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하오버]Alice in Wonderland

망상정원 by 스윗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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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면서 들었던 로동요


마족의 침공으로 혼돈에 빠진 세계를 구원하고 실험을 바탕으로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도달하기 위한 발걸음을 준비하던 매드 닥터의 발은, 수렁 아래로 푹 빠지며 전혀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혼돈의 틈 안은 시간도, 공간도, 위도, 아래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가라앉고 있는 건지, 뜨고 있는 건지 알 수도 없는 미지의 공간. 애드는 지루한 틈 안에서 많은 생각을 한다. 이 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렇게 갖은 고생을 하며 얻어낸 명예를 누려보지도 못하고 허무하게 이런 곳에 고립될 것이라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동안 난 무엇을 위해 그렇게 피땀어린 노력을 했던 걸까.. 원망스러운 운명에 눈물이 왈칵, 차오르려는 것을 슥슥 닦아내고는 엄니에 독을 품는다. 나약한 소리를 하면 얕보이고 짓밟힌다. 그렇기에 제 몸을 깎아먹는다 하더라도, 그 누구도 곁에 다가올 수 없게 되더라도 독을 품는다. 그것이 나의 생존 전략이니까. 그러나 그 독을 쓸 수 있는 것도,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를 악물던 소년은 곧 날카로운 엄니 또한 물어뜯을 무언가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낸다. 쓸 곳이 없는 이를 갈아봤자 내구도만 줄어들 뿐. 분노하는 것에 에너지를 낭비해 봤자 금방 지칠 뿐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가다듬어 보자.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고 잠시 자신의 모든 것을 비워내보자. 그러나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 을 견디기엔 소년은 이미 마음이 공허했다. 그 허탈함을 어떻게든 잊기 위해 닥치는대로 제 안에 이것저것을 쑤셔넣었다. 지식도, 돈도, 명예도, 추종자도 이 마음을 채우진 못한다. 대체 나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기에 나는 완벽으로 향하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원하는 거지? 유년기의 결핍을 성인이 된 후 충족시키려 해봤자 밑 빠진 독에 물을 펌프로 부으면서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너무나 뒤늦은 것을, 애드는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결핍에 대한 갈증의 원인을 신경질적으로 따지던 게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감고 있던 탓에 애드는 자신의 주변을 감싸던 환경이 바뀐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무색무취의 공간에서 순간 확, 맡아지는 수증기의 냄새에 눈이 번쩍 떠진다. 그리고.. 자신이 굉장한 속도로 공중에서 낙하하고 있다는 사실도 곧이어 알아챈다. 어째서?? 분명 땅으로 꺼졌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이런 고도에서 낙하하는 거라면 다이너모로 반동을 준다고 해도 땅에 쳐박힐 때 적잖게 충격을 받게 될 거다.

“젠, 장..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날이군, 진짜..!”

낙하 예상지점과 자신의 몸에 에너지 필드를 둘러 받는 데미지를 최대한 경감시켜보려 하던 중, 낙하 예상위치로 질주하는 무언가를 발견한다. 검붉은 홍염을 마치 로켓처럼 추진력을 얻기 위해 내뿜으며 달려오는 무언가. 마족인가? 상공이 너무 높아 정체를 파악하기 힘들다. 다이너모로 저것에 대해 데이터를 가져오게끔 명령하기엔 제 몸을 지키는 것도 벅차고.. 적인지 아군인지, 인간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을 무언가에게 만약 노려지고 있던 상황이라면 여전히 최악을 면할 수 없겠는걸. 그리고 그 순간, 찢어지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퍼졌다.

“..애드, 그 쪽으로 가고있다!!”

