.

"너희들의 그 눈 말인데... 솔직히 보통은 아니지. 모모만 해도 그래. 그 녀석은 저렇게 돼버린 때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너희들과 무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우와 직설적. 아니, 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는 낫나. 드디어 원하던 것을 내뱉은 키사라기씨는 어쩔 줄 몰라 하듯 시선이 방황했다. 그에 나도 모르게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마음속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 가벼워진 듯한 착각도 들었다. 슬쩍 옆을 바라보니 키도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저런 표정일까?

"...이녀석 전에 너에게 말해야 했었구나. 미안해."

"에, 아니. 전혀. 괜찮은데. 뭐라 해야 할지 역시나 신경 쓰여서..."

"그럴 만도 하죠. 얘기하기 전에 한마디 하자면, 눈치채고 계실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이건 믿기 힘든 이야기예요. 일반적인 상식 바깥의 이야기니까..."

아까 키도가 한 것처럼 '그렇지?'라며 동의를 구하며 키도를 바라보자 키도는 싱긋 웃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래. 시라키의 말이 맞아. 이건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야. 이 능력 때문에 우리들은 학대당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바로 이야기하자면, 몸을 지키는 것도 못했어."

키도의 말에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라 버렸다. 버티기가 힘들어 시선과 고개를 아래로 떨구다가 문득 키도는 어떨까 싶어 키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키도는 버거워하는 나와 달리 슬픈 기색이 전혀 없는 표정으로, 그저 강한 의지를 머금은 불투명한 눈동자로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새삼 키도는 강하다는 생각이 들며 나 자신을 반성하게 되었다.

"그, 그렇네. 나에게는 모르는 일이고, 그거...야."

우리 둘의 반응에 키사라기씨는 더 어쩔 줄 몰라 하며 더듬더듬 입을 움직였다. 그건가... 역시 이런 이야기 거북할 수밖에 없겠지. 키사라기씨의 눈동자에는 아직도 망설임이 가득했다. 마치 이런 이야기 들어도 괜찮을지 묻는 듯이... 만약 그걸 입 밖으로 내뱉는다고 해도 할 말 없지만. 그러다 갑자기 키사라기씨의 안색이 급속도로 안 좋아졌다. 듣는 게 무서워진 것일까?

"키사라기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안 좋은데... 오늘은 그냥 자는 게 어때요?"

"아, 아아... 아니, 괜찮아. 미안... 신경 쓰지 마."

"아니, 역시 너도 피곤했던 모양이로군. 내일 하도록 하자."

키도는 그렇게 말하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서려했다. 우리 쪽으로 뻗어 나온 손 하나에 키도는 일어서다 만 엉거주춤한 자세로 키사라기씨를 바라봤다. 아직도 키사라기씨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멀미라도 하는 것처럼 얼굴이 새파래져 있고, 손도 약간 떨리고 있다. 하지만 결심을 한 깊은 눈동자는 떨리지 않고 올곧게 우리 두 사람을 향하고 있었다. 흔들림 없이 총명함을 발하는 그 눈빛에 빨려들 듯 나와 키도의 시선 또한 키사라기씨에게 고정되었고, 세 명의 시선이 서로 얽혀들었다.

"...아니, 조금이라도 좋아, 들려줘."

"...알겠어. 그럼 말해줄게. 일단 내 이야기부터 해볼까..."

키도는 내 옆에 앉고는 뭔가를 회상하듯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떠 보였다. 키도의 눈은 평소의 검은 색이 아닌 붉은 색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눈을 숨기는 능력」이라고 카노는 부르고 있지만, 요점은 자신이나 주위의 물체 인식을 흐리게 하는 능력이야."

키도는 유리 테이블 위에 있던 잡지를 눈앞으로 들어 올리자 점차 연해지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키도 손안에 존재하고 있을 터이지만. 지금까지 함께 행동하긴 했지만 제3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니 키도의 능력이 확 와닿았다. 무엇보다 나 지금까지 능력 써서 키도 능력 통하지도 않았었으니...

"「이것」을 얻기 전, 나에게도 부모님이 있었어. 그렇다 해도 엄마는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심한 아버지였어. 실컷 여자놀음을 한 끝에 회사는 파산. 그것으로써 최후는 집에 불을 붙여."

"...뭐?"

"뭐, 뭐야 그거..."

불과 몇 초 만에 횅하고 지나간 키도의 과거사는 실로 어느 드라마 같은 내용 같은지라 그만 되묻고 말았다. 엄청난 과거사에 당황한 나나 키사라기씨와 달리 당사자인 키도는 그런 일도 있었다며 지난 추억을 떠올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이것도 지난 추억이기는 하다만 이렇게 담담할 수 있다니...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워지는 약한 나와 비교가 되어 기가 죽는다.

"하하. 끔찍한 이야기지? 하지만, 본론은 지금부터다."

"으응..."

"아빠가 불을 붙였을 때, 나와 내 가족은 모두 집 속에 있었어. 나는 언니랑 두 명이 방에서 도망갈 수 없게 되어버려서."

"주, 죽잖아. 그거..."

"그럼 너도 역시..."

키도는 잠시 말을 끊고 나와 키사라기씨의 반응을 살피더니 짓궂은 웃음을 짓고는 이야기를 계속해갔다.

"아아, 죽어버렸어. 점점 숨 쉴 수 없게 되어버려서, 몸도 불타버렸어."

"히이이..."

"그리고, 그때 봤어. 집의 벽이 구불거리면서 갈라져서, 커다란 이빨에 붙어있는 입 같은 것이 펼쳐진 것을!"

"우와아아!!"

지금 이 모습을 음소거할 수 있다면 영락없는 수학여행 밤에 무서운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거기에는 키사라기씨의 겁먹은 모습이 크게 한몫했다. 유원지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겁 참 많다. 겁쟁이인 건 키도도 마찬가지인지라 지금 이 상황이 좀 웃기다. 겁쟁이가 겁쟁이한테 겁을 먹는다니... 솔직히 좀 웃기잖아. 겁쟁이 키도는 벌벌 떠는 겁쟁이 키사라기씨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는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그 뒤로는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았다.

