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네가 된다는 것
포스트아포칼립스 카이바+유우기
누구에게 기도하는 거야?
유우기의 물음에 카이바는 지그시 눈을 떴다.
밤이 걷히고 새파란 아침이 쏟아지는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아주 느릿한 움직임이었다. 그 행위로 나타난 것 역시 새파랬지만, 여명의 어렴풋한 온기를 품은 파랑과는 달랐다. 카이바는 시선만 움직여 유우기를 바라보았다. 햇볕에 타 거칠어진 피부와 조금은 다부진 표정의 또 다른 생존자를.
기도 따위 하지 않아.
답지 않게 경멸은 담겨 있지 않았으나 말투는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성대에서 고압적으로 울리는 낮은 저음과 싸늘한 태도 앞에서도, 유우기는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카이바가 따스한 목소리로 정겹게 대꾸했더라면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유우기는 작게 웃고는 비닐을 뜯어 육포를 꺼냈다. 값싼 고무처럼 딱딱하고 질겨 이빨이 상할 것 같아 안간힘을 다해 찢어 먹으니 삼킬 만은 했다.
그럼 뭘 하는 거야?
물음과 함께 두랄루민 케이스에서 통조림을 하나 꺼내 던졌다. KC의 유능한 사장이었던 카이바는 캐치볼에도 능숙했다. 크래커임을 확인하자 인상이 살짝 구겨졌지만, 기다란 손가락은 거침없이 뚜껑을 땄다. 떨그럭, 뚜껑 열리는 소리가 흉흉한 소음에 뒤섞였다. 무너진 건물, 깨진 유리 따위로 바람이 드나드는 소리였다. KC 본사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서 있었던 과거에는 이것과 다른 소리가 났다. 고층 건물 사이로 부는 도시풍의 치열한 소리가. 그 건물들은 이제 허리가 잘리고 머리가 부서져 바닥을 나뒹굴고 있으니 다른 소리가 나는 것도 당연했다.
카이바는 크래커를 꺼내 한입에 베어 물었다. 그는 방금 자신이 한 행동을 되새겨보았다. 이 황폐해진 도시 - 한때는 카이바가 다스렸기에 더욱 자랑스럽게 여겼던 도미노 시티 - 에서 유우기를 만난 후 생긴 버릇.
매일 아침 그는 하나뿐인 동생의 사진을 눈에 새긴 후 잠시간 눈을 감곤 했다. 처음에 유우기는 카이바가 모쿠바의 사진을 발견해 기뻐한다고 생각했다. 카이바가 가진 것이라고는 비상식량이 든 케이스와 사진 한 장 없는 업무용 휴대전화뿐. 때마침 마주친 유우기의 지갑에는 모쿠바를 포함해 친구들과 다 같이 찍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유우기는 잠깐의 고민 끝에 흔쾌히 사진을 카이바에게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동행하게 되었다.
다짐…이라고 해두지.
지금처럼 한참을 헤맨 끝에야 겨우 다른 사람을 마주치는 시대가 아닌, 거리가 있고 자동차와 사람들이 활발하던 일상에서, 유우기는 형제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몸에서 떼어놓지 않던 로켓 목걸이는 어째서 이젠 걸지 않느냐고. 모쿠바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현실적인 대답을 했다.
대외적으로는 가끔은 너무 친밀하게 보이지 않아야 할 때도 있어.
그에 반해 늘 냉정하고 독선적이던 카이바는, 그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대답했다. 이것은 전 세계에 둘밖에 없는 물건. 만에 하나라도 잃어버릴 위험은 감수할 생각이 없다. 너무나도 소중해 철저히 보관하고 있던 로켓은, 역설적이게도, 그 탓에 영원히 다시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유우기는 카이바의 대답을 들으며 생각했다. 무엇에 대한 다짐이야? 그러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유우기는 알고 있었다. 앞을 향해 나아갈 때마다 바닥에 남는 발자국처럼 한 움큼 마음을 짓누르는 공포. 그와 반대로, 바람 앞의 불꽃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죽어만 가는 일말의 기대.
유우기는 한 번 겪었고 카이바는 옆에서 지켜봤으므로, 더욱 뚜렷한 현실로 눈앞에 들이밀어진 것.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유우기도 카이바도 이런 세상에서 사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유우기는,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과, 그래도 특유의 강운이 발동하여 어딘가에서 태연히 살아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 죽지 않았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많은 가능성의 하나로써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건물 잔해로 보인 익숙한 금발을 발견한 순간,
유우기는 깨달았다.
아무리 슬픔을 가정하고 대비해도 현실 앞에서는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이 나지 않는 동시에 갑작스럽게 덮쳐온 상실감이 너무나 두려워 온몸이 벌벌 떨렸다. 친구의 시체를 파내기 위해 손을 움직이는 행위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다. 손에 유리 파편이 잡혀 피가 나도 아프지 않았다.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카이바는 정신 차리라고 호통을 치거나, 울어도 된다고 위로해주지 않았다. 카이바도 알아버리고 말았다.
저기에 있는 저 나약한 인간은 곧 자신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이 없는 비참한 세상에 무기력하게 내던져지고, 하루하루를 상실 속에 살아야 할 것이다.
그 시작점에서, 살아있는 타인의 말은 당장은 가치가 없었다. 카이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서 유우기를 억지로 떼어내고, 무릎을 굽혀 앉은 뒤, 손으로 흙과 먼지를 파내기 시작했다. 유우기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카이바의 옆에 앉아 땅을 파냈다. 시체를 꺼내 땅에 묻는 순간까지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일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유우기는, 어딘가에 모쿠바가 살아있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한편, 운명의 여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카이바에게 진실을 알려주길 바랐다. 매일 아침 카이바가 너덜너덜한 사진을 손에 꼭 쥔 채 눈을 감는 것이 슬펐다. 속눈썹이 미미하게 떨리고, 상반된 감정이 담긴 새파란 눈동자가 침착하려 애쓰는 모습은, 너무도 마음이 아팠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
유우기는 케이스를 닫고 일어섰다. 카이바도 손으로 옷자락을 툭툭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 사람은 움직여야 한다. 목적지는 없다. 그저 한 곳을 향해 쭉 걸을 뿐. 결말을 전부 알고 있다고 해도 페이지를 넘겨야 도달할 수 있듯이, 이 여행도 마찬가지다. 마주해야 하기 때문에 나아가야만 한다. 이 세계의 유이한 생존자들은, 체념과 의무와, 이제는 너무 닳아 작아진 희망을 주워 들고 오늘도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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