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가제)유자차 - 1

ㄱ님의 '김여주 수난기' 리메이크작 / 2021.05.02 업로드

원작 - 김여주 수난기 1



다섯 번째 전학. 아이는 가죽 재질의 가방을 쥔 채로 깨끗하게 칠해진 건물 외벽을 바라보았다. 군데군데 페인트 냄새가 가시지 않은 새 건물이 햇빛을 받아 희게 빛나고, 단정하게 조성된 화단에는 색색깔의 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어쩐지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출발이었다.

종종 아이는 자신을 자조적으로 평가했다. 이런 가정에서 뭐 얼마나 훌륭한 자식이 자라겠냐고.

아이의 아버지는 20년도 더 된 대학 성적 이야기를 명예랍시고 아직까지 떠벌리는 한심한 사람이었다. 상대적으로 잘난 아내 앞에서 그럭저럭 잘생긴 얼굴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어, 하찮은 것으로라도 무작정 자신을 포장하려 끊임없이 애쓰는 안쓰러운 사람. 술을 진탕 마시고 들어와서는 이제 겨우 열다섯 먹은 딸에게 자기가 중학생 시절에 좀 논다는 고등학생들과 이십오 대 일로 싸워 이겼다는 등의 허황된 이야기를 자랑스레 늘어놓곤 하던, 여태껏 어느 젊은 여자의 오래된 사진을 지갑 속에 숨기고 사는.

대체 어디가 좋았던 것일까. 꽤 유명한 대기업의 회장직을 자랑스레 쥐고 있는 어머니는 아이가 보기에 누굴 사랑하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다. 사랑같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허무한 것에 매달리지 않아도 삶이 비척할 일 없는 완벽한 사람. 돈과 명예, 사회적 지위, 탄탄한 자아까지. 아니다, 어쩌면 여기서는 아버지란 사람을 불쌍히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눈에 보이는 가치에 굴복하여 무릎 꿇고 만 건 그쪽이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아마 미래에도. 땅바닥에 구른 제 사랑을 줍지도, 버리지도 못한 채 그곳에서 맴돌면서.

"또 경찰서에서 연락이 오게 하는구나."

"그 애들이 먼저 무고한 사람한테 돈 뜯고 있었어."

거짓말한 것은 없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퍽 평범하지 않았고,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향했고- 어른을 협박하는 양아치들을 발견했고……, 그래서 때렸다. 사건의 경위는 이게 전부다. 다만 아이는 제 아버지를 닮아 ―그 알코올 냄새 풍기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남을 때리는 일에 재능이 있었고, 덕분에 법은 아이의 편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협박을 당하고 있던 쪽이 모 대기업의 차기 후계자였다는 사실은 의외였지만.

안정적인 가정에서 어린 시절부터 착실하게 엘리트 과정을 밟아왔을 전형적인 도련님이었다. 제 그릇보다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그런 인간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특성이었고, 이는 자존감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이 미래가 없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서 '나중에 우리 회사 경호 팀에 입사해도 되겠다'고 재수 없게 비아냥거렸겠지. 감히 세상 물정 모를 양아치 여고생 주제에 저를 무시하고 가려고 하니 '월급이 오천만 원은 족히 될 텐데 명함이라도 받아 가야 하지 않겠냐'며 도발을 한 것일 테고. 선의는 가끔 제 깃털을 까맣게 태우는 법이다. 그렇다고 후회하지는 않았다. 기대하는 순간 실망하는 것 또한 선임을 알았으니까.


학생들의 낙서를 지우려 두껍게 페인트를 덮은 벽을 따라 계단을 올라 기름칠 된 미닫이문을 열면, 비슷한 풍경에 비슷하게 꽂히는 마흔 개의 시선이 있었다. 어차피 하루 이틀이면 거둬질 관심이라고는 하나, 여러 번의 전학을 반복함에도 저 이방인을 보는 낯선 표정들은 익숙해지질 않았다.

"오늘은 전학생이 왔다. 전학생, 인사해라."

담임은 페인트칠로 메울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벗겨져 있었다. 대기업의 후계자라던 그 남자의 미래가 이렇게 생겼을까.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길거리에서 닮은 사람 셋은 쉽게 꼽아낼 수 있을 것처럼 흔한 외형이다.

"…안녕, 얘들아. 만나서 반가워."

"그래. 저기 빈 자리 있는 곳에 가서 앉아라."

다섯 번째 전학, 다섯 번째 소개. 문득 첫 번째 전학 날이 떠올랐다. 잔뜩 긴장하여 새로 산 교복 치마 뒷자락을 티 나지 않게 꽉 쥐고 있었던, 친구가 생기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하며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지금과 같은 초여름의 어느 날을. 결말이 강제 전학이었으니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겠다마는, 추억이란 펜의 잉크가 날아가고 남은 흔적과 같은 것이라 때때로 원래의 색깔을 제 마음대로 오해하게 하였다.