"...그, 그래서?"

"응? 끝이다."

"하?"

"어?"

키사라기씨와 동시에 허무한 반응이 튀어나온다. 느긋하게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그, 그러면 그 능력이란 건 결국 뭐야!?"

"아아. 집이 불탄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까 쓸 수 있게 되어있었어. 입었을 터인 화상도 어느 정도 깨끗하게 말끔히 사라졌고, 정말 이상한 이야기다."

"그, 그럼 그 벌어진 입 같은 녀석이란 건 뭐였던 거야."

"그것도 모습을 본 것만으로, 그 이후의 기억은 완전히 없어져 버려서 말이지. 아마도 삼켜져 버린 듯하지만 살아남은 건 나뿐이고, 대체 뭐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키도는 유감이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끝? 정말 이걸로 끝?

"...정말 그 이후의 기억은 없는 거야? 전혀? 조금도?"

"아아... 유감이지만 전혀 없어. 결국, 그 입의 정체도 모르겠고."

"진짜로? 그럼 다른 애들은? 카노나 세토말이야."

"그 녀석들도 마찬가지야. 죽은 사연은 다 다르지만... 아, 카노도 완전히 똑같은 것을 봤다며 커다란 입을 본 모양이지만, 세토는 강에 빠진 탓에 봤는지 어땠는지도 모호해."

"...그럴수가."

망연자실이다... 분명 메카쿠시단에게서 무언가를 정보를 더 얻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것 같은데 실망하게 해서 미안하다. 우리도 조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조사할 생각이지만, 결국 아무 진전도 없었어."

키도는 미안함을 뜻하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메카쿠시단 애들은 전부 그곳의 기억이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나는 있어. 생생히 기억해. 긴장감과 새로이 부풀려지는 기대감에 가슴이 크게 뛰어오른다.

"...아니, 괜찮아. 사과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부터 진전이 있을 테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리지?"

"나도 봤거든, 그 커다란 입. 똑똑히 기억해.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어. 지금도 선명히 떠올라."

"너도구나. 그럼 역시 세토도 그 커다란 입에 삼켜진 걸까."

"아니,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커다란 입이 아니야. 아니, 물론 그것도 있지만 나는... 나는 그 이후의 기억이 있어."

"...뭐?!"

깜짝 놀란 키도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 탓에 소파가 휘청하고 흔들렸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키사라기씨도 매우 놀랐는지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움찔거리는 게 보인다. 드디어 꺼내 보는, 떠올리고 싶진 않지만, 똑똑히 기억하는 그 이야기를 할 생각에 가슴이 따끔거리며 괴롭다.

하지만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나는 천천히 심호흡하고 놀란 표정의 두 사람을 똑똑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의 이야기 들려줘서 고마워, 키도. 이번엔 내 이야기를 해줄게."

잠시 숨을 들이마시며 머릿속으로 말할 내용을 정리했다. 일단 키도처럼 능력에 관한 이야기부터 시작할까.

"임의로 「눈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라고 이름짓긴 했지만 내 능력은 알고 있다시피 투시 능력이야. 하지만 보는 대상이 사람, 즉 생물체면 그 대상의 감정, 상태 등을 알 수가 있어."

그렇게 말하고 눈을 감았다 뜨며 두 눈을 붉게 물들여보았다. 붉어진 두 눈에 동요함과 긴장감, 약간의 기대가 「보이는」 두 사람이 들어왔지만 내 능력은 키도처럼 눈으로 보여줄 수 있는 능력이 아닌지라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것」을 얻었을 때는 내가 딱 히비야만 했을 때야. 초등학생 때였거든."

"...너도 부모님과 함께 죽은 건가? 분명 아침에 공동묘지에선 어머니와 아버지 두 사람의 무덤이 있었던 거로 아는데...."

"응, 우리 부모님 무덤은 맞아. 하지만 엄마는 원래부터 몸이 약하셨던 분이셔서 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돼서 돌아가셨어. 그래서 아빠랑 둘이서 지냈지. 그래도 우리 부모님이 지금의 양부모님, 그러니까 큰아버지네와 함께 한 사업이 잘 돼서 큰 부족함 없이 자랐어."

거기서 말을 끊고 숨을 들이마신다. 역시 이런 얘기는 말하기 힘들다. 그런 내가 걱정스러웠는지 키도가 힘들면 내일 말해도 된다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에 고개를 저어주었다. 입을 연 이상 관둘 생각은 없다.

"그 때문에 아빠는 늘 바쁘셨어. 그런데 모처럼 그날에는 아빠가 시간이 나셨는지 전화로 엄마 성묘하러 가자고 말씀하셔서 말이야. 나는 엄청나게 기뻐하면서 아빠 사무실로 갔지. 아빠는 출장 갔다가 돌아오시는 길이라서 아직 사무실에 안 계셨는데도 말이야. 그때 거기서... 사촌오, 빠를 만났어..."

조금 버겁긴 했지만, 어찌어찌 말하는 데 성공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시선을 피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더니 그게 정말인 모양인지 선택적 함묵증이 어느 정도 나아진 모양이다. 뭐, 이 정도의 상태로는 아직도 그 사람 앞에서 말을 하는 건 무리겠지만...

"후우... 앞서 말했던 양부모님... 아들, 이야. 지금은 법적으로 내 오, 빠지만... 아무튼 아빠를 만나러 왔다고 말했더니 아직 안 오셨다며 기다리라고 하더라고. 기왕이면 바람 쐴 겸 옥상에서 기다리자며 제안까지 해왔지. 그래서 옥상으로 올라갔다가... 떨어졌어."

"...왜?"

"그건..."

조심스러운 키사라기씨의 질문에 입을 다물었다. 이걸 말해도 될까? 말해도 괜찮은 것인가?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이건 말하기 싫은데... 그러다가 키도가 숨김없이, 망설임 없이 자신의 과거를 술술 말했다는 것을 떠올려내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솔직해져야 한다.

"밀었거든요... 그 사람이 날."

"뭐?! 어째서?"

