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eart

비참

헥스 헤이와이어 X 시클링 (너)

※ 헥스 헤이와이어에 대한 개인 해석과 날조가 있습니다.




이 모든 비참은 결국 전부 너를 위해 준비된 것이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은 약점이 많은 사람이다. 너는 지나치게 다정하고 상냥해 지킬 사람이 너무 많았으니 이런 비극을 맞이하는 것이 아주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쩌면, 너는 이미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임을 충분히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너는 이 참상을 막을 수 없었고, 모든 것은 무너져 내렸으며,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라지고 오직 깊은 어둠만이 눈을 가리고 있으며 사랑했던 모든 것들은 먼지로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네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난자당해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네가 움켜쥐고 싶었던 것은 너의 손아귀 안에서 바스라져 먼지가 되었다. 모든 것이 엉망이었고 모든 것이 끔찍했다.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일 것이다. 너는 감히 확신할 수 있다. 여기는 오직 너 하나를 위해 마련된 지옥이며, 이곳에서 억겁을 타오를 지옥 불을 꺼트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너의 눈물 뿐이니 너는 하염없이 울고 또 울어야 한다. 


구원? 그런 것을 바랄 정도로 배가 불렀구나. 누가 너를 구원할 수 있겠니, 누가 이 화염이 들끓는 지옥으로 내려와 작열하는 불꽃에 온 몸을 그을리고 자신의 살갗을 태워 가며 너에게 손을 내밀까. 그 누구도 너를 구할 수 없고, 심지어 그 누구도 네가 여기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세상은 개인을 쉽게 버린다. 우리는 세상에, 사회에,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고 믿지만 얄팍한 방패로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세상은, 사회는, 공동체는 개인에게 관심이 없으며 개인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음으로서 생존을 영위해 나간다. 그러므로 누구도 이 지옥을 알지 못한다. 지옥에 떨어지기 전까지는 아무도 지옥을 알지 못한다. 너는 하염없이 울고, 울고, 또 울지만 아직 지옥의 불꽃을 꺼트리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너는 영원히 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무너져 내리는 것들 사이에서 너는 참담하게 망가지고 조각나서 함께 무너져 내릴 테다. 네가 사랑하는 것들은 너를 이루는 것들이었지. 너를 구성하는 것들이 네가 바로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우리 자신을 채워 나간다.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꽃과 좋아하는 동물, 좋아하는 책과 좋아하는 음악…… 그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네가 사랑하는 것들이 모두 사라진 지금 너는 너의 존재마저 위태롭다. 너는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지키고 싶은 것도 너무 많았고, 사랑하는 것도 너무 많았다. 그 모든 것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질 때 너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긁고 손톱을 세워 모든 것을 끌어안으려 했지만 네 팔은 너무 짧았고 품은 너무 좁아 모든 것을 지킬 수 없었다. 아무것도 지킬 수 없었다. 그렇게 너는 혼자가 되었다.


