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화承花]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돌아가나니
22.12.25 작업 완료
※공백미포함 9,073자.
※2022.12.25 작업 완료
※어쩌다 보니 크리스마스에 작업이 완료되긴 했으나 기념 연성은 아닙니다.
※제대로 퇴고를 거치지 않았습니다. 오타, 맞춤법 오류, 비문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 죠타로와 거대 인어 카쿄인의 이야기입니다.
바다에서 태어나 바다로 돌아가나니
1.
바다에서 만난 이가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던 자. 그 누구보다도 바다와 어울리는 이. 그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고, 그와 함께 하는 대화가 무엇보다도 즐거웠으며, 그와의 만남이 참으로 기대되었다.
2.
바다 깊숙한 곳에는 거대한 인어가 산다더라. 마을 사람들 누구나가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단순한 미신, 구전설화, 환상 속의 존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인어는 종종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과 심해 광물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를 가지고서, 마을을 바라보다 모습을 감춘다. 인어가 나타나는 때에는 조건이 있었다. 태풍이나 역병 등, 사람들이 크나큰 피해를 입은 상황일 것. 그러면 인어가 나타난다. 마치 우리네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보려는 것처럼, 마을 가까이에는 절대 오지 않고 먼 바다에서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그거 들었어요? 광장 쪽에 사는 사람들 말이에요. 며칠 전에 그물을 걷으러 갔다가 갑자기 폭풍을 만나서 배가 뒤집어졌잖아요. 그 때도 인어가 나타났다지 뭡니까. 분명히, 그 폭풍도 인어 녀석이 만든 걸 거예요. 사람 목숨이 장난인 줄 아는 놈! 마을 사람들이 죽고 다칠 때마다 나타나는 게 정말 꼴도 보기 싫어요. 그 녀석한테 놀아나는 것도 싫단 말입니다! 아! 누가 그 녀석을 없애준다면 참 좋을 텐데!
마을 사람들은 인어를 싫어했다. 마을이, 사람이 엉망이 되었을 때만 슬쩍 나타나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서 마을 가까이에는 다가오지 않는 것까지. 푸르디푸른 바다와는 어울리지 않는 머리카락도 그랬다. 꼭 우리네들의…. …사람들이 처음부터 인어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바다의 수호신, 정도로 여기며 모시고 받들었다. 그들은 인어에게 빌었다. 태풍도, 역병도, 그 외에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고들도 피할 수 있기를. 고기잡이가 언제나 풍년이기를.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 인어는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배신당한 사람들은 인어에게 분노하기 시작했고, 무슨 일이 발생해야만 나타나는 그가 점차 불길함의 상징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3.
작은 조각배 하나가 망망대해로 흘러들어왔다. 최근의 바다는 비교적 잠잠해서, 배가 좌초되거나 난파되는 일이 드물었다. 조각배는 해류를 타고 더 멀리, 멀리 흘러가기 시작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커다란 배도 아니고 이렇게 작은 배라니. 마을에서 정박해있던 배가 어쩌다보니 떠내려 온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깊은 바다 밑에 있던 인어도 그것을 보았다. 인어는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배를 가지고 놀 생각일까? 폭풍을 불러서 그것 역시 산산조각 낼 생각인 걸까. 바다가 울렁울렁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큰 파도를 만들더니 이내 사방으로 바닷물을 흩뿌렸다. 촤아악 소리를 내며 나타난 인어가 조각배를 내려다보았다. 상대를 파악하는 약간의 정적 뒤에, 그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외쳤다.
“너, 눈 안에 ‘내’가 있구나!”
인어가 파리한 입술을 끌어올리며 웃었다. 졸지에 흠뻑 젖어버린 조각배와… 그 안에 있던 소년-마찬가지로 물에 젖은 생쥐꼴이었다-이 웃는 얼굴 아래에 있었다. 경계심으로 물든 소년의 얼굴이 참 대조적이었다.
4.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년은 무사히 마을로 돌아갔다. 바다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다며 조각배를 훔쳐다가 바다로 나간 모양이었다. 마을은 당연히 뒤집어졌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년이 살아돌아왔으니 말이다.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명백한 사실이 뭐가 그리 궁금해서 죽음을 자초하냐고, 혼도 나긴 엄청 났다. 물론 소년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바다 끝에 가지는 못했지만 인어를 만났다는 소년의 말에 마을 사람들은 딱딱하게 굳었다. 방금까지 혼을 내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사람들은 웅성대기 시작했다. 인어가 나타났다고? 또 무슨 일이 생기려는 건가? 저 소년한테 무슨 짓을 한 게 아닌가? 그들이 소년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할 동안 소년은 생각했다. 바다 끝에 무엇이 있는지 보지를 못했으니 이번엔 준비를 철저히 해서 다시 바다로 나가봐야겠다고.
