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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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고 어두컴컴한 콘크리트 바닥. 적진 한가운데에 고립되어 악의와 폭력으로 얼룩진 외로운 방에, 혈혈단신으로 맥신을 구하러 온 남자가 있었다. 히르칸이 청혼한 건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레비온의 미래는 불투명했고 히르칸과 맥신은 군의 소유였으며 맥신은 아직도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 그러나 그가 내린 결정이 결코 성급하지는 않았다.
“사과를 좀 따오려고요.” “…먹고 싶어?” 아침이었다. 짐을 챙기던 히르칸은 막심의 제안이 눈에 띄게 탐탁지 않은 표정이었다. 평소라면 ‘굳이?’ 그렇게 말한 다음 막심의 눈총을 받았을 텐데. 히르칸이 말을 여러 번 고르는 게 눈에 보이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심 미안하기도 했다. 이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낸 데에 자신의 책임이 일부분 있는 건 부
막심.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막심은 고개를 들었다. 본가의 앞뜰에 앉아 토끼풀과 여린 꽃들을 엮고 있던 참이었다. 화관을 만들고 싶었는데 잘 되지 않았다. 뒷짐을 진 채 멀리 서 있던 아버지는 막심과 눈이 마주치자 가까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막심은 자기도 모르게 만들다 만 화관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심이 만들고 있던 것에는 별 관
초년의 활기로 시끌벅적하던 주점, 일면식 없던 호노카의 술잔은 빌 틈이 없었고 그는 주량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했다. 조금 취했나. 시야는 노랗고 따뜻한 전등의 불빛을 따라 아른거리고 눈꺼풀은 무거워지기만 했다. 그러나 대학에 와서 첫 모임인 만큼 술에 취해 실수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화장실을 가겠다며 슬그머니 일어섰다. 일렬로 앉아있는 사람들 사이
이어폰을 끼고 나란히 걷는 하굣길,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 같은 잿빛 하늘. 잇시키의 이어폰 줄은 짧아서 나눠 끼면 늘 서로의 손이 닿을 듯 말듯 스쳐 지나간다. 언제부턴가 매 순간 함께 있는 게 당연할 정도로 익숙해진 사이지만 손끝이 계속해서 부딪히는 그 애매한 거리만큼은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어, 친해지고 나서는 차라리 손을 잡거나 팔을 겹쳐 놓
황금, 섹스, 권총. 자기는 물질적인 것 앞에서 좀 더 솔직해지지. 감정적인 것 앞에서는 스스로를 감추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네 솔직한 마음을 어떻게 해야 얻을 수 있을까? ¹⁾ *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까지 시간이 좀 남았기 때문에 샤샤와 젠킨슨은 면세점에 방문했다. 비행 전에는 주로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는 편이었다. 면세점에 직접 들르는 건
미궁의 구조가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미궁은 없다지만… 히르칸이 언제부턴가 오고 가는 것을 무척 서두르게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라고, 막심은 생각했다. 미궁 탐험에 있어서는 히르칸이 막심보다 훨씬 박식했지만 적어도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막심 또한 괴리감을 느꼈다. 학교에서 공부할 적에도 이렇게까지 제한된 구조를 갖고 있는
여느 때처럼 식사를 마친 저녁이었다. 지난번의 강행군 끝에 막심의 발이 심하게 부르튼 이후로 히르칸은 되도록이면 일찍 캠프를 차리려 했다. 막심은 돌연 성가실 만큼 그를 챙기는 히르칸의 태도에 종종 그 정도 약골은 아니라고 투덜거리곤 했지만 저녁 식사 후 이어지는 히르칸의 ‘발 마사지’는 제법 좋아했다. 히르칸도 그 시간을 좋아했다. 편안한 시간이냐
해가 뜨고 지지 않는 미궁이지만 숙련된 탐험가라면 몸의 신호와 피로도 따위를 통해 제법 정확한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바깥은 아마 슬슬 노을이 지고 있을 테다. 막심과 히르칸은 잠깐의 점심시간을 제외하고선 여태 쭉 전진해왔다. 중간에 전투가 한 번 있었고 함정도 하나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앞서간 파티가 있는지 대부분의 함정이 분해되어 있었다는
“윽!” 막심의 목소리였다. 히르칸은 힘껏 꽂아 넣은 나이프를 뽑고 얼굴에 튄 피를 쓱 문질러 닦았다. 쥐를 닮은 그 마물의 목은 히르칸의 마지막 일격에 거의 끊어져, 몸뚱이를 집어 들자 흉하게 덜렁거렸다. 라투스 라투스. 4계층에 진입하는 파티가 흔히 볼 수 있는 쥐 마물이다. 정확히는 보는 게 아니라 식량 가방을 쏠아 먹은 자국이나 쥐똥을 통해 유추
사랑하는 국가 레비온의 평온한 교외에서 히르칸 리그는 술을 마시고 있었다. 군 시절에는 입에도 대지 않았던 술을 조금씩 마시게 된 건 막심 때문이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종종 음주와 흡연을 즐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 가까워질 때까지만 해도 그와 술잔을 부딪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노란 조명이 켜져 있는 펍의 내부는 쌀쌀
오늘은 운이 좋네요. 니콜라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 부드러운 음성은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으로, 여자는 돌연히 니콜라스에게 말을 건 것이었다. 겁 없는 여자로군. 니콜라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여자는 니콜라스에게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았고, 그래서 더 서슴없이 말을 던진 것 같았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