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온라인 게임은 무법지대

5화

익명 by 시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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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3단짜리 보스의 피통이 80%가량 깎여나갔다.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마린이었지만 행동은 레이드 리더가 빨랐다.

“패턴 변한다!”

회의 때 작전대로 모든 플레이어가 보스의 주변에서 조금 떨어진 채 빙 둘러싸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놈은 작은 방패와 무기를 공중으로 집어 던졌다. 그렇지,이제 베타 때처럼 곡도를 들면…….

“…!”

이번에도 가장 먼저 이변을 캐치한 건 마린이었다. 일팽 더 코볼트 로드, 피통이 빨갛게 변하면 최후의 발악처럼 무기를 낡아빠진 검에서 곡도로 바꿀 것이다. 모두가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놈이 허리춤에서 소환한 건 곡도가 아니라 태도. 미세한 차이라서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마린의 눈에는 그 차이가 확연히 보였다.

“큭…!”

말로 하기엔 늦었다. 마린은 하는 수 없이 근처에 있던 스테노의 멱살을 잡아 뒤로 크게 뛰었다. 그와 동시에 코볼트의 왕이 치켜든 태도를 바닥에 끌더니, 그륵, 그르륵.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회전시켰다.

“뭐, 뭐야… 으악!”

“뒤로, 뒤로 뛰어!”

그제야 패턴이 다르다는 것을 눈치챈 리더가 모두에게 명령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코볼트는 태도를 정면을 향해 겨누더니,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돌진했다. 거친 먼지폭풍이 일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정면에서 공격을 맞은 사람, 측면에서 폭풍에 휩쓸린 사람. 아비규환이다. 먼지가 걷히자, 날카로운 태도 끝에 누군가 찔린 채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리더…!”

마린이 숨을 참았다. 스테노는 미간을 구긴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입을 틀어막았고, 누군가는 주저앉았다. “컥, 컥….” 장신의 남자는 무력하게, 그저 칼끝에 꽂혀 순식간에 0으로 줄어든 자신의 hp만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몇 초도 되지 않아, 그를 구성하는 데이터는 터져 파편이 되었다. 그저 데이터 하나가 사라지는 것 뿐이다. 원래라면 그랬을 텐데, 게임이 게임이 아니게 된 순간부터 이런 저렴한 연출이 하나의 목숨이 사라졌음을 의미하게 됐다.

모두가 굳어 있었다. 공포와 놀람 때문만이 아니었다. 보스가 쓴 태도 광역기에는 마비 기능도 탑재되어 있었다. 모두가 꿈쩍도 못하고 엎드려 있었다. 코볼트의 왕은 먹잇감을 놓칠 수 없다는 듯 쓰러진 플레이어들에게 태도를 겨누었다. 마비? 그런 걸 쓰는 몹은 1층에 없었잖아. 마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았다. 그러나 어떠한 행동을 하기 직전, 곁에 있던 스테노가 먼저 움직였다.

“…!?”

스테노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보스를 향해 질주했다. 놈이 태도로 내리치기 직전, 스테노의 검날이 놈의 짧뚱한 다리에 닿았다. 그러자 타켓팅이 변경되고, 몸을 돌려 태도를 휘둘렀다. 스테노는 이를 받아쳤다. 그러나 공격이 묵직한지 조금 휘청거렸다. 그럼에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경직 타임이 있는 소드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우직하게 보스와 검을 맞대고 있었다.

까앙, 깡! 몇 차례의 공방전 끝에 코볼트 왕은 소드 스킬을 발동시켰다. 태도의 검신이 푸르게 빛났고, 스테노도 소드 스킬을 발동시켰지만 반 템포 늦은 것 같았다. 푸른 궤적이 십자 형태로 스테노에게 육박했다. “윽!” 받아 치려 했지만 때는 늦었다. 검격을 한 대 얻어맞고는 튕겨져 나온다.

“하압!”

그때 때마침 튀어나온 신속배달이 스테노의 몸을 캐치했다. 온전히 받지는 못해 두 사람은 바닥에 몇 차례 굴렀다.

“윽, 아야야….”

거칠게 구른 탓인지 신속배달도 조금은 피가 깎여 있었고, 스테노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3분의 1 넘게 깎인 피를 보던 슈크림이 재빨리 달려와 힐 포션을 그녀의 손에 쥐어 주었다.

“너무 무모해.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한 거야.”

마린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 대답을 듣고자 물은 질문은 아니었으나 힐 포션을 들이킨 스테노가 입을 열었다.

“그냥 몸이 움직였어.”

…이유를 알 수 없는 열기가 가슴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약간의 불쾌감, 먹먹함. 이 감정의 정체는 알 수 없었으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움직일 수 있으면 따라와.”

그 말을 끝으로 마린은 보스에게 달려들었다. 마린은 단발계 대낫 소드 스킬 ‘프루너’를 발동시켰고, 강력하고 묵직한 한 방을 휘두르자 코볼트가 비명을 질러댔다. 소드 스킬의 짧은 경직이 끝난 직후, 또 한번 디버프계 소드 스킬 ‘펠러’를 발동했다. 낫이 가로로 붕붕 돌더니 놈의 다리에 적중했다. 수 차례 발동한 펠러의 디버프 기능이 그 순간 빛을 발했다.

“경직!”

