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자들
2023.07.17~2023.09.08 | 잠뜰TV 도망자들 단문 모음. 바다조
푸른 그 여자는, 그래서 그를.
잠뜰은 뻑뻑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이 불편한 곳에서 청했던 잠은 선잠일지라도 잠뜰의 굳은 몸을 풀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약간 불행한 점은 자신의 반대쪽 벽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남자가 여전히 잠에 취해 있다는 점이겠지. 탁자 다리 너머로 잠뜰은 아직 눈을 뜨지 않은 그를 바라보았다가, 이윽고 풀 따위로 얼기설기 엮은 초라한 침구 비슷한 것 위에 다시 몸을 뉘었다.
결코 평온한 인생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안정적이었다. 잠뜰은 모든 일의 시작점인 그날을 상기했다.
믿을 것 하나 없는 상대와 몇 날 며칠을 동행한 것도 처음, 동시에 사람을 쏜 것 또한 처음이었다. 그날로부터 며칠 동안은 문득 떨리는 손에 혐오를 담았다. 자신의 삶을 위해서 많은 것을 버려두고 온 인생이었는데도 일말의 양심 같은 것은 남아있었구나. 물론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의미 없는 감정이었지만. 운명인지 신의 농간인지 몇 달 만에 다시 만나 아무 탈 없이 그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꿰뚫듯 쳐다보는 그의 붉은 눈을 마주하며 세상은 넓고 일어날 수 없는 일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양이 내리쬐는 넓디넓은 세상의 그늘진 어둠 속, 겨우 반쪽짜리 세상에서만 살아가는 자신이기에 이 세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건만. 반쪽짜리 세상이더라도 여전히 자신이 아는 것 보다 세상은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잠뜰은 누워 있는 채로 자신의 안주머니에 있는 총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힘차게 몸을 일으키고서 세상 편히 자는 그의 앞으로 걸어나왔다.
싸구려 조명 빛에 그의 얼굴이 퍼석하게 빛났다. 죽지 않는 몸이더라도 아픔이나 피곤함은 느끼는 건지 얼굴에 얹은 팔에 가려지지 않은 눈가가 유독 어두웠다. 말하는 방식이나 행동을 보자면 자신과 그리 나이 차도 없을 것 같음에도 어쩐지 고된 것이 보였다. 트럭 운전으로 물건을 배달한다고 했었지. 돈을 바라는 탐욕적인 성격 어림잡아 본다면 잠이나 유흥을 줄여가면서, 더해 불법 약물 '아니머스'의 힘을 빌려 죽을 걱정 없이 온갖 수모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며 이 일을 해왔을 것임을 잠뜰은 쉽게 짐작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동정하는 것은 아니다.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바닥에서 지내는 모든 이들은 다 이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 온 자들뿐이다. 우선 자신이 그렇지 않은가. 큰돈 한 번 만져보겠다고 거대 기업의 기밀에 손을 대 결국 꼬리 자르기로 쫓기는 신세가 된 나. 끌어안지 않고 버려버리면 될 그 기밀문서. 이런 상황에까지 왔는데도 자신의 잠금쇠 달린 가방의 가장 안쪽에 존재하는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로 큰돈 벌어보겠다고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채 끌어안고 있다. 아마 정말로 어리석은 것은 자신이 아닐까.
손에 들린 몇 발 남지 않은 금 간 총을 그의 심장 가까이 들이댔다. 여기서 만약 내가 이 사람을 죽인다면? 어차피 잠뜰 또한 도망치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다. 되려 이 붉은 남자와 함께 다니다가는 더 눈에 띌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무리 세포를 순식간에 완벽하게 재생시키는 약을 먹고 있더라도 한 번에 숨을 끊어버리면 좀비처럼 부활할 리는 없겠지. 더군다나 부작용으로 멀쩡한 상태가 아니다. 자신이 여기서 쏘든 쏘지 않든, 죽이게 되는 결국 죽지 않든 제 가방 안의 문서가 없다면 부작용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고, 몸에 부하가 걸려 죽는 것은 금방일 것이다. 잠뜰은 방아쇠에 손을 가져다 댔다. 딱 한 발만 더. 단 한 발만.