5.
“안녕. 또 왔네?”
“….”
인어는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소년의 배가 흘러가다보니 인어와 마주친 거지만. 인어는 다시 만난 소년이 반갑기라도 한 건지, 신난 개구쟁이처럼 굴었다. 손가락-이라고 해도 소년의 키만큼 했다-으로 소년이 탄 배를 톡톡 건드리기도 하고, 입김을 불어 소년의 배 주위에 물결을 만든다든가, 마을 근처로 절대 오지 않는 것치고 인어는 소년의 배 근처를 떠나지 않았다. 문제는 인어의 그 가벼운 장난들이 소년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손짓에, 입김에 소년의 배는 심하게 출렁거렸다.
“나도 죽이려는 건가?”
네가 지금까지 폭풍을 보내고 역병을 보내서 죽여 왔던 마을 사람들처럼? 혹여나 배가 전복될 세라 필사적으로 배를 붙잡고 있던 소년이 으르렁거렸다. 소년은 화가 났다. 바다의 날씨는 변덕이 강하다고는 해도 요 며칠은 날씨가 좋을 것이었다. 왜 인어가 나타난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인어가 기상악화를 불러온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건가. 그렇다면 저번에는 왜 멀쩡했지? 왜 나를 살려뒀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인어가 눈을 깜빡였다. 생글거리던 얼굴은 어느새 무표정이 되어있었다. 어떠한 감정도 읽기 어려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체로 존재해. 때로는 잠잠하고 때로는 거칠지. 그저 그뿐이야.”
인어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소년이 알 수 있는 건 어쨌든 인어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처음 만난 날도 그랬다. 잡아먹히는 건가 싶어 눈을 질끈 감았더니, 다음 순간 인어는 없어져있고 물속에서 소리가 들렸다. 잘 가. 이제 곧 해류의 방향이 바뀔 거야. 정말로 잠시 뒤에 바다로 떠내려가던 소년의 조각배는 마을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소년은 그렇게 마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소년은 인어에게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다.
“넌… 뭐지? 무슨 존재지?”
“나는 ‘나’야. 너의 눈 앞에도 펼쳐져 있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태풍을 부르고 폭풍을 불러서 뱃사람들을 죽게 만든 것도 너인가?”
“와아, 그것 참 멋진 능력인데.”
“지금 나랑 말장난하자는 거냐?”
“…작은 아이야, ‘나’는 개입하지 않아.”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소년이 인어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그리고 난 작지 않아. 아이도 아냐. 네 녀석 눈에는 다 작아 보이겠지만, 웬만한 사람들보다 크다고, 난.”
“그럼 커다란 어른이라고 불러줄까?”
“집어치워.”
너 정말 까다로운 아이구나. 그렇게 말하며 인어가 웃었다. 소년이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이가 아냐. 쿠죠 죠타로다.”
“그럼 작은 쿠죠 죠타로?”
“작은도 떼!”
인어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꼭 바다가 웃는 것 같다고 죠타로는 생각했다.
“좋아, 죠타로. 네가 이름을 알려주었으니 이번에는 너를 도와줄게.”
무슨 말이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타고 있던 배가 허공으로 들려졌다.
6.
죠타로는 이번에도 무사히 마을로 돌아왔다. 거대한 인어가 마을로 돌아가는 해류를 탈 수 있도록 그의 배를 들어서 옮겨주었기 때문이다. 바다 끝에 가보고 싶었던 죠타로에게는 쓸데없는 친절이었지만, 정말 바다 끝에 낭떠러지가 있다면 인어가 그를 살려준 셈이었다. 인어를 만난 적은 딱 두 번이지만,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인어에 대한 얘기는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천지난만하면 천진난만했지, 전능해보이지도 않았고 위험해보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바다 끝에 있는 건 낭떠러지가 아니라 그 인어인가? 어쩐지 그 인어는 답을 알 것 같았다. 죠타로는 다시 바다로 나가보기로 했다. 그 인어를 만나러. 그 녀석만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자신은 그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 불공평하기도 했다.
