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eart

부탁

to. 헥스 헤이와이어



※ 헥스 헤이와이어에 대한 개인 해석과 날조가 있습니다.

※ 헥스 헤이와이어의 공식 설정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임을 밝힙니다.




고통은 그 자신의 고유한 것으로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고통은 신체에 새겨지고 겪은 당사자 외에 그 누구도 그것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 누구도 타인의 고통을 대신 겪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고통을 타인에게 덮어 씌우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타인의 고통은 그의 몸에 새겨진 것으로 그 누구도 타인의 몸을 대신할 수 없는 것처럼 고통은 그런 식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억되고 혹은 새겨지고 간혹 되살아난다.


나의 고통은 나의 것이다. 나의 언어나 행동, 생각은 타인에게 옮겨 갈 수 있으나 고통만큼은 그럴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고통이 바로 내가 누구임을 증명한다. 고유한 지문처럼. 그 누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이 겪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같은 상황, 같은 처지, 같은 고통에 놓여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각각은 각각의 다른 고통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모두 그들 자신을 구성한다. 모두가 함께 비를 맞는다고 해서 모두가 똑같이 젖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우산을, 누군가는 우비를 입겠지만 누군가는 구멍이 난 우산을 쓰고 누군가는 우산 없이 그저 노출된다. 누군가는 지붕 아래에서, 누군가는 처마 아래에서 비를 본다. 누군가는 나무 아래 숨어 손을 내밀고 누군가는 심지어, 전혀 비가 내리지 않는 곳에 있을 수 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우리의 것을 가진다.


그는 그 고유한 증명을 약탈한다. 그의 능력은 타인의 고통을 흡수하는 것, 그 자신을 대가로. 그는 그 자신을 내놓아 타인의 고통을, 트라우마를, 타인이 맞아야 할 비를 대신 가져간다. 나를 적셔야 했던 그 비가 그를 젖게 만들고, 잠기게 만든다.


그리고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고통을, 트라우마를, 비를 박탈당한 나는 과연 나인가? 나를 구성하고 있던 상처와 흉터, 고통과 기억을 망각한 나는 나인가? 여전히 나일 수 있는가? 누군가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의한 스트레스 혹은 그 모든 반응이 뇌의 자기 방어라고 말한다. 똑같은 상황을 겪었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전략을 구상하기 때문에 절대로 잊히지 않고 계속 기억에 남아 상기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가 나의 기억을, 고통을 가져갔을 때 나는 과거의 공격에 대한 방어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노출되고 그는 나의 고통을 가져가는 대신 희생을 치른다. 그가 치른 희생을 내가 짐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그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며 타인의 고통을 강탈해 온다. 그러므로 그는 타인의 고통을 기억한다. 타인의 고통을 기억하는 것으로 그 자신의 고통을 새롭게 새긴다. 그의 몸에 새겨진 무수한 상처들은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증명한다. 그가 구원한 무수한 사람들은 그의 희생을 기억할까. 적어도 나는 그들이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기억한다 하더라도, 고통을 빼앗긴 것을 기억하지 못하리라 생각한다. 그가 ‘고통을 흡수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망각의 축복을 내려 주는 것이고, 완벽한 망각을 위해서는 그가 무엇을 가져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기에 그들은, 그를 의미 있게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나 푸른 머리카락 사이 언뜻 보였던 검은 머리카락을 기억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는 나의 상처를 앗아갔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그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하여 상처를 흉터로 덮고 새 살이 돋아날 기회를 빼앗았다. 누군가는 그것에 감사할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드는, 충격과 고통, 공포로 인해 몸을 뻣뻣하게 굳게 만들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만들고 무력하게 눈물을 흘리거나 비명을 질러 그 자신을 유지할 수 없는 기억을 가져가 주었기에 감사할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것에 감사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내가 나의 것을 씹어 삼키고 소화하여 오롯한 내 것으로 만들기 전에 그것을 가져간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내가 모든 것을 잊고 다른 ‘보통의 평범한’ 사람처럼 살아가길 바란다면, 이 세상에 그런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누구나 각자의 고통을 가지고 있으며 그는 그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전부 다 앗아 갈 수는 없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과 트라우마를 끌어안기에 그 역시 그저 한 명의 인간일 뿐이고,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는 금방 자신을 잃어버릴 것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그가 잊어버리기 가장 쉬운 것이 바로 그 자신이라는 것은 지독한 모순이다.


그러므로 그는 타인과의 소통을, 관계를 배워 나가야 한다. 그의 눈에 보이는 슬픔과 고통을 눈 감아 주고 그저 지나치고 그들이 그들의 고통을 양분 삼아 성장할 수 있을 기회를 주기 위하여, 손을 뻗지 않기 위하여, 그의 눈에 들어오는 모든 이들의 슬픔을 박탈하지 않기 위하여. 그는 그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가 그 자신을 잃어버리기 전에, 잊어버리기 전에, 그 다른 어떤 기억보다 가장 깊은 곳에 묻어 버리기 전에, 버리기 전에. 그는 그 자신을 유지하고 그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여 성장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그런 기회를 줄 수 있을 테니까.


