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못죽]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한

[청우문대] 요괴답사록(妖怪答竢錄)

마침내 찾아온 날, 마침내 오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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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입니까!"

거대한 대궐, 그 대궐의 모서리를 세 번 끼고 돌면 보이는 장지문 하나.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감히 그 양을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서적이 가득한 서고가 있다.

쿵-

예고 없이 들려온 큰소리에 그 안으로 한 사내가 급히 달려왔다.

"괜찮으신 겝니까?"

사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사내의 시선이 닿은 곳엔 머리를 짚은, 철릭을 두른 남자가 있었다.

"괜찮네. 잠시 어지러웠던 것뿐이야."

철릭을 두른 남자가 그 고개를 살짝 들자, 갓 아래로 단정한 미소를 띤 남자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의 발치에는 기이한 기운을 휘감은 낡은 서적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채 펼쳐져 있었다. 사내의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인 남자가, 곧 허리를 숙여 그 서적을 주워들었다. 펼쳐진 서적은 깨끗했다. 서적임에도 보이는 글자라고는, 왼쪽에 붓으로 거칠게 쓴 듯하면서도 정갈한 未命鬼라는 글씨뿐이었다. 곧 남자의 큰 손이 탁 소리를 내며 책을 덮었다. 그 서적은

[妖怪踏査錄]

捉嘷甲士의, 요괴답사록이었다.

"출두, 하시렵니까?"

사내의 눈길 속 착잡함이 남자를 바라봤다.

"착호갑사 류청우는, 나와서 명을 받들라."

사내의 착잡함을 읽은 것인지, 남자가 작게 숨을 한 번 내뱉었다.

"그래야지."

그의 숨과 함께 뱉어진 답은 큰 고저 없이 단단했다. 그 단단함 뒤로 숨겨둔 부드러운 미소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어명이 아니더냐. 내 임금께서, 요괴답사록의 완성을 원하신다. 그러니, 내 그 명에 따를 것이다."

제법 비범한 기운으로 웃어 보인 착호갑사 류청우가 돌아 서고를 나섰다.

요괴답사록. 왕의 명을 받들어, 조선 곳곳의 요괴를 잡아 봉인하여 기록한 서적.

'이제... 미명귀만 남은 것인가.'

그 속 未命鬼 단 세 글자만이 자리한 빈 장을 가만 내려보던 류청우가 서적을 덮어 제 품속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착호갑사 류청우의, 마지막 행차렸다.

그의 발걸음이 도래한 곳엔, 웬 무너져가는 기와집 하나가 있었다. 기와는 이미 다 깨지고 부수어져 곳곳에 떨어져 있었으며, 장지문은 썩어가고 있었다. 그저 버려진 지 오래된 집일 터인데, 류청우는 그 기와집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감히 겁도 없이 도성에 있던 것이냐."

요상한 기척을 느낀 류청우가 여전히 기와집에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히 말을 뱉어내었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그가 느낀 기척의 주인이 깐죽대며 입을 열었다. 착호갑사인 그도 본 적 없던 요괴였다.

"아~ 이분이 요 일대를 싹~ 치셨다는. 그, 착호갑사이신가? 어떻게. 저도, 퇴치하시렵니까?"

스릉-

검집에서 빠져나간 검이 천천히 뻗어 나가 그 끝이 류청우의 앞에 놓인 요괴의 목을 겨누었다.

"에헤이 나리~ 한 번만 봐주십시오. 제아무리 요괴라 한들 모두 나쁜 짓을 일삼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선-한 요괴라고요!"

그 요괴가 제 목에 겨누어진 검에도 당황한 기색 없이 입을 놀렸다. 그 말을 담담히 듣던 류청우의 눈꺼풀이 천천히 한 번, 두 번, 깜빡였다.

"내 질문에 빠짐없이 답하도록 하라."

류청우의 느릿한 걸음이 도성을 벗어나 숲으로 들어가, 더 깊은 곳을 향했다. 점차 산길이 험해지고, 무성하게 자란 풀이 그 길을 어지럽혀 갈피를 잡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검을 빼내 그 풀을 쳐내며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답하겠습니다. 말만 하십시오."

