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일
7월 13일이 나이스 데이라길래 주제 하나만 놓고 손 가는 대로 써봤는데 전혀 길하지 않게 된 글 / 2022.07.13 업로드
느린 오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말하자면 '예상하였으나 거절하지 못한 손님'이었다. 처음에는 하나둘 나뭇잎을 적시던 것이 금세 창문가를 거세게 때릴 정도가 되니 그나마 들던 햇살마저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여자는 단색의 커튼을 손등으로 슬쩍 들춰내었다. 최근 창틀에 쌓인 먼지를 모조리 닦아낸 것이 무색하게 군데군데 거뭇함이 엿보였다. 밖은 오로지 적막이다. 쓰라린 시선이 회색의 콘크리트 위를 잘게 덮는다.
길일이랬다. 날짜를 고르고 골라 달력에 붉은 별을 세 개나 그려 놓고도 모자라 팔이 접히는 곳 안쪽에 매직으로 표시까지 해 두었으니 꿈에서라도 잊을 리 만무했다. 시끄럽고 밝은 음성에 잠을 깨이면 익숙한 일상 속 때때로 왈칵 쏟아지는 작은 행복에 그만 눈꼬리가 발개지고 마는, 그런 노곤한 하루. 늘 그러하듯 평범하게 찾아온 생의 시작.
아스러지게 빛나는 나뭇잎과 속눈썹에 알알이 맺히는 태양 빛,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한없이 머리 위로 번져 가는 새파란 하늘― 태어난 이래로 그런 호사를 감히 바라본 적 없었다. 수평선 저 너머로부터 세차게 맹세하는 파도 소리 한 번에도 혹여 사치일까 어깨를 움치고, 꽃다발 대신 모래 더미를 끌어안은 채 그 안의 작은 생명에 속삭이던 이다. 그래봐야 더 나은 온기는 쥘 수 없었으니 당연하겠지.
고작 20도 남짓한 기온에 여자는 피부 조각이 통째로 쓸려나가는 듯한 고통을 직감했다. 두드러진 뼈 사이사이마다 눅눅한 자국이 새겨졌다. 그러다 웅덩이가 되고 한 방울씩 끄트머리를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그는 무채색의 비 아래서 쉬이 물러지곤 했다. 미처 마르기 전에 밟아놓은 페인트 바닥처럼, 고개를 내밀기 전에 짓이겨놓은 잡초처럼.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처참하고 고상하도록.
때를 잘못 만나 앙상해진 가지가 울퉁불퉁해진 창문을 두드린다. 그 끝에 달린 것은 꽃도 잎도 아닌 칼날이라 다만 부러지기 쉬웠으므로 안타깝게도 그 얇은 유리를 뚫지는 못하였다. 그륵그륵, 정중한 초청을 바라는 지겨운 소리가 메아리친다. 방향을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고작 가림막 한 장에 부닥쳐 고꾸라지고 여자는 또 너덜너덜한 미소를 내던진다.
퍼렇게 질린 손이 단절의 벽을 걷어내면 기다렸다는 듯 방안으로 들이치는 물기가 시렸다. 온통 마음을 뺏기었던 하얀 거품도 이리 발밑을 적셔주지는 못하였으니, 그래 여자가 품을 수 있는 안식은 겨우 이까지였다. 무엇 대체할 수 없는 존재란 세상에 부정당해야 마땅하지 않던가.
무섭도록 밀고 들어오는 공기가 그토록 메마른 것은 상대적인 것이나 뭍에서 침수되기란 방 한구석에서 배를 뒤집고 죽어 버린 검은 것을 찾는 일보다 쉬운 것이었으므로 그는 다시 창문을 닫아 버리었다.
확실하게도 길일이구나. 온통 짙어져 버린 세계에서의 마무리는 초라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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