"그건 저도 몰라요. 처음부터 날 미워해서 그랬을지도... 아니,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냥 우발적으로 그랬던 것 같네요. 그때 그 사람 성적이 엄청나게 떨어져서 혼나고 나오는 길이라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그때 내가 그 사람 기분도 생각 못 하고 신나서 잔뜩 떠들어 댔으니 순간적으로 화나서 그랬을지도."

뒤로 갈수록 대답이 아닌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 되어버렸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내뱉은 말일뿐이지만 말해놓고 보니 그런 것도 같다. 횡설수설한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것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키도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 그럼 넌 혼자 죽은 건가?"

"응? 아, 응. 분명 혼자 떨어져서 죽었어. 그리고 그때 커다란 입도 똑똑히 봤고."

"아니, 커다란 입을 물어보려는 게 아니야. 정말로 혼자 죽었다고?"

"어? 맞는데..."

키도는 내 대답에 고민에 빠진 듯 턱을 괴었다. 그리고 내 체감시간으로는 한참 동안을 눈을 감고 또 생각에 잠겼다. 내가 무슨 이상한 말을 해버린 걸까.

"왜? 뭔가 이상해?"

"어. 이상하다고 할까... 나나 다른 녀석들은 다들 누군가와 죽었거든."

"누군가와? 너는... 분명 가족과 함께 죽었다고 했지."

"아아. 정확히 말하자면 언니랑 같이지만. 카노는 엄마와, 세토는 자신의 친구를 구하려다 죽었다고 했어. 그런데 너는 혼자라니..."

"모모도..."

키도의 말에 생각에 빠지려는 무렵, 키사라기씨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키사라기씨는 뭔가를 깨달은 동시에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모모가 저렇게 된 것도 바다에 빠진 후부터인 것 같아... 어릴 때, 저 녀석 큰 파도에 휩쓸렸었거든. 그런 모모를 구하려고 아버지가 뛰어들었다가..."

"...그랬던건가. 알겠어. 키사라기한테는 함부로 해도 좋은 이야기는 아니네."

"모모한테는 이 이야기 안 하도록 할게요. 언젠가 알아야 하겠지만 지금만이라도..."

"고마워..."

짧게 감사 인사를 하고 키사라기씨는 두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건 괴로워하는 모습 같기도 하고, 우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생각하는 모습 같기도 했다.

"신타로의 얘길들으니 더 이상하군. 우린 「대체로 누군가와 함께 죽었다.」 하지만 시라키 너는 「혼자 죽었지.」 그런데도 우리들도 너도 아마 공통으로 「커다란 입」에 삼켜졌고, 어떠한 능력을 얻고 되살아났다. 거기다 우리의 경우 함께 죽었던 녀석들은 결과적으로 「소실」되었고."

"「소실」이라니?"

"나와 같이 죽었던 언니의 시체는 어째서인지 발견되지 않았다. 그건 카노나 세토도 마찬가지인 모양이고... 키사라기는 어떻지?"

"...마찬가지야. 아버지의 시체는 끝내 발견하지 못했어. 지금까진 그냥 파도에 멀리 휩쓸려가서 못 찾은 줄 알았지만..."

누군가도 함께 죽었다. 그리고 우린 능력을 얻고 되살아났고, 나머지 그 누군가는 소실. 키도의 말을 듣고 번쩍하고 기억 하나가 떠오른다.

"어쩌면 아빠가..."

"응? 그게 무슨 소리지?"

"시간차가 있긴 했지만, 아빠도 그날 돌아가셨어. 사인은 과속으로 인한 차량전복. 시신은 찾지 못해서 장례식에는 빈 관만 놓여있었어. 그건 능력을 사용해서 봤으니까 확실해. 차 안에는 운전자 쪽 안전밸트가 매어져 있던 상태였다고, 그런데 시신이 없다니 참 이상하다고 떠드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그렇다는 것은... 잠깐 하나 물어봐도 될까? 너 죽고 난 뒤 정신을 차린 곳은 어디였어? 삼켜진 곳 안에 말고, 이쪽 세계에서 말이야."

"사무실 건물 뒤쪽 정원에... 내가 떨어진 바로 그곳에서 정신을 차렸어요! 그러고 보니 키도 너도 죽은 그 자리에서 정신을 차렸다고 했지?"

"아아. 분명히 그랬어..."

"모모도 마찬가지야. 그 일이 있고 바로 다음 날 모래사장에서 발견됐어. 상식적으로 하루 동안 바닷속에서 살아있으리란 건 불가능하지. 그렇지만 모모는 살아났지... 거기에 너희가 봤다는 「커다란 입」을 가미하면 얘기가 맞아떨어져. 모모와 아버지가 질식하는 그 순간 그 커다란 입이 두 사람을 동시에 삼켰고, 그 안에 갇혀있다가, 모모가 발견되기 직전에 내뱉어졌다면... 그리고 공통점을 하나 더 발견했어. 시라키의 아빠도 같이 죽은 누군가에 해당이 된다고 한다면 그 커다란 입에 함께 삼켜지고, 그 뒤 각각 한 명만 능력을 얻고 돌아온 게 돼."

"그리고 같이 삼켜졌던 녀석들은 아직 아무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곳에 삼켜진 그대로라는 것이 되네."

"있어! 그 안에 있다고!"

다급하게 내뱉은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로 꽂힌다. 진전이 있다. 이야기가 점점 맞아떨어져 가. 이대로라면 이 능력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될지도 몰라! 심장이 크게 뛰어오른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을 정도의 큰 고동이다. 가슴이 벅차올라 숨쉬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괴롭지는 않다. 오히려 기뻐! 현재 나는 지금까지 살아온 것 중 최고조의 흥분 상태에 달해있다.

"그게 정말인가, 시라키?"

"응! 내가 그 커다란 입에 삼켜진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어. 분명 아빠 목소리였어. 헷갈릴 리가 없어! 비록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아아, 그런데 나 기억이 있다던가 말하긴 했지만 거기서의 기억은 정말로 짧아. 얼마 안 있다가 빠져나왔으니까..."

