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
드림소설 '이치카의 다이어리' 백업
한여름.
말 그대로 한여름 날씨다. 아니, 그 이상인가?
최근 여러 방송에서 평년 기온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느니, 지구 온난화가 더욱 가속화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느니 떠드는 걸 듣긴 했지만 실제로 체감하니 꽤 무섭다. 여름이 덥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확실히 올해가 가장 심한 것 같다. 내년엔 이보다 더 심해질 거라 생각하면 끔찍하다. 이 살인적인 열기에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피어나오고 저절로 땀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집에서 나오기 전 선크림을 제대로 바르고 나오긴 했지만, 흐르는 땀에 씻겨 결국 이 치명적인 자외선을 끝까지 막아내지 못할 것만 같다. 더위에 약하지는 않은 나까지 주위 사람들처럼 땀에 절인 배추처럼 어깨가 축 늘어지고 만다. 문득 아침 뉴스에서 오늘은 꽤 더워서 일사병이나 열사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얘기한 것이 떠올랐다. 공정하게 사실을 전해야 하는 뉴스답게 이 치명적인 기온은 그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을 생생히 알려주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나 역시 열사병으로 쓰러진 한 사람으로 뉴스에 실릴 것만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열사병에 걸려 뉴스에 나올 일이 없다. 나는 지금 언제나처럼 편의점에 가고 있으니까. 그 편의점은 내가 알바를 하는 곳으로 다른 편의점처럼 에어컨이 24시간 풀가동 중일 거다. 지금이 자외선이 가장 세다는 2~3시라지만 곧 편의점에 도착할 테고 그러면 에어컨의 은혜 속에서 4시간을 보낼 수 있다. 편의점 알바의 가장 좋은 점이 이게 아닐까. 물론 그 4시간 동안 손님 상대라던가 물건 채우기 같은 일을 해야 하지만 적어도 열사병에 걸리진 않을 테니까.
아지랑이 사이로 바뀌지 않을 것만 같던 신호등의 빨간 불이 초록 불과 바톤터치를 하자마자 바로 하얀 횡단보도를 향해 발을 뻗었다. 이제 곧 오봉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다. 누군가와 부딪히지 않으려 노력한 사이 무사히 건너편으로 도착, 곧장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큰길을 따라 묵묵히 걷다가 이번엔 왼쪽으로 꺾자 익숙한 모습의 편의점이 거기에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다 왔다고 생각하니 송골송골 맺혀있는 땀이 이젠 못 버티겠다는듯 바닥을 향해 하강한다. 아아, 어느새 땀이 이렇게나 차오른 건지... 이 무더운 기온에 맞추어 내 몸이 잘 반응하고 있다는 거지만 그다지 반갑지 않다. 찝찝하고 또 찝찝할 뿐이다. 얼른 들어가서 에어컨 바람을 쐬고 휴지나 물티슈라도 사서 이 땀들을 닦아내고 싶다. 마음 같아선 아예 샤워하고 싶긴 하지만.
자동문 앞에 서 있으니 두 개의 투명한 유리문이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지며 시원한 냉기를 방출해낸다. 등 뒤에 자리한 열기와 안녕을 고하고 냉기 속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가자 이 편의점만큼이나 익숙한 사람이 보인다.
"어서 오세... 아, 왔니? 밖이 많이 덥지?"
"네. 오늘따라 더 더운 것 같네요. 이따가 돌아가실 때 조심하세요."
"후후. 걱정해줘서 고맙구나. 하지만 난 열사병에 쓰러질 정도로 약하진 않단다?"
「그래도 이제 50대가 되셨으니 안심하지 마세요.」라는 말은 그냥 꿀꺽 삼켜버린다. 분명 기분 나빠하실 테니까. 50대 초반의 여성이신 이분이 바로 여기 편의점의 점장님으로, 무척 온화하시고 착하신 분이시다. 어느 정도냐면 지금까지 최저임금보다 월급을 낮게 받은 적이 없다.오히려 「어린애 혼자서 고생이 많지?」라며 용돈처럼 보너스를 넣어주실 때도 있다. 요즘 경제도 안 좋은데 이런 사장님을 만나는 건 무척이나 행운. 덕분에 2년이라는 결코 짧지는 않은 시간 동안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먹을래?"
"아뇨. 괜찮아요. 그 대신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내일모레 쉬어도 될까요?"
"내일모레? 무슨 일있니?"
"...아빠, 기일이라서요."
내 말에 점장님은 뭔가 실수라도 했다는 듯 짧게 탄식을 하더니 물어봐선 안 될걸 물어보기라도 했다는 듯 갑자기 나에게 사과를 했다.
아, 지겹다. 저 눈.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세요.
이 말 역시 그냥 삼켜버리고 괜찮다는 뜻으로 슬며시 웃어 보이자 점장님의 얼굴이 약간 풀리셨다. 미소 하나에 풀리다니 왠지 좀 어이없는 기분이지만 별문제 없이 휴가를 받아낼 수 있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신세진 분이니 딱히 안좋은 기분이 들지도 않는다.
아까까지 내가 있었던 살인적인 열기 속으로 들어가시는 점장님께 인사를 한 후 재빨리 탈의실에서 편의점 직원용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하도 많이 갈아입어서인지 속도는 거의 달인급. 들어간 지 단 1분 만에 옷매무새까지 다듬고 계산대에 섰다. 스스로도 감탄할만한 실력이다. 이제부터는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며 대충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겠지만 실상 그렇지는 않다. 재고 정리도 해야 하고 손님들이 사가셔서 줄어든 물품들도 채워야 하고, 편의점 바닥이나 시식대 정리, 쓰레기통 비우기 등 편의점 알바는 의외로 해야 하는 것이 많다.
거기다 내가 맡은 파트 타임은 3시~7시. 하교하는 학생들과 막 퇴근하는 회사원들로 가장 편의점이 소란스러울 시간이다. 손님이 몰리게 되니 무슨 이런 사람이 다 있다 싶을 정도로 무례한 손님이 말로 다 하기 힘들 만큼 많다. 물론 가끔 착하신 분들도 계시긴 하지만 문제는 그게 정말로 가끔이라는 거다.
덕분에 편의점 알바를 쉽게 생각하고 찾아오는 이들 중 대부분은 대량의 잡일과 무례한 손님들의 상대에 기가 죽어 나가버리는 경우가 꽤 있다. 편의점 알바의 특징이 단기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뭐, 이유 중에는 급히 돈이 필요할 때 가장 만만히 생각한 편의점 알바를 하기 때문도 있겠지만. 그런 와중에서 내가 꽤 오래 편의점 알바를 지속하는 건 내가 감정 기복이 심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클 것이다. 그렇지만 보통 사람과 다른 걸 갖고 있다는 것 역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잠시 독백을 멈추고 나는 이곳 계산대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눈을 잠시 감았다가 떴다. 눈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어디 보자. 콜라 캔이랑 삼각김밥, 껌, 흰 우유, 커피... 일회용 면도기도 채워야 할 것 같다. 응? 왜 냉장고 안에 쓰레기가 있는 걸까. 모양새로 봐선 영수증 같다. 영수증이 무슨 보물이라도 되나 꼭꼭 숨겨놓게. 청소는 아까 점장님이 하셨는지 무척이나 깨끗해서 안 해도 괜찮을듯하다. 하지만 시식대 안쪽에 박혀 있는 라면 봉지는 제대로 버려야 되겠지.
어느 정도 관찰이 끝나고 나서 나는 천천히 물품 창고에 들어가서 아까 재고를 확인한 것들을 꺼내 바로 채워놓았다. 물론 냉장고 속에 꼭꼭 숨겨져 있는 비밀의 영수증을 빼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펼쳐보니 다른 편의점의 영수증이다. 굳이 우리 편의점에 와서 다른 편의점의 영수증을 냉장고에 고이 넣어두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대충 정리가 끝나고 나자 다시 계산대로 돌아와 한쪽에서 대기 중인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이제 진짜로 손님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거다. 여기 이 계산대 안에서. 사실상 난 이 계산대에서 움직이는 경우는 많지 않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뭐가 부족한지 이곳에서 곧장 알 수 있으니까.
그렇다. 나는 투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많은 종류의 상품이 있어도, 다른 진열대에 가려져 있어도 상관없다. 난 내가 보고 싶은 것을 그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볼 수 있다. 이게 꽤 편리한 능력이라 지금처럼 일상생활에 유용하게 쓰고 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내가 이 능력을 가진 것을 안다면 특별한 능력을 겨우 그런 곳에 쓰는 거냐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은행 금고를 털 강도도 아니고, 목욕탕을 훔쳐볼 변태도 아닌 그냥 평범한 여학생이다. 그리고 특별이란 것은 겉으로 볼 땐 매력적이고 부러울지 몰라도 사실 알고 보면 꽤 성가신 녀석이다. 따라서 난 이 능력을 함부로 남용할 생각은 없단 말씀. 지금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이 능력 편해 보이긴 하지만 쓸 때마다 붉은 눈으로 변해버리고. 유리에 비친 내 붉은 두 눈이 마치 괴물 같아 보여 썩 좋진 않다.
