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엣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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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큰한 냄새가 주방에서 넘어오고, 거실에는 기타 조율 소리가 은은하게 흘러나온다. 흠, 하는 느긋한 허밍 소리가 듣기 좋아서 A는 하던 것을 멈추고 잠시 거실 쪽을 돌아본다. 짧은 코드와 함께 그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반복하며 기타를 조율하는 B는 정말…, 예뻤다. 평소 연주하는 기타와 달리 잔잔하게 울리는 통기타 소리가 어색한 탓인지, 아니면 오랜 시간 방
“맨발도 나쁘지 않죠?” “간지러운걸.” “그걸 느끼려고 맨발로 걷는 거죠.” 가볍게 부는 바람에 파도가 잔잔하다. 모래를 밟은 발 사이로 물거품이 몰려들어와 간질이고선 도망간다. 젖은 모래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던 A는 그런 파도가 꼭 장난을 치는 것 같다고, 제 옆의 연인 같다고, 생각한다. 팔짱을 끼고, 손을 잡고, 깍지를 끼고. 공기가 더워지면 유독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나도 내가 쟤를 좋아하는 줄 몰랐어, 하는 등의 멍청한 말은 듣기에 식상하고 짜증 날 수 있겠지만, 당사자가 되면 정말 당황스러운 법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진지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느긋하게 명상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으니 말이다. 어쩌면 사람의 마음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인지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내 진짜 감정을 마주하
그대의 죽음이 나의 악몽이요 그대의 웃음이 나의 행복인데 이것을 사랑이라 칭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 우연히 발견한 책을 별생각 없이 펼쳐 짚은 구절이 이래서. A는 이 문장을 몇 번이고 다시 읽어본다. -짓이라. 문장 끝에 남은 아쉬움에 다시 그대-, 로 돌아가는 것이다. 다섯 번쯤 읽었을까. 괜히 간지러운 마음에 고작 한 문장 읽은 책을 다시 덮
젠장, 망했다. 딱 그 표정이네. 잘 정리했던 머리를 쥐어뜯는 A를 구경하다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 웃어버렸다. 신난 웃음에 원망과 억울이 담긴 녹색 눈이 내 눈엔 그저 귀여웠다. 아, 진짜 큰일났네. 귀여워 보이면 답도 없다던데. 실컷 웃다가 A가 삐칠 기미가 보여 겨우 진정했다. 그래. 지겹게 싸우고 지겹게 간을 보다 겨우 서로 마음
시작은 별것 아니었다. A가 그 자신을 인간과 분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염세주의적인 면모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결을 달리했다. 하지만 시작은 정말 별것 아니어서, 그조차도 기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간혹 그의 아내만이 찰나의 괴리감을 느끼고 눈을 깜빡일 뿐. B는 종종 A가 말하는 ‘우리’에 자신이 없음을 느꼈다. 그녀는 애써 납득했다. 내 남
삶을 비유하는 단어는 많으나 A에게 삶은 퍼즐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로 조립한 퍼즐. 들어갔으면 하는 퍼즐은 끼워 넣고, 없었으면 하는 퍼즐은 버린다. A 역시 사람이기에 원하는 대로만 일이 풀리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는 남들과 달리 기회가 더 있었다. 그러니까, 이미 끼운 퍼즐을 뺄 수 있다는 것은 A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그 기회 때문일지, 원래 그의
♬Gabriel Fauré - Sicilienne, Op. 78 수없이 많은 가는 선이 가로지르는 창문 아래, 다 식은 차 한잔과 고서를 옆에 두고선 A는 잠들어있다. 동유럽의 마녀집회 때문에 한참을 시달리다 겨우 여유가 났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그가 짧은 휴식을 즐기기 위해 책을 들고 자리에 앉은 건 분명 따스한 햇볕이 창문을 살피던 한낮이었지만, 지
‘당신이 내 고모라고요.’ 위태롭다. 사납다. —의 자식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는 분위기였다. 아직 어리다. 여리고. 그래서 그만큼 독하다. 나는 몇 번 보지도 못 한 제 어머니의 무언가일까? 그러나 날카롭게 뜬 눈 사이로 보이는 눈빛만큼은, 아아…. ‘영특하구나. 졸업도 전에 스스로 알아오다니.’ ‘무슨 뜻이에요?’ ‘네가 졸업할 때 내 추천서와 함께 알
북적이는 홀을 뒤로하고 흑발의 남자가 급히 어디론가 향한다. 붙잡으려는 사람이 여럿 있었지만, 아무도 그를 연회장에 잡아놓는 데 성공하진 못한다. 그들의 권유를 거절하는 남자의 태도는 어딘가 상대를 낮잡아보는 듯했지만, 무표정에 어린 특유의 거만함과 척 봐도 비싸 보이는 옷이 그 태도를 자연스럽게 한다. 거절당한 이들도 익숙하다는 반응으로 돌아서 이내 저들
아수라장이 된 광장 한복판에 별안간 밝은 빛이 터져 나온다. 광장에 있는 대부분이 그 근원지를 바라본다. 모든 광경이 슬로우가 걸린 것처럼 보이고, 사방에 튀는 돌조각과 핏물이 공중에 뜬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화면이 현실감을 없앤다. 내 몸마저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고, 무언가 날 가로막는 느낌이 든다. 마치 물속에서 걷는 것처럼 힘겹
그 애 머리가 굽어진 모습이 어딘가 어색했던 이유가 심한 곱슬머리여서가 아니라 묶었다 푼 자국이 남은 것이었음을 나는 바보같이 한참을 지나서 알았다. 비행 중 묶은 머리에 헬멧을 쓰고선 한참을 상공에 있다 내려오면 묶었던 모양대로 굽을 수밖에 없지. 대충 풀어 엉킨 머리를 풀기 위해 손가락을 꼼질 거리는 모습이 귀엽다. 드디어 내가 미쳤지. 우습다고만 생각
♬AJR – Sober Up 그야말로 신들의 연회였다. 술과 과일, 온갖 진귀한 보석들. 이들에게 금은 그저 금속일 뿐, 온 우주의 보석들을 가져다 꾸며놓은 연회장은 눈이 아프도록 빛났다. 그뿐이랴. 아스가르드의 신들 역시 빛났다. 여기저기 화려한 색색들이 흩날렸으며 오색 빛이 그들을 비췄다. 그런 연회장에서 불길을 닮은 적발이 신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당
삶이란 무엇이며 생이란 무엇인가. 죽음을 초월한 아이에게 남겨진 질문은 그것이되 답은 스스로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태양이 점점 붉어지고 뾰족한 첨탑의 그림자가 길어지는 저녁에 소녀와 소년은 가만히 책을 팔락, 팔락, 넘긴다. 숨소리는 고르고 먼지는 느리게 부유한다. 집중한다면 눈을 깜빡이는 소리까지 들릴 것 같은 이 고요는 붉은 넥타이를 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