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유산

가내더지와 자헤이라 중심, NCP

창고 by 롣

** 다크어지 스토리 3막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요양원이나 다름없는 꼴이 됐어. 영웅은 무슨.”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물건들을 살핀 아스타리온이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이쪽을 흘겨보는 것을 보니 모두 자헤이라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자헤이라에게도 변명할 말은 있다. 이 엉성한 일행의 리더라는 놈 때문에 모두의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발더스 게이트에 입성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한밤중 동료의 끔찍한 비명에 기겁하며 깨어나기를 반복한 지도 일주일이 되었다는 소리다. 이틀 전부터는 레이젤마저도 손에 대검을 쥔 채 침대를 뛰쳐나오는 대신 머리를 감싸쥐고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막상 악몽의 당사자는 이 상황에 전혀 익숙해지지 못하고 있었지만. D는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동료들에게 매번 사과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도 딱 거기까지였다. 친애하는 바알께서 손수 무의식에 부어주시는 각종 악몽은 한낱 필멸자인 그 아들에게 달리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는다. 바알스폰은 매일을 똑같이 괴로워하고 애원하고 발버둥 치고 비명을 질렀다. 상황이 이러니 동료들 또한 살인의 신을 향해 불경하고 험악한 발언을 되뇌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없이 불면의 나날만이 흘러갔다. 

그 결과 대다수의 일행은 구울과 비슷한 낯빛으로 신음하며 눈에 띄는 커피를 무차별 약탈하는 산적 무리 같은 꼴로 전락하고 말았다. 주점 주인과 몇몇 종업원은 위층에 세 든 일당이 모험가가 아니라 좀비 떼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 모양이고, 게일이 졸다가 수프 그릇에 얼굴을 처박은 날 이후로는 라크리사마저 심란한 염려의 시선을 보내왔다. 결국 오늘 아침, 자헤이라는 일행의 연장자로서 마땅한 행동을 취해야겠다고 결단을 내렸다. 

“안 되겠다. 이대로는 마인드 플레이어가 되기 전에 다들 언데드로 먼저 변이하겠어.” 

식사라기보단 연료 공급에 가까운 모습으로 커피 4잔을 입에 들이붓고 있던 이 언데드 산적 무리의 리더는 자헤이라를 한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아. 그럼 부디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로운 조언을 주십시오, 현명한 연장자님.” 

안색에 변함이 없는 드래곤본이니 엘프를 제한 일행 중에선 개중 그나마 멀끔해 보이는 꼴을 하고 있지만 자헤이라는 그가 열흘째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응 속도가 현저히 느려져 전이라면 쉽게 피했을 적의 칼날에도 매번 상처를 입고, 말수는 더욱 줄었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앉아있는 시간이 부쩍 늘었다는 것이다. 이 바알스폰에게는 상당히 치명적인 증상이다.

“언제는 ‘현명한’ 과 ‘늙은이’ 중에 맞는 수식어는 하나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농담조로 던진 말에 D가 눈만 굴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뭔가 생각이 있는 게 아니면 당신이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뭔데?”

건방진 녀석.

솔직히 말하자면 자헤이라는 처음 만난 날부터 이 애송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술에 든 것이 자백제라는 걸 바로 알아볼 수 있는 예리함, 알면서 그 술을 단숨에 들이키는 담력, 그 후 아무렇지 않게 눈을 마주쳐 오는 뻔뻔함까지. 하퍼로 영입하기에 손색이 없는 인재가 아닌가. 물론 그땐 이 녀석이 이 모든 재앙을 직접 기획한 바알의 적장자라는 사실은 몰랐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날 무지한 상태에서 내린 평가는 아직 유효했다. 아니, 오히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금처럼 자헤이라의 의중을 파악하고 요령 있게 받아치는 것이 더 능숙해졌다. 영리한 놈이니 앞으로도 그 재주를 꾸준히 갈고닦아 점점 더 노련해지겠지. 이러다간 ‘써먹을 만한 후배’ 목록에 바알스폰의 이름을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 사실에 어떤 감정을 느끼면 좋을지 자헤이라는 아직 명확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나라고 기적 같은 해결책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되든 안 되든 일단 시도라도 해 봐야겠군. 이런 상태로는 오린도 고타쉬도 상대할 수 없어.”