제가 알던 목소리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분명 그것은 반나소드의 목소리였다. 목소리가 다른 만큼 행동도 딴판인데? 적어도 매드 닥터가 알고있던 반나소드는 자신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신은 비유적으로 내면에 독을 품고 악을 쓰고 있었지만 그 녀석은 문자 그대로 독을 품고 상대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망령이었으니까. 오싹하고 스산한 죽음의 기운과는 사뭇 다른, 맹렬히 타오르는, 아니 폭발한다는 느낌에 더 가까운 불꽃을 바라보며 애드는 침착하게 다이너모에게 에너지 필드를 반나소드의 몸에도 감싸도록 명령한다. 이 몸을 받아주겠다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서툰 짓을 했다가는 부상자가 한 명에서 두 명이 될 뿐이다. 닥터로서 합당한 판단을 내리겠어! 고도가 점차 낮아지고, 두 사람은 겨우 얼굴을 마주한다. 한 명의 얼굴에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한 명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에너지 필드가 데미지 완충재 역할을 하며 엄청난 속도로 추락하던 애드가 반나소드의 품에 안겨도 반나소드는 두 발짝 정도 뒷걸음질을 치다 넘어지는 정도에서 멈췄다. 겨우 몸을 일으켜세운 애드는 그래도 최소한의 답례는 하기 위해 낯선 얼굴의 반나소드를 바라본다. 거의 다 새어버린 머리카락, 온전한 두 눈동자, 그리고.. 굉장히 적응하기 힘들 의복을 하고 있군. 충격의 여파로 부상은 없는지 침착하게 자신과, 반나소드의 신체 데이터를 스캔하여 진단한다. 나도, 그도 가벼운 골절 정도에 그쳤군. 이 정도야 어렵지 않지. 치료 앰플이 담긴 드론을 꺼내들어 그에게 주사하려는 순간,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애드에게 말했다.

“..분명 닮았지만, 내가 알던 애드와 너는 다르군. 너도..애드가 맞는 건가?”

“이쪽의 애드가 어떤 녀석이었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나는 애드가 맞아.”

얌전히 있어, 라는 말을 뒤에 붙이며 매드 닥터는 생명의 은인에게 조금의 자비를 베푼다. 약물이 온 몸에 스며들자 가벼운 골절이 아물고 뻐근했던 몸이 조금 더 매끈하게 움직여진다. 여전히 착잡한 얼굴을 한 반나소드의 뒤로, 한 무리의 인파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선두로 보이는 붉은 머리. 아, 이쪽의 엘 수색대인가. 본래부터가 3백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현재 이 곳에 존재하고 있으니 다른 세계를 넘어왔다는 사실에 새삼 놀랄 것도 없었다. 덤덤하게 자리를 지키던 애드는 자신을 마주하는 인파의 숫자에 놀란다. 이렇게나 많은 인파가 흐트러지지 않고 한 일행으로 뭉쳐다닐 수 있는 건가? 거기에, 조금 낯선 얼굴들도 함께 보이는데..

“어? 애드 머리카락이 길어졌어! 그리고 북실북실하지가 않아..”

“..단순히 머리카락이 길어진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딴 사람이잖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갓 엘리아노드에 당도했던 애드의 시간대와는 달리, 이곳은 마계. 콜로서스 플레가스를 다시 봉인하고 귀환하던 중, 트랩을 밟은건지 짧은 머리의 복실한 애드(분홍머리 덩어리의 설명밖에 없어 이 설명으로 대체한다.)가 하늘로 솟구쳐 버렸고, 반나소드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에 자신을 받아주기 위해 먼저 발걸음을 뗐다.

“그리고 그 하늘에서, 두 명이 맞바뀌었다.. 그런 황당한 이야기지만 이건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군.”

“복장과, 방금 전에 내게 투여한 그 주사를 보았을 때는.. 너는 의사에 더 가깝다고 생각되는데. 내 생각이 맞나?”

대답 대신 하얀 애드는 고개를 끄덕여 대신한다.

“애드가 치유사, 믿기지가 않는데? 그야..애드는 마법을 믿지 않았잖아?”

“흥, 너희들의 급 낮은 치유술과 나의 데이터와 실험을 바탕으로 구축한 하이테크놀로지를 비교하려 들다니...”

“음, 저 말투를 보니까 애드 맞네! 우선은 우리도 전투로 지친 몸이기도 하니, 오로라로 돌아가서 재정비할까?”