그 어떤 빛도 없는 세상에서. 너는 절망에 갇혀 울음을 터뜨린다. 소리 없는 울음이다. 다른 사람에게 들릴까 봐, 다른 사람을 성가시고 귀찮게 할까 봐 울음을 삼켜 버릇한 너는 소리 내어 우는 법을 모른다. 너무 오랫동안 숨죽여 울어왔기에 아예 소리 내어 통곡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것을 잃었다, 고 해도 좋을 것이다. 너의 어떤 일부는 영영 잊히고 잃어버려 다시는 되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런 식으로 잊어버리고 떨어뜨리고 지워진 너의 조각이 얼마나 될까. 너는 너를 너무 많이 훼손했다. 상처에서 흐른 피가 바닥으로 떨어져 웅덩이를 만들 때, 너는 통증에 집중했다. 그 통증이 네가 살아있다는 유일한 지표였기에. 입술을 물어 뜯거나 손목을 긋거나 목을 죄거나 하는, 생명을 위협하는 그런 것들이 너를 너이게 만들었고 너를 살아 있다고 확신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지금 너는 통증도 아픔도 느끼지 못하고 그저 서럽게 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네가 서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잿더미가 남았다. 너는 발바닥을 데이고 또 살갗을 태워가며 맴돌았고 너를 중심으로 불은 잦아들어 잿더미가 남았지만 너의 발이 닿지 못한 곳에는 아직도 맹렬하게 불이 타고 있고 너의 눈물은 이제 말라버렸다. 너는 더 이상 불을 끌 힘도, 기운도, 의지도 남아있지 않다. 너는 네가 만든 잿더미 위에 털썩 주저앉아 한숨을 쉰다. 너는 지쳤고, 쉬고 싶고, 그만 눈 감고 잠들고 싶지만 그 중 무엇도 허락된 것이 없었다. 너는 몸 하나 누이기도 좁은 잿더미 위에 웅크리고 앉는다. 너는 너무 오래 혼자였기 때문에 혼잣말을 벗 삼아 혼자 묻고 혼자 대답했다. 그래서 너는 이번에도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한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아마 죽을 때까지. 죽음을 앞당길 수는 없을까? 방법이야 많지. 당장 저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면? 끔찍하게 고통스럽겠지만 언젠가는 결국 죽겠지. 그 고통을 견디고 나면 자유로워질까? 그건 아무도 알 수 없지. 너는 힘없이 웃는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불확실성과 불명확함, 불가능과 불가해 속에 너는 있다.


지금을 잊고 내일을 잊은 너에게는 오직 과거 뿐이다. 너는 끝없이 과거를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후회하고, 후회하고, 다시 후회한다.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어. 혹은 그렇게 해야 했어. 좀 더 노력할 수 있었어. 좀 더 잘할 수 있었어.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했어. 내 탓이야. 내 잘못이야. 나 때문이야. 오만한 자책. 세상의 모든 불행이 자신으로부터 기인했을 거라는 자의식 과잉. 너는 몸을 웅크리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는다. 주먹으로 머리를 때린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아무 짝에도…….


그렇게 퍽, 퍽 소리를 내며 머리를 내리치던 너의 손목을 그가 잡았다.


그는 너를 찾아 기꺼이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진 사람이다. 그는 지옥의 불길 사이를 헤매며 너를 찾았다. 모두가 너를 잊어버리고 지워버리고 마침내 존재조차 상실했을 때에도 그는 너를 잊지 않았고 지우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되새기고 있었다. 그는 너를 알고 있었고, 너를 이해하고 있었고, 너를 원하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너를 원하고 있었던 그는 오랜 시간을 헤맨 끝에 결국 이렇게 다시 너를 찾아냈다. 그는 너의 소중한 사람이었고, 너 역시 그의 소중한 사람이었을 테지만 너는 모든 과거에서 불행만을 꺼내 곱씹었으므로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다고 그는 웃으며 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너를 일으켜 세웠다. 옷에 묻은 재 가루를 툭툭 털어 주고 당신의 얼굴을 슥슥 문질러 말라붙은 눈물 자국을 닦아 준다. 미안해. 너무 늦었어. 내가 미안해. 그가 사과하고, 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는 너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은 넓었고, 따스했고, 좋은 향기가 났다…….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떠나가고 부서지고 너를 혼자 남겨두고 죽어 가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없어지고 너를 혼자 남겨 둔 채 박살 났을 때, 그만큼은 너를 잊지 않고 떠나지 않고 되돌아왔다. 그는 너를 오랫동안 찾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아주 오랫동안 너를 구하기 위해 많은 것을 시도했고,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었고, 너를 위해 이곳에 왔고 이제 너를 다시 데려갈 거라고 말한다. 너는 흐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지만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네가 사랑하던 모든 것이 부서졌기에 너는 그를 사랑하고 싶지 않다. 그 역시 부서지는 것을 너는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는 그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너의 손목을 빼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갈 수 없다고 말했다. 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아직 더 울어야 한다고, 더 많이 울어서 이곳의 불을 모두 꺼야 한다고 너는 다 쉰 목소리로 힘겹게 중얼거렸다. 거의 속삭임에 가까운 그 목소리를 어떻게든 알아들은 그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는 네가 이곳에 더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 모든 불행으로부터 너를 꺼내 주겠다고, 그것을 위해 내가 왔다고 말한다. 너는 그 말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슬픔과 불행이 있고 사랑했던 것들은 반드시 사라지며 좋은 관계일수록 빨리 끊어지고 소중히 여길 수록 더 빨리 뭉개져 버리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다. 그래서 너는 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왜 다칠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걸까. 결국 없어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을 줄 수 있는 걸까. 사라지고 끊어질 것을 알면서도 불안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는 걸까. 당신은 알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결국 먼지가 되어 사라질 텐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지 너는 질문한다. 모든 것은 없던 것이 되어 내 손을 떠나가고 내 품은 곧 공허해질 텐데, 그렇게 모든 것이 부서지고 망가져 이곳에서 불타 재가 될 뿐인데. 그것을 감내하고 사랑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는 조용히 당신을 바라본다. 그의 콧등 위에 걸친 안경 너머 그의 눈은 오색 찬란하다. 푸른가 하면 노랗고, 노란가 하면 주황빛이다. 또 그런가, 하면 연녹색으로 혹은 하얀색으로 또는 보라색으로 빛나기도 한다. 그의 눈은 오로라처럼 아름답다.