깐죽대던 요괴가 무릎을 꿇고 털썩 주저앉았다. 세게 주저앉은 것인지 모래바람이 작게 일 정도였다. 여전히 웃음은 거두지 않은 채, 행위는 복종하고 있었다.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류청우가 입을 열었다.

"미명귀를 아는가."

그의 물음에, 요괴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에 류청우가 고개를 작게 까딱였다.

"하하... 미명귀 그자는 어인 일로, 찾으시는 겝니까?"

"답하라."

요괴가 고개를 돌리자, 언제 빼낸 것인지조차 모르게 검을 빼낸 류청우가 그의 목 가까이 그 끝을 가져다 대었다. 그에 검의 날을 피해 고개를 치켜든 요괴의 목울대가 울렁이다 입이 열렸다.

"큼큼, 저 숲 깊-은 곳에 낡은 초가 하나가 있을 것입니다. 이미 다 썩어버린 장지문을, 색색의 고-운 천들이 휘감고 있지요. 마치, 혼삿날처럼 말입니다."

얼마나 걸었을까. 풀을 쳐내던 류청우의 검이 멈추었다. 숲 깊은 곳에 다다르자, 정말 숲 한 편의 낡은 초가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곱디고운 색색의 천이 어울리지 않게 초가의 다 썩은 장지문을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툇마루에 혼례복을 입은 채 앉아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그런데... 미명귀는 정말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그자는 죽이지 말아주십시오. 기구한 운명을 가진 자이옵니다."

요괴는 처음으로 다급히 외쳤다. 하지만 그 다급한 외침도 곧, 흔적도 없이 공중으로 흩뿌려졌다. 류청우의 검에 의해.

"세상에 선한 요괴가 어디 있단 말이냐."

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던 류청우가 가만 그 사내를 바라봤다.

'저자가 미명귀란 말이지.'

미명귀는, 정말 미동도 없이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류청우의 발소리를 들은 것인지,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잘 보이지 않았음에도, 그 모습에 어딘가 슬픈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저, 죽어서도 제 서방을 기다리는 자입니다."

-

"도련님, 드디어 내일이 혼삿날이지요? 이만 자리에 드십시오. 내일 고운 얼굴로 맞이하셔야지 않겠습니까."

문에, 달빛에 비친 하인의 그림자가 말했다. 그 염려 가득하면서도 저를 생각해주는 목소리에 남자가 작게 웃었다.

"알았다. 내 이만 자리에 들도록 할 터이니, 이만 가보도록 하거라."

그에 고개를 조아린 하인의 그림자가 흐려지다 사라졌다. 하인이 물러난 자리, 하늘에 떠 있을 달이 환한 빛을 내려보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후-

초롱불이 꺼진 자리에도 그 환함이 느껴질 만큼.

소란하고 화려한 분위기가 밝은 기운까지 안겨주었다. 그 속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남자의 혼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모두가 들뜬 시간은 흘러, 혼례를 치르기로 한 미시(13시~15시)가 가까워졌다. 들떠있던 분위기는 곧, 소란스럽게 웅성거렸다.

"왜 나타나지 않으시는 거지?"

"혹, 마음이 식어 떠나신 것 아니야?"

그에 남자의 가문의 사용인들과 그의 하인 또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던 하인이 남자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쩌지요, 도련님."

남자는, 그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히 말을 뱉었다.

"기별도 없이 오지 않으실 분이 아니다. 분명, 일이 생기신 게야. 난 기다릴 수 있다. 아니, 기다릴 것이다."

