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OC

낙원이 실재할 가능성 - 홍주

𝄋

𝄋

짧고 얕은 숨을 가졌니?

플루트를 배워보렴.

여린 손으로 삶을 헤쳐 나가기 벅차다고?

그럼 우리 함께 기타를 치자.

-황유원.

𝄋

- 배우 김새벽

홍주

紅珠

*

38세 여성

165cm

변방에서 작은 악기상가를 운영한다.

지옥에도 낭만 한 꼬집 곁들이면, 꽤 괜찮을걸?

나의 아버지. 유명하다면 유명한 가수였다.

컨트리와 포크를 오가는 테크닉이 훌륭했다나... 아버지는 늘 통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자연히 기타를 접할 기회가 많았고. 아버지는 꽤 일찍부터 나에게 이것 저것 가르쳐 주셨다. 아버지에겐 낭만지상주의자인 면도 있어서, 내가 이 동네 불량배들에게 얻어 맞고 오는 날이면 아버지가 내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며 새로운 노래를 가르쳐줬다. 그렇게 새로 알게 된 노래가 정말 많다... 이 바보 같은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번 돈을 모두 털어, 왕왕 같이 들렀던 악기상점을 통째로 사들였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아버지는 크게 앓았고, 내 딸... 아니, 아빠. 무리해서 그 가게는 왜 샀어요. 병원비가 없잖아... 여기선 무슨 일을 해도 별로 유의미하진 않은 것 같다... 그러니 너는 그저 최소한의 너만을 영위하면서... 가끔 기타도 치고. 낭만 하나만은 절대 잃지 마...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제 막 이십대 초반에 들어선 나로서는, 한 가게를 굴린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이런 곳에 덜렁. 놓인 악기점이라니. 우리 같은 사람 말고 누가 또 악기를 사러 오기나 할까? 그렇게 몇 달을 파리만 날리며 지냈다. 악기점 건물 자체가 내 소유였으므로, 건물 관리에 품이 들긴 했지만? 임대료에 허덕이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여름, 장마철이었다. 장마철엔 악기 관리가 더 어려워서, 한껏 예민해져 있을 시기였다. 실로 오랜만에, 가게 출입문에 붙은 종이 울렸다. 웬 남자애가. 숨가쁘게 달려와서는.

누나. (헉헉대며 숨을 고른다.)

저 뭐든 좋으니까. 악기 연주 하는 방법 좀.

가르쳐주세요. 돈은 지금 없는데...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꼭! 갚을 테니까...

나는 너를 처음 보는데... 다짜고짜 누나라니. 내가 몇 살인줄은 알아? 아니, 그건 둘째치고.얘. 번지 수 잘못 찾았어. 여기는 악기를 파는 곳이지, 연주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 그러기엔 소년의 눈빛이. 흙먼지에 파묻힌 보석처럼. 숨길 수 없이 빛났다. 그제서야 그 애의 행색이 눈에 다 들어왔다. 어디서 구르다 온 건지. 영 거지 꼴에. 옛날의 나처럼 맨날 처맞았는지. 얼굴이며 팔 다리가 멍투성이였다. 하아아... 크게 한숨 한 번 쉬고 그 애한테 물었다. 돌아갈 집은 있니? 아니요? 부모님은 계시고? ...아뇨. 하. 그래... 미안하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입이 늘어나는 건 좀 곤란한데... 어미 잃은 개새끼 같은 애가. 나를 키워주세요. 하고 제 발로 들어오다니... 그리고 강아지라고 치기에도 영 커다랗고... 징그러운 남자앤데. 눈 질끈 감고. 그래. 우리 집에. 아버지가 쓰던 방이 비어 있어. 대신에. 너 여기서 일해. 밥 값은 하라고. 악기는... 글쎄. 내가 여러 종류 깔짝이며 건드려보긴 했는데, 가르쳐 줄 수 있을 만한 건... 몇 가지 없네. 어째. 그거라도? 그 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거렸다. 그렇게... 일방적 구제에 가까운 동거를 시작했다. 그 애는 삐뚤게 크지는 않았는지. 내가 자고 있는 새벽에도 부스럭거리며 이곳 저곳을 청소하는 것 같았다. 자기 옷... 아니. 아버지가 젊을 때 입던 옷들을 빌려준 것이지. 아무튼. 제 몫의 빨래도 스스로 했다. 어디 나돌아 다니며 뭐라도 하긴 하는지, 가끔 손님을 데리고 가게로 들어올 때도 있었다. 그 애 덕에 약간은 더 윤택하게 가게며 생활이 굴러가고 있을 때 즈음... 한 가지 잊었던 것. 악기 연주. 그 애는 뭘 하면 좋을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쉬는 날에 내 앞에 불러 앉혀서. 물었다.

