쌉소리의 고찰

트라우마가 페티쉬가 된다는 말 되게 잔인하다

실제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디코를 하다 트친이 ‘저 그 말을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말씀하셨다.

아, 그럼 충격이 취향이 된다고 바꿔 말해도 될까요? 라고 제안했다.

그건 괜찮은 것 같아요. 라고 말씀하셨다.

생각해보면 트라우마가 페티쉬가 된다는 말이 그리 좋은 말은 아니다.

이 말에서 나오는 트라우마는 충격적인 경험일테고, 페티쉬는 성적 페티쉬를 의미할테니까.

시달릴 수준의 충격적인 경험이 성적자극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말하는 것이 좋을 리 없다.

단순한 농담이라 해도 ‘트라우마’라는 것은 그저 단순한 충격이 아니지 않은가.

뇌는 충격과 쾌감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한다.

충격에서 얻은 자극과 쾌감으로 얻은 자극을 같은 것으로 분류한다고 한다.

아마 이 말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부정적 감정과 긍정적 감정 모두 도파민이 나온다는 연구일 것이다.

나는 사람이 지루한 것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생각한다.

항상 즐거우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그저 잠시간은 ‘심심하다’라고 느낄 정도로 가만히 있는 경험을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단 의미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극에 익숙해지고 만다. 계속 더 큰 자극을 끝없이 찾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

무작정 자극적인 것들은 정말 재미있다. ‘씨발.’ 이 ‘짜증나.’ 보다 강렬하지 않던가.

15금 소설보다 19금 소설이 더 잘팔린다.

사람들은 좀 더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것을 원한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자극적이고 강렬한 것들은 모두 섬세하지 않다.

섬세하단 건 감정을 면밀하게 관찰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부분에선 둔감하고 어떤 부분에선 세심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겐 한없이 둔한데에 비해 남에겐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신경쓰려 한다. (아마 눈치를 보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모든 자극이 둔감하기에 나올 수 있단 말은 아니다.

명작 영화나 소설도 자극적인데도 불구하고 명작이라 평가받지 않던가.

예리한 자극은 대부분 정말로 섬세하다. 지독할 정도로 쫓아붙는다.

하지만 자극적이기만 한 것은 둔하다. 그것들은 대부분 생각을 오래 하지 않고 나온다.

그저 어떤 충동을 좇아 나온다는 게 개인적인 견해이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을 생각하지 않고 표출하기만 하니 예리할 수 없다.

면밀하게 관찰하는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단 말을 믿는다.

지나치게 예민하단 말을 들어도 날을 세우고 싶다.

조금 더 섬세해지고자 마음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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