'도련니임...' 하인은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릴 것만 같았다. 말은 저리하셔도, 속은 분명 그 누구보다 타들어 가고 있으실 게 뻔하다며, 제 속 또한 이리 타들어 가는데 도련님은 어떠실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속을 모르는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의 혼사를 축하해주러 온 사람들도 하나둘 떠나갔다. 왁자지껄 떠들어대던 소리가 점차 꺼지고, 각종 화려한 장식만이 고요한 소란을 안겨주었다. 해도 어느새 떨어지고, 남자의 가문의 사용인들은 그의 눈치를 보다 그것들을 떼고, 치우기 시작했다. 그에 고요한 소란이 일던 곳엔, 그저 고요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도련님. 이만 일어나시지요. 벌써 두 시진(4시간) 남짓을 이러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남자는 여전히 팔을 들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기별 없는 제 서방님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에 그의 하인이 남자의 곁으로 와 울음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걱정했다. 그 걱정과 함께 남자를 일으키려는 순간,

"도련님...!"

남자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의 기다림이 그의 팔과 다리를 짓눌러 그를 괴롭혔다. 그 고통에도 남자는 눈물 한 점 흘리지 않았다.

"어찌 이 몸으로 버틴 것이냐!"

남자의 아비가 문을 열고 마당으로 뛰쳐나와 남자를 책망했다. 그 책망 속에도 걱정이 자리하고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

"이리 오지 않으실 분이 아닙니다. 기다릴 것입니다."

그의 아비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소란한 침음성과 울음이 가득한 곳, 남자만이 홀로 조용했다.

그날부터, 남자는 매일 혼례복을 입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하루도 빼지 않고, 붉고 화려한 활옷을 입고, 머리에는 장식이 그득한 화관을 쓴 채 댕기를 늘어뜨리고 툇마루에 앉아 대문만 바라보았다. 열리지 않는 대문이 야속할 만큼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대문이 열렸다 싶으면, 심부름하러 다녀온 하인이 남자에게 꾸벅 인사하고 제 자리를 찾아갔다. 문이 몇 번을 열려도, 남자의 서방님은 기별 한 점 없었다.

남자의 소문은 도성 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매일 저리 혼례복을 입고 기다리고 계신다지 아마? 처음에는 안타까움이었다. 이미 떠나간 사내 마음을 어찌 붙잡으시려고 저러신담. 두 번째는 비웃음. 기다리다 미치신 것이 분명해. 세 번째는, 남자를 광인으로 취급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심부름하러 밖에 나간 하인들은 그에 못마땅함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아무리 그래도 소중한 제 도련님이신데, 이런 취급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인제 그만 벗으십시오, 도련님...!"

그에 침통한 외침을 보내도

"언제 돌아오실지 모르니, 내 벗을 수 없다."

남자는, 생기를 잃은 얼굴로 같은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남자는 그제야 툇마루를 벗어나 제 방에 누웠다. 방 저편에 걸린 혼례복을 보며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의 떨리는 입술 끝이, 말을 툭 떨궜다.

"입어야 합니다. 입어야 해요."

속절없는 기다림에 앓아누운 때에도, 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병에 걸려 앓아누운 때에도, 보이지 않는 자가 아니더냐! 어찌, ...어찌 이런단 말이야."

남자의 아비가, 그의 손을 꽉 붙잡은 채 침음했다. 그 침음에도 남자는 여전히 담담히 말을 뱉었다.

"아버지. 약조하였습니다. 오래도록 보여드리겠다, 그리 약조하였어요. 헌데,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그에 그의 아비 또한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하인을 불러, 남자에게 다시 혼례복을 입혀 치장해주었다. 고운 자태와 달리 맥없이 누워있던 남자가 하인에게 일렀다.

"나를 묻거든, 부디. 혼례복을 입혀 묻어주어라. 약조하였다. 오래도록, 보여드리겠다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곱고 화려한 활옷과 장식이 반짝이는 화관, 길게 늘어뜨린 댕기, 발에 딱 맞는 어여쁜 꽃신과 함께 잠이 들었다.

오랜 잠에서 눈을 뜬 남자는, 미명귀가 되어 그곳을 지켰다. 새로운 생을 얻은 후에도, 그는 그곳을 떠나지 않고 기다림을 계속했다. 하지만 그도 얼마 가지 못하였다. 그의 한기 때문인지, 남자의 가족들에 계속해서 화가 닥치고, 아프기를 반복했다. 그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나, 산속 깊은 곳, 버려진 초가로 거처를 옮겼다. 제 서방님이 그곳을 알 리 없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툇마루에 앉아 문밖을 가만 바라보며 기다림을 계속했다. 초가라 대문이 없으니, 문이 열리지 않아도 바로 보일 터였다. 낮은 담장에 그 얼굴이 보일 터였다.

