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LGRAM】 #01_이게 그거잖아

#밀그램_전력_60분

Snow by S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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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주제

도피

등장인물

카시키 유노

카지야마 후타

키리사키 시도우

시이나 마히루


“저희는 지금, 도피를 하고 있는 걸까요.”

그렇게 시도우가 뜬금없는 소리를 꺼내온 것은 마히루와 함께 내 진료를 봐주고 있던 때였다.

“하? 뭔 소리야. 그런 소리 해댈 정도로 여유 넘쳐?”

뭐 하자는 건지. 지금 환자를 앞에 두고 시원찮을 소릴 해댈 상황인가? 안 그래도 안대까지 벗기고 만지작거려서 아픈데. 기본적인 치료를 끝냈다 한들, 감옥 안에서 진통제를 먹을 수 있을 리 만무했으니까.

그래도 이 양반은 의사니까 어련히 잘하겠거니 싶지만. 하여사, 누가 봐도 곱게 자랐을 의사가 눈치 챙길 순간이 있기는 한가 싶었다.

“하지만 그런 후타야말로 치료받는 신세면서 잘도 불평불만이잖아.”

옆에서 마히루의 진료를 거들고 있던 유노 녀석이 입을 거들었다.

“하지만 뭐, 어느 정도 동감이야. 이쪽은 굳이 아프지 않더라도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란 느낌.”

참나. 그럴 거면 뭐라고 하질 말지. 그딴 식으로 동조 받아도 잡친 기분이 돌아오진 않는데.

“으음……. 시도우 씨, 도피라는 게 어떤 의미의……?”

그냥 하나의 ‘하여간 시도우는 이상하다’란 제목의 헤프닝으로 끝났을 이야기를 마히루가 잇고야 말았다. 이언 복잡하고 긴 이야기는 질색이란 말이다. 차라리 흑백논리가 더 유익할 터.

와중에 마히루는 제몸 하나 간수하기 버거우면서 시도우가 하는 말을 하나하나 들어주고나 앉았다. 가족 얘기든, 세상 얘기든, 상처 얘기든, 어느 날은 갑자기 이해하기도 힘든 의학적 지식을 나불대지 않나. 갑작스레 기분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한두 번도 아닌데. 뭐가 그리 신경 쓰인다고 맞장구를 쳐 주고. 그게 마히루 녀석답다는 생각은 들기야 한다만.

“글쎄요……. 답이 나올 것 같기도 하고요.”

또 저 소리네. 이럴 줄 알았어. 아재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매번 그런 식이지? 그럴 거면 그냥 입을 닫는 게 에너지 절약에 효율적이잖아? 생각하느니만 못한 걸 입 밖으로 내보내야 봤자……그런 소리가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올 뻔했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듣지도 않을 이야기, 내가 에너지 절약을 하고야 말지.

“문득 그런 의문이 들어서요. 저희는 모두…… 제각기 다른 사정으로,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곳이 사회 속에 숨겨진 공간인 건지, 어쩌면 아예 별개의 공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아, 시작됐다. 주저리주저리가. 교장 훈화 말씀만큼이나 지루한.

“결국 사회와 분리된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어쩌면 가상의 공간과 비슷한 개념일지도 모르고, 그 밖에도 여러 가능성은 있지만…….”

“있지만?”

이번엔 유노가 시도우의 편을 들었다. 난 잊었나? 아니, 뭐, 그래,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는 시늉 정도는 해 줘야지.

“저희가…… 사회로부터 도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마치 그렇게 설계된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이 밀그램이라는 곳이. 이렇게 생활하다 보면, 어느 순간 깨달음을 얻었을 때는 죄의식이 들 테고, 깨닫지 못했을 때는, 그땐 그런 감각이 마비된 거라고 보는 게 편하겠지요.”

“아니, 아니, 스톱. 어이, 시도우. 그건 아니지 않나.”

시도우의 말은 더없이 황당했다. 도피? 우리가? 어이가 없다. 뭔, 누가 보면 원해서 이곳에 온 건 줄 알겠단 말이다. 도저히 딴지 거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우린 여기에 끌려온 거야. 누구도 여기에 오길 바래서 온 게 아니라고. 너는 길 가다가 납치당하면 ‘아, 오늘은 외출을 하지 말 걸……’하고 궁상맞게 앉아있을 셈이냐?”

“하지만 외출은 거의 매일 하고요. 그런 우연이라고 위탁하며 마무리 짓기에는 저희는 너무 큰 사건에 휘말렸잖아요? 앞서 말했듯이──저희 넷뿐만 아니라 나머지 여섯 명도, 사람을 죽였으니…….”

“아, 아니, 사람을 죽인 거에 다른 여러 요인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고……. 애초에, 그래, 누가 도피 같은 비겁한 짓을 한다고. 난 도피 따위 안 해! 적어도, ……내 책임이 있는 일에는.”

곧바로 되돌아온 답변에 당황해서 말을 조금 절였다. 아, 토론대회 같은 것 좀 자주 나갈 걸 그랬나, 국어책 읽기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나. 그런 잡생각이 조금씩 더 내 말을 절게 만들었다.