너, 호흡이 좀 가쁘니. 평소에?

...네. 숨이 좀 짧아요.

그래. 그게 어때? 생활하면서... 불편해?

아무래도요? 한 호흡에 긴 말도 잘 하고 싶어요.

...그러면... 가게 한 구석의 악기창고에 갔다. 제일 막 다뤄도 아깝지 않은 싼 걸로 시작하자. 그리하여 이 매장에서 제일 싼 모델의 플루트를 가져와 그 애 앞에 놓았다. 열심히 일해준... 보너스야. 너, 플루트 배워 봐. 아주 기초는 내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 같아. 역시 초심자라 그런가. 플룻을 불기 위한 제대로 된 호흡법부터 가르쳐야 했다. 곽티슈 한 장을 뽑았다. 너 아직 저거 불 때 아니야. 플룻은... 숨 쉬는 법부터 새로 배워야 해. 반드시 복식호흡을 하고. 혀를 약간 차며 두, 두, 두.숨을 내뱉고. 그렇게 쉬는 숨은 일관된 방향으로 불어야 한다. 그렇게 휴지를 얼굴 앞에 갖다 대고, 텅잉(플룻 연주 등에 쓰이는 기법. 혀를 투. 투. 하고 찬다.)을 가르쳤다. 거울 앞에 세워두고 고개가 필요 이상으로 비뚤어지지 않도록 잡아주기도 했다. 그런 것만 한 달은 한 것 같다. 대체 악기는 언제 해요? 떼쓸 법도 한데. 불평 하나 없이 잘 따라와 주었다. 드디어. 세 조각으로 나눠져 있는 플룻을 조립하고, 각 키에 손가락을 어떻게 얹어야 하는지. 이게 도. 이건 레. 이렇게 다시 잡고 좀 세게 불면 높은 도... 플룻은 마음이 비틀어지면 예쁜 소리를 낼 수가 없으니까. 늘 거울 앞에서 연습 시켰다. 그 애는, 가끔 잘 되지 않으면 그 나잇대 애들처럼 어리광도 피우면서. 열심히 연습했다. 어느 정도 매끈하게 모든 음을 빚어낼 수 있을 때 즈음, 플룻 교본을 가져왔다. 아, 너 악보 볼줄은 알고? ...네! 그건 알아요. 그 애는 일하고 난 뒤의 짤막한 틈마다 플룻을 연습했고. 집에 돌아와서도. 밤엔 내가 자야 하니까 소리는 내지 않되, 손가락을 플룻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이는 연습도 했던 것 같아 보였다. 그렇게 교본을 세 권째 떼고, 그 애는 성인이 되었다. 내가 굳이 봐주지 않아도 알아서 자세를 고쳐 잡을 수도 있게 됐다. 야. 이젠 하산해라. 또다시 악기창고에 들어가, 내가 본격적으로 플룻 연주를 할 때를 상상하고 따로 빼 두었던 플룻을 가져왔다. 이거 비싼 거야. 네 몸보다 소중히 다뤄. 알겠지? 농담하듯 말했지만, 그 애는 받은 플룻 가방을 꼭 쥐고 몇 번이나 감사하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 애는 내가 만들어 준 둥지에서 나갔는데... 한동안은 걔가 없는 자리가 허전하긴 했다. 청소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다시 집이 옛날처럼 더러워졌다. 그래도 적응해야겠지... 간간히 들어오는. 걔가 단골로 만든 손님들을 맞으며. 어떻게 잘 지내긴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우편 하나를 받았다. 발신인이 그 애네? 반가운 마음으로 봉투를 열어보니... 티켓과 짧은 편지. 누나. 저. 한 오케스트라의 단원이 됐어요. 모두 누나 덕분이에요. 제가 처음으로 오케스트라 무대에 오를 공연 표도 넣었어요. 꼭 와주세요. 와서, 저를 쳐다봐 줘요. 저도. 누나를 찾을 테니까.

...