붉은 머리의 여성, 엘리시스..였나? 이 쪽에서는 엘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건지 새지 않은 온전한 붉은 머리카락이군. 하지만 무리 안에서의 위치는 그곳이나 이곳이나 크게 바뀌진 않은 모습이다. 어렵지 않게 일행을 쥐어잡고 움직일 수 있는 저 묘한 카리스마는 여전히 조금 부러운 부분이란 말이지. 일단 다행인 것은 이 곳의 반나소드, 레이븐은 나에게 호의적인 편인 것 같다. 목숨을 구해준 것도 있으니 이것저것 말을 붙이기 그나마 편하지 않겠나. 침착하게 레이븐의 옆에서 걸음을 맞춘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답게, 그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우선은, 고맙다. 곧바로 부상을 파악하고 치료해줘서.”

“전투 중에 부상자를 최소화하는것도 다 내 전력이 되니까 했을 뿐이야. 뭐, 나도 중상을 입을 뻔한 상황에서 경상으로 그치게 도와준 그 쪽의 호의에는 감사하도록 하지.”

아까 스캔해 둔 그의 신체 데이터를 펼쳐두고 열람해 본다. 많은 부분이 자신이 알던 레이븐과는 다른 몸이다. 불완전한 결합으로 인해 한 개의 몸에 두 개의 자아가 양립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저걸 유지하고 그 힘을 전투에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니. 연구자의 눈으로선 탐이 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조금 더 저 존재에 대해 알고싶다. 저 몸에 대한 데이터는 분명, 한 단계 더 높은 인류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속셈을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으니 우선은 조금 때를 기다려보려던 애드에게 호박이, 아니, 멜론이 넝쿨채 굴러 들어온다.

“애드..그, 괜찮다면 돌아가서 나소드 핸드를 정비받을 수 있을까? 의사인 지금의 네가 나소드에는 익숙하지 않다면 다른 동료에게 요청하겠다만, 아무래도 가장 편하게 정비를 맡겼던 건 네 쪽이었어서 말이다.”

스스로 내게 몸을 맡기다니 이게 왠 횡재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 쪽의 애드에게 진심으로 감사해야 겠군. 그 녀석이 충분히 레이븐과 호감도를 주고받았기에 이 녀석이 다른 존재여도 ‘애드’ 라는 이유로 호의를 보인 거라면 열심히 이용해 먹어야겠다.

“본래 전공은 나소드였으니 그 정도면 어려울 것도 없어. 아무리 애드라고 해도 남의 방을 쓰는 느낌일 거 같은데 그건 싫으니.. 우선 네 방으로 가서 그 깡통 정비를 도와주지. 그 다음 내 스타일대로 방을 손봐야겠군.”

“음, 그럼 잘 부탁하마.”


프뤼나움 중간에 물에 잠긴 지역이 있었는지, 하늘에서 떨어진 자신을 제외한 수색대가 제법 축축한 몸 꼴을 하고있었고 아무리 폭발하는 화염을 두르고 있다고 해도 레이븐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깔끔을 떠는 애드는 각종 바이러스와 병균의 전파 등을 주장하며 당장 씻고 나오지 않으면 정비는커녕 에탄올도 아닌 메탄올에 레이븐을 담궈버리겠다고 엄포령을 내렸고, 레이븐은 머쓱한 얼굴로 간단한 용품을 챙겨 욕실로 발걸음을 옮긴다. 레이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애드는 그의 방을 살펴본다. 잠시 지나가듯 머무르는 거처이기에 큰 특징은 기대할 수 없었지만 레이븐의 방은 유독 휑한 느낌이 강하다. 굳이 이 방만이 아니라 곧 세상을 떠날 사람처럼 빈 손으로 다니는 그의 방이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완전한 결합으로 어거지로 기워진 헝겊인형이 언제 날카로운 것에 찔려 구멍이 뚫린 채 안을 채운 솜이 터질지 알 수 없어 소중히 보관해봤자, 낡아빠진 헝겊이 삭으며 원형을 찾을 수 없게 될 딜레마에 빠진 사내를 바라본다. 분명 기생식물에 잠식되어 독을 뚝뚝 흘리며 사령들 사이에서 모든 것을 저주하는 운명보다 나을지도 모르지만, 오십보백보의 엉망인 인생에 질을 따져봤자 아니겠는가. 나소드와 인체에 대한 지식을 겸한 자신이 저 엉망으로 얼기설기 기워진 몸을 조금 손을 봐주도록 해줄까. 그가 더 오래 남아있어야 전력으로 이용할 수 있고 더 많은 증폭으로 인한 신체 강화에 대한 데이터 등 이용하기 좋으니 그러는 것 뿐이다. 그래, 단지 실험체는 이용하기 위한 존재라지만 데이터를 장기적으로 보기 위해서 보호하는 것 뿐이야. 그것 뿐... 그리고 그런 착잡한 애드의 고민을 단번에 날려버린 것이 하체에 타올 한 장만 두르고 저벅저벅 욕실에서 빠져나오는 반나소드의 나체였다. 곪아빠진 속을 쉽게 알아볼 수 없는 탄탄하고 아름다운 남성의 육체 외견에 아주 잠시 넋을 잃던 애드는 곧 파렴치한 외양에 다시 주목하고 날카롭게 소리친다.