“……후타 군. 언쟁은, 조금 더, 미뤄둬도 괜찮지 않으려나……? 우리한테는 넘치는 게 시간이잖아, 응?”

내 말을 끊어온 것은 마히루였다. 언쟁이라 할 것도 없지 않나. 이 정도면 준수한 토론이고 의견 나누기라고 생각했다만. TV에서 나오는 정치인들보다야 훨씬 영양가 넘치는 것 같았는데. 심지어 마히루 때문에 하려던 말을 까먹었다. 평소였으면 진작에 뭐라고 했을걸. 근데…… 근데 지금은, 마히루 녀석, 고작 이걸로 지친 얼굴이니까……. 패스해 둘까.

“……그래, 뭐. 그래서? 그걸 입 밖으로 꺼내서 뭐가 변하는데? 혹시 지금 궁상 타임이야?”

“표면적으로는 변한 게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깨닫는 건 아주 좋은 일이에요, 카지야마 군.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뭔 소리? 학비 아깝다는 생각은 했다. 그다음으로는 내 시간이 아깝다, 그 다다음으로는 이럴 시간에 게임 한 판을 더 돌리고 말지, 아, 이런 쓰레기 같은 교수들이랑 멍청한 녀석들 때문에 내 인생이 아깝다.

“지금 궁상맞은 생각하는 건 아니지? 후타.”

“아니거든.”

“그리고 또…….”

또 있는 거구나. 아마 여기 있는 셋 정도에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떠올랐을 것이다.

“죄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은.”

“죄로부터……?”

“뭐라는 건지. 나 원 참.”

“흠흠.”

셋이 동시에 발언을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고 당연하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소리를 해대니 웃음이 안 나올 수가. 옆에 누가 봐도 경청하는 소리를 내는 두 인간은 아닌 것 같지만.

“저희는 어찌 되었든 이곳에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반성하라는 의미로 이끌리게 된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게 형무소──감옥의 제 목적이지요. 사회와 격리시켜,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러고 있지 않지 않나 하고. 사람을 죽여놓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죽여놓고, 살려고 몸부림치고……. 어쩌면 숨을 내뱉는 행위 하나하나가 기만이 되는 것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가슴이 아파졌습니다.”

“그럼 눈 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있을 거야?”

이런 걸 촌철살인이라 하던가. 지금은 딱 그 말이 어울릴 듯했다. 저 녀석도 가끔씩 이렇게 훅 들어온단 말이지.

“그건…… 아니지요.”

“그럼 그냥 계속 사는 걸로 만사 오케이 아니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나는 후타의 말에 동감이야. 이런 거 생각한다고 뭐가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는걸. 말 그대로 시간 낭비. 그렇게 궁상맞게 생각하고 있을 바에야 한 시라도 빨리 죄책감에 몸부림치고 있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다들 그걸 기뻐할지도.”

마지막은 그냥 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용케 의사 아재는 납득한 듯 보였다. 유노 녀석이 희한한 건지, 시도우 녀석이 희한한 건지……. 아마 둘 다겠지.

“그럼 정리된 거지? 이 주제는 끝이야~ 마침 진료도 다 본 것 같고? 팔팔하잖아? 입이 자꾸 움직이는 걸 보면 어쩌면 하나도 아프지 않은 걸지도.”

유노 녀석이 희한한 거다. 아니, 희한한 걸 넘어서 미쳤다. 이거 뭐 하자는 거지.

“으응, 그렇네, 후타 군, 시도우 씨도……. 완벽한 대답이 되지는 않았을지도 몰라도, 유노 쨩이 하는 말,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납득할 수 있지 않으려나. 조금이라도, 더…… 죄의식을 가지는 편이, 스스로한테도 좋을 거라 생각해. 에스 군도, 분명 그 편을 더 좋아할 거야.”

딱히 지치지도 않았었고 그 녀석한테 좋을 일을 하고 싶진 않았지만. 유노 녀석이 막판에 실컷 어째도 좋을 것들을 떠들어댄 탓에 나도 조금 피로가 쌓였다. 아, 아닌가? 이거, 그게 아니라……. 좀 더……. 애초에 뭔 얘길 하고 있더라.

확실히 요즘 피로가 쌓인 것 같다. 이러다가는 미코토인지 뭔지처럼 되는 거 아닌가.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 녀석마냥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건 좀 괴물이고.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잠에 드는 게, 훨씬 이로울 테니까. 시간 감각 흐려져서 전혀 모르겠지만 이렇게나 피곤한 걸 보면 늦은 밤이겠지. 유노 녀석, 이 늦은 밤까지 안 자기나 하고 말이야. 뭐, 나도 그 나이 땐 한창 새벽에 눈을 붙였지만. 그래도 다음에는 일찍 자는 편이 좋다고 말해두는 편이 좋겠네……. 시도우 녀석도 너무 무리하지 말라고 전해 두고, 마히루도, 그렇게 축 처진 채로 실실대봤자 안 좋다고 전해두는 게…… 훨씬 더,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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