그렇게 억겁 같던 몇 년이 흐른 그곳으로, 철릭을 두른 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류청우가 남자를 발견하고 느릿한 걸음으로 그 앞에 도래했다.

"네놈이 미명귀더냐."

마치 철퇴같이 무겁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소인, 박문대라 하옵니다."

남자는, 자신을 미명귀가 아닌, 박문대라 칭하였다. 그에 흐음 소리를 내던 류청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래 끌 것 없다. 내 어명으로 너를 잡기 위해 친히 행차하였으니. 얌전히, 칼을 받도록 하라."

검을 빼내기 위해 손잡이에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남자, 미명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류청우를 바라보았다. 그에 류청우가 움찔하였고,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굴이, 사람이었던 흔적이라곤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 썩어 말라버린 얼굴이었다. 기다림에 썩어가던 남자는, 그의 모습을 잃었다.

그 썩어 말라버린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그 움직임에도 그의 얼굴이 투둑 갈라졌다.

"이리 보여드렸으니, 되었습니다."

그 순간, 남자의 얼굴이 서서히 갈라지다 선명해졌다. 남자, 박문대의 옛 모습이 그 얼굴에 만연했다. 그 모습을 본 류청우의 눈에서 눈물이 투둑 흘러내렸다.

-

"도련님! 천천히...! 천천히 걸으십시오!"

다급한 하인의 외침에도, 박문대는 그저 환히 웃으며 속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옆에서 갑작스레 튀어나온 이에 부딪혔고, 박문대의 몸은 빠르게 기울었다. 균형을 잡기는커녕, 어찌하면 덜 아프게 넘어질까 하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런데, 고통이 없었다. 질끈 감은 눈 때문에 깔린 어둠은 여기가 사후인가, 하지만... 겨우 그런 것으로 죽는단 말이야? 하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다. 눈을 슬며시 뜨자 웬 사내의 품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흐익...! 도련님! 괜찮으십니까?"

그 품에서 살짝 떨어지자, 품의 주인인 사내가 빙긋 웃으며 물었다. 멀리서 박문대의 몸이 휘청이는 것을 보고 달려온 그의 하인이 박문대를 살피자, 그는 황급히 사내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 ...큼.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내는, 그런 박문대를 보고 픽 웃었다. 그의 옷깃 속 살갗이 발갛게 물들어있는 것을 본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내는 알지 못했다. 저 또한 박문대처럼, 귀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다는 것은.

"...혹. 저잣거리 구경을 함께해도 되겠습니까?"

저를 류청우라 소개한 사내가 입꼬리를 말아 올려 웃었다. 그 맑은 미소에 박문대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바보 같은 외마디를 내뱉다 자신 또한 그에게 제 이름을 알렸다.

두 사람은, 그 뒤로도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았다. 처음은 그저, 마음이 잘 맞는 좋은 벗이라 여겼다. 서로를 만나지 못한 날이면 깊은 밤, 서로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기도 했다. 그들은 곧, 그것이 연심임을 깨달았다.

그 그리움이 애타질 무렵,

"저와, 혼인해주시겠습니까?"

류청우의 손 위에는 고운 가락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그 가락지를 가만 보던 박문대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다 슬쩍 손을 내밀었다.

"직접, 끼워주셔야지요."

자신의 눈앞에 놓인 하얗고 고운 손등이, 만져보지 않아도 그 얼마나 부드러울지 느껴지는 듯했다. 그 곱고 보드라운 손을 살짝 잡은 류청우가 빙긋 웃으며 박문대의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다.

"허락하신 겁니다."