"…아직 완전히 동맹을 맺지 않은 사람을 두고 이렇게 깊게 곯아떨어져도 되는 거야?"
잠뜰은 깊은 한숨을 뱉어냈다. 그에 응하듯 누운 그는 낮은 침음을 내며 뒤척였다. 잘 정리된 앞머리가 흐드러지며 이마에서 흘러내렸다. 그것이 마치 갓 흘린 피 같다고 잠뜰은 생각했다. 직후 올라오는 것은 한숨이 아니라 웃음이었다. 부질없는 고민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잠뜰은 들어 올렸던 팔을 완전히 내렸다. 총은 쩔그렁대며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붉은 그 남자는, 그래서 그를.
라더는 뻐근한 허리를 두드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나가듯 바라본 트럭 앞유리 너머 저물기 시작한 노을이 칙칙한 주목朱木에 주홍빛을 묻혔다. 나무보다 더 넘어 어스름히 자신들의 목적지인 버니모텔의 하얀 벽면 일부는 위치를 알리고 있었다. 라더는 이내 좌석의 뒷벽이자 짐칸의 벽 한 부분을 가볍게 노크했다. 묵직한 쇠철 소리가 트럭 전체에 잠시 울렸다. 이후의 응답을 기다리던 라더가 지금까지와 달리 즉각적인 반응 없는 상황에 의아함을 느끼고서 트럭에서 몸을 꺼내었다.
몇달 전 쫓기는 상황을 조금 여유롭게 피하기 위해 자신의 첫 붉은 트럭은 터트려버렸지만 영 그 디자인이 아니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굳이 굳이 이미 판매조차도 되지 않는 오래된 기종의 트럭을 더듬어가며 찾아 새로 장만했다. 아주 약간 새것 같은 트럭의 외벽을 만지며 이번 녀석은 잘 다뤄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홀로 남은 자신에게 가족이라고 말할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자신에게 있어 이 트럭도 돈을 벌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이지만. 생물에게도 마음 한켠 열어보지 못하는 인생이다. 물건 따위에 정을 붙이는 것은 너무 초라해 보이지 않는가.
짐칸의 입구를 단단히 봉쇄한 잠금쇠에 열쇠를 끼워 넣어 풀어냈다. 힘을 주어 당기면 문은 상대가 자신의 주인임을 안 것인지 의외로 부드럽게 열린다.
안은 건조했다. 기다란 벽면에 작게 내 둔 창에서 들어오는 주홍빛에 반사된 먼지들이 둥둥 떠서 기분 나쁜 공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바닥에는 잡동사니 몇 개가 상자에 들어가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었고, 그나마 잘 정리된 상자도 개미 몇 마리가 그 위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들어앉아 있을 공간은 아님을 톡톡히 보여주고 있음에도, 그 사이 제일 안쪽 벽에 누워 있는 것은 미동 없이 얌전했다.
죽었나? 라더는 순간 생각을 하며 짐칸 깊이 몸을 움직였다. 느릿한 발걸음은 이내 그의 앞에 멈추었다. 거뭇한 흙먼지들이 묻은 낡은 매트 위에 옆으로 누워 팔로 머리를 괸 채 잠든 그가 시선에 찼다. 머리 위에는 자신이 갈망하는 것이 들어 있는 잠금쇠 달린 가방이 놓여 있었다.
라더는 자신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검은 잭나이프를 손에 쥐었다. 생각에 잠긴 시선은 그의 목덜미에 향해 있었다.
잔졸한 창으로 넘어온 빛에 그의 얼굴이 초췌하게 빛났다. 잘 거면 그냥 조수석에서 자라는 말을 한사코 거절하며 기어코 짐칸에 몸을 뉘이더니만, 한 눈으로 봐도 잘 자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자신이 이 앞까지 다가갔음에도 반응 없는 것을 보면 운전석에 앉아 있던 자신에게 긴장하고 있었다는 뜻이겠지. 얕은 각오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고작 자신의 눈앞에 그가 없다는 것 하나로 이렇게 긴장이 풀려 잠에 빠져드는 것을 보아하니 스파이 짓 했다는 것이 거짓처럼 느껴진다. 라더는 그에게 들리지 않게 코웃음을 쳤다.