그런 결심이 무색하게 죠타로는 한동안 인어와 만날 수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바다로 나가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겨우 출발했대도 멀리 가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바다가 거칠어졌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면 늘 태풍이 왔다. 죠타로는 인어를 떠올렸다. 그는 태풍을 만드는 능력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늘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지우기가 어려웠다.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꼭 인어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태풍이 지나간 직후가 그와 만날 수 있는 기회라는 뜻이었다. 죠타로는 인어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너는 무엇인지, 네가 사는 곳에는 뭐가 있는지, 우리가 아닌 다른 인간들을 본 적이 있는지. 죠타로는 인어가 궁금했고, 바다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많았다. 바람이 실시간으로 강해지고 있었다. 곧 태풍이 온다. 서둘러 대비해야했다. 태풍에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인어를 만날 수 없잖은가. 죠타로는 바다에 대고 외쳤다.
“네 녀석, 도망치기만 해 봐!!!”
그의 외침은 바람에 흩어졌다, 거센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하지만 인어는 분명 자신의 목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그런 느낌이 들었다.
7.
“저쪽을 봐. 인어가 나타났어.”
“빌어먹을 놈. 이번에도 우리가 얼마나 죽고 다쳤는지 구경하러 온 거야!”
태풍이 지나가고 며칠 후, 바다가 잠잠해졌을 때. 마을에서 그렇게까지 멀지 않은 바다에 인어가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를 갈았다. 마을이 피해를 입은 상태만 아니라면 당장에 배를 띄워서 저 녀석을 없애버릴 텐데!
“…어라? 인어 근처에 뭔가가 있어.”
“음? 배…인가?”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혈혈단신으로 인어한테 가는 거야?!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군!”
“저 녀석, 쿠죠 죠타로 아냐?”
“뭐?!”
8.
인어는 죠타로가 다가오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처음에 마주쳤을 때는 창백한 얼굴로 불길하게 웃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적어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가 웃고 있었다. 내가 반가운 걸까?
“그러니까… 큐타로?”
“…죠타로.”
아, 맞다! 그가 활짝 웃으며 손뼉을 쳤다. 바닷물이 잔뜩 튀었다. 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래, 죠타로. 사람들이 너를 찾으러 오고 있어.”
“…음?”
“내가 너를 홀렸대. 그래서 네가 자꾸 나를 만나러 오는 거래.”
죠타로는 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커다란 배 몇 척이 그들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선이 아니었다. …군함처럼 보였다. 죠타로는 다시 인어를 바라보았다. 인어는 여전히 순진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할 거야? 라는 얼굴로.
“네가, 나를 홀렸다고.”
“응.”
“사실이냐?”
“아니.”
“그렇게 답할 줄 알고 있었지.”
죠타로가 웃었다. 조각배에 앉아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조각배가 심하게 흔들렸지만 죠타로는 굴하지 않았다. 그가 인어를 가리키며 외쳤다.
“어이, 인어! 너라면 바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겠지?”
“당연하지. 나는 ‘나’니까.”
“그렇다면 나를 데려가. 나는 너에 대해서도, 바다에 대해서도, 그 너머에 대해서도 알고 싶은 게 잔뜩이니까.”
“…‘나’는 개입하지 않아.”
“뭘 어떻게 해달라는 소리가 아니다. 네 도움을 원하는 것도 아니야. 그저 알고 싶을 뿐이지.”
너도 오해를 풀고 싶지 않나? 인어는 고민하기 시작했고, 군함은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포라도 쏘면 명중할 거리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죠타로는 초조하게 인어를 바라봤다. 이대로 가면 자신은 마을로 돌아가야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인어도 크게 다치게 될 텐데, 뭐가 저렇게 태연자약한지. 죠타로의 입술이 바짝바짝 마를 때쯤, 군함들이 대포를 조준할 때쯤… 인어가 말했다.
“좋아.”
너희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지만, 알고 싶어 하는 자는 나쁘지 않아. 너희들에게 ‘나’는 여전히 미지의 존재일 테니까.
“‘나’를 이용하는 건 언제나 너희 인간들이었지.”
다음 순간, 큰 물보라가 일어나 용솟음쳤다. 거칠어진 물살이 진정되었을 때, 인어와 죠타로는 사라지고 없었다. 조각배만 동동 떠있을 뿐이었다.
9.
“너도 이름이 있나?”
죠타로가 약간 놀라워하며 말했다.
“기억도 안 나는 아주 먼 옛날에,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불렀어.”