두 집안은, 두 사람의 마음을 어여삐 여겼다. 서로를 저보다 중히 여기며 아끼는 모습이 눈에 선했으니까. 두 사람의 혼사는 차질없이 진행되어 그들의 혼삿날은 하루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더없이 행복한 얼굴을 한 류청우가 박문대를 품에 끌어안았다. 박문대 또한 그의 품에 폭 안겼다.

"내일까지 못 참겠습니다. 어서, 혼례복을 입으신 모습을 보고 싶어요."

"내일이면 보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 말에 류청우가 제 품에 가둔 박문대를 천천히 떼어내, 제 품에 파묻혀있던 얼굴을 가만 보았다. 얼굴만 봤을 뿐인데 무엇이 그리 좋은 것인지, 그의 입꼬리가 절로 씰룩거렸다.

"허면, 내일 오래도록 혼례복 입으신 모습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예, 오래도록 보여드리겠습니다."

박문대가 씨익 웃으며 답하고 품에 다시 안기자, 류청우 또한 그 작은 머리통을 감싸 보듬어주었다. 많은 이들의 축복 속에 혼례만 치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 혼례는 지켜지지 못할 약속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그래. 네가 착호갑사 류청우더냐."

"그렇사옵니다."

광활한 공간, 다른 신하를 다 물린 것인지 왕좌에 앉은 왕과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류청우만이 그 안에 존재했다. 신하를 물린 이유가 곧 왕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요괴를 잡아 기록하여, 요괴답사록을 엮고 있다 들었다. 그것을 완성토록 하라. 왕은 그리 명하였다. 그에 류청우의 얼굴엔 난색이 보였다.

"전하, 실은... 오늘이 소인의 혼삿날이온데, 하루만. 하루만 시간을 내어주실 순 없으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왕이 소리 내 크게 웃었다. 텅 빈 공간 속 그 웃음이 제법 오래도록 울려 퍼졌고, 그것이 뚝 끊기는 순간, 왕의 표정이 일순간에 바뀌었다.

"지금, 어명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류청우는 입을 꾹 눌러 막은 채였다.

"...송구합니다, 전하. 지금 바로 출두하겠나이다."

대궐에서 빠져나온 류청우의 옷이 철릭으로 바뀌어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이, 그의 오른손에는 활이, 그의 등에는 화살이 가득한 화살집이 매달려있었다. 그의 품속엔, 요괴답사록도 함께였다. 숨을 후 내뱉은 류청우의 눈빛이 제법 비범했다.

류청우는 강했으며, 빨랐다. 그의 검은 언제 휘두른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그의 활은 모든 것을 단숨에 꿰뚫었다. 그의 요괴답사록도 몇 장 남지 않았었기에, 오시(11시~13시) 안으로 끝낼 수 있으리라 여긴 그의 걸음이 숲속을 향하였다. 숲으로 들어가 얼마 걷지 않은 순간이었다.

"...!"

류청우가 황급히 몸을 돌리자, 그 옆으로 화살 하나가 빠르게 지나가 그의 앞에 놓인 나무에 꽂혔다. 누군가 류청우를 노리고 있는 것이었다. 류청우가 등으로 손을 뻗어 화살 하나를 잡아 활시위에 걸어, 그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당겼다 단숨에 놓았다. 그 화살에 맞은 것인지 무언가 풀썩 주저앉는 소리가 들렸다. 곧 화살 하나가 더 날아와 그의 옆을 스쳤다. 류청우는 빠르게 내달려 그 화살의 끝을 모두 피해내며, 저 또한 화살을 쏘아댔다. 하지만 그도 곧, 죽음을 면치 못했다.

동시에 날아든 화살 중 하나가, 그의 가슴팍에 꽂혀 그를 쓰러뜨렸다. 땅에 힘없이 누운 그의 가슴에서 피가 천천히 새어 나왔다. 류청우의 기침 한 번에 피가 솟구쳐 나와 그 주변을 단숨에 피로 물들였다.

"부인이라 한번 불러보지 못하였는데..."

류청우의 눈이 감겼다. 감긴 눈꺼풀 사이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

류청우의 눈에선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아래, 그의 가슴엔 화살이 하나 박혀있었다. 그 화살 깃은, 왕실군의 것이었다.