“이런 미친 변태 고철덩이가..! 옷 당장 안 입어?”

“아, 이런.. 나도 모르게 버릇이 되어버려서. 미안하다, 잠시만 기다려다오.”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애드의 성원을 이기지 못하고 레이븐은 애드와 등을 돌려 정비를 받기 편하게 가벼운 복장으로 옷을 입고선 다시 흠흠, 하고 헛기침으로 애드를 불러들인다. 어느새 스캔해둔 자료를 바탕으로 진료차트를 만든 애드는 편한 자세로 누운 레이븐을 내려다보며 몇가지 의료도구들을 꺼내든다. 분명 이 세계의 그에게 내가 호의를 표하고, 전력으로 써먹는다 하더라도 그건 찰나일 뿐인데. 내가 본래 ‘있어야 할 곳’ 으로 돌아간다면 이 행동은 어떠한 의미도 없을텐데. 그럼에도 소년은 낡은 헝겊인형을 모른 채 돌아설 수가 없었다. 이미 반쯤 생명마냥 기생, 아니 공생에 조금 더 가깝게 붙어있는 나소드 핸드와 레이븐의 신체의 동조율에 주목한다. 이 둘을 별개의 존재로 분리해서 운용하게 두는 것이 맞을까, 그렇지 않고 오히려 동조율을 올려 그의 신체에 부담이 간다고 하더라도 한 개의 몸처럼 이뤄질 수 있게 두는 것이 옳은 길일까. 애드의 선택은 후자였다. 곧 이 낡아빠진 인형이 더 움직일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인형이 원하는대로 움직이게 해 주는것이 맞을 것이다. 인형의 바느질을 풀어내고 다시 박음질을 시작한다. 마취를 진행하지 않고도 덤덤하게 자리를 지키는 그의 모습에 왜인지 마음 한 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온다. 이런 고통 속에서도 아무렇지 않은듯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는 그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아서. 아픈 것이 두려워서, 약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서, 통제되지 않은 무질서가 무서워서 이 길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자신과 상반되게 그 모든 것을 감내하면서도 투사로서 마지막 생을 태우는 이 한심한 이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된 것일까.

“다 끝났어.”

“뭔가, 조금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군. 긴 시간이었는데 정말 수고가 많았다. 애드.”