나는 여지껏 이 구질구질한 동네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너는 훨훨 나는구나. 내가 가진 제일 비싼 옷으로 차려입고, 공연을 보러 갔다. 꽃다발도 하나 챙겼다. 오케스트라 한 쪽의 플룻 무리에서 쉽게 그 앨 찾을 수 있었다. 걔는 키 하나는 멀대같이 컸으니까. 앉은 자리에서도 혼자 불쑥 솟은 게 웃기기도 했다. 뭐. 기대했던 것보다 그 애는 단체 연주에 잘 녹아 들었다. 곡이 절정으로 치달을 즈음엔, 걔도 나를 찾았는지. 눈이 마주쳤다. 연주가 끝나고. 나는 열심히 치는 박수로 칭찬을 대신했다. 무대 뒤편에서 그애를 만나 꽃다발을 건넸다. 와줘서 고마워요. 나, 이제. 누나가 줬던 월급보다 더 벌어요! ...하긴. 내가 거의 무급 수준으로 부려먹은 게 생각나 좀 미안했다. 그래도. 네가 다 컸구나... 내가 온전히 다 키운 애도 아닌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리고요, 있잖아요. 누나...

*

눈 뜨니 나의 집. 나의 방인데... 좁은 침대에 낑겨 옆에 누운? 그 애가?

...뭐야? 뭐야?

누나. 나... 누나가 진짜 좋아요. 사랑해요. 가벼운 마음도 아니고. 어린 마음에 막 지르는 것도 아니에요.

야...너...

숱한 고민을 했다. 나는 이십대 중반에서도 꺾였는데. 얘는 이제 갓 성인이고. 고작 내가 붙잡아 두기엔 너무... 앞길이 창창한 애잖아... 막막했다. 평소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울음이 터졌다. 아, 아니. 누나... 그... 미안해요... 나 너무 어리죠...?  근데... 정말로... 그 뒤의 말들은 혼미한 나머지 기억을 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결론은... 그 애의 끈질긴 구애는 성공했다. 그때처럼. 우린 다시 같이 살았다. 방은 같이 쓰면서. 걔 눈엔 나 뿐이고. 그런 가득한 사랑을 받고. 이런 애를 꼭 닮은 아이가 갖고 싶었다. 많이 시도해봤지만, 임신이 잘 되지 않았다. 내가 문제인 것 같았다. 크게 슬퍼하는 나를 두고 그 애는 또 그렇게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달래주었다. 우리 둘이서도. 정말 즐겁게 지낼 수 있잖아요. 괜찮아요. 괜찮아요. 사랑해요, 누나...

... 그런데  왜 지금은 혼자 있냐고?

그러고 한 삼 년 정도가 지났다. 거의 포기했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다다라서. 착상이 되었다.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 애는 엄청나게 기뻐했다. 이제 몸조심만 잘 하면 되는... 거였는데... 바닷가에 가자고 하지 말았어야 했다. 만조를 구경하고. 컨트리 음악을 들으며 해안도로를 달리지 않았어야 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했어도. 재해처럼 닥쳐온 음주운전 덤프트럭을 피할 수 없었다. 우리 차는 반파되었고. 병원에서 깨어나니 나뿐이었다. 그 애의 발인 날에, 차마... 그 관 속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모든 걸 잃었다. 몇 년을 술에 절어 살았다. 가게도 여는 둥 마는 둥 했다. 소식을 들은 단골들이 크게 슬퍼하며 돌아가면서 나를 찾아와 위로했다. 아아. 이게 다 무슨 소용이야...

*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나는 살아 있으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가끔씩 너울로 밀려오는 그리움과 슬픔을 참으며. 매장의 악기들을 닦고, 꼭 맞는 주인을 찾아 주었다. 걔도,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사는 걸 원하겠지. 생각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매장의 차임벨이 또다시 울렸다.

...저기요...저...

악기를 배워보고 싶은데... 뭘 고르면 좋을까요?

꼭 그 때의 그 애 만큼 어린 애가 찾아왔다. 꾹 참고 살았는데. 황급히 돌아서서 조금 울었다.

여기는 악기를 파는 데지, 연주하는 걸 가르쳐 주는 데가 아닌데?

알아요. 근데... 이 동네. 그런 거 없잖아요.

아... 그 애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구나. 음... 집에 어른들은 계시고? 네! 공부하기 싫어서 몰래 나왔어요. 저희 집은 너무 좁고... 더럽고...

그래... 너는... 약하고 보드라운 손을 가졌구나.

약간 왜소한 아이에게 알맞은 작은 기타를 가져왔다. 기타 잡는 방법부터, 코드를 어떻게 잡는지. 손이 너무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것도 몇 달은 쓴 것 같다. 그리고 얼마 후, 그 아이의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이 아이와 함께 찾아왔다. 그동안 실례가 많았다고. 값은 지불하겠다고. 정말로 꽤 두꺼운 봉투를 카운터에 내려놓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그들은 사라졌다. 또 다른 연주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아.

낭만을 잃지 말라던 게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드디어... 알겠어요. 아빠.

𝄋

장마철이네.

습한 계절은 참 힘들어.

모든 악기들이 서글퍼지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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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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