카쿄인 노리아키, 인어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까마득한 옛날부터 카쿄인과 교류한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어째서 몰랐지? 마을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아나? 어쨌든 자신이 처음은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죠타로는 어쩐지 기분이 나빠졌다.
“…너는 주로 어디에 머무르지?”
“심해 밑바닥일 때도 있고, 해수면 바로 아래일 때도 있지. 그 모든 곳일 수도 있어. ‘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수수께끼 같군.”
“그런가?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얘기는 아닌데.”
“마을 사람들이 하는 말은 어떻게 들었지?”
“네가 외치는 소리도 들었어.”
“용케도 들었군.”
카쿄인이 후후 웃었다. 카쿄인은 거대한 공기방울을 만들어 그 안에 죠타로를 넣어주었다. 덕분에 죠타로는 젖지도, 숨이 막히지도 않은 채로 바다 속을 여행 중이었다. 그는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다 같아 보이는 바다에도 각각의 흐름이 있다는 것을, 심해에 사는 생물들을, 계절과 시기에 따라 여행을 떠나는 물고기들을, 그들 옆을 지나가던 돌고래의 습성을.
“카쿄인,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 줄 알아?”
“다른 땅이 있지.”
“그래, 낭떠러지가…. …뭐?”
“낭떠러지는 없어. ‘나’의 끝은 없거든.”
이런 엄청난 사실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바람에 죠타로는 그만 공기방울을 뚫고 밖으로 나갈 뻔했지만, 어쨌든 카쿄인은 죠타로가 모르던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평생 마을에만 있었다면 알지 못했을 사실들. 죠타로는 바다에 들어온 카쿄인의 몸이 바닷물이 비쳐 보이는 것도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맑고 푸른 녹빛으로 빛나는 그의 꼬리도, 물결이 그대로 담긴 것처럼 보이는 그의 비늘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꼭 바다에 녹아든 것처럼,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가 곧 바다인 것처럼….
“왜 그래? 다른 땅에 데려다 줄까?”
“…아니.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
죠타로의 시선을 느낀 카쿄인이 괜히 꼬리를 흔들었다. 그 움직임에 따라 그의 비늘에서는 햇빛에 반사된 바다의 빛깔처럼 어여쁜 색이 났다. 그의 꼬리는 어두컴컴한 해저에 있음에도 예쁘게 반짝이며. 죠타로가 홀린 듯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내 몸이 이상해?”
“아니…. 신비하고, 아름다워. 꼭 보물 같군.”
“너에게 ‘나’는 그런 이미지구나.”
“아니, 난 너를 말한 거다.”
“너 진짜 이상해.”
그들의 여행은 몇 시간이고 더 지속되었다. 바다 밑이라서 해가 지고 뜨는 것도 몰랐다. 카쿄인이 들려주는 바다 이야기가, 그와 나누는 이야기가 너무 흥미로워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죠타로가 피곤해하지만 않았더라면, 배고파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여행은 쭉 이어졌을 거다. 뭐, 죠타로는 살아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쉬지도, 먹지도 못해서 여행이 중단되는 건 필연적인 일이었을 테지만.
“그러고 보니 너는 안 먹어도 되나?”
“글쎄. ‘나’는 그 자체로 있을 뿐이거든.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아.”
“이 기회에 먹어보는 건 어때. 자주 놀러도 오고.”
“그건… 재밌겠다.”
“너라면 언제나 환영이야.”
“그래. 그 전에 너는 집에 가야지.”
“…데려다줄 수 있겠나?”
“물론이야.”
카쿄인이 어려운 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웃었다.
10.
지금의 죠타로는 생각한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랬다면 정말 그 일을 피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도 아니었을 거다. 그 때의 내가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헤어지는 게, 그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운명이었을까.
11.
마을 변두리의 인적 드문 해안가에 그들은 도착했다. 카쿄인은 항구에 가까운 곳으로 그를 데려다주려고 했지만, 죠타로가 그쪽으로 가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군함과 대포까지 대동하며 카쿄인을 위협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항구 같은,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면 카쿄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게 죠타로의 생각이었다. 그를 걱정하는 죠타로의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카쿄인은 그런 건 신경 안 써도 된다며 해맑게 웃었다. 그러니 죠타로의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갈 수밖에. 카쿄인이 아무리 크고 강하다-카쿄인이 어떠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고 해도 위험이 될 수 있을 만한 것은 전부 피하고 싶은 것이 죠타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죠타로가 바닷가에 발을 디뎠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카쿄인이 자신을 데려갔던 탓인가, 마을은 철통경비태세였고, 평소 사람 한두 명이 다닐까 말까 하던 해변은… 무장한 사람들이 여럿 돌아다니고 있었다. 해변은 곧 시끄러워졌다. 인어가 상륙했다고, 서두르라고, 놓치면 안 된다고. 죠타로는 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긴박하고 험악해진 분위기에도 카쿄인은 그저 웃고만 있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얼굴로 순진무구하게, 태연자약하게.