"아니, 일단 그걸로도 충분해. 그럼 역시 함께 죽은 사람들은 그 커다란 입속에 삼켜진 채로 있는 건가..."

키도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으며 허공으로 시선을 던졌다.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서 정신이 없겠지... 보아하니 키사라기씨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하긴 나도 그런걸... 잠깐 거실에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저기 그때의 기억 좀 더 자세히 알려줘."

"네. 일단 정신을 차려보니 어떤 건물 옥상에 있었어요. 뭔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꺼림칙한 곳이었죠... 거기서 아빠의 목소리를 들리기 전에 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여성?"

"응. 나는 그 여성이 우리에게 능력을 준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 비록 짧은 기억이긴 하지만 거기서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거든. 아니, 사람이 맞을까..."

"그거 무슨 뜻이야?"

"잠깐만, 키도. 일단은 이야기를 끝까지 듣자."

벌떡 일어나서 나를 추궁하는 키도를 키사라기씨가 제재했다. 흥분해서 충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부끄러운지 키도는 뺨을 살짝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런 거 보면 역시 멋진 척하지만 키도도 내 또래란 말이지...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키도의 재촉도 있고 해서 말의 속도를 더욱더 빠르게 했다.

"그 여성이 나에게 살고 싶냐고 물었어. 내가 별로 살고 싶지도 않다고 대답하자 그때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지. 부탁이니까 살아달라는 말이... 바보 같이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때까지만 해도 착한 아이로 자라서 말이야. 그럼 살고 싶다고 말하고 말았어. 그러자 그 여자가 『좋아. 하지만 이건 네 선택이란 것을 잊지 마라.』라고 말하더니 눈 안쪽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워지면서 다시 정신을 잃었고, 아까 말했던 대로 내가 떨어진 바로 그곳에서 정신을 차린 거야."

"그런가... 그럼 역시 너의 예상대로 그 사람이 우리에게 능력을 준 건가..."

"혹시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해? 아, 목소리밖에 못 들었다고 했지..."

"아뇨. 기억해요. 그곳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모습을 드러냈거든요. 키도, 펜이랑 종이 좀 빌릴 수 있을까?"

내 말에 키도는 바로 후다닥 자신의 방에 들어가 3색 볼펜과 급히 찢은 노트 한 장을 내게 내밀었다. 꽤 오래전 기억이긴 하지만 워낙에 인상이 깊었던 지라 잘 기억하고 있다. 붉은 끈으로 묶은 폭포수처럼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 특히 옆머리는 각각 두갈래가 교차하여 마름모 모양이 반복돼있는 게 인상적이었다. 얼굴은 붉은 눈이 날카로웠고, 두 볼에 무언가가 나 있었고, 체격은 왜소했어.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보다 조금 큰 정도였으니까... 옷은 검은 색이었던 건 기억나는데... 아아...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아...

그래도 여기까지 기억해내는 게 어디인가. 초등학생 때 기억을, 그것도 단 몇 초밖에 못 본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조금 자기합리화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기억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이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충 느낌이나 생김새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만 그리고 펜을 내려놓자 두 사람의 시선이 종이쪽으로 쏠렸다.

"다 됐어요."

"...그림 꽤 잘 그리네."

"아뇨. 그냥 보통이죠."

"이 사람이 바로..."

키도는 유심히 그림을 바라보며 또 생각에 잠긴 듯 턱을 괴었다. 버릇인 걸까.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도 잠시. 이내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이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림을 그려준 건 고맙지만 우리는 그쪽의 기억이 없으니 봐도 잘 모르겠네... 뭐, 어쨌든 고맙다. 덕분에 많은 정보를 얻었어."

"아니, 나야말로. 역시 말하길 잘한 거 같아."

"일단 지금까지 나온 얘기들을 정리해보자."

키사라기씨는 종이와 펜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후 종이를 뒤집고는 거기에 뭔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능력을 얻게 된 계기는 죽음.

2. 다른 누군가와 함께 죽고(시간차도 인정되는 듯), 「커다란 입」에 삼켜짐.

3. 어느 이상한 공간에 있다가 몸의 상처가 다 나은 후, 이쪽 세계로 능력을 얻고 돌아옴.

4.그 이상한 공간에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가 능력을 주는 장본인인 듯. (모습은 뒤의 그림 참고)

5.그곳에는 능력을 얻은 사람들과 함께 죽은 자들이 갇혀있는 것으로 추측.

6.그곳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한 공간이라고 함.

키사라기씨는 여기까지 쓰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믿기 힘든, 거기다 듣기도 괴로운 이야기가 연속되다 보니 정신적으로 좀 지친 모양이다.

"후우... 지금까지 열심히 얘기했는데도 딱히 확실한 정보는 없네..."

"그래도 여기까지 정보를 끌어낸 것만 해도 엄청난 수확이다. 수고했어."

"...있지, 그럼 히비야는 히요리라는 애와 함께 죽고 능력을 얻은 것이 되겠지?"

"정황상 그렇겠지. 뭐, 아무튼 히비야에 관해서는 능력을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을 때까지는 돌봐줄 예정이야. 그 점에선 익숙해져 있으니."

"나도 도울게. 나도 내 능력은 제어할 줄 아니까."

"그러고 보니 너는 어떻게 능력 제어를 할 줄 알게 된 거지? 우리들은 서로 도와가며 익힌 거지만 너는..."

"혼자 익혔어. 능력을 얻은 직후에는 능력 탓에 모든 것을 다 투시해버려서 일상생활 자체가 힘들었고, 붉은 눈을 향한 시선들이 너무 안 좋아서 온종일 방 안에만 있었거든. 그러면서 온갖 짓을 다 하면서 어떻게든 익힌 거야. 덕분에 시간은 많이 걸려버렸지만..."

"...힘들었겠네."

"그건 너도,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잖아. 그런 눈빛 할 필요 없어."

"잠깐만."

약간 풀어진 분위기 속 키도와의 수다 틈으로 잠자코 있던 키사라기씨가 끼어들었다. 키사라기씨는 조금 놀란 듯하면서도 뭔가를 깨달은 듯한 깊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시 진지해지기 시작한 분위기의 원인인 키사라기씨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너는 그곳에 있던 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었지? 그리고 시라키 한 사람을 제외한 모두 그렇다고 말했을 거야."