"그러게. 왜 요괴를 죽이러 다니고 그러시나."

류청우의 죽음을 전해 받은 왕이 왕좌에 방만하게 드러누웠다. 그 뒤로 거대한 꼬리가 솟아올랐고, 그의 얼굴엔 교활한 미소가 그득했다. 그는 왕이 아니었다. 왕을 연기한 구미호였다. 류청우를 비롯한 모두가 여우에 홀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었다.

평생을 요괴를 잡으러 다니던 류청우는, 요괴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또한, 하나의 요괴에 지나지 않았다. 요괴가 된 이후로도 그는, 그의 마지막 기억을 반복해, 착호갑사의 생을 계속해서 되풀이하였다. 제가 요괴인 줄도 모르고.

이것은 하늘의 농간이었을까. 아니, 그들을 어여삐 여긴 하늘의 마지막 자비였다. 어긋나버린 생과 운명이지만, 이 또한 결국 그들의 생, 그들의 운명이었기에 거스를 순 없었다. 그렇게 돌고 돌아 그 운명을 되풀이한 끝에야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들을 내려다보던 시선 하나가 그들 몰래 웃고 있었다. 류청우의 검에 의해 공중으로 흩뿌려지듯 사라졌던 그 요괴였다. 책 속에 갇히지 않고 사라져버린 요괴가 곧 모습을 바꾸었다. 형상은 없이 그저 밝은 빛을 뿜어내는 모습이었다.

'허나, 그 운명을 받들어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주마.'

그 빛이 하늘로 솟아오르고, 그 주변이 밝아졌다.

박문대는 류청우를 만나고 나서야 웃음을 보였다. 그의 올라간 눈꼬리 끝에 눈물이 맺히다 그의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이제야 불러봅니다. 서방님."

곳곳이 썩어 말라 있던 박문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온전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하얀 것이 투명하다 느껴질 만큼 깨끗하고 고운 피부, 밤하늘처럼 깊지만, 그 속에 별처럼 빛을 내는 듯한 눈동자, 은은한 분홍빛으로 물든 그의 입술까지. 모두 온전히 류청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사뿐 걸어와 그의 앞에 서자, 그 뒤로 낡고 야살스러운 기운을 뿜던 초가는 사라지고, 말끔한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었다.

류청우 또한 혼례복을 입은 채 박문대와 마주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사모를 쓰고, 허리에는 각대를 두르고, 목화를 신은 류청우가 입은 단령은 깨끗했다. 그의 가슴에 꽂혀있던 화살도, 그로 인해 흘러나온 피 한 점 없이 깨끗하고 온전한 모습이었다. 그 또한, 온전한 류청우의 모습으로 제 부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혹, 길을 헤매시진 않으셨습니까? 그곳에서 기다리지 못해 죄송해요."

"아닙니다. 내 너무 늦게 찾아뵈었죠."

두 사람의 눈에서 흐르던 눈물이 모두 멈추고, 두 사람은 환하게 웃으며 서로를 눈에 담았다.

내 이제야 답합니다.

"참 어여쁩니다."

오래 기다렸나요, 부인.

착호갑사 류청우 × 미명귀 박문대

"뭐예요, 할머니! 이야기는 이게 끝이에요?"

할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가 투덜거렸다. 그 목소리에 작게 웃은 아이의 할머니가 책을 탁 덮었다. 그리고 따스한 목소리로 아이를 도닥였다.

"남의 이야기는 딱, 허락된 곳까지만 훔쳐보는 것이란다."

妖怪答竢錄의 뒤는 捉嘷甲士와 未命鬼 아니,

류청우와 박문대만이 알고 있을 터였다.

* 미명귀(未命鬼)

1. 혼례복을 입은 채로 말라죽은 미라

2. 결혼할 나이가 되어서 남편에게 시집을 갔는데, 하필이면 시집을 간 지 얼마 안 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여자의 귀신.

이것이 정확한 미명귀의 정의입니다. 제가 내용에 맞춰 변형한 부분이 많아서 정정 차원에서 남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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