마린의 짧은 외침에 신속배달이 달려들었다. “흐랴압!” 한손검 소드 스킬 ‘스러스트’를 발동했다. 기본 찌르기 기술이 코볼트 왕의 복부에 명중했다. “스위치!” 신속이 외치자 에라 모르겠다 슈크림이 달려들어 메이스를 휘둘렀다. 메이스 공격이 끝남과 동시에 마린과 스테노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런 두 사람의 뒤를 마비가 풀린 몇 사람이 따랐다. 겁도 없는 사람들이다.

선두에 선 건 레이드 리더 곁에 서 있었던 칼단발의 여성이었다.

“공격해!”

가장 앞에 서 있던 마린이 끝을 낼 마음으로 대낫 소드 스킬 기본기인 ‘모어’를 발동했다. 굵은 낫의 날이 허공을 붕붕 돌더니 놈을 X자 모양으로 베어 넘겼다. 그러나 아주 조금 부족했다.

그때 뒤따르던 스테노가 검을 어깨에 짊어지더니 ‘버티컬’을 사용했다. 푸른 라이트 이펙트가 수직으로 날아들었다. 검신이 보스의 옆구리를 베어내는 순간.

“꺼져!”

스테노의 옆에서 불청객이 끼어들었다.

범인은 지금껏 쓰러져 벌벌 떨고만 있던 혁이었다. 혁이 휘두른 검이 운이 좋게 스테노의 소드 스킬의 뒤를 이었다. 그 순간 보스가 굉음을 내며 뒤로 쓰러졌다.

파앙!

커다란 파열음과 함께 보스의 몸체가 폴리곤 파편으로 터져 나갔다. 바닥에 엎어져 그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 힐 포션을 마시던 사람들, 소드 스킬을 발동한 직후라 어정정하게 검을 들고 있던 사람들 모두…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 주춤거리며 몸을 움직였다.

“…깼어, 깼어!”

“드디어!!!”

눈앞에 나타난 윈도우에 클리어 성공 알림과 보상 일람이 쭈루룩 나타났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나 둘 침묵하기 시작했다. 1000콜 아이템 몇십 개의 보상. 사망자가 나타난 이상 전부 부질이 없었다. 정말 죽는걸까? 이 게임에서 탈출한 게 아닐까? 그런 희망을 품어 보아도, 로그아웃을 할 수 없는 이상 어떤 쪽으로든 증명할 길이 없었다.

칼단발의 여성 또한 사망한 리더와 친분이 있었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몇몇 사람이 그녀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이고 있었다. 쾌거라고는 절대 부를 수 없는 승리였다.

그 순간만큼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그러나 눈치도 없이 혁이 신속배달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후려 쳤다.

“얌마, 나 막타 보너스 먹었다. 개쩔지.”

“…….”

“새끼, 벙어리야? 왜 대답이 없어.”

“사람이 죽었잖아. 그런 소릴 할 때야?”

“뭐? 븅신, 진지빨기는.”

혁이 윈도우에서 무언가를 조작하자 어깨에 까만 망토가 걸쳐졌다. 펄럭이는 망토를 보며 오오, 같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야야, 궁상 좀 떨지 마. 사람이 진짜 죽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고작 게임인데.”

신속배달이 터질 것처럼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게임? 게임이라고? 그런 감각으로 이 싸움에 임했던 거냐. 그는 과거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정의감이 넘쳤던 혁이. 함께 자웅을 겨루기도 했던 친우. 그랬던 그가 지금 이 순간 가장 헛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멍청하게 자란 거냐, 준혁아.

“뭘 꼬라, 미친.”

신속배달이 고개를 들자 스테노가 혁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혁이 미간을 잔뜩 구기며 따라서 노려 보았다.

“죽는다는 거, 알고 있었어.”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넌, 죽을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있었어. 그래서 무서워 했던 거야. 무서운 거, 당연해. 이건 고작 게임이 아니니까.”

스테노의 말투는 덤덤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혁이 이를 꽉 깨물더니 스테노의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갔다.

“내가… 여자라고 못 패는 줄 알아? 애시당초 내 포지션을 뺏은 건 너다, 이 새끼야.”

“그만.”

이대로라면 정말로 때릴 것 같았다. 신속배달이 혁의 앞을 가로막고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몇 초간 대치 상황이 이어졌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지 하나 둘, 다른 플레이어의 시선이 일행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혁을 아니꼽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 시선을 알아챈 혁이 욕지거리를 난무하며 뒤를 돌았다.

“넌 다음번에 만나면 쳐맞을 줄 알아라.”

그 말만을 남기고 혁이 자리에서 떠났다.

난전 후, 리더 대신 칼단발의 여성이 사람을 모았다. 비척거리며 모여든 사람들의 눈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녀, 유진이라는 이름의 여성은 그 자리에 꿋꿋이 서서 수고 했다는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오늘은 다들 수고 하셨습니다. 목숨을 건 여러분의 분투, 앞으로 이어질 공략의 한 줄기의 빛이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음 층, 또 그 다음 층에서 만나 뵙지요.”

이야기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구석에 있던 마린이 몸을 돌렸다.

“마린, 어디 가?”

“다음 층.”

마린은 눈앞에서 사람이 소멸하는 모습을 보았다. 일반적인 게임이었더라면 운이 없었네, 하고 끝났겠지만 여기선 아니었다. 피가 터져 나온 것도 아니었지만, 속이 안좋았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혼자 살아남는다면,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돼.

마린이 스테노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녀의 뒤로 슈크림과 신속배달도 서 있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죽는다면? 어쩐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오랫동안 꿈자리가 안 좋을 것 같았다.

“벌써 가는 거냐…?”

신속배달의 물음에 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몸 조심해.”

스테노의 말을 끝으로, 마린이 보스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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