12.
카쿄인, 바다로 돌아가! 당장!
13.
쐐액, 퍽─….
14.
날카롭고 거대한 쇠뇌가 날아와 카쿄인의 가슴에 박혔다. 카쿄인이 휘청거렸다. 수많은 작살도, 포환도 날아와 그에게 꽂혔다. 카쿄인의 상처에서부터 무언가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정신 나간 녀석! 너는 인어에게 홀린 거야! 마을 사람 여럿이 공격을 중지하라고 외치던 죠타로를 붙잡아 뒤로 내동댕이쳤다. 카쿄인이 흘리는 것은 바다로 스며들었다.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카쿄인의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징그러운 괴물 놈, 죽는 모습도 혐오스럽고 끔찍하다며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카쿄인! 죠타로가 울부짖었다. 그런 와중에 죠타로는 똑똑히 보았다. 여전히 웃고 있는 카쿄인의 얼굴을. 죽어가는 해파리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와중에, 카쿄인이 말했다. 꼭, 물속에서 말하는 것 같은 일렁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5.
‘나’는 죽지 않아.
16.
카쿄인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대로 바다에 녹아 사라졌다. 사람들은 환호했다. 드디어 우리를 괴롭히던 괴물이 죽었다고. 이제 태풍도, 역병도, 바다 위의 폭풍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바다는 이제 우리의 편이라고.
“헛소리하지 마!”
“죠타로, 이제 괜찮다. 너를 홀린 인어는 죽었어. 너도 곧 제정신으로 돌아올 거야.”
“카쿄인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아. 우리가 제대로 버텨냈는지, 이겨냈는지, 잘 살아남았는지 궁금해서 보러 온 거라고 했단 말이다!”
“세상에, 죠타로.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나! 그 괴물의 말을 믿니?”
“안 믿는 건 네놈들이다!”
“내버려 둬. 어차피 며칠 있으면 돌아오겠지. 그 때면 우리한테 사과할 수밖에 없을 거다. 우리가 구해준 거니까 말이야.”
…하지만 인어가 죽었는데도 태풍은 불었고, 역병이 돌았다. 여전히 바다는 잠잠하다가도 거칠었다. 그들을 방해하고 괴롭히던 인어가 죽었는데도 바다는 그들의 편이 되어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사실 인어가 죽지 않은 게 아니냐고. 죽은 것처럼 위장해서 바다 깊숙한 곳으로 도망친 게 아니냐고.
죠타로는 카쿄인의 말을 떠올렸다. 눈 안에 ‘내’가 있구나. 바다와 닮은 색의 눈동자를 가졌다는 칭찬을 자주 들어온 죠타로였다. ‘나’는 죽지 않아. 인어, 혹은 인어로 대표되는 무언가는 사실 살아있을지도 모른다. 그제야 그 말을 알 것 같았다. 너와 ‘너’의 차이를 알 것 같았다. 너는 카쿄인 노리아키였고 ‘너’는 바다였구나. 너는 바다 그 자체였구나.
17.
그 날 이후, 죠타로는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는 일이 잦아졌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해가 뜰 때, 해가 떠올랐을 때, 해가 질 때, 해가 졌을 때. 비가 올 때, 구름이 꼈을 때, 햇살이 맑을 때, 안개가 꼈을 때, 바람이 불 때. 바다의 모든 모습들을 죠타로는 눈에 담았다. 모두 카쿄인을 통해서 보았던, 그의 꼬리와 비늘에게서 보았던 빛깔들. 죠타로는 카쿄인을 떠올렸다. 둘이 만났던 시간은 24시간도 채 안되면서, 참 꿈결 같은 시간이었고 즐거웠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잊을 수 없어서 죠타로는 카쿄인을 그리워하기로 했고, 그리워했으며, 앞으로도 그리워할 것이라고….