다시 눈을 감자 눈에 느껴지던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간다. 눈을 뜨자 유리에 비친 내 두 눈은 전과같이 검푸른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오봉 휴가로 다들 놀러 가기라도 한 것인지 오늘은 의외로 손님이 없어 한가하게 책이나 보고 있던 때였다. 지이잉- 자동문 열리는 소리가 고요하던 편의점을 가르고 손님들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이번에 온 손님은 나와 동갑 혹은 한두 살 연상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었다. 한쪽은 검은 후드에 연한 갈색빛 머리카락, 고양이 눈이 인상적인 남자애였고, 다른 한쪽은 순간 남자라고 착각할 정도의 중성적인 매력을 물씬 풍기는 여자애였다. 덥지도 않은지 보라색 긴 팔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하얀 피부와 긴 속눈썹 등의 미인상을 보지 못했다면 성별을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 있다, 있다. 서점엔 없었는데 여기서 사게 되네~"
"됐으니까 과자나 골라. 마리가 기다리겠어."
남자애는 잡지를 든 채로 장난스럽게 대답하고는 과자 진열대 쪽으로 다가가 아무 과자나 막 집어 들었다. 저렇게 막 사도 괜찮은 걸까. 친구들끼리 과자 파티라도 할 생각인가 하고 별 쓸데없는 걸 생각하고 있을 때, 남자애가 한 과자봉지를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키도, 이것 봐. 「농후한 다시마 맛국물·남자의 간식」이래! 푸흐흐... 이거 대체 누가 만든걸까?"
"너 같은 바보가 만든 거겠지."
대충 장단을 맞추기 위해 말한 여자애의 설렁설렁한 대답에 말없이 동감을 했다. 나도 저 과자를 만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 뿐이다. 제품명과 포장도 센스 없지만, 우연히 들은 손님 말에 의하면 맵고 짜고, 비릿하기도 한 것이 대체 뭔 맛인지 모르겠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잘 팔리지도 않고, 어쩌다 사는 사람도 어디까지나 호기심에 의한 거라 점장님은 저 과자의 발주를 그만둘까 심각하게 고민하셨다. 하지만 그런걸 알 리가 없는 저 고양이 눈의 남자애는 정말 살 모양인지 과자를 팔 사이에 끼었다. 저 애 또한 호기심 때문에 산 거겠지... 미리 저 둘의 미각에 명복을 빈다.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자 과자 고르기가 끝난 건지 두 사람 다 과자 몇 봉지와 음료수 한 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중에는 「농후한 다시마 맛국물·남자의 간식」도 있었다. 결국 사 가는구나... 다시 한번 짧게 명복을 빌어 주었다. 하지만 난 일개 알바생. 손님이 고른 물품에 이래저래 따질 수도 없고 그런 성격도 아니다. 빨간색 레이저 선이 검은 바코드에 닿자 삑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낸다. 그러기를 여러 번 하고 계산대 모니터에 뜬 금액을 슬쩍 바라본 뒤 담담하게 말했다.
"1,860엔입니다."
내 말에 여자애가 후드의 주머니 안에서 의외로 귀여운 지갑을 하나 꺼내 그 속을 뒤졌다. 그 애가 지갑에서 동전을 탈탈 털어 그 수를 세고 있을 때 난 자연스럽게 뒤쪽에서 봉지 두 개를 꺼내 음료수와 과자 일부, 잡지와 나머지 과자로 나누어 담았다. 음료수 같은 경우 표면에 물방울이 맺힐 수 있기 때문에 종이인 잡지랑 같이 넣으면 곤란할 테니까. 편의점 알바를 하면서 생긴 요령 중 하나로 이렇게 해야 손님한테 원성을 들을 일도 없고, 편의점 이미지에도 좋아진다. 마침 둘이 왔으니 나눠서 들어도 상관없겠지. 그런데 신경 쓰이는 건─
"...저 손님."
"응?"
"제 얼굴에 뭐가 묻기라도 했나요?"
내 얼굴에 아무것도 안 묻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결국 참다못해 남자애한테 흔해 빠진 질문 하나를 던졌다. 바코드를 찍을 때부터 느껴진 시선은 꽤 따갑게, 아니 뭔가 이질적으로 느껴져서 아무리 편의점 알바를 오래 한 나라도 버티기 힘들었다. 내 얼굴이 재미있게 생기기라도 한 걸까. 왜 빤히 쳐다보는 건지...
"아, 미안해요. 그게─"
"네?"
"흥미롭게 생긴 눈이라고 생각해서 그만."
응?
이런 말 듣는 거 처음인 데다가 의미를 모르겠다. 잠깐, 그 전에 흥미롭게 생긴 눈이란 건 대체 어떻게 생긴 눈인 걸까. 살짝 기분이 나빠져 미간을 찌푸릴 찰나였다.
─설마 내 「붉은 눈」을 본 걸까?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내가 오늘 능력을 쓴 건 편의점에 도착한 직후 손님이 없었을 때뿐. 단언컨대 이 두 사람이 오고 나선 능력을 쓴 적이 단 1초도 없다. 그리고 내가 능력이 있다는 것을 얼마나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데, 주변 사람도 아닌 완전 초면인 이 사람이 내 능력을 눈치챌 리가 없다. 그러니까 「흥미롭게 생긴 눈이네.」라는 건 그냥 농담. 분명 이상한 말을 해서 곤란해하는 편의점 알바의 모습을 보려는 심보 나쁜 장난일 것이다. 「농후한 다시마 맛국물·남자의 간식」 같은 과자를 고르는 이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런 결론에 도착하자 나는 그렇냐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여기요."
"네. 2,000엔 받았습니다. 거스름돈 140엔 맞으십니까?"
내 형식적인 물음에 여자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그렇게 열심히 동전을 세더니 결국 지폐를 낸 걸 보면 아무래도 동전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뭐, 흔히 있는 경우다. 여자애가 음료수가 든 봉투를, 남자애는 잡지가 들어 있는 봉투를 들고 자동문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웃는 얼굴을 한 채 날 보고 말했다.
"그럼."
"언제 또 봐요~"
"..안녕히가세요."
지이잉 소리와 함게 자동문이 가볍게 바닥과 마찰하며 부드럽게 열리고 두 사람을 내보냈다. ...대체 뭐였을까, 저 두사람. 여러 의미로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다음에」가 아니라 「언제」라니... 전자였다면 또 편의점에 방문하겠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괜찮겠지만 후자의 경우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이 곳에 와서 만나는, 그런 의도적인 만남이 아니라 왠지 「필연적인 만남」을 예상하는듯한...
아, 잘 모르겠다. 그냥 기분탓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고 넘겨버리고 싶다. 그치만 자꾸 신경쓰인다. 아까 그 말들이. 그리고 스치며 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언뜻 보였던 「붉은 눈빛」이... 그거 때문일까, 어쩐지 그 애들이 했던 말이 진짜로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이 든다.
뭐,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야. 일어날 확신도 없는, 그런 아무런 근거없는 예감으로 쓸데 없는 걱정을 하고 싶진 않다. 만약 진짜로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 여러가지 물어봐도 괜찮겠지. 한 번 기지개를 쭉 핀 후 잡지코너에 가서 아까 고양이눈의 남자애가 골랐던 잡지책 한 권을 집어든다. 「대특집! 초~ 그리운 걸 패션 대집합」이라는 쪽팔린 제목의 잡지. 표지에는 지금으로선 절대 입는 사람이 없을 것 같은 옷을 입은 여러명의 모델이 나란히 등장하고 있었다. 과자에 이어서 잡지도 악취미적이다. 그래도 소제목을 보니 재미있어 보이는 기사나 코너도 있는 것 같아서 그대로 계산대에 가져와서 펼쳤다. 시간 때우기에도 괜찮을 것 같고 어차피 이 잡지는 샘플로 존재하는 것이니 좀 봐도 상관없다. 안 봐도 좋을 옛 패션 페이지를 그냥 휙휙 넘기고 있는데 자동문 특유의 마찰음이 또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아주 귀여운 손님으로 검은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초등학생 여자애와 그 또래로 보이는 갈색머리의 남자애였다. 내가 편의점에 안에 있는 동안 기온이 더 상승되기라도 한 건지 남자애는 물놀이라도 하고 온 것처럼 보일 정도로 땀에 푹 젖어있었다. 그에 반해 여자애쪽은 지금은 한 손에 고이 잡고 있는 양산 덕분인지 땀방울 하나없이 고고한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이런 생각하는거 남자애한테 좀 미안하긴 한데 참 많이 대조되었다.
"너 그만 좀 헥헥 거릴 수 없어?"
"미, 미안. 하지만 도시가 이렇게 더울줄은 몰랐어..."
"오늘 많이 더운 건 사실이지만 넌 너무 심해. 기분 나빠."
"그, 그런가?"
여자애가 차가운 얼굴로 딱딱한 말을 내뱉지만 남자애는 별 신경 안 쓰는지 실실 웃기만 했다. 속이 없는 건지 아니면 저 애를 좋아해서 그러는건지 분간이 잘 가지않는다. 확실히 알 수 있는건 저 둘이 사귀는 사이는 아니라는 거정도? 캐리어와 각종 가방을 보니 방학을 맞아 여기로 놀러온 듯한데, 문제는 이 짐들이 전부 남자애한테 쏠려있다는 거다. 여자애의 고고한 행동과 남자애의 속없는 듯한 행동들을 보면 영락없는 아가씨와 짐꾼이 연상된다. 어쨌든 어린 아가씨와 짐꾼은 다른 것들엔 눈길도 주지않고 곧장 아이스크림이 담긴 대형 냉장고로 향했다. 저 애들 반응을 보니 오늘 아이스크림 사러 많이들 올 것 같다. 미리미리 채워두길 잘했네. 고르는 중 '우와,종류 많아.'라던지 '좀 조용히 골라.'라는 말들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고르는 시간이 걸릴 것 같아 소제목 중에서 재미있을거같다고 생각한 페이지를 향해 종이를 넘겼다.