자신의 목숨줄. '아니머스'의 부작용을 완화하기 위한 해결책이 그의 손아귀에 있다고 한들 잠금쇠 걸린 가방 따위 힘으로 열어버리면 그만이다. 죽이면 트럭에 피 좀 깨나 묻겠지만 치워버리면 그만이고, 그 뒤에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살아가면 그만이다. 좀 쫓기고 총 몇 방 정도 맞아도 회복하면 된다. 더해 부작용의 고통 또한 걱정할 필요 없겠지. 자신은 미래가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약으로 현재에 대한 문제를 뒤로 밀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은 라더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전개 방식이었다. 라더는 잠뜰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다. 이대로 팔을 아래로 내리면 끝이다. 잠든 상대를 노리는 것은 많이 해 본 적 없지만, 지금까지 죽여 온 경험에 따르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옳은 이야기다.
"…야. 일어나."
라더는 손을 뻗어 잠뜰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에 응하듯 그는 낮은 침음을 내며 뒤척였다.
먼지 덮인 겉옷이 으스러지듯 구겨지며 바닥을 쓸었다. 붉은 안감이 라더의 눈에 들어와서, 문득 그는 그것이 피 같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갈색 빛의 눈이 가늘게 뜨이며 자신의 얼굴을 쫓았다. 라더는 삐뚤게 웃었다. 현재를 즐기는 자신이 무심코 미래를 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라더는 등 뒤로 숨긴 잭나이프의 날을 한 손으로 손잡이에 정리해 넣었다. 미지근한 금속음이 소리 없이 갈무리되었다.
거울에서 본 자신은, 그리고 그는.
잠뜰은 어두운 페도라를 자신의 깔끔한 갈색빛 단발 위로 눌러썼다. 남색의 끈 민소매에 암청색인 셔츠를 입은 모습과는 전혀 어울릴 만한 모자가 아니었으나, 블랙스톤 스트리트의 마스터이자 현재 자신의 젊은 보스인 덕 개가 준 일종의 선물이었다. 아무리 뒷세계 갈라진 도로 바닥에서 깡패놀음질 따위만 한 것들이라도 자신의 밑에 들어 온 이상 마냥 더럽게만 다녀서는 안 된다는 보스의 신념 비슷한 것과, 어딜 가든 자신의 표식이 따라다닐 것이니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장 같은 의미가 담겨 있을 터다.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것들 아닌가?”
어차피 구실일 뿐이다. 이 바닥 사이에서 내가 거느리는 인물들은 그런 것들 아니라고 웃음 지으며 속이 문드러진 것을 어설프게 가리려는 알량한 껍데기일 뿐이다. 잠뜰은 덕개를 처음 만났던 그날의 새벽을 짧게 머릿속에서 상기했다. 처음에는 점잖은 말투를 흉내 내며 펜던트를 돌려달라 하더니, 불복하면 금방 성을 내며 단정하게 묶은 넥타이를 오른손으로 거칠게 풀어 헤치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입술 사이로 비추었다. 이 뒷세계에서 두꺼운 돈다발 좀 만져보고 살기 위해서는 제 위에 보스를 두는 것은 옳은 선택이지만 이와 별개로 그의 행동들은 코웃음만 나올 뿐이다. 물론 그렇다 해서 뒤를 쳐 자신이 직접 위에 오를 생각은 없다. 돈뭉치보다 무거운 것은 짊어지지 않는다. 그게 잠뜰의 신조였으니까.
잠뜰은 머리에 쓴 페도라를 벗어 거울 옆 고리에 걸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이 그 행동을 따라 하고서, 곧이어 잠뜰을 바라보았다. 흑색 눈에 적당한 단발. 하얗고 검은 가구들 사이에 서 있는 자신. 모든 거짓 껍데기를 뜯어낸 날것의 얼굴이다. 물론 앞으로도 햇빛 아래로 나가기 위해서는 거죽을 새로 써야 하겠지만 이 방 안에 서 있는 자신은 진짜 잠뜰이다.