"아, 아아. 확실히 그래. 기억나는 것은 눈을 떴을 때부터일 뿐이야."

키도는 키사라기씨가 무얼, 왜 묻고 있는지 짐작이 전혀 안 된다는 기색으로 조금 겁먹은 듯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같이 얘기했으면서 새삼스레 저걸 다시 묻는 의도가 뭘까? 다만, 진지한 키사라기씨의 눈동자는 결코 가벼운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니, 떠올랐어. 히비야는 방금 코노하를 향해서 「당신은 계속 보고만 있었을 뿐이다」라든가 말했었지. 어쩌면 그 녀석..."

설마! 덧붙여진 키사라기씨의 말에 생각 하나가 빠르게 떠오른다. 지금까지 얘기를 종합하면 함께 죽는 누군가와 시간차를 두고 죽은 나 이외에는 저쪽의 기억이 없다. 그나마 기억이 있는 나마저도 저쪽의 기억은 짧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은 계속 보고만 있었을 뿐이다」라니? 누군가가 지금까지의 일들을 계속 보고 있었다는 걸 기억한다는 건 바로─

"기억하고 있는 거 아냐? 그 삼켜진 저편의 녀석을."

─가슴이 크게 철렁이며 소름이 끼쳤다. 순간 소파가 거칠게 덜컹거리더니 키도가 벌떡 일어서 어디론가로 향했다. 가는 방향은 세토의 방, 히비야가 있는 곳이다.

"어, 어이 어디 가는 거야!? 그 녀석 지금 자고 있잖아!?"

키사라기씨의 말에 다시 깜짝 놀란 키도는 순순히 내 옆으로 돌아왔다. 단장인데 충동적으로 행동한 것이 부끄러운지 키도는 뺨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단장이라고 폼을 잡아도 이런 걸 보면 영락없는 내 또래다.

"...미안."

"아니, 괜찮아. 나도 네 마음 십분 이해하니까... 어쩌면 가족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뭐, 그렇지... 나라도 그래. 아버지 따윈 몇 년이나 만나지 않았고, 만약 만난다면..."

키사라기씨는 거기까지 말하다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 눈엔 아까와 같은 진지함도, 무엇도 없었다. 대신 「망설임」으로 가득 차 여름날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안색도 다시 안 좋아지고 말았다. 대체 왜 키사라기씨는 저런 눈을 하는 것일까. 아버지를 만나기 싫은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키사라기씨?"

"응? 아아. 미안미안... 뭐, 일단 내일 이어서 할까. 카노도 돌아오지 않는 것 같고."

키사라기씨 뒤쪽 벽에는 뻐꾸기 시계나 디지털시계 등의 여러 시계가 곳곳에 붙어있었다. 그건 아마 내 뒤쪽도 마찬가지일 터지. 적어도 내 시야에 들어오는 시계들은 일제히, 정확하게 오후 10시 30분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내 치료가 끝났을 때쯤 시간이 9시였으니까 1시간 30분씩이나 계속 이야기하고 있던 셈이 된다. 그런 화제의 이야기를 1시간 30분 동안 해서 그럴까. 급 피로가 몰려와 지쳐버린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응. 그렇네. 그 녀석은 뭘 하고 있는지... 그나저나 오늘은 지쳐버렸어."

"그렇네... 나도 이런저런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그리고 이 정도의 많은 사람을 이곳으로 불러오는 것도 처음이고 말이지."

키도는 현관을 바라보며 「이런, 이런」이라고 말했지만, 말에도 표정에도 기쁨이 듬뿍 묻어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단원이 늘어난 게 기쁜 모양이다.

"그 「단장」이라는 것은, 제법 힘들어 보이네."

그냥 흘려보내듯이 키사라기씨가 그렇게 말하자 키도는 마치 뭔가 부끄러운 모습을 들킨 듯 뺨을 더욱 붉혔다.

"시, 시끄러웟! 하나하나 태클 걸지 마! 이, 이제 잘 거다! 알겠어!?"

평정심을 잃은 키도는 그렇게 말하고는 이제까지 것 중에 가장 센 강도로 덜컹 일어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설핏 웃음이 흘러나왔다. 문득 키도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기에 서둘러 웃음을 넣어버렸지만...

"이불은 꺼내놓은 그쪽에 있는 녀석을 코노하랑 써라. 그리고 시라키 너는... 카노 녀석 오늘은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니까 그 녀석 방을 쓰도록 해. 깨끗하니까 괜찮을 거다. 그럼."

키도는 그렇게 빠른 속도로 말하며 현관 옆에 쌓아놓은 담요들과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방문을 연달아 가리키고는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문을 닫아버렸다.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키득키득 소리가 나게 웃어버리자 키사라기씨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 녀석은..."

"후후, 좀 부끄러운가 보죠."

"대체 어디가 부끄러운 건데..."

"뭐, 몰라도 상관없지 않을까요? 그럼 저도 이만."

"저기..."

일어서려던 것을 멈추고서 다시 키사라기씨를 바라봤다.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아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진지한 얼굴을 한 채 키사라기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너도 어제 막 메카쿠시단에 들어왔다고 들었는데 맞아?"

"네. 맞는데 그건 왜요?"

"그런데 그런 것치고는... 뭐랄까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는 이 애들이 수상하다던가라는 생각 안 해봤어?"

"당연히 해봤죠. 오히려 안 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요?"

즉답으로 날아가는 내 담담한 대답에 키사라기씨는 뭔가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게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좀 웃겨 풋 하고 웃으니 그에 정신 차린 키사라기씨는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너, 너 그러면서 왜 이 녀석들이랑 잘 지내고 있는 건데?"

"그야 수상한 단체에 들어왔다는 불안감보다 나와 같은 「붉은 눈」을 만난 기쁨이 더 컸기 때문이죠. 그건 아마 모모도 똑같을 거로 생각해요."

"아..."

