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같은 한나절이었다. 눈부신 태양과 선선한 바닷바람, 항구를 가득 채운 고기잡이배와 무역선, 넘쳐흐르는 부, 선원들, 상인들, 아이들… 그리고 데이트. 레이젤은 확실히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선호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데이트’가 꽤 재미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부 도시 시장에는 검의 해안과 그 너머에서 가져온 물자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고된 업무시간 중의 단비 같은 낮잠에서 깨어났을 때, 고위 하퍼는 무릎 위에서 제발 여기 좀 봐달라는 듯이 우렁차게 찍찍거리는 시궁쥐 한 쌍을 발견했다. 하퍼는 손에 쥐고 있던 냄새나는 두루마리를 내려놓은 뒤, 시궁쥐들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참이나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끝에, 하퍼의 입에서 떨어진 첫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나 원
▴ 읽으면 좋은 전편 바알스폰은 나흘째 되는 날 밤 자헤이라의 현관 앞에 나타났다. 온몸에 재와 먼지를 뒤집어쓰고 매캐한 연기와 화약 냄새를 휘감은 채였다. 입고 있는 옷은 시커먼 기름과 알 수 없는 검붉은 액체에 찌들어 본래 색을 알아보기가 어려웠고 신발은 어쨌는지 한쪽 발이 맨발이었다. “이 시간에 갈 데가 없어서.” 도시를 구한 영웅이라기엔
이른 저녁부터 ‘충동’은 시체처럼 곯아떨어졌다. 매일 밤 어김없이 꾸던 악몽도 극심한 피로 앞에서는 한 수 접어야 하는 건지, ‘충동’은 신음을 흘리지도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지도 않았다. 레이젤은 그런 연인의 머리맡을 한참 동안이나 지키고 있었다. 이따금 ‘충동’의 눈꺼풀이 움찔거릴 때마다 레이젤은 잔뜩 긴장한 채 은검을 그러쥐다가, 경련이 멈추는 것을 확
“기스양키는 여왕이 지정한 개체만 재생산을 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 바알스폰은 어떤 종족과도 번식할 수 있고 말이야. 그러면, 바알스폰과 기스양키 사이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수 있나?” “무슨 질문이 그래?” 창백한 여자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는 ‘충동’이 제기한 생물학적 난제에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육종 전문가야. 유용한 생명체를 발명하
아스타리온은 그랬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봐, 이번에도 그랬잖아. 타브가 제게 첫눈에 반했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제 감정에 둔한 아스타리온은 그 감정을 카사도어를 죽이고 나서야 깨달았지만. *** 지금 생각해 보면 타브는 마냥 착한 놈은 아니었다. 약자들에게는 자비롭고 호구 같았지만 제 심기를 거스르는 자들에게 무기
** 다크어지 스토리 3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요양원이나 다름없는 꼴이 됐어. 영웅은 무슨.”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물건들을 살핀 아스타리온이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이쪽을 흘겨보는 것을 보니 모두 자헤이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자헤이라에게도 변명할 말은 있다. 이 엉성한 일행의 리더라는 놈 때문에 모두의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