그러다 '초인기 아이돌, 키사라기 모모 드라마 출연 확정!'이라는 페이지에 시선이 꽂혔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아래, 활기찬 복장의 키사라기 모모가 귀엽게 웃고 있었다. 이 잡지는 '초'라는 말을 좋아하기라도 하는걸까. 표지서부터 기사까지 웬만하면 다 '초'라는 글자가 들어가있었다. 그런데 이 애 초인기 아이돌인 건 알았지만 데뷔한지 얼마 안 된 신인 아니었나? 설마 이정도 인기일줄은... 드라마 첫 방영 날짜를 보아하니 이제 슬슬 드라마 찰영이 시작될 시기일 듯했다. 이런 더운 날씨에 드라마 찰영이라니 이 애도 고생이 많겠다 싶다.
"앗, 히요리 이건 내가 사줄게."
"됐어. 이 여행에서 드는 돈은 내가 전부 부담하기로 했었잖아. 니가 너무 헥헥거려서 사주는거니까 앞으론 좀 조용히 다녀."
"으, 응! 알겠어."
아이스크림를 들고 계산대로 다가오는 두 아이를 보고 서둘러 잡지를 덮고 쪽팔린 표지를 보지 못하게 한 쪽으로 치워 버렸다. 그렇게나 고심하더니 고른것은 결국 어디에서나 살 수 있는 평범한 하드바 두 개였다. 가볍게 바코드를 찍은뒤 미소를 지으며 160엔이라고 말했지만 여자애는 아무 반응없이 지갑속에서 동전을 꺼낼 뿐이었다. 뭐,일상적인 일이다. 오히려 이런 손님들이 상대하기가 더 수월하다.
"아, 잠깐 길 좀 물어도 될까요? 저희가 여기로 가려고 하는데요."
주소가 적힌 약도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여자아이가 예의바르게 물어보았다. 그 태도는 아까 남자애에게 보여준 것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순간 위화감이 일었다. 어찌되었든 어린 아이가 예의 바르게 물어보는 것을 거절할 수는 없다. 여자애에게서 약도를 건네받고 빠르게 눈으로 스캔한다.
"어디 보자... 편의점에서 나가서 왼쪽으로 꺾어지면 오르막길이 나옵니다. 그 길을 따라 쭉 올라간 뒤 오르쪽으로 바로 꺾어지면 아마 바로 보일거예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여기 계산이요."
정확히 160엔을 받고 계산대 아래 돈 넣는곳에 집어넣는 동안 두 아이는 아이스크림을 뜯고 한 입 베어물며 편의점 밖으로 나갔다.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쓰레기는 제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고 갔다. 요새 아이스크림을 사가시는 손님들이 그냥 쓰레기를 바닥에 떨구고 가는 일이 많아서 짜증났었는데 그래도 저 둘은 예의라는 개념이 붙어있나보다.
지이잉-
"아,어서오세요."
두 초등학생이 나가고 나자 하나둘 손님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쇼핑 나왔다가 잠깐 들린 여학생들부터 아까 아이들처럼 단순히 더워서 찾아온 손님, 간식거리를 사러온 꼬마애들까지. 아까까지의 여유가 무색할 정도로 쉬지 않고 몰려온다. 자, 지금부터라도 정신 바짝 차리자, 이치카. 손님들은 더 늘어날 거고 물품들은 빠르게 빠져 나갈거다. 자동문의 마찰음, 뚜벅거리는 손님의 발자국과 바스락거리며 물품을 고르는 소리... 몇 백 일이나 들어 귀에 익은 그 소리를 오늘도 귀에 담으며 나는 몸을 움직였다.
핸드폰 액정에 당당히 새겨져 있는 8월 14일 12:33을 보며, 뺨을 타고 턱까지 내려온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원래 이 시간에는 방학이니까 집에서 집안일을 하거나 에어컨이라도 쐬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난 밖에 나와 어제보다 더 강렬해진 태양의 공격을 온몸으로 받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횡단보도를 빨간 불로 바뀌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건너자 현실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거대한 백화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의 그 어처구니없는 실수만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땀을 흘릴 일도, 백화점에 와서 쓸데없는 지출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그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알아차린 건 7시를 넘긴 조금 늦은 시간, 알바를 끝내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왔을 때였다. 평소처럼 번호키를 풀고 깜깜한 집 안으로 들어왔을 때, 태양열에 달궈진 집안 열기와 함께 희미하게 나는 탄 냄새를 감지했다. 혼자 살아서 나갈 때는 창문도 예외 없이 다 잠그고 가서, 미처 냄새가 빠지지 못하고 집안을 맴돈 모양이다. 뭐, 그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서 서둘러 손을 더듬어 형광등을 켜고 부엌으로 향했다. 차츰차츰 더듬은 기억 속엔 내가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 같은 것을 올려놨던 적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이 샘솟았다. 그래도 역시 내 기억력은 나쁘지 않았는지 가스레인지 위엔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반짝하고 광택을 뽐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코가 잘못된 건가 하고 방심한 채 뒤를 돌아봤을 때 난 발견했다. 햇살이 잘 드는 창문 아래 방치된 내 노트북을. 창문은 제대로 잠겨 있었지만 한여름의 열기까지 막지 못한 모양이었다. 제대로 방어도 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공격당한 노트북은 장렬히 사망해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사태에 당황해하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렵지 않게 노트북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알바 시간이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거실의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 내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거실의 창은 베란다 때문에 크고 널찍했기 때문에 오후가 되면 거실 중앙에 놓인 테이블은 가볍게 햇빛에 노출될 수 있었다. 고로 내 노트북은 오늘 여러 사람을 열사병으로 쓰러트리게 만든 강렬한 열기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왜 항상 치고 나가던 커튼을 어제만 치지 않고 나가버린 걸까! 왜 많고 많은 곳들 중에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놓은 걸까! 사람도 버티기 힘든 열기에 노트북을 방치시켜버린 걸까! 잠시 자학해봤지만 그렇다고 노트북이 살아날 리가 없었다.
망가진 건 어쩔 수 없으니 A/S 센터에 맡겨야 겠다 생각하고 노트북을 살펴봤다. 그렇지만 비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노트북은 소생 불가능한 상태였다. 노트북 액정에 금이 간 정도는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원래부터 내려쬐던 열기에 배터리가 터지기라도 했는지 노트북 안쪽이 좀 녹아있었다. 테이블에도 멍 자국처럼 그을음이 생긴 정도니 말 다 했지.
이러한 이유로 사망한 노트북을 대용할 새 노트북을 사러 이 백화점에 온 거다. 바이바이, 옛 노트북아. 넌 내 좋은 심심풀이 상대였단다. 나도 쓸데없이 큰 지출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노트북이 없으면 꽤 허전해진다. 인터넷 정도야 핸드폰으로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한도가 있고, 노트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업들이 많기에 하나 장만하는 수 밖에 없다. 마음 같아선 노트북이 아닌 데스트탑 세트를 장만하고 싶긴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 큰돈을 소비하는 것은 역시 부담스럽다. 단 하나 과거의 나를 칭찬할 게 있다면 옛 노트북에 있던 중요 데이터들을 미리미리 백업해놨다는 점이다. 그마저도 안 했더라면 지금쯤 난 상당한 멘탈 붕괴에 빠져있을 게 분명하다.
작년에 지어진 이 백화점은 전자제품은 물론이고 옷, 식품, 도서, 앨범 등 다양한 분야까지 섭렵하고 있어 나는 물론 이 도시의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 중 하나다. 최근에 지어진 건물답게 거대하고 화려한 외형을 하고 있어서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한가지 흠이랄까. 여기에 처음 오는 사람이 보면 RPG 게임에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할 만한 정도이니. 이런 생각 따위를 하며 백화점 입구를 향해 길게 뻗어 있는 알록달록한 직사각형의 돌을 따라 걸어갔다. 사람들 틈을 빠져나가 안으로 들어서니 상쾌한 냉기가 나를 감싸준다. 역시 편의점보다 냉방이 시원하게 되어있다. 안내판을 보니 가전제품 코너는 7층. 높은 곳은 꺼려지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가긴 싫으니 어쩔 수 없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는 인구수를 보면 그냥 계단으로 가고 싶긴 하지만 이 정도 높이면 엘리베이터쪽이 더 나을─
"여기까지 필사적이었던 주인님에게 맨 먼저 하는 소리가 그거냐!!"
아, 깜짝이야.
갑자기 난 큰 소리에 자동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가 돌려진다. 그러자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에게 시선이 몰려 당황스러워하고 있는 한 남자였다. 나이는 나보다 1, 2살 연상쯤일까? 그 남자는 이런 날씨에 덥지도 않은지 긴 팔의 빨간 저지를 입고 핸드폰과 한쪽 귀를 하얀 이어폰으로 잇고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한 말은 통화 상대에게 한 말인가? 그런데 주인님이라니 대체 무슨 관계인 거야. 여러 시선에 어찌할 줄 모르던 그 사람은 결국 '아... 아니... 하하...'라고 중얼거리며 상당히 미묘한 억지 미소를 짓다 빠르게 사라졌다.