나는 그동안, 이 눈에 많이 시달리고 살았다. 이 도시에 오기 전에는 기분 나쁜 시선들에 시달렸고, 그 후에 누구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그럴 필요가 없다. 편하게 내 눈을 드러내고, 내 자신을 드러내고, 아까 같은 이야기도 마음 놓고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여기 있는 것이다. 이곳이 바로 내가 있어야 할 곳 같은 기분이 드니까. 키사라기씨는 내 말을 납득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곤 고개를 푹 숙였다. 아마 괜한 걸 물었다고 자책하는 걸까?

"그러는 키사라기씨야말로 잘 적응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은근 즐거워 보이던데."

"내가? 그럴 리가... 오늘 종일 이곳저곳 끌려다녀서 무지하게 피곤하다고.."

"그래도 오랜만에 나와서 즐겁지 않았나요?"

"글쎄... 별로..."

"제 눈을 속일 생각 마세요."

내 말에 키사라기씨는 짧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흠칫 몸을 떨었다. 새삼스레 내 붉은 눈을 보고 놀랐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모르게 새어 나온 웃음소리에 내가 더 놀라고야 말았다.

지금까지 이처럼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아니, 단 한 번도 없었다.

굳이 붉은 눈 때문이 아니더라도, 옛날부터 주변의 시선들은 날 불편하게 했으니까. 그건 특히 붉은 눈이 생긴 후에 더 심해졌었는데 그 붉은 눈 덕분에 이런 편안한 기분이 들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뭐, 아무려면 어때.

"그럼 저 먼저 잘게요."

"어... 그래. 잘 자. 이치카."

"...네?"

순간 귀를 의심했다.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나온 내 이름은 갑작스럽게, 그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서 나온 것이라 굉장히 얼떨떨하고 위화감이 일었다. 하지만 나보다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더 놀란 표정을 지었기에 금방 침착해지고 말았다. 애초에 난 쉽게 차분해지는 성격이기도 하고. 반면에 그런 성격이 아닌 걸 딱 봐도 알겠는 키사라기씨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며 혹시 기분 나빴나, 이걸 어떻게 무마시켜야 하지 같은 생각들로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는 듯했다. 내가 세토도 아닌데 무슨 생각하는지 대충 짐작이 가다니... 정말 알기 쉬운 사람이다. 하지만 머리를 돌리는 바람에 무슨 말을 꺼낼 타이밍을 완벽하게 놓쳐 버린 키사라기씨는 아까보다 더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이해 못 할 말들을 늘여 놓았다. 그러고 보니 모모가 키사라기씨 머리 되게 좋다고 하지 않았었나? 분명 전국 모의고사 톱이었다고... 공부 머리와 생활 머리는 다른 것이라는 걸 새삼 깨닫는다.

점점 목소리가 작아지는 바람에 무슨 주문 외우는 것 같은 모습이 된 키사라기씨의 두 눈은 이젠 아예 소용돌이 모양이 그려져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에네 말대로라면 2년 동안 히키코모리라서 타인과의 소통에 능하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이해하자.

자, 그럼 원만하게 마무리하고 들어가 볼까. 연속된 사건들에 나도 무척 피곤하고 졸리니까.

"어쨌든 안녕히 주무세요, 신타로씨."

싱긋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키사라기씨, 아니 신타로씨는 볼은 약간 붉게 물들였다. 연상인데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그 모습이 어제의 모모의 모습과 비교되어서 조금 웃기기도 했다. 모모는 내가 이름을 부르니까 신타로씨와 반대로 날뛰며 좋아했었는데. 예의에 어긋날, 삐져나올 것만 같은 웃음을 겨우 집어넣고 어버버 거리는 신타로씨를 뒤로 한 채 카노 방으로 쏙 들어갔다. 신타로씨가 한숨 비슷한 소리를 내는 게 희미하게 들려왔다.

카노의 방은 우드 인테리어로 되어 있고, 꽤 아늑한 느낌이 났다. 여러 잡다한 물건이 많기는 해도 키도 말대로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있는 게 카노의 모습과 너무나 달라 의외지만.

아무렴 어때. 깔끔하면 좋은 거지. 이제는 정말 자고 싶다.

타인의 방을 주인 허락 없이 맘대로 써도 되나 잠깐 머뭇거렸지만 키도의 허락도 있었고, 카노도 오늘 안 들어온다고 했으니 하루쯤은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이미 남자 두 명이 차지하고 있는 거실에서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키도 방에는 이미 모모가 있고, 마리는 이미 잠든 상태라 들어가기 미안하고 말이지... 피곤한 몸뚱아리는 풀썩 침대 위로 쓰러졌고, 나는 세수도 하지 못한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푹신한 이불에 묻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부스럭-

조그마한 소리가 귓속으로 살며시 들어온다. 무슨 소리지? 궁금하긴 해도 보이는 건 검정, 검정, 검정뿐. 한참을 생각해보고 나서야 내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몹시 졸리고 피곤한 몸 상태로는 정신 역시 비몽사몽 할 뿐이라 눈을 뜨지도 않고, 수상하다 여길 소리도 그냥 내버려 두고 현실과 잠 사이를 그저 왔다 갔다 했다.

졸리다.

일어나기 싫다.

좀 더 자고 싶다.

시간개념을 상실한 상태라 정확히 얼마나 지난 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떠한 인기척이 내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아까 말했다시피 정신이 꿈과 현실 사이에 있는 상태라 그 느낌이 진짜인지 꿈인지도 전혀 구별하지 못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게 꿈이든 현실이든 그저 푹 자고 싶었다. 그때 그런 나의 바람을 알고 일부러 흩트려놓듯 그 인기척은 손을 뻗어 내 뺨을 매만졌다. 갑자기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그제야 이것이 현실임을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이 덮쳐오는 불안감에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의 불안감마저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손은 천천히 부드럽게, 그리고 상냥하게 나를 달래주었다. 덕분에 아빠하고 느낌이 비슷하다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그 손은 대체 누구였을까.

혹시 꿈이었던 건 아닐까.


"우, 아아아앗!!"

"우와아아아아!?"

"뭐, 뭐야?!"