그래서 죠타로는 바다를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하면 카쿄인과 ‘카쿄인’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쿄인에게서 배운 지식 일부와 그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는 비밀에 부쳤다. 바다 끝에는 낭떠러지가 아니라 다른 땅이 있다든가, 아직 세상에 공개하기엔 너무 이른 이야기들이었다. 카쿄인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또 그 이름을 주었다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알려지지 않은 게 바로 이런 이유였을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의 변화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미친 사람처럼 바다만 보지를 않나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게 좀 오래 걸리는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학자가 되는 것도 인어에게 홀렸던 것이 분통해서 그런 것이라고 멋대로 추측했다. 그래서 죠타로가 바다에 대해서 많이 알아내면, 자신들에게도 유리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죠타로는 사람들이 멋대로 지껄이게 내버려두었다. 그게 아니라고 해봤자 듣지 않을 게 뻔했다. 내가 카쿄인에게 홀렸었다고?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르지. 너를 잊지 못해서 이러고 있는 걸 보면 다른 의미로는 홀린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카쿄인은 죽지 않는다고 했다. 당연하다. 바다는 죽지 않으니까.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모든 것들이 자기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아우성이었다. 그것 역시 당연하다. 태풍은 바다에서 오고, 역병도 바다 건너에서 오며, 폭풍도 바다 위에서 분다. 바다는 한낱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니까. 카쿄인 노리아키는 바다에서 만들어진 인격일 뿐이지, 그를 쓰러트렸다고 바다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카쿄인이 다시 태어나기까지 바다는 어느 정도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다. 죠타로는 기다릴 수 있었다. 다만 너무 긴 시간이 아니기를 바랐다. 새로 태어난 카쿄인이 자신과의 기억이 없는 건 상관없었다. 사람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바다의 시간은 무한하고 인간의 시간은 너무나도 짧았다. 자신이 가진 시간이 모두 없어지기 전에, 새로운 카쿄인이 태어날 수 있을까? 죠타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죠타로를 불안하게 했다….
18.
오랜 시간이 지나고,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마을의 오래된 설화처럼 남았다. 인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대부분 나이 들어 죽고, 한때 존재했었던 인어를 아는 사람은 이제 죠타로만이 남았을 때.
“그거 들었어? 먼 바다에서, 뭐라더라…. 할머니할아버지들이 자주 얘기해주던 옛날이야기 있잖아. 거기 나오는 인어가 나왔다더라.”
“인어? 그거 허풍 아니었어?”
“그러니까 말이야. 그런데 진짜 인어래. 엄청 크고, 하반신은 바다에 잠겨서 안 보이고.”
“에이, 말도 안 돼~.”
소문이 돌았다. 옛날이야기 속에 나오던 인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19.
죠타로는 거친 숨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인어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바닷길이 모두 막혀서 어떻게든 빠져나와 여기까지 나오는 것도 힘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체력은 좋은 편이라고 자부하건만, 나이는 못 속이는지 이제는 슬슬 힘에 부쳤다. 하지만 그 때처럼 조각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고 있자니 가슴은 어릴 적 그 때처럼 마구 뛰어 설렘에 두근거렸다. …몇 년이 걸린 거지? 20년? 30년?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다. 어쨌든 내가 아직 너의 시간에 함께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거대한 인어라더니, 죠타로의 기억과 똑같았다. 푸른 바다에서도 너라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붉은 머리카락, 해저에 숨겨진 보석처럼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 창백한 듯 반투명하여 바다가 비쳐 보이는 흰 피부. …너였다. 그리하여 너였다, 정말 너였다.
20.
…카쿄인. 죠타로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잔뜩 떨리고 잠긴 목소리로, 몇 년 만에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르는 이름인지 모를 목소리로.
21.
죠타로가 다가오는 걸 느낀 인어가 그를 바라보았다. 약간은 멍한 얼굴로, 죠타로를 보았다. 처음 들어보는 낱말의 조합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쿄인?”
“카쿄인, 카쿄인 노리아키. 너의 이름이다.”
카쿄인. 카쿄인 노리아키. 아기새가 어미새를 따라하듯 죠타로가 해준 말을 중얼거리던 인어가 웃었다. 내 이름은 카쿄인 노리아키. 마침내 카쿄인이 웃었다. 죠타로도 아는 그 미소였다. 그래서 죠타로도 따라 웃었다.
22.
…그런 이가 있었다. …의 이름은 …라고 말하던. …바다는 다시 돌고 돌아 순환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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