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벨져]무제

어쩌다 보니 쓴 후편

전편 : https://glph.to/t1jjku

예정된 길을 따라가듯, 며칠 전 미리 표를 구해 뒀던 기차에 오른 그는 단촐하지만 필요한 것은 일체 빠짐 없이 챙긴 짐가방을 맞은편 좌석에 올려놓았다. 하얗게 일던 뿌연 입김이 기차 안 따스한 온도를 만나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로브에 가까운 형태인 긴 코트도 벗어 옆에 함께 내려놓고 자리에 편히 앉았다.

새벽 같이 나온 것도 있지만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창밖으로 보이는 사위가 상당히 어두웠다. 푸르다 못해 여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조차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렇다 보니 그와 마찬가지로 기차를 타기 위해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곳곳에 밝혀진 가로등 아래로 모여들어 표와 시계를 번갈아 들여다보고 있었다. 혹은 웃음과 눈물로 인사를 나누거나. 흐릿한 빛 사이로 바쁜 걸음을 누비며 신문을 파는 꼬마 아이도 있고, 동전과 신문을 맞바꿔 1면을 들여다보는 이도 있었다.

한 손에 종이컵을 들고 신문을 진지한 얼굴로 보고 있는, 마른 체격에 갈색 코트를 입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컵 안에는 필시 입에 대기도 힘들 만큼 뜨거운 커피가 들어 있을 것이다. 신문을 다 읽은 뒤에는 아침 식사로 먹을 만한 것을 찾아 불 켜진 점포를 몇 군데 순방할 테고. 그러다 발견하지 못하면 멋쩍게 웃으며 말을 돌리려 들….

"…."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을 한 것 같아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그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남자에게 덧씌워졌던 형체가 사라졌다. 남자는 모자를 쓰고 있어서 어떤 머리카락 색을 가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신문을 넘기느라 잠깐 움직인 손에 들린 컵에서는 김이 나지도 않았다. 남자가 선 왼쪽 바닥에는 며칠 길게 여행이라도 가는지 커다란 가방이 세워져 있는 데다 혼자인 것도 아니었는지 허리쯤에 올 듯한 아이가 바로 옆에 서서 바닥을 보며 발장난을 치는 중이었다.

말로 표현하기 싫은 어떤 감정이 일순 지저에서 들끓었다. 하지만 그 또한 원인 모를 것이라 그는 결국 쯧, 혀를 차고 커튼을 쳐 차창 밖 풍경을 가려 버렸다.

이동하는 시간이 긴 그로서는 이미 행선지가 정해진 길에 올라 다음 정보를 얻기 전인 지금 같은 시간에나 주변을 바라볼 여유가 되지만 가린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고 싱숭생숭한 기분만 남겨 놓은 꿈 주제에. 창밖을 보는 것이 중요한 일은 아니니 큰 상관이야 없지만 제가 모르는 것에 휘둘리는 것은 썩 좋지 않다. 목적지가 그리 멀지 않으니 짧게 잠을 자고 일어나면 이런 것은 언제 존재했냐는 듯 잊히리라. 그는 불편한 심기가 겉으로 드러났던 얼굴을 평소의 무표정으로 덤덤히 되돌리고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았다.

"……."

"…하는 건 별로 아닌가 하는 의견이 많…."

"……."

"…안자. 그러다 넘어지…."

"…낙화놀이 라는 걸 한다던데? 동양…."

"……."

묵묵히 다스렸던 감정이 수없이 들리는 소리를 듣고 다시 꿈틀거렸다. 카펫이 깔린 기차 내부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릴 리 없건만 말소리가 하나둘 넘어오기 시작하니 문 하나를 두고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기척까지 하나하나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상태가 이상하다. 물론 노력한다고 항상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심중이 흔들리는 일도 잘 없다. 출발을 늦췄어야 하나. 뒤늦게 엄습하는 것은 의심에 따른 합리적 추론이자 불안이다. 이대로 하루 정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역에 오기 전 들렀던 소담한 카페에서 차디찬 안개 앉은 공기와 함께 따뜻한 차를 들이마시며 조여진 긴장을 슬며시 풀어줄 때였다.

거리를 비춰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가로등마저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시각, 아릿하면서도 어째서인지 그리운 것 같기도 한 분위기의 도로에서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 했다. 집중하는 건지 멍해지는 건지 분별도 안 될 만큼 몰입해 흐릿한 마을을 응시하던 그는 그다지 낯설지 않으면서 향긋한 냄새에 고개를 돌렸다. 부드럽고 따스한 커피 향. 이끌리듯 돌아본 곳에 있던 건 가게 주인이었다. 기묘한 실망감이 파랑 위에 인 백파처럼 아련히 물들었다 사라졌다. 이른 시각부터 일어난 동지라고 반기며 좋은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고 수줍게 내놓던 마들렌은 갓 구워진 것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향내가 났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고 그 순간 그는 그가 모르는 무언가에 쫓기듯 이만 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켰다.

불편이 치밀어 자리를 떴지만 음울한 듯 뭉개진 형체는 어딘가 익숙한 것을 떠올리게 해 발치를 붙들려 했다. 그림자보다 무겁게 따라붙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떼어냈는데….

"하아…."

그는 길게 숨을 내쉬고 다시금 몸을 비틀어 보다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래도 시간이 없다. 아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낄 수 있는 시간이라면 되도록 축약하는 것이 옳다. 몸이 솜이라도 되는 것처럼 묵직하게 적셔 오는 감상은 긴 여정이 끝나는 때에 풀어도 될 테니 지금은 이러한 상념도 접어 상자 안에 넣어야 한다.

때가 멀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전쟁이 한 차례 끝나는 날에는,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않을 테니… 그때까지만. 그는 굳건하게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 아직 바뀌지 않은 창밖을 한 번 흘겨보고 도로 눈을 감았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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