3시간에 걸친 대규모 픽스동안 애드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집중했고, 레이븐은 그런 애드의 성의를 침묵한 채 바라보았다. 예민하고 날이 바짝 선 말투로 상대를 도발하는 철없는 어린아이. 그 첫 인상과는 달리 오래 접하면 접할수록 그 내면이 보이기 시작하니 평가를 정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내면에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겁이 많은 소동물에 가까웠다. 겁이 많기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적의로 판단하며 자기가 가진 유일한 대응수단인 힘을 내세워 전력으로 밀쳐낸다. 서툴기 그지없는 방식이었다. 아직 어리니까, 라는 이유로 일부러 말싸움이나 사소한 다툼에서 지고 들어가니 이 쪽을 바라보는 경계의 눈빛이 서서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우 동료로서의 유대를 형성했다고 생각..했던 애드는 지금 이 곳에 없지만 말이다. 나 홀로 그에게 유대감을 느끼던 것은 아닐까 설레발을 염려했지만, 애드 역시 마냥 그를 내치지는 않았다. 호의를 먼저 보이며 다가오는 상황이 낯설 뿐, 싫어하진 않는다는 건 오늘 처음 알게 되는군. 땀으로 얼룩진 애드의 얼굴을 여분으로 가져온 마른 타올로 닦아준다. 짐짓 놀란 얼굴을 하던 소년은 이내 그 손길을 내치지 않고 얌전히 위치한다.

“하, 닥터에게 최소한의 성의표현은 할 줄 알다니. 나쁘지는 않군.”

“훗,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다. 너도 피곤할테니 이만 쉬어야지. 낯선 곳에 온 것에 대한 긴장감도 있을텐데 정비..아니, 이건 수술에 가까운가? 어쨌건, 이것까지 도와주었으니 많이 지쳤을 거라 생각돼서 말이다.”

낯선 상냥함. 그러나 이것은 내 것이 아닌데. 내가 누려야 할 것이 아닐텐데. 그럼에도 이 온기에 홀려버린다. 그의 상냥함에 긴장이 풀렸던 것일까? 스르르 몸이 기울어진다. 몰려오는 피로감에 그만, 낯선 곳에서 낯선 이의 품에 잠에 빠지고 만다.


꿈 속의 애드는 앨리스였다. 그레이스라는 시계토끼를 찾아 걸어들어온 구멍에 빠져 도착한 곳에는 비단벌레도, 체셔 캣도, 매드 해터도 없었다. 텅 빈 왕성을 지키는 트럼프 병사 레이븐이 앨리스를 빤히 바라본다. 트럼프 병사는 붉게 물든 장미를 하얗게 칠하고 있었다. 피로 물든 장미를 이대로 두고 싶지 않다나? 이제 겨우 한 줌을 칠했는데 가지고 있는 페인트의 양과 남은 장미의 양을 보면 터무니없는 행동이었다. 멍청한 트럼프 병사를 비웃으며 앨리스는 집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다. 그랬어야 했다. 왜 여기서 나는.. 붓과 페인트를 들고 트럼프 병사의 곁에서 장미를 칠하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꿈 속의 행동에 의아해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트럼프 병사는 감사를 표한다.

[나의 속죄를, 나의 죄악을 씻어내는 것을 도와줘서 고맙다. 애드.]

다정한 감사인사와 함께, 애드는 잠에서 깨어난다. 따뜻하게 자신을 한 팔로 감싸안고 잠에 빠진 레이븐의 얼굴을 마주한다. 무모하고 헛된 행동을 하면서 제 몸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는 바보를 멈추게 해야 하는게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어느새 그와 같이 그의 손에 깊게 물든 핏물을 씻어주고 있었다. 감화되어선 안 되는데, 나는 결국 여기 있어선 안될 사람인데. 마음을 주어선 안되는데. 온정에 굶주렸던 어린아이는 너무나도 쉽게 마음을 열어버렸다. 가볍게 잠든 레이븐의 상처가 패인 얼굴에 작게 입맞춤을 남긴다. 그를 못 본 체 할 수가 없어서, 그가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주었으니까. 잠시만, 잠시만 이 세계에 어울리는 애드가 되기로 하자. 위선자는 가면을 내려놓았다. 이런 바보같은 낡은 헝겊인형을 지켜준 수색대 일행도 분명 상냥한 바보들만 모인 집단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몸이 지휘하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해 주겠어. 오만한 척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잊지 않은 앨리스는 출구로부터 등을 돌린다. 원더랜드를 향한 꿈 같은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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