갑자기 문밖에서 들려오는 힘찬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기상에 놀란 뇌는 몽롱하면서도 핑글핑글 도는 등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후에는 대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고 싶었지만 한밤중인 모양인지 주변은 캄캄했고, 방안도 아닌 문 바깥쪽에서 일어난 일이 뭔지 내가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야 물론 능력을 사용하면 간단히 알 수 있기는 하지만... 문 바깥쪽에서는 아직도 누군가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지만, 아까와 달리 잘 들리지 않는다. 그냥 능력을 사용해서 확인할까, 문밖으로 나가볼까 한참을 고민하다 아까 꿈결에 느껴진 손의 감촉이 신경 쓰여 나가기로 했다. 능력을 약간만 사용해 어둠을 투시해서 손쉽게 문손잡이를 잡은 나는 약간 머뭇거리며 문을 열었다.

"우~응. 그렇지만 어제오늘도 많이 움직였고, 역시 오빠야 지쳐있어. 느긋이 쉬도록 해?"

"그렇게 할게... 아."

"모모하고 신타로씨? 둘이 이 시간에 뭐해요?"

문밖의 소음의 원인은 다름 아닌 신타로씨와 모모였다. 도둑이라도 든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것 같다. 마음을 내려놓는 한편, 여러 알전구 아래 한창 대치하던 것 같은 모습으로 서 있는 두사람과 달리 시야의 끄트머리에서 평화롭게 잠을 깊이 자고 있는 코노하씨의 모습은 굉장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에?! 시라키쨩도 깨워버린 거야? 미안해!"

"아니, 괜찮─시라키쨩?"

모모는 나를 이치카쨩이라고 부르는데? 그 순간 모모가 움찔거렸다. 비록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똑똑히 목격했다. ....부자연스러운 것은 코노하씨만이 아니었다.

"역시 그런 건가 보네."

그렇게 말하며 신타로씨는 눈빛을 차갑게 식히고 마치 내려다보는 듯이 모모를 마주했다. 나 역시 능력을 약하게 발동한 채 모모를 마주했다. 예상치 못한 모습이었는지 모모, 아니 「모모」인 척하는 「그」는 어떻게든 얼버무리려는 듯 웃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상당히 어색했다. 마치 일부러 어색하게 하는 것처럼.

"왜, 왜? 왜 그래, 오빠야..."

"너, 어째서 이런 짓 하는 거야?"

"에, 에에... 질문의 의미를 조금 모르겠는데..."

"정말 모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조심조심 발을 떼어 신타로씨의 옆에 서서 겉모습은 모모인 「그」를 바라보았다. 신타로씨의 질문에 초조함과 무서움이 섞인 듯한 표정을 짓는 모모 속에 그의 모습이 겹치어 보인다. 능력을 약하게 발휘한 탓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겉모습인 모모와 달리 똑똑히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의문과 불안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모모는 한 번 잠들면 움직이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아. 고생하고 있다고, 옛날부터. 그리고 모모는 히비야랑 조금 전에 크게 싸웠었어. 한밤중에 걱정해서 둘러보러 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게다가..."

신타로씨는 거기서 말을 끊고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선 너도 눈치챘냐고 묻는 듯이 나를 흘낏 쳐다본 후 다시 입을 뗐다.

"모모는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고, 이치카한테는 「이치카쨩」이라고 부른다고."

"...카노."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대기가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며 색을 바뀌어 갔다. 그리고 이내 그 속에서 카노의 모습을 드러냈다. 카노는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웃음이 아닌 사람을 깔보는 듯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야~ 역시 재밌네에, 신타로군은 최고야. 설마 시라키쨩한테도 들킬 줄은 몰랐지만."

"..."

"와아, 냉담해라~ 그건 그렇고 두 사람 언제 서로 이름으로 부르기로 한 거야? 이런 예쁜 여고생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사이라니 신타로군 굉장한데?"

"그것참 감사. 그럼 이제 말해보실까. 왜 일부러 이런 한밤중에 모모로 변한 건지."

차갑고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신타로씨의 태도에도 카노는 여전히 기분 나쁜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하. 꽤나 미움받아버렸네. 뭐 어쩔 수 없나. 소중하고 소중한 여동생으로 변해버린다면..."

'그치?'라고 덧붙이며 카노는 윙크를 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평소처럼의 장난 같은 것은 아니었다. 깔보고, 추악하고, 악질적인 것이 뻔히 보이는 그 태도는 나와 신타로씨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딱히 그런 거 아냐. 왜 넌 자신의 집에서 사람으로 둔갑하고 있는 거야.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하고 있는 거다."

"우~응, 물론 나는 나 나름대로 의미 있는 것을 할 생각이야. 그렇지만, 그걸 말해서 어떻게 되는 건데? 그걸 알아서 신타로군이나 시라키쨩은 어떻게 할까나아."

카노는 빙글 뒤를 돌아 우리에게 등만 내보인 채 양손을 과장되게 펼치며 그렇게 말했다. 그 모습은 익살스러운 피에로 같은 동시에 사람 속을 긁어내는 모습같이 느껴졌다. 그렇게 느낀 것은 비단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신타로씨는 기분 나쁘다는 듯, 아니 뭔가 찔리는 게 있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렸다. 카노가 뒤를 돌아있는 탓에 표정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여전히 꺼림칙한 미소를 짓고 있을 테지. 왠지 이 이상 대화를 진행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일었다.

"그쯤 해둬, 카노. 우린 단지 왜 모모로 변했는지 묻고 있는 것뿐이야."

"으음~ 물론 시라키쨩은 그렇겠지. 그렇지만 말이야, 신타로군은 나에게 뭔가 묻고 싶은 게 있는 것 같은데?"

"...묻고 싶은 거라니 그런 거 없어. 오히려 네가 뭔가를 말하고 싶은 거 아니야?"

"음... 글쎄에~ 나도 딱히?"