...이상한 사람이다. 왠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모르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래야 했다.
뭐, 만약에 저 사람이 나였다면 나도 분명 저렇게 할 테지만. 저기선 뭐라 해명하는 게 더 이상하고 어차피 한 번 마주치고 헤어질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필요도 없으니까 저게 최선책이겠지. 그 전에 이상한 말로 큰 소리 내지 않는 게 더 현명했겠지만.
띠링-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열리지 않을 것 같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무수한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간다. 그 모습이 마치 엘리베이터가 사람들을 잡아먹는 것처럼 보인다. 이걸 놓치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 지 모르기에 나도 최대한 먹히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다행히 세이프. 한순간에 무게가 늘어난 엘리베이터는 모두를 실고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위로 올라가는 느낌에 몸이 조금 굳어졌지만, 사람들 무리에 바깥은 안 보이고 서 있는 것에만 집중해보니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다.
층층이 멈추기를 6번.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7번째에 사람들 틈새를 헤쳐 매장 안으로 들어섰다. 대망의 7층에 발을 내딛자 투명한 유리로 덮어진 대형 창문이 햇빛과 바깥 풍경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높다면서 창밖을 내다볼지도 모르겠지만 엘리베이터만으로도 몸이 굳는 나에게는 절대로 무리. 황급히 시선을 창에서 떼어내며 절대로 저 근처 가까이엔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 목표인 노트북이 창문 쪽이 아닌 안쪽에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PC 용품 판매장 바로 옆으로 가자 모양도 색깔도 다 제각각인 여러 노트북이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노트북들은 오른쪽과 왼쪽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 중 왼쪽에 '학생분들께 특히 추천!'이라는 조금 흔한 팻말이 꽃혀 있었다. 슬쩍 눈으로 훑어보니 확실히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귀엽고 앙증맞은 디자인이 많았다. 하지만 난 디자인만 보고 사는 타입이 아니므로 일단 가장 깔끔해 보이는 노트북에 접근했다. 그리고 나선 자판부분을 가볍게 두드리거나 터치패드를 만져보기도 하고 들어보기도 하는 등 여러 접촉을 시도했다. 제3자가 보면 노트북 가지고 장난치는 거로 보이겠지만 이게 다 좋은 노트북을 사기 위한 노력이다. 자판이나 터치패드의 느낌, 휴대가 가능할 정도로 가벼운지 등을 살펴보고 있는 거다. 물론 그러면서 옆에 쓰여 있는 사양이나 성능들을 살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에 사면 햇빛 아래에 두고 가는 터무니없는 실수는 절대 하지 않을 것이므로, 오랫동안 쓸 만 한 걸 사야 한다. 지금 만져보는 건 자판 느낌은 나쁘지 않지만, 터치패드에 따른 커서의 움직임이 그리 부드럽지가 않다. 물론 그건 집에 있는 마우스를 사용하면 그리 문제가 될 게 아니지만, 무게가 꽤 나가서 휴대는 힘들 듯하다. 가끔 편의점에 가져가서 숙제나 웹서핑을 하는데 이래선 힘들겠는걸. 아... 태블릿PC 갖고 싶다. 기왕 사는 거 그걸로 사버릴까... 내적 갈등 속에서 첫 번째 평가를 마친 후 그 옆의 노트북으로 옮겨갈 때 오른쪽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 본 핸드폰에서는 수화기 모양과 함께 점장님이라는 글씨와 번호가 떠올라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면서 액정을 쓱 드래그했다.
"여보세요? 점장님?"
“아, 이치카니? 저기 내가 헷갈려서 그러는데 오늘 쉰다고 했었니?”
"아뇨.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에요."
“역시 그렇구나~ 미안하다. 나이가 들다 보니 깜박깜박해서 말이야.”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어쩐지 주변이 조금 시끄러운 거 같은데 밖이니?”
"네, 뭐 좀 살 게 있어서 백화점에─"
─그때였다.
정말로 갑자기 귀를 찢어놓을 듯한 굉음이 플로어 안에 울려 퍼졌다. 반사적으로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지만, 머릿속에 박힌 굉음이 몇 번이나 리플레이 되었다. 들어본 적 있는, 하지만 현실에서 들어본 적은 없는 이 특이하고 소름 돋는 소리. 손으로 미처 막아지지 않는 고함이 여기저기 터져 나오자 두 눈을 크게 뜨고 플로어를 바라봤다. 서서히 내려오고 있는 셔터, 총에 맞은 듯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여자, 허둥지둥 도망치는 사람들과 그것을 저지하고 있는 어떠한 무리의 사람들... 그리고 영화에서 나온 것만 같은 특수부대 같은 옷을 입고 한 손엔 총을 든 채 거만하게 서있는 수염의 남자까지.
“여보세요?! 이치카? 이치카 너 괜찮은 거니?!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이치카!!”
전화기 안쪽에서 다급한 점장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하지만 난 그걸 들을 기력도 없어 휴대폰을 든 손을 아래로 떨궜다.
아수라장.
이 광경을 아수라장 말고 뭐라 표현해야 좋을까. 내가 이 아수라장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자 모든 사고가 멈추고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걸 실감이라도 나게 해주려는 듯 어떤 험악하게 생긴 사람들이 플로어 전체에 흩어져있던 손님들을 억지로 모으고 있었다. 휴대전화는 다행히 뺏기기 전에 통화 종료를 누르고 주머니에 넣었다.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가만히 무릎을 꿇은 나에게 한 남자가 두 손목을 검 테이프 같은 것으로 꽁꽁 묶어버렸다. 내가 앉아 있는 이곳엔 전부 나와 같은 모습들이었다.
"...그래서, 이걸로 전부냐?"
"네. 쇼핑 고객까지 포함해 이 플로어의 있는 전원입니다."
"헤에. 아~ 휴일이라 즐거운 쇼핑을 만끽하는 중이었을 텐데, 안됐네. 진짜 운도 없네, 댁들."
수염 있는 남자가 내뱉은 불성실하기 짝이 없는 말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니 내가 결코 가까이 가지 않겠다 맹세한 창문은 회색 셔터로 덮어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셔터로 엘리베이터 홀과 격리된 지 오래인 듯 했다. 바깥에서는 경찰로 추정되는 사이렌과 확성기의 교섭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 편, 우리 앞에는 총 아홉 명의 사람들만이 서 있었다. 그중 세 명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다른 세 명은 셔터 쪽에, 우리들 앞에는 리더로 추정되는 수염 있는 남자와 다른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마치 영화나 만화속에서나 나올 듯한 장면이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지자 정지되었던 사고가 삐걱거리며 조금씩 돌아간다. 느리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윤곽을 드러내는 한가지의 생각은 너무나도 비현실적이라 머리가 받아주질 않는다. 하지만 그 생각 이외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믿기지는 않지만 이 사람들 테러리스트다!
"13시. 시간입니다."
"어어."
시계를 흘낏거리던 남자의 말에 수염 있는 남자는 휴대전화를 척 꺼내 들고 마치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것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목소리를 듣는 게 친구가 아니라 인질로 잡힌 우리들과 바깥의 경찰이라는 사실이겠지만. 수염 있는 남자의 목소리는 휴대전화를 타고 컴퓨터까지도 장악한 모양인지 대용량 스피커를 통해 대 음량으로 흘러나왔다.
"아~ 마이크 테스트. 어, 들리지? 에~ 경찰 여러분, 수고 많으십니다.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듣도록."
남자의 말에 바깥에서 들리던 교섭소리가 뚝 끊긴다. 일단은 테러리스트의 말을 들어볼 생각인 듯하다.
"이미 알고 있듯이, 이 플로어는 우리가 점거했다. 수십 명의 인질들도 뭐 지금은 무사하다. 지금은 말이지. 그래서, 간결하게 말하자면 요구는 하나. 지금부터 30분 이내에 10억 엔을 준비해라. 건네받는건 30분 후 이 건물 최상층에서 한다. 이쪽에서는 한 명이 이미 건네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고로, 헬기에서 떨어트려 줘. 위조지폐라던가 하는 말 같은 건 소용없으니 그만두도록. 그리고 뭐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바로 준비할 수 없다든가, 인질의 해방이 먼저라든가 하는 게 나올 시, 여기 있는 녀석들 바로, 전원, 죽인다"
10억 엔. 아직 경제 개념이 없는 어린애나 말할 듯한 어마어마한 금액을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데다 모두의 목숨을 돈을 얻기 위한 도구 취급하고 있다. 저 말이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무서워서 아랫입술을 깨물자 비릿한 맛이 감돌았다. 남자의 말에 잡혀 있는 사람들이 술렁거리며 반응하지만, 총을 겨누던 남자들 세 명에 의해 얼마 못 가 저지당하고 말았다. 한쪽에선 흐느끼는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와 공포심을 더욱 돋우고 있었다.
"뭐 이런 느낌이야. 선처해보라고? 지금 말한 거 하나라도 엎을 시에는... 아~ 뭐 알겠지? 그런 느낌으로 잘 부탁해."
자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건지 알고는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태평한 말투에 안 그래도 받아들이기 힘든 이 상황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난 지금 인질로 잡혀있고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 경찰이 신속하게 와주긴 했지만 나를 포함한 무수한 인질이 잡혀있어 함부로 나설 수도 없다. 그렇다고 이딴 짓을 하는 테러리스트에게 순순히 10억 엔을 내어줄 경찰은 있을까. 애초에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여기는 저 녀석들이 10억 엔을 받은 뒤 우리를 순순히 풀어주리란 보장도 없다.