누가 사용했던 것인지 군데군데 파이고 지저분한 낙서가 있는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미묘하게 높이가 맞지 않는 의자에 앉아 따가워지는 눈을 비비고 있자니 그제야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하나둘 잡히기 시작했다. 쟤는 뭔데 저기 앉냐며 대놓고 박히는 날카로운 시선에 고개를 돌리자 교탁에서 눈이 마주친 것도 같은 여자아이가 미간을 구기고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유 없는 악의를 받아본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질 종류는 또 아니었다. 열린 창문 틈으로 선선한 바람이 흘러들어와 목덜미를 헤집었다. 썩 좋지 않은 출발에, 좋지 않은 진행이었다.

달갑지 않은 시선의 얽힘이 삼 초쯤 이어졌을까. 아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또 물의를 일으키면 그때는 가족조차도 감싸주지 않을 것이다. 찝찝한 시선은 관자놀이를 떠날 줄을 몰랐고, 불쾌한 기분을 어떻게든 환기하려 필통을 뒤적이는 손에는 금세 흑연이 묻어 지저분해졌다. 공간의 한계로 스펀지를 빼둔 탓에 필통 안쪽에도 여기저기 펜 자국이 가득했다. 문득 억울해졌다. 왜 미움받는지 알기는 해야지. 고개를 들면 앞자리에는 안경을 쓴 남자아이가 조용히 문제집에 답인지 낙서인지 모를 것을 끄적이고 있었다. 답 틀렸는데. 펜 뒤꽁무니로 날갯죽지 부근을 쿡 찌르자 시선이 돌아왔다.

"여기가 무슨 자리야?"

"…거기가 무슨 자리냐니?"

일단 짜증은 내지 않으니 다행인데,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바로 받아칠 문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도대체 뭐라고 물어야 한단 말인가. 무얼 모르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게 아니라, 왜 다들 저러는지 모르겠어서."

"아……. 교실 맨 뒤 창가 쪽 자리라서? 거기가 인기 제일 많잖아. 거울도 바로 있고, 창가고, 맨 뒤고."

아니다, 그게 아니었다. 그런 반응치고는 위화감이 너무 커. 눈가를 구기고서 모르겠다는 듯이 턱을 괴니, 눈을 몇 번 깜박이던 남자아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마저 늘어놓았다. 그래. 어떤 일에는 대외적인 이유와 그 속뜻이 따로 존재하는 법이다. 겉껍데기 말고, 그 속에는 씨앗이 존재할 터였다.

"보통 여기 좀 노는 애들이 앉거든. 선생님도 최대한 신경 안 쓰려고 구석으로 밀어 넣는 자리. 네 짝꿍도 그런 애고……, 그리고 잘생겼잖아. 좋아하는 애들 많아. 너 질투 받는 거야."

노는 애들만 앉는 자리, 선생님도 신경 쓰지 않는 일진, 그리고 그런 짝꿍 옆에 앉은 자신. 아이는 현재 제가 처한 상황을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 자리에 앉은 것부터 무난하게 학교에 다니기는 글렀을지도 모른다. 교육에 큰 뜻을 가지고 임하려는 목적이야 애초에 없었다지만, 예상한 것보다도 분위기가 제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을 거라는 짐작에 저절로 한숨이 내리꽂혔다. 어쩌면 책상 위의 파인 자국들은 전 주인의 한숨 자국이었을까.

그러고 보니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도 여즉 몰랐다. 뒤늦게 눈길을 주니 한 남자아이가 책상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이 잠들어 있었다. 검은 유화 물감을 칠한 듯한 새까만 뒤통수는 여름이 이마를 내민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운동을 했을까. 아니면 아침에 감고 말리질 않은 걸까. 얇은 하복 셔츠 아래로 아마 교칙에 부합하지 않을 사복 티셔츠의 색깔이 비쳤다. 눅눅한 바람이 스쳐, 샴푸 향과 담배 냄새가 섞인 묘한 향이 팔과 어깨를 타고 교실 안쪽으로 사라진 후에야 아이는 눈동자를 거두었다.

아이는 사실 흔히 '날라리'나 '양아치'라고 불리는 부류의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교내 폭행으로 강제 전학 경험이 있는 주제라지만, 아이는 이유 없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혹은 그것을 유희로 여겨본 적이 없었다. 폭행은 폭행이고, 욕설은 욕설이다. 그런 행위로 자신의 권력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랑은 도저히 가까이 지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얻은 교훈일지도 모르겠으나.

불편한 나무 등받이에 무게를 실어 기대자 마녀의 시계를 해부하는 것 같은 기분 나쁜 소리가 귓가를 긁었다. 세상모르고 잠든 이의 넓은 등짝에서부터 풍기는 불량함에 어쩐지 좀 전에 집요한 시선이 꽂힌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어딜 가든 이런 부류는 있다. 모두가 상냥한 학교를 기대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엮여 참지 못할 상황이 생기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종교라도 가졌어야 했을까. 됐다. 신이 있어도 이런 사소한 기도는 고려하지도 않으실 테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그 시점, 나무 의자의 연결 고리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제 머리카락처럼 까만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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