"거짓말 마!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그만 흥분해버려서 금방이라도 튀어 나가려는 신타로씨의 팔을 힘껏 잡아당겼다. 지금 이 상황에서 흥분해봤자 카노의 페이스에 휘말릴 뿐 좋을 것 하나 없으니까. 일단 진정하라는 내 눈빛을 눈치채준 것인지 신타로씨는 한 번 입술을 깨물고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때 갑자기 천장에 붙은 알전구들이 파직거리며 깜박거려 카노가 마치 섬멸 장치처럼 깜박거리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 탓이겠지만 왠지 내가 잠시 눈을 돌린 사이 카노가 어둠 속에 스며들어 사라져버릴 것만 같은 이상한 예감에 눈에 더욱 힘을 가했다.

─그러자 믿을 수 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렁거리며 새로이 모습을 드러낸 카노는 우리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미약하다고는 하나, 나는 분명 능력 사용 중이었다. 그런데 그 아래에 또 속인 모습이 있었다니?

잘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능력 사용했던 적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카노의 상태,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보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내가 봐왔던 카노의 모습은 대체 뭐였는지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음~? 아니, 아니. 말 그대로의 의미야. 신타로군은 뭔~가 중요한 것을 금방 잊어버릴 것 같은 얼굴 하고 있는걸."

그런 내 상황을 알 리가 없는 카노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네 놈이 뭘 안다고 하는 거야!"

잔뜩 분노가 치밀어오른 신타로씨는 기어코 카노쪽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순간 때리는 것인 줄 알고 말리려 했지만,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주먹을 쥐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는 이상한 몸짓을 취하는 게 아닌가. 잠시 몇 초 동안 상황 파악도 못하고 눈만 깜박이다가 이내 카노가 능력 사용 중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능력을 풀었다. 지금 상황에서 능력을 사용해봤자 상황 파악에 더 어려울 것 같아서.

능력을 푼 바로 다음 순간, 전구가 크게 한 번 깜박이더니 그의 새로운 「거짓」 모습이 드러났다. 돌연 숨이 멈추고 말았다.

"그럼, 어째서 나를 구해주지 않는 거야?"

어깨까지 기른 검은색 미들롱 헤어, 피처럼 붉디붉은 색의 머플러, 검은색 어느 학교의 동복 차림... 너무 다정하지만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가 눈앞에 서 있었다. 오래되어 먼지까지 쌓인 기억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이.

"아, 아..."

"...신타로씨! 정신 차리세요!!!"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채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다리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신타로씨를 서둘러 부축했다. 하지만... 이미 틀렸다. 신타로씨의 눈에는 이미 가짜 카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저기, 신타로 대답해줘? 그게 아니면 나에 대한 거, 이제 잊어버렸어?"

"트, 틀려... 나..."

신타로씨는 아까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동공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내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았다.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겨우 마음을 다잡고 두 다리로 곧게 섰다. 머리가 뒤죽박죽이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어째서 카노가 저 사람으로 변한 것인지, 어째서 신타로씨가 이렇게 패닉에 빠진 것인지. 우리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웠던 목소리가 안녕을 고했다. 바이바이라고. 멀어지는 검정과 빨강의 그 모습은 문 너머의 어둠 속에 그대로 스며들어 사라질 것만 같았다.

"잠깐... 기다려!"

급하게 손을 뻗는다. 그때처럼 닿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렵지만, 부질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급해진 내 마음에 동요하여 미약하게 타오르기 시작한 내 두 눈이 앞에 있는 사람이 붉은 머플러의「그녀」가 아니라 검은 후드인 「그」임을 알려주었다. 그의 검은 등은 무척이나 작고 약하고 슬퍼 보였다. 내 외침에도 그 검은 등은 묵묵히 차가운 밤거리를 걸어갔다. 약하게 발현된 능력 탓에 그녀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흐릿하게 그의 등위에서 일렁거렸다. 그는 잠시 고개만 꺾어 나를 보더니 이내 오른쪽 골목으로 꺾어 들어가도록 「속였다」. 골목으로 들어간 것은 거짓된 그녀의 모습뿐, 그는 여전히 큰길의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직진하고 있었다. 키도가 정성껏 치료해준, 하지만 다 낫지 못해 부어있는 발목을 절뚝절뚝 끌고서 전력으로 쫓았다. 이제 다리 통증 따위 아무래도 좋다. 설사 발목이 나가떨어진다고 해도하고 싶은 것이 있다.

묻고 싶다. 왜 그런 모습을 했는지, 왜 신타로씨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왜 그동안 모두를 속여온 것인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제 더는 속고 싶지 않다.

이제 더는 거짓된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거짓된 모습도, 말투도, 미소도, 전부 다.

내 능력은 이런 마음 때문에 얻은 능력이니까.

밤의 어둠과 반대로 내 두 눈은 더욱 빛났다

"카노 슈우야!!!"

갈라진 목소리로 절박하게 그의 이름을 외치고는, 팔을 뻗어 제법 차가워진 밤공기를 뚫고 카노의 손목을 잡아챘다. 「속이기」까지 했는데도 내가 자신을 쫓아올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인지 카노의 몸은 별 저항 없이 홱 하니 돌아 나와 마주 서게 되었다. 드디어 마주하게 된 카노의 진짜 얼굴. 생각보다 여리고 앳된 얼굴. 왜인지 신타로씨보다 더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

"...아까 그 사람, 네가 변했던 그 사람. 아야노선배, 맞지?"

숨을 잠시 고르고 조심스럽게 내뱉자, 안 그래도 놀라서 약간 커져 있던 카노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너 누나를 알아? 누나를 어떻게 아는 거야?! 그리고 분명 능력을 썼는데 어떻게 날 따라왔─"

"일단 진정해. 묻고 싶은 게 많은 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래. 듣고 싶은 것도, 말해주고 싶은 것도 많다. 그에 비해 여름의 밤은 짧지만,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 느긋이 얘기해도 괜찮겠지. 우린 정말 막 만났을 뿐이니까. 잠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법 차가운 여름밤 공기가 그대로 폐 속으로 들어와 마음속의 무언가를 가지고 다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당당히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비친 붉은 눈의 소녀는 비장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이었다.

"네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을래, 카노? 나도 내 이야기를 들려줄게."

짧다면 짧을 여름날 밤의 시답잖은 담화가 시작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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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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