“...정말로?”
잠뜰은 자신의 눈가를 문질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그 행동을 그저 따라 하기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행동을 하는 그를 무기질 한 눈동자로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 전 값싸게 구매한 옷은 일부 구겨져 있긴 했지만, 여전히 새것의 것을 띄우고 있었다. 이 옷을 사고 나오면서 직원을 향해 미소를 짓고 감사하다고 했다. 그렇게 웃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었더라. 그러니까, 그때 그 잠뜰은 왜 웃었을까. 그 뒤에 간 술집에서 만난 직원에게 초대장을 건네면서 무슨 얼굴을 했었지? 보스의 거짓을 간파하며 말을 지적하던 자신은 어떤 표정을─
“야, 너 뭐 하냐?”
거울 밖 세상에서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잠뜰은 화들짝 놀라며 거울 바깥, 자신의 뒤편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더가 우중충한 얼굴로 방문 옆 벾에 삐딱하니 서서 잠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어헤치고서 텁텁한 모랫빛 자켓을 걸친 그가 붉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며 길게 하품했다.
“늦었잖아. 여섯 시에 출발한다고 어제 말했는데. 편하게 살 곳 구하더니 좀 긴장 풀리나 봐?”
“여섯 시면 아직 오 분은 아직 더 남았거든? 왜 갑자기 시간 잘 지키는 척해.”
“아 됐고, 빨리 정리하고 나와. 이번에 보스가 이번 물건 잘 전달하면 두둑하게 준다는 거 알잖아.”
“네 네 알겠습니다~.”
라더는 무심하게 붕대 감은 왼손을 휘적이더니 구부정하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방 밖으로 나갔다. 잠뜰은 방을 나간 라더의 붉은 잔흔을 바라보다가 탁자 위 피스톨을 손에 쥐고는 바지 허리춤에 찔러넣었다. 안주머니에 여유분의 탄창을 집어넣다가 문득 거울 속의 자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갈색 단발머리에, 검은 눈동자의 여자가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웃음기 섞인 얼굴을 지니고서.
“... 진짜 웃기네.”
잠뜰은 콧소리 내며 마저 웃어 보이고는 방 밖으로 나섰다. 문 반대편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라더는 직전 자신의 방에 들어왔었던 것과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잠뜰은 벽에서 등을 떼고 먼저 걸어 나가는 라더를 올려다보고서,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서 옆을 따라 걸었다. 라더는 아야, 하며 적당히 반응하며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없이 제 옆에서 걷는 잠뜰을 내려다보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뭐야. 아까 방에서는 그렇게 죽어 가는 얼굴이던데. 죽을 것 같아서 내가 준 약이라도 드셨나? 효과 죽이지?”
“그딴 약 같은 거 내가 먹을 일 없다고 했었는데. 그냥, 뭐. 친구 한명쯤 있는 거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너 친구 없잖아.”
“너가 내 친구 아니야?”
물 흐르듯 대꾸하는 잠뜰에 라더는 내가 너를 말로 이길 수 있으려면 세 번은 더 죽었다 살아야겠다.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소박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스트리트의 외곽에 주차한 붉은 트럭의 끝자락이 보였다.
“도착지는?”
“트와일라잇 검문소. 지금은 폐쇄됐다더라.”
“익숙한 이름인데. 가본 적은 없지만.”
“폐쇄되기 전에 난 가본 적 있어. 낡아빠졌는데 거기 되게 웃긴 직원 하나랑 개 하나 있었지. 어디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죽었으려나?”
붉은 트럭의 운전석에 앉으며 라더는 바지 주머니에서 꺼낸 차 열쇠를 구멍에 꽂아 넣었다. 차 시동이 걸리는 둔중한 진동이 울리자 잠뜰은 길게 기지개를 켜며 조수석 등받이를 뒤로 적당히 기울였다.
차 앞 유리는 태양에 붉게 오르기 시작한 푸른 하늘을 여과 없이 두 사람에게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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