“그렇기에 더욱 순간을 사랑할 뿐이야.”


곧 없어질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름을 붙이고 사랑할 수밖에. 지워질 순간이기에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고, 흘러갈 시간이기에 소중히 품을 수 있다. 언젠가 사라질 사람이기에 후회 없이 사랑하고, 끝날 관계이기에 미련이 남지 않도록 마음을 쏟는다.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것에 상처 입는다는 뜻이 아닌가요? 너는 질문하고 그는 희미하게 웃는다. 모든 것에 상처 입는다면 모든 것이 결국 나에게 남는 거겠지. 몸에 새겨진 상처는 흉터로 남고 흉터는 추억이 된다. 흐릿한 나의 기억 속에서 모든 것은 내가 영원할 동안 영원하고, 나는 죽음 직전까지 영원하다. 영원히 사랑해,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없음에도 영원을 걸고 약속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의 존재 한계가 영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죽을 것이기에 더 맹렬하게 타올라, 울고, 웃고, 있는 힘껏 기뻐하다가도 화를 내고, 미워했다가도 다시 사랑하게 되는 거라고 그는 말한다.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야. 그는 조용히 대답하고 너를 바라본다. 너는 그 눈을 들여다본다. 오로라 빛으로 찬란한 그 눈을.


이 모든 비참을 딛고 일어난 너는 더욱 아름답기에.


너는 그의 손을 잡는다. 그는 너를 이끌어 이 지옥을 빠져나간다. 그는 오르페우스가 아니고 너는 에우리디케가 아니라서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너는 그림자가 되지 않는다. 지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다시 찬란한 햇빛이 너의 얼굴에 닿았을 때, 너는 모처럼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었다. 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졌어도 세상은 아직 여전하고, 네가 존재하기에 너의 세계가 여기 있고, 너는 앞으로 더욱 살아가면서 더 많은 것을 만나고 더 많은 것을 사랑하면서 더 많이 울게 되겠지만. 그 모든 것이 너를 너이게 하고, 계속 운다는 것은 결국 더 많은 것을 사랑했다는 증거이기에. 네가 저 깊은 심연으로 너를 파묻지 않는다면, 세상은 여전히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마치 그가 너를 기어이 찾아내 이곳으로 데리고 나온 것처럼, 그 어떤 사랑도 헛되지 않았고 그 어떤 시간도 무의미하지 않았기에. 그는 너를 보며 빙긋 웃는다. 그의 미소는 다정하다.


너를 사랑해. 오직 그것 뿐이야.


잔잔한 목소리가 담담히 사랑을 고백해 올 때, 너는 문득 울음이 터진다. 다시 태어난 것처럼 갓난아이처럼 운다. 사랑해. 그게 전부야. 그게 전부였다. 그게 너를 살려냈고, 살아있게 하고, 살아가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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