그는 아직 그 방법을 모른다. 그는 심지어 그 사실조차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는, 타인이, 그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고통과 슬픔, 비탄과 비통으로 쓰러져 있을 때 그가 스스로 일어나 그 모든 것을 치우고 두 발로 일어 서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모든 것을 가엾게 여기고, 모든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슬픔으로 받아들이는 가엾고 안타깝고 슬픈 사람이다. 여린 사람이기에 타인의 여린 면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알아차리고 그 모든 것에 상처 받은 경험이 있기에 타인이 어떤 때에 어떻게 상처 받는지를 너무 잘 아는 사람. 그는 그 자신의 고통을, 슬픔을, 아픔을 견딜 수 없어 타인 역시 그러리라 생각하고 타인의 슬픔을, 고통을, 아픔을 약탈해 온다. 그럼으로 그들을 해방하고 자신을 더욱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것은 전혀 괜찮지 않다.


우리는 그의 고통을 알 수 없다. 고통은 그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더 많은 고통을 스스로 찾아, 손을 뻗어, 삼키는 것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최소한 그에게 그러지 말라고 부탁 정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식으로만 타인을 대해 왔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고통을 가장 잘 이해하기에 타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비통은 뿌리가 깊고 그 아래 파묻힌 고통은 무수히 많아 그는 하염없이 슬프겠지만 적어도 그의 곁에 서서 우산을 씌워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고통을 훔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그 자신의 인내심으로, 참을성으로, 지나치게 상냥하고 다정한 그 마음을 무정하고 냉정한 마음으로 방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는 분명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타인을 고칠 수 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별개로, 해야 하는지, 그것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 수 없기에. 그는 무수히 많은 사람을 구했지만, 그렇기에 그 자신을 구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의 고통으로 성장하고, 자라고, 자립한다. 그 역시 그 자신의 고통으로 성장하고, 자라고, 자립해야 한다. 지나치게 활짝 열려 있는 그 문을 닫는 법을 배워야 하고, 슬픔을 삼키는 법을 배워야 하고, 허투루 동정과 연민을 베풀지 않도록 스스로를 단속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전혀 괜찮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는 지나치게 현명하여 지나치게 슬픈 사람이다. 그의 또 다른 이름이 비통의 현자인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타인과 섞일 필요가 있다고, 교류할 필요가 있다고 자각하여 어딘가에 소속되길 원하는 것은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다른 이들을 끌어안는 대신 곁에 나란히 서서 손을 잡는 법을 배워야 하고 사람이, 각자의 트라우마와 고통과 아픔을, 아주 오랫동안 고통 받으며 힘겹게 소화한다 하더라도 그것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방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심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타인에게서 눈을 돌림으로써 타인과 더욱 결속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의 모순이다. 그러니, 그에게 부탁하고 싶다. 할 수 있다면 그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다. 타인의 슬픔을 삼키지 말아 달라고, 다른 사람이 그것을 고유하게 간직하고 품어 이물질을 품은 조개가 진주를 빚어내듯 새로운 결실을 맺는 것을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씨앗에서 싹이 터 커다란 나무가 되듯이, 알을 오랫동안 품어 마침내 새가 부화하듯이.


당신은 무정해질 필요가 있다. 그것이 나의 진단이다.


불타는 집에 뛰어 들어가지 않고.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러 함께 물에 들어가지 않고. 설령 당신이 불타는 집에 뛰어 들어가 상대방을 구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 함께 뭍으로 나올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는 대신 집에 물을 끼얹어 불을 끄고 물에 빠진 사람에게 튜브 따위를 던져 주어 뭍으로 당겨 주는 방식으로 타인을 돕는 다른 방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이 상하지 않고, 다치지 않고, 훼손되지 않고 타인을 품을 수 있도록. 당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너무 많이 알아 너무 많이 슬픈 당신이, 이제 슬프지 않을 수 있도록. 슬픔을 지나치게 머금어 너무 눅눅해진 당신이, 타인이 맞아야 하는 비를 모두 대신 맞아 축축하고 차가운 당신이. 그만 젖은 외투를 내려놓고 따스한 햇볕 아래에서 몸을 데우고 옷을 말릴 수 있도록 당신은 모든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설령 당신이 그것을 원치 않는다 하더라도, 당신이 보다 오래 존재해 주길 바라는 존재들을 위해서라도.


당신이 보다 행복하게 타인과의 관계를 맺어 가길 바라기에. 보다 덜 다치면서, 보다 덜 훼손되면서, 당신 자신을 유지하면서 타인과 어울리길 바라기에. 아마 그 아픔과 고통과 트라우마로부터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리는 것은 매우 어렵고 견디기 힘든 연습일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당신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타인을 돌보는 대신 당신 자신을 생각하라고. 당신이 없으면, 타인을 구하는 당신이 없으면 결과적으로 아무도 구할 수 없게 된다고. 그러므로, 나는 그에게 부탁하고 싶다. 그 무수한 슬픔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는 당신에게. 그 모든 것을 당장 내려놓으라고 하지는 않을 테니, 적어도 더 많은 짐을 얹지는 않도록.


그것이 내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부탁이다.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