젠장,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선뜻 뭔가를 할 수 없는 이 상황. 그렇다고 가만히 있기는 싫다. 사람이 많긴 하지만 다들 시선은 테러리스트에게 향해 있고, 테러리스트를 보고 있지 않아도 나를 볼 정신은 없을 테니 망설이지 않아도 된다.
혹시 들킬지도 모르기에 후드를 쓰고 나서 잠시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눈 안쪽이 뜨거워지며 두 눈이 붉은 색으로 물드는 게 느껴진다. 조용히 눈을 뜨고 백화점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한다.
셔터 바로 앞에 여러 명의 경찰이 각종 총 등으로 위장한 채 모여있다. 뭐라고 수군거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테러리스트들을 어떻게 상대할지를 의논하는 듯하다. 이 상황을 얼른 어떻게 좀 해줬으면 좋겠지만, 표정들을 보아하니 그럴듯한 작전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고개를 들어 위를 살펴보니 9층쯤 각종 컴퓨터 및 CCTV 화면이 보이는 곳에 꽁꽁 묶여있는 몇 명의 사람들과 느긋하게 앉아있는 남자가 있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백화점 시스템을 해킹한 모양이다. 단 몇분만에 이 플로어에 있던 모두를 인질로 잡고 해커까지 동원해 백화점을 완전히 장악한 데다, 경찰이 왔는데도 이처럼 여유만만인 걸 보면 이런 짓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닌 프로급인 모양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왜 하필이면 테러에 프로급의 실력을 쌓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일단 테러리스트의 말을 확인해보기로 한다.
좀 더 위쪽을 보기 위해 눈에 더욱 집중하니 옥상에 10명 정도는 거뜬히 태울 만한 헬기와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굳이 백화점 옥상에서 거래를 요청했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저 헬기가 도주 루트인가.
해커에 의해 백화점은 완전히 테러리스트들의 손아귀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 경찰들은 나를 비롯한 인질들 때문에 섣불리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저들의 요구인 10억엔을 줄 수도 없다. 뭘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는 순간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간다.
...어째 능력을 쓰면 쓸수록 절망감만 커지는 것 같다. 나, 이대로 죽는 걸까... 죽음이란 공포 앞에 저절로 몸 전체에서 힘이 풀려간다.
「스마일~ 찰칵!」
"에...?"
뭐지? 이 상황에 완벽하게 미스매치되는 이 효과음은? 서둘러 이 소리의 행방을 찾을 필요는 없었다. 너무나도 눈에 띄었으니까. 모두 검 테이프로 손이 묶인 채 겁을 먹은 얼굴로 벌벌 떨고 있는데, 이 효과음의 주인공은 묶여 있어야 할 터인 손으로 자유롭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몰래 가족이나 경찰에게 연락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친구한테 재미있는 문자를 보내는 한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응?"
너무 어이없고 황당해서 빤히 쳐다본 탓일까. 소년이 시선을 눈치채고 이쪽을 바라봤다. 저쪽도 나 못지않게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이 마주치자 내가 지금 붉은 눈이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능력을 풀려고 했지만, 순간 뇌 속을 지나치는 한 기억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저 소년 어디서 본 것 같더라니 어제 편의점 알바 때 본─
"고양이 눈─"
"자자, 조용히 해야지!"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을 고양이 눈인 소년이 급히 내 입을 틀어막아 겨우 막을 수 있었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다. 그냥 말해버렸다면... 아니, 상상하지 말자. 고양이 눈 덕분에 살기는 했지만, 숨이 막히므로 손을 치워내는 그 순간.
봤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을 말이다.
"아, 역시. 너도 「붉은 눈」이네."
고양이 눈의 말에 반사적으로 후드를 깊게 눌러쓰니 고양이 눈이 잠시 당황하다 이내 쿡쿡 웃었다. 이미 들킨 마당에 이런 대처는 좀 우스웠나... 그리고 「너도」라는 건 자신 역시 붉은 눈인 걸 인정하는 것이니... 나 말고도 붉은 눈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니 많이 놀랐지만 애써 진정하려 애썼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에는 안 들릴만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응? 아아, 지금은 자세히 설명해줄 순 없어. 미안. 일단 저 사람들 눈에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보인다」라는 것만 알아둬."
고양이 눈의 말에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양이 눈의 말대로 설명 같은 거 들을 시간은 없으니. 그리고 저 애도 「붉은 눈」이란 것은 나처럼 투시 능력은 아니더라도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자세히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말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받아들이는 것은 조금 버겁지만... 나를 제외하고 붉은 눈은 처음 보기도 해서 물어볼 것도, 듣고 싶은 것도 잔뜩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겨우 목 아래로 삼켰다. 이런 내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이야~말이 잘 통하네~'라며 실실 웃고 있는 고양이 눈을 보자니 어쩐지 긴장이 탁 풀리는 기분이다. 이 애, 지금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거 맞아? 공기마저 공포감과 긴장감으로 가득 찬 이 상황에서 이 애한테만은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띠리링-
"아, 문자 왔다."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양이 눈은 태평하게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아마 아까 고양이 눈이 찍은 사진이 담은 문자에 대한 답장일 거다. 그렇다면 적어도 「아하하 그 얘기 재밌네!」라는 시시껄렁한 문자는 아닐 테지.
봐야 한다.
지금 고양이 눈과 마주 보고 있어서 액정이 전혀 보이진 않지만, 능력을 사용하면 어떻게든 볼 수 있다. 뭔가 남의 문자를 함부로 훔쳐보는 것 같긴 하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질 상황이 아니다. 내 두 눈의 붉은빛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자 휴대폰 너머 좌우 반대로 된 문자 내용이 보였다.
제목 : 카노씨, 키사라기입니다.
카노씨, 제가 이 상황을 타파할 작전을 하나 세워보았습니다!
일단 단장의 능력으로 「눈을 가린」 저희가 물건들을 쓰러트린다든가 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저희 쪽으로 주목시킬 테니까 그때 카노씨는 저희 오빠의 손을 풀어주세요.
그러면 오빠가 분명 에네쨩을─ 에... 그러니까 오빠의 핸드폰에 있는 프로그램인 소녀인데요.
아무튼 오빠가 에네쨩을 아무 컴퓨터에 들여보내기만 하면 에네쨩이 이 백화점의 컴퓨터 안으로 들어가 분명 모든 셔터를 열어줄 거예요.
그 뒤 경찰들과 테러리스트들 간에 총격전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 제가 모두의 「눈을 뺏은 후」 그 눈을 마리쨩이 모두 「눈을 마주쳐서」 모두를 굳게 만든 뒤 모든 걸 경찰에게 맡기고 메카메카단 전체 「눈 가리기」를 하고 이곳에서 탈출합니다!!
그리고 저 리더로 보이는 남자 지금 꽤 지루해 보이는 게 이따가 시간을 단축하는 방송을 할 것 같아요.
그러므로 작전의 시작은 테러리스트들이 두 번째 방송을 시작할 때!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뭔 소리일까, 저건.
프로그램인 소녀라는 에네쨩도 그렇고 눈을 가린다느니, 뺏는다느니, 마주친다느니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말 그대로의 의미는 아닐 테고 일종의 암호 같은 걸까? 어쨌든 의미를 모르겠고 짐작조차 가지 않아서 내용 파악이 전혀 안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메카메카단이란건 대체..."
"아하하. 키사라기쨩 메카메카단이 아니라 「메카쿠시단」이라니까. 또 틀렸네. 그런데 너 이거 본 거야?"
나도 모르게 생각이 말로 흘러나온 건지 고양이 눈, 아니 문자에 따르면 카노겠지. 아무튼 그가 나에게 물었다. 순간 놀라서 움찔해 버렸지만, 어차피 들킨 거 더 숨길 필요를 못 느꼈기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반응에 카노는 「흐응~ 그런가. 그런 능력인 건가~?」라며 또 웃었다. 인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이 상황에 웃고 있는 저 얼굴이 참 어이없는 동시에 얄밉다. 어떻게 이 상황에서 자신은 마치 이 상황을 지켜보기만 한다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는 걸까.
"음~이해를 돕기 위해 한마디 하자면 나도 이 문자를 보낸 애들도 모두 능력을 가진 「붉은 눈」이야."
"뭐? 그럼 메카쿠시단이란 건 능력자들의 모임 같은 거야?"
"비슷해. 저기 있는데 혹시 보여?"
고개를 돌려 카노가 가르킨 방향을 쳐다보자 플로어 안쪽에 숨어있는 세 명의 여자아이들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어제 고양이 눈과 함께 있던 후드의 여자애였고, 요즘 대세 아이돌인 키사라기 모모도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저 애도 어떠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까. 태연하게 방송 같은 데를 나가는 걸 보면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사람 일은 정말 모르는 거구나 싶다. 그 두 명 사이에 있는 몽실몽실한 하얀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애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무척 귀여웠다. 저런 여자애들이랑 아는 사이라니 이 녀석 대체 뭐지.
아니, 잠깐 내가 지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니!
카노와 있다 보니 나도 어느새 긴장감이 없어진 모양이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제대로 긴장하고 있어야 하는데 이런...
"...보여. 저기 구석에서 여자애 세 명이 몸을 숨기고 있잖아."
