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밸런타인
남편이 마탑주였다 / 안단테
"남편에게 초콜릿을 만들어 줄 거야."
발단은 마샤의 그 말이었다.
에이는 사과를 먹다 말고 눈을 깜박였다.
"뭘 해?"
"초콜릿!"
"요리는 남편이 한다며."
"에이도 참. 초콜릿이랑 요리는 다르지."
만든다는 점에선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간식부터 식사까지 모두 자신이 만드는 에이는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사과를 한 입 더 베어물었다. 그제야 마샤가 설명을 덧붙였다.
"좋아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전달하는 날이잖아, 곧."
"그건 2월 아닌가?"
"남편 고향은 5월에 그런 날이 있대."
뭔가 수상하지만, 에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이 넓은데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마샤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같이 만들자."
왜지?
***
왠진 모르겠지만, 사실 거절할 이유는 딱히 없었다. 에이에게는 오래 된 (비록 중간 몇 년이 날아갔지만) 남편이 있었고 친구를 도와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며 이백 년 동안 갈군 요리 실력이 있었다. 에이는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마샤는 기뻐하며 초콜릿 재료를 가지러 갔다. 에이는 어린 친구의 뒷모습을 보며 결혼이란 정말 사람을 바꾸어 놓는구나 생각을 했다. 마샤가 저렇게까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신 나게 부엌에 초콜릿 재료를 늘어놓는 마샤 옆에서 어떻게 뭘 해야 하는지 차근히 알려주기 시작했다.
"초콜릿을 중탕할 땐 수증기가 닿게 하면 안 돼. 그러면 맛이 없어지거든."
"그래?"
"너무 팔팔 끓는 물도 안 돼. 화이트 초콜릿은 끓는 온도 달라야 하니까 확인하고."
사실 전문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고 성의가 중요하니 이렇게 열정적일 필요는 없었는데 마샤는 열심이었다. 오랜 생활의 지혜로 깨우친 것들을 이것저것 알려주며 에이는 고개를 기울였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란 참 신기하지. 이런 말을 하면 마샤가 뭐라고 대답할까. 너도 남편 있잖아, 하면서 웃을까?
마샤가 집중한 얼굴로 하트 모양 틀에 중탕한 초콜릿을 부었다. 에이는 제 앞에 놓인 하트 모양 틀을 바라보았다.
단테는 본래도 에이의 애정 표현을 좋아했다. 손짓 하나 말 한 마디를 속에 담아두고 싶어 안달을 냈다. 초콜릿도 분명 좋아할 것이다. 에이가 준다면 석탄이라도 좋아하며 씹어먹을 테니,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이래서 준비했다'고 하면 웃겠지. 약간 붉어진 뺨으로 보랏빛 보석 같은 눈동자를 휘면서 에이의 손을 붙들고 선명히 사랑스러운 얼굴로.
에이는 초콜릿을 녹였다. 실수로 손끝에 약간 묻혀서 핥아보자 달았다.
딱 초콜릿 같은 맛이었다.
***
초콜릿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완성됐다. 마샤는 기뻐하며 포장했고 에이도 옆에서 얼결에 리본을 달았다. 리본 색은 고민하다가 보라색으로 했다. 단테는 연한 갈색을 더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있긴 했지만, 주는 건 자신이니까 맘대로 하기로 했다.
마샤는 날짜에 맞춰 주고 싶으니 그 전까진 비밀로 하자고 했다. 에이도 동의했다. 정확히는 동의보다 수긍에 가까웠지만, 뭐 아무래도 좋았다. 에이는 고민하다가 초콜릿을 집까지 들고 왔다. 다행히 집에 단테는 없었고 숨기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았다. 에이의 남편은 마탑주였고 강했고 그만큼 일복이 터졌으며 일 나가기 싫다고 징징대도 나가야만 하는 능력자였다. 에이가 소소하게 집 안에 누워서 화분 돌보고 앉아서 책 읽고 등불 구경하는 동안 처리해야 할 업무가 많았다. 그즈음은 단테가 아주 바쁘던 주기였고 단테는 방을 살펴볼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이 정도면 당일이 돼도 바쁠까?'
에이가 문득 생각했다. 요근래 최소한의 시간을 제외하곤 자리를 비운 단테 덕에 그날도 아무도 없었다. 시간에 맞춰 산책하러 나가며 단테를 데리고 오는 것도 한두 번이었다. 그렇게 돌아온 단테는 몇 시간 안 되어 다시 또 불려 갔다.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했다.
"휘하 왕국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왕국에?"
"속국이라 별수 없이 도움을 줘야 한다고 자꾸 불러대서 말이야. 가기 싫은데."
이번에도 그의 얼굴엔 능력 없는 것들, 하는 말이 적혀 있는 듯했다. 불쌍한 척 눈썹을 늘어뜨린 단테가 낑낑대는 소동물마냥 얼굴을 붙이며 안겨들었다. 껴안아 오면서도 힘을 싣지는 않아서 별로 무겁지 않았다. 에이는 별생각 없이 일하고 오라고 대답했었다.
오늘 밤에는 돌아온다고 했는데.
뭐, 초콜릿을 만지작거리며 에이는 턱을 괴었다. 오늘 안 돌아오더라도 전해 줄 수 있는 날은 많다. 그들에겐 널린 것이 시간이었고 같은 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며 초콜릿은 지금만 전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뭐 지나고 나서 전해 줘도 나쁘지 않겠지. 단테는 언제 주든 좋아할 것이다.
다만…….
에이가 힐금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다소 어두컴컴해진 하늘에 별빛이 총총 떠 있었다. 달빛이 그림자에 가려져 흔들렸다. 종류를 모를 보랏빛 꽃이 소담하게 피어나 빛을 받고 살짝 흔들렸다. 바람이 불어서 갈색 머리칼알 흔들고 사라졌다. 에이는 옆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종종 단테를 기다리던 그곳에 섰다.
좋아하는 마음은 참 신기해.
종종 이런 기분을 들게 하지.
치맛자락이 약하게 펄럭였다. 꽃잎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다가 뺨을 한 번 스치고 다시 날아간다. 단테는 꼭 밤까지 온다고 했었다. 이미 밤을 지나 거의 자정에 가까워진 시각이었지만 에이는 눈을 감고 기다렸다.
네가 온다고 했어.
그 말 때문에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니야.
"에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영원이 약속된 순간에도 그 사람이 보고 싶어지는 날이 온다는 뜻이었다.
"나 기다렸어?"
사랑을 확신하는 그 목소리가 귓가를 메웠다. 에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커다란 손이 뺨을 덮는 게 느껴졌다. 사랑에 빠진 얼굴로 단테가 고개를 수그리며 달짝지근하게 웃었다. 에이는 초콜릿 향을 맡으면서 대답했다.
"응."
5월에는 여전히 초콜릿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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