"보인다니 다행이네! 키도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못 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여기에 없다고 깎아내리다니. 키사라기를 제외한 나머지 둘 중 누구 키도인지 모르겠지만 만약 여기 있었다면 카노를 한 대 때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그 문자의 「오빠」는 누구야?"
"여기. 우리 바로 앞에 붉은 저지를 입고 겁에 벌벌 떨고 있는 남자애입니다! 이어폰 너머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에네쨩」이란 애도 있는 거 같네."
저 붉은 저지는 아까 1층에서 소리치던 남자... 그동안 겁을 먹고 있어서 몰랐는데 확실히 이어폰 너머로 밝은 여자애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주인님! 주인님!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빨리 말하지 않으면 주인님의 부끄러운 데이터들을 인터넷에 다 퍼트릴 거라고요?!"
...참 귀여운 협박이다. 아니, 따지자면 질 나쁜 협박이겠지만 아까 전문 테러리스트의 협박을 들어서인지 상대적으로 귀엽다고 느껴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1층에서 붉은 저지의 말은 통화 상대가 아니라 이 애에게 하려던 거였나 보다.
살짝 능력을 써 이어폰이 나온 주머니 안쪽을 살펴보니 검은색 휴대폰 액정 안에 파란색의 귀여운 여자애가 다리 아래쪽이 없는데도 열심히 발버둥을 치며 말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의 소녀라더니 정말 딱 그 모습이다. 가장 짧은 단어로 저 '에네'라는 애를 훌륭하게 표현한 키사라기에게 조용히 박수를 보낸다. 솔직히 믿기지는 않지만 아무리 봐도 A.I(인공지능)인 거 같고 초조한 모습을 보아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 정도는 눈치챈 모양이다. 저 애가 백화점 안의 컴퓨터를 장악한다면 이 상황을 단번에 타파할 수 있다. 아까 본 의미불명의 문자의 내용 일부가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응. 저 사람 휴대폰 안에 에네가 확실히 있어."
"그래? 그럼 답장을 보내볼까~"
카노가 이번에도 친구한테 재미있는 문자를 보내는 한 소년의 모습으로 휴대전화를 두드린다.
제목 : 재밌어!
본문 : 키사라기쨩의 작전 재밌네! 키사라기쨩이 말한 애 확실히 있어!
아까부터 말소리가 들려오는데 야무지고 좋은 아이잖아!
일단 오빠분이 키사라기쨩이랑 같은 생각을 하는지 확인해 볼테니까 들키지 않게 근처까지 올 수 있어?
그리고 또 기념 촬영했습니다, 한가해서─
─가 아니라! 또다른 신입 후보를 발견해서.
여기까지 적고 나서 갑자기 카노가 나를 끌어당기더니 셀카 모드의 휴대전화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다시 한번 '스마일~ 찰칵!'이라는 굉장히 부끄러운 소리가 들려오고 얼굴이 빨개진다. 순간 당황해버려서 굉장히 바보 같은 표정으로 찍혀버렸을 텐데! 보내는 걸 저지하고 싶지만 큰 소리는 낼 수 없고 두 손은 묶여 있는 상태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휴대전화 액정에 떠오른 '송신 완료'라는 문구를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아아! 키사라기 부탁이야! 방금 그 사진은 이상한 문자와 함께 그냥 삭제해줘!
...말이 전해지지도 않을 텐데 부탁이라니 순간 내가 어떻게 된 거 같다.
"저기, 지금 키도네 어디있는지 보여? 문자 보내느라 놓쳐버렸지 뭐야."
"응? 걔들이라면 저기 통로 끝에 있잖아."
"아, 진짜다. 어이~ 키도~!"
카노가 활짝 웃으며 저 애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돌아오는 건 후드의 여자애의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같은 심정이니 이해하지만. 키사라기는 붉은 저지의 남자, 그러니까 자신의 오빠를 바라보고 있었고 하얀 머리의 여자애는 그 둘과 조금 떨어진 채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그렇다면 「키도」라는 건 저 후드의 여자애를 말하는 걸까. 느낌상 문자의 「단장」도 저 애 같다. 단장이라는 사람이 작전 실행 직전 딴짓을 하진 않을 거 아닌가. 그러다가 후드의 여자애와 그만 눈이 마주치고 말았는데 내가 자신을 본다는 것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노의 말대로 저 애도 「붉은 눈」이었다.
...잠깐, 겨우 봤다는 거에 저렇게나 놀란다고? 그리고 숨어있다고는 하지만 꽤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니.
─아, 그런가. 「눈을 가린다」라는 건 그런 능력을 뜻하는 거였나.
문자의 내용이 또 하나 이해가 된 건 기쁘지만 이대로 눈을 계속 맞추고 있을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저쪽은 내 생각보다 더 놀란 건지 키도로 추정되는 애는 왼손으론 키사라기를 툭툭 건드리고 오른손 손가락으론 내 쪽을 가리키며 놀라고 있었다. 그에 키사라기의 시선까지 나에게 향해서 살짝 당황했지만 침을 한번 삼키고 당당히 그들을 눈을 바라보며 입을 뻐끔거렸다.
'잘 부탁해.'
소리로는 내지 못한 입 모양뿐이었지만 뜻은 제대로 전해진 건지 놀란 표정을 대신 각오한 표정으로 나를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난 여기에 얌전히 묶여 있어서 돕지도 못하고 응원밖에 할 수 없는데 저 애들이라면 믿어도 좋을 것 같다. 각오한 눈빛도 그렇지만 저 행동에 어떠한 거짓도 보이지 않는다. 진심, 100% 진심. 무조건 성공하겠다는 저 애들의 의지가 너무나 잘 보인다. 그러니까 믿을게. 제발 이 믿음을 저버리지 말아줘...
그때 하얀 여자애가 드디어 등을 돌렸는데 그 손엔 전기안마기를 들려 있었다. 그 모습에 두 사람과 나까지 맥이 빠진 표정을 짓고 말았다. 뒤돌아서 뭐 하나 했더니 저 전기안마기를 보고 있었던 건가. 그나저나 대체 저건 왜 들고 온 거지? 설마 무기로라도 쓰려고 가져온 건 아닐 테고─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하얀 여자애가 엎어지며 키도의 비명이 터져 나온 동시에 전기안마기가 수염 있는 남자의 후두부에 직격하고 말았다. 순간 나도 심장이 철렁했지만 너무나 놀란 탓에 다행히도 아무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그리고 저쪽도 천만다행으로 전기안마기가 떨어지기 직전 키도가 잘 캐치해 서둘러 도망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고통까지 도망가는 건 아니니 수염 있는 남자는 아파하며 머리를 감쌌지만. 설마 하얀 여자애가 갖고 온 전기안마기가 진짜로 무기로 쓰일 줄이야. 능력을 쓰고 황급히 도망간 탓에 키도를 못 본 수염 있는 남자는 자신의 옆에 있던 남자가 한 짓이라고 생각했는지 냅다 그의 배를 힘껏 때렸다. 전기안마기 사건의 희생양이 된 저분께 애도를... 말은 그렇게 해도 저 사람도 결국 테러리스트니 불쌍하단 생각은 들진 않는다. 나랑 저 애들은 지금 죽는 줄 알고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있는 한편, 카노는 그게 한편의 코미디로 보이기라도 했는지 키득키득 웃고 있다. 몇 번이나 말했던 거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웃을 수 있는 건지... 이젠 황당하다 못해 어이없다.
"에?"
카노의 웃음소리가 들린 건지 붉은 저지의 남자애가 이쪽을 돌아봤다. 난 거의 반사적으로 시선을 회피했지만, 카노는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붉은 저지에게 말을 걸었다.
"아, 아니. 미안, 미안. 너무 이상해서, 그만."
"이상하다니 뭐가?"
"내가 보기엔 네가 제일 이상한 거 같은데."
"아하하, 그런가?"
어쩐지 내가 더 쪽팔려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하나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마 붉은 저지의 것이겠지. 아아... 무의식적으로 말해버린 이놈의 입을 원망하고 싶다. 인질이 되고 이 정도의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 내가 유일할 거다.
"그것보다 너, 아까부터 꽤 재밌는 「눈」을 하고 있네. 뭔가 해볼까~ 그치만 찬스가 없네~ 같은 느낌의."
그 와중에 카노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확실히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긴 했다. 아마 아까 문자에서 말했든 오빠분이 키사라기쨩이랑 같은 생각을 하는지 확인할 심산인가 보다. 그 말에 뭔가 찔렸는지 붉은 저지는 「왜 그런걸...」이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반응이다. 그리고 지금 이 남자에게 이 상황에 대한 공포와 당황스러움, 그리고 카노의 말에 대한 동요가 보인다.
"아니, 그냥 느낌이지만. 하지만 실제론 어떤 거야? 비책이 있다는 느낌일까나?"
"...이 손의 이게 풀리고 30초만 있으면, 확실하게 이 녀석들의 눈을 돌리게 할 수 있어."
"...승산은 몇 퍼센트라고 생각하나요?"
"분하지만... 100퍼센트."
확신에 가득 찬 저 말을 할 때 붉은 저지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의 확신이라면 이쪽도 믿어도 좋을 듯하다. 어쩌면 문자 속 정체불명의 작전이 정말로 성공할지도 몰라! ...그런데도 카노는 여전히 키득키득 웃기만 한다. 붉은 저지는 그 웃음을 믿지 않아서 웃는 거라고 생각했는지 김빠진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카노도 나와 마찬가지로 키도 쪽과 붉은 저지를 믿고 있다는 걸. 그 증거로 붉은 저지가 몸을 돌리자마자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여 이런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제목 : 괜찮은 것 같아~
본문 : 뭔가 오빠분 계기만 있으면 승률 100%라고 하고 있어!
이야- 왠지 재밌어졌네! 근데 아까 그건... 최고(웃음)
그것보다 이제 슬슬 질렸으니까 빨리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 오빠분한테는 다음번에 수염 난 사람이 방송하기 시작할 거라고 전해둘게~
...정말 끝까지 한결같은 문자 스타일이다. 휴대전화 액정에 「송신 완료」가 뜨자마자 카노는 나를 쳐다보곤 싱긋 웃는다. 저 웃음은 아마 나보고 말하라는 뜻이겠지... 짧게 한숨을 내쉬고 작은 목소리로 붉은 저지를 부른다.
"저기."
"응?"
"짐작이지만 곧 있으면 저 수염 난 남자가 다시 한번 방송을 시작할 것 같아요. 그리고 그때 「확실하게」 틈이 생길 테니까 그 뒤를 부탁드릴게요."
"하아? 무슨 뜻이야? 그것보다 애초에 일단 이 묶여있는 게 풀리지 않는데..."
"아아~ 젠장 짜증 나. 야, 한 번 더 말한다. 스피커에서 소리 나게 접속해 놔."
"네, 네!"
마치 내가 이 말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다시 한번 방송을 하겠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잠깐만, 첫 방송이 한 지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빨라... 걱정스러워서 여자애들 쪽을 쳐다보니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저쪽은 더는 걱정하지않아도 괜찮겠다. 오히려 걱정되는 쪽은...
"아~ 들리지? 돈을 준비하는 시간을 10분 단축한다. 고로 앞으로 10분이다. 시간에 맞추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일단 이 녀석들의 반을 죽인다. 괜찮지?"
충격적인 말에 인질들 전체가 술렁거리고 절규도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건 우리들만의 일이 아닌지 같은 동료일 터인 다른 테러리스트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분명 저 말은 수염 난 남자가 동료들과의 상의 없이 멋대로 내뱉은 말일 테지. 테러리스트 중에서도 가장 쓰레기 같은 자식 같으니라고.
"그리고 지금 말해두지만, 돈을 받고 난 후, 우리들은 헬기로 여길 나간다. 추적 같은 건 멈추는 게 좋을 거야. 밑으로 떨어지면 마을 상당 부분이 사라져 버릴 폭탄이 쌓여있어. 조금이라도 추격하는 낌새가 있는 순간 그걸 떨어트린다."
"윽..."
저 자식이 지금 무슨 말을 떠들고 있는 걸까.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저 말에서 딱히 거짓이 보이지 않는다. 만약, 진짜 만약에 수염 난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인질이 되는 것은 우리들만이 아니라 이 마을 주민 전체! 겨우 이 12명의 남자 때문에 가늠하기도 힘들 정도의 사람들이 희생되고 마는 거다. 급히 고개를 꺾어 옥상을 쳐다본다. 헬기는 여전히 한 남자의 옆에 당당히 서 있었다. 문제는 헬기가 아니라 폭탄. 눈에 가득 힘을 주며 헬기 내부를 보려고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어서인지 이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눈이 너무 아파 폭탄을 보는 것은 포기하고 고개를 숙였다. 확인할 수가 없으니까 더욱 불안해진다. ...하지만, 괜찮을 거다. 메카쿠시단과 붉은 저지, 파란 A.I의 소녀가 있으니까.
분명 어떻게든 될 거다. 아니, 어떻게든 되어야만 해!
"뭔 생각을 하는 거야... 젠장... 좀 적당히..."
초조함이 끓어 오르는 건지 붉은 저지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중얼거렸다. 그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초조함은 일을 그르칠 수도 있으니 일단은 진정시켜야겠다.
"진정하세요. 분명, 분명 틈이 생길 테니까 그때까지 조금만 더..."
"그래, 괜찮아. 앞으로 조금이니까, 괜찮다구."
"...그딴 여유 있는 소리 할 때야! 내 가족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일났다. 우리가 한 말이 역효과를 낸 모양이다. 붉은 저지가 낸 큰 목소리는 당연히 수염 난 남자에게도 들려 이쪽으로 오게 만들고 말았다. 수염 난 남자가 붉은 저지를 가볍게 들어 올리자 붉은 저지의 온몸이 공포감에 심하게 떨린다. 굳이 저 사람이 아닌 다른 사람이래도 저 상태에선 다들 저렇겠지... 하지만 지금은 이런 한가로운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다. 재빨리 능력을 써서 여자애들을 찾으니 대형 텔레비전이 모여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저게 시선을 끌 첫 번째 도구인 듯했다. 여자애들의 위치를 확인하고 나서 황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휴대전화, 즉 「에네」를 컴퓨터로 보낼 만한 곳을 찾아야만 한다. 굳이 눈을 이리저리 돌려 찾을 필요는 없었다. PC용품 매장은 내가 아까까지 있던 노트북 매장 바로 옆이었으니까. 바로 그쪽에 눈길을 두니 운 좋게도 여기서 그리 멀지 않다. 그것도 여기서 직선으로 뛰어가면 곧장 닿을 거리! 최적의 장소다.
주변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던 그때, 갑자기 두 손목을 옥죄던 감각이 사라졌다.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카노가 내 손목에 감겨 있어야 할 터인 검 테이프를 들고 서 있었다.
"일단 너부터 풀어줄게. 휴대폰 연결할 곳 찾은 거지?"
"응!"
손목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당당히 대답하니 카노가 씩-웃는다. 기분 탓일까 오늘 본 미소 중에 최고로 멋지다. 이제 남은 것은 일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것! 고개를 빳빳하게 들며 이 작전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떨림이 멈춘 그는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라고..."
"아? 뭐라고 했냐. 작아서 안 들리네"
"너 같은 쓰레기 자식이야말로, 평생 감옥에 처박혀 있으라고!"
"동감이에요."
"역시 너 재밌어! 최고."
그 순간 엄청난 소리와 함께 대형 텔레비전이 바닥을 향해 추락했고 곧이어 대형 스피커까지 줄줄이 쓰러졌다. 시끄러워서 내가 귀를 막는 동안 모두의 시선은 확실히 그곳에 쏠렸다. 모두의 시선이 아직 그곳에 남아있는 사이 여자애들은 단번에 이쪽으로 달려와 수염 난 남자 쪽에 있던 상품 진열대를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걷어차 버렸다. 당연히 상품들과 선반은 일제히 수염 난 남자에게 달려들었고, 그 남자 입장에선 갑작스러운 일이기에 어찌할 도리없이 깔리는 수밖에 없었다.
"으아아아!?"
그동안 기고만장해서는 우릴 붙잡고 깔보던 남자가 얼굴이 마구 일그러지며 비명을 질러대는 꼴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내가 백화점에 와서 처음 짓는 웃음이었다. 이대로 저 남자의 몰골을 보며 비웃어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아직 작전이 끝난 게 아니다. 수염 난 남자에게서 벗어나 아직 일어서지 못한 붉은 저지에게 부축해 일으켰다. 붉은 저지의 두 손은 카노에 의해 완전히 해방되어 있었다.
"그럼 뒤는 부탁할게. 기대하고 있어~"
"저쪽에 있는 PC 앞으로 곧장 뛰어가세요! 그리고 저기에 연결을!"
우리의 말에 붉은 저지는 상황 판단도 하지 않고 바로 내가 가리킨 쪽으로 뛰어갔다. 붉은 저지가 거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PC와 휴대전화 속 에네가 연결되었고 아까 능력을 사용해서 본 파란색의 여자아이가 모든 디스플레이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대로 위로, 위로 향해 컴퓨터 제어실에 도착하면 작전 완료─
"위험해!!!"
타앙-!
공포감을 자극하는 두 개의 소리가 거의 동시에 내 귓가를 찌르고선 지금껏 느껴본 적이 없는 아찔한 통증이 팔에서 느껴졌다. 마치 팔 하나가 도려져 나간 듯한 고통에 나는 팔을 감싸며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일순 숨이 멈출 것 같고 지속적인 고통이 팔을 조였다. 팔에서 진하게 느껴지는 아픔과 살짝 거칠어진 호흡에도 용케 내 머리는 돌아가 주었다.
방금 그 소리는 총소리. 그렇다면 나는 총에 맞은 걸까?
아니, 그런 것치고는 멀쩡하다. 피가 나오고 있긴 하지만 총알에 관통되었다고 하기엔 출혈량이 너무 적고. 겨우겨우 그 고통을 짓누르면서 손을 떼어보니 팔에 가늘고 길게 난 상처 사이로 붉은색의 선혈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막았던 손도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 천만다행으로 그냥 스친 것뿐이다. 스친 거로도 이 정도면 관통은 얼마나 아픈 걸까...
"...오빠!"
뒤에서 작게 들려오는 키사라기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붉은 저지가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나와 붉은 저지가 같은 방향에 서 있었음을 떠올리고 서둘러 그쪽으로 걸어갔다. 옷이 붉은색이라 총에 맞아 피가 난 건지 안 난 건지 구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쓰러져있는 모습에 더욱더 무서워진다. 나는 다행히 스쳤으니 이 사람도 그냥 스친 정도로 끝나야 할 텐데... 같은 방향으로 서 있었으니 분명 그 정도로 끝날 거다. 그래야만 한다! 모든 신경이 눈에 쏠려 붉어지려는 찰나였다.
─그때 갑자기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이유도, 동기도 없다. 그냥 무작정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뒤나 돌아볼 때가 아닌데...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내 목은 어느새 뒤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키사라기, 키사라기 모모입니다. 나이는 16세. 아이돌을 하고 있습니다!"
...키사라기? 갑자기 무슨.
"이크, 여긴 보면 안 돼."
"뒤는 부탁할게! ...마리쨩!"
"─미안해."
내가 완전히 뒤를 돌아보기 직전, 크고 따뜻한 손이 내 시야를 가렸다. 뒤에 키사라기의 목소리와 하얀 애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혼란 그 자체였던 플로어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건 단 몇 초. 셔터가 완전히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러 명의 발소리로 플로어 안이 다시 시끄러워졌고, 그제야 난 내 시야를 되찾을 수 있었다. 눈 앞에는 카노가 여전히 웃고 있었다. 마저 뒤를 돌아보니 당황한 경찰들 사이로 온몸이 굳어버려 전혀 움직이지 않는 인질들과 테러리스트들이 보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어서 눈만 깜박거리는데 이번 작전의 최고 활약자 두 명이 우리에게로 뛰어왔다.
"...카노씨! 오빠는요!?"
"유감이지만... 이 사람 약간 스친 것뿐이고 기절한 것 같은데?"
"...예?"
카노의 말에 키사라기는 어이없단 표정을 지으며 휘청거렸다. 하긴 총소리가 나고 자신의 오빠가 쓰러져서 달려왔는데, 스친 거에 놀라 기절했다는 말을 들으면 맥이 빠질 수밖에 없겠지. 총에 스친 건 나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내 쪽이 더 깊이 스쳤는데 「이제 봐주세요... 실수였어요...」라며 한심한 잠꼬대를 하는 이 사람을 보니 또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건 비웃음이라기보단 안심해서 나온 웃음이었다.
"상처를 보면 얘가 더 심한 거 같은데 괜찮아?"
"아, 괜찮아. 나도 스쳤을 뿐이니까. 그건 그렇고 정말 대단했어. 세 사람 모두... 어라?"
"왜 그래?"
"저기... 그 하얗고 몽실몽실한 머리를 가진 애는 어디 갔어?"
"마리? 마리라면 여기에... 얘 또 어디 갔어?!"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리쨩!!!"
키사라기는 기겁한 얼굴로 비명을 질러대며 한 쪽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아까 수염 난 남자의 후두부를 멋지게 명중시켰던 전기안마기를 든 하얀 여자애, 키사라기의 말로는 '마리'가 있었다. 거기에 혼자만 있었으면 별문제가 없겠지만 마리는 경관부대 중 한 명에게 질문 공세를 받고 있었다. 지금 우리와 경관부대를 제외하고 움직이는 사람은 저 애뿐이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점점 사람이 몰려들자 마리는 툭 건들면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더워서가 아니라 당혹스러움에 식은땀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저, 저 바보.! 저걸 돌려놓으러 간 거야!"
"우와아아... 어, 어떡하죠!? 이거 상당히 위험하죠!?"
"풋, 큭큭... 아아, 저게 전에 수염을 후려친 전기 안마기! 근데 왜 저런걸... 일종의 개그!? 히익... 배 아파, 아파!"
"넌 좀 가만있어!! 젠장... 어쩌지..."
"...내가 가볼게!"
말보다 더 빨리 몸이 반응하여 마리 쪽으로 뛰어간다. 뒤에서 키도가 「잠깐, 너까지 가지 마!!」라며 절규하고 있지만 이미 움직여진 다리를 멈출 생각은 없다. 나와 마리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곧 모여있는 경관들을 헤쳐 마리 바로 옆에 도착했다. 총알에 스친 상처를 막느라 붉게 물든 손으로 마리를 보호하듯 감싸 안고 마리에게 질문 공세를 하던 경관의 말을 가로챘다.
"제, 제 일행에게 무슨 볼일이시죠?"
아, 말 더듬어버렸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조금 떨리고... 뭐, 이 상황에선 이러는 게 더 나을지도.
"아, 그게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기 위해서─"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은 건 오히려 저희라고요! 정말이지... 오봉 휴일을 맞아 백화점에 놀러온 거 뿐인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거기서 말을 끊고 고개를 푹 숙여버리자 경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놀란 건 경관뿐이 아닌지 '아, 저, 저기... 너...'하고 나보다 몇 배는 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마리를 더 끌어안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마리만 들을 정도로 작게 '미안하지만, 지금은 날 믿고 얌전히 있어 줘.'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눈에 뛸 정도로 고개를 끄덕거리다 내 말대로 얌전히 있어 준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지만. 이 애 좀 덜렁거리고 어설픈 애이긴 해도 본성은 착한 것 같다.
자아, 그럼 이제 내 차례다. 나는 눈에 가득 힘을 주어 눈물을 짜낸다. 어깨도 조금씩 들썩거려 본다. 몇 초 동안이나 내가 숙인 고개를 들지 않자 겁먹었다고 생각했는지 주변 경관들로부터 질책이 섞여 들려온다. 우리 앞에 있던 경관은 꽤 당황했는지 '왜, 왜들 그래! 내가 뭐, 뭘했다고...'라며 나보다 더 말을 더듬는다. 그래, 이 사람은 잘못한 게 없다. 잘못한 게 있다면 마리에게 말을 건 것뿐이겠지. 어쨌든 나는 마리와 저기 있는 아이들과 함께 이 백화점을 빠져나갈 거다. 경찰 조사 같은 복잡한 일에 휘말리는 건 절대 사양이다.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시야가 어느 정도 흐려졌다고 판단되었을 때 고개를 들고 경관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이렇게 말했다.
"부탁이에요! 제발... 제발 돌려보내 주세요... 이런 무서운 곳에 단 일초도 있고 싶지 않아!"
눈에 가득 고인 눈물 OK, 울먹이는 목소리 OK. 경관들이 술렁거리는 타이밍에 딱 맞춰 뺨을 타고 내려가는 눈물방울까지 OK. 거기에 내 팔에 난 상처도 있으니 효과는 배가 될 거다. 아니나 다를까 마리에게 질문하던 경관은 당황해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흘렸다. 놀리는 건지, 오버해서 우리 마음을 풀어주려는 건지 주변에선 그 경관을 마치 대역죄인으로 몰아가듯이 야유를 보내고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이 경관에게 죄송합니다 하고 닿을 리 없는 사과를 보내본다.
"하, 하지만 그... 너희 심정을 이해 못 하는건 아니지만 말이다. 저... 이건 대 사건이기도 하고... 그래서 경찰 조사는 바, 받아야... 하거든..? 그... 미, 미안하다!"
주변의 질책과 험담을 받으면서도 자기 일을 끝까지 해내려는 저 자세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렇지만 내 입장에선 작전 완료 후 퇴장를을 방해하는 것이라 마냥 감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옆에 꼭 붙어있는 마리의 떨림은 어느 정도 멈췄지만, 경관들의 기에 눌린 건지 몸이 점점 움츠러들고 있고, 한쪽에선 다른 애들 우리가 빨리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다.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좋지 않다. 적당히 장단 맞춰주며 얼버무리고 나와버려야지. 나는 다시 한번 눈물과 울먹거리는 목소리를 장전했다.
"그, 그럼... 지금 말고 나중에..."
"그, 그래! 경찰 조사는 나중에 해도 되니까! 이, 일단 저기 벤치에 가서 쉬어라... 좀 진정하고..."
"네..."
한 손으로 흘러나온 눈물을 쓱쓱 닦은 후, 마리를 데리고 경관들 틈을 빠져나왔다. 우리가 가고 나자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그때까지도 그 경관에 대한 질책은 끊기질 않았다. 이쯤 되니 죄책감이 생기려고 한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쨌든 경관들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자 재빨리 방향을 꺾어 다은 애들과 합류했다. 별문제 없이 우리들이 돌아오자 키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리쨩! 괜찮아?!"
"으응. 걱정시켜서 미안해... 그런데 이거 갖다 놓지 못했어..."
"하아... 그건 상관없으니까 아무 데나 내려놔."
"푸핫, 키사라기쨩의 오빠도 재밌지만, 너도 재밌네! 눈물 연기라니, 크크크..."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싶었던 건데 그만 웃을 순 없어?"
"그 녀석은 원래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어쨌든 빨리 나가자. 곧있으면 석화가 풀릴거야."
키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플로어 전체가 단숨에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찼다. 키도가 말한 석화란 게 풀렸나 보다. 이것도 「붉은 눈」의 능력인가. 대단하네. 그럼 아까 카노가 내 시야를 가린 건 이거 때문이구나. 옆에서 계속 어서 가자고 보채는 키도탓에 이어지려는 생각을 멈추고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계단은 형식상 만들기라도 한 건지 불빛은 있지만 창문은 단 한 개도 없었다. 다행이다... 내려가면서 한가지 거슬리는 게 있었다면 뒤에서 카노가 키사라기의 오빠를 부축하면서 종일 쫑알거렸다는 거정도? 나중에 키도한테 한 대 맞아서 조용해지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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