D는 앞에 놓인 빈 커피잔을 내려다보며 잠시 침묵했다. 자헤이라는 피로에 찌든 젊은 얼굴들을 한 번 쭉 살핀 뒤 부러 짓궂은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뜨개질을 해보는 건 어떠냐?”

예상했던 대로 드래곤본은 즉시 코웃음을 쳤다.

“굉장한 해결책이군.”

고위 하퍼는 품위 있게 그를 무시했다.

“그럼. 괜히 현명한 연장자겠어. 몇 개 더 있으니 마저 들어봐. 자기 전에 따뜻한 우유 마시기, 향 태우기, 명상하기, 음악 감상하기. 네가 야밤에 정신 나간 하피처럼 연주하는 바이올린 같은 거 말고, 좀 조용한 걸로.”

“자헤이라—”

“일반적인 악몽이 아니란 건 나도 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잖아. 말했지, 네 아비의 진정한 유산은 공포라고. 무력감에 젖어 참고 견디기만 해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누가 알아? 효과가 있을지.”

묵묵히 듣던 바알스폰이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당신 뜨개질할 줄 모를 거 아냐.”

자헤이라는 삐딱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르지.”

“그럼 무슨 수로 해? 그런 거 할 사람이 여기 누가 있—”

“나 할 줄 알아!”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돌려 옆에 앉아 있는 게일을 바라보았다. 자헤이라가 중얼거렸다. “놀랍지 않군.”

“우리 어머니 수준엔 한참 못 미치지만, 그래도 제법 나쁘지 않은 실력을 갖췄다고 자부하고 있거든. 컵 받침, 모자, 양말쯤은 눈 감고도 뜰 수 있어. 어때? 알려줄까?”

D는 피곤함을 숨기지 못하는 느린 동작으로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다시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연장자님의 말씀대로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 좋아. 알려줘.”

그의 맥 빠진 답변에도 게일은 활기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전까지 커피잔에 머리를 파묻고 다 죽어가는 행색이던 위저드는 어딜 갔는지 그새 피로가 다소 걷힌 갈색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모두의 지난 7일을 끔찍하게 만들었던 원흉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인지, 동료의 배움을 향한 미지근한 열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솔직히, 마음의 안정에 정말 도움이 되는 훌륭한 취미라고 생각해. 나도 마탑에 틀어박혀 지낼 때 도움을 많이 받았거든. 게다가 생산적이기까지 하지! 나가서 필요한 것들을 사 오자. 우선 털실이랑—”

맞은편에 앉아 있던 칼라크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도 같이 가도 돼? 우리 엄마도 뜨개질을 잘하셨거든. 배울 기회를 놓친 게 항상 아쉽더라고.”

“물론이지, 칼라크! 둘이 같이 배우면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거야.”

“괜찮다면 나도 합류하고 싶소. 전부터 관심이 있었거든.”

“아치 드루이드에게 뜨개질을 가르치게 되다니! 죽기 전에 해야 할 일 리스트에서 항목 하나 지울 수 있겠는걸.”

그렇게 아침 식사를 마친 네 사람은 하부 도시에 있다는 뜨개질 전문 가게로 떠났다. 남은 인원은 모험을 즐길 상태가 아니었으므로 숙소에 남아 낮잠을 청하거나 무기를 손질하며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자헤이라는 민스크가 부의 털을 빗겨주며 흥얼거리는 정체불명의 노래를 배경 삼아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바알이 D에게 행사하는 지배력은 강력했다. 자헤이라와 민스크의 옛 친구가 겪었던 것보다도 훨씬 더. 불행히도 신 역시 지난 과오로부터 학습을 하는 모양이다. 

물론 신은 거역할 수 있다. 그들의 친구가 온몸으로 증명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하지만 그땐 고라이온이 쏟은 수년의 세월과 애정, 가르침이 있었고 살육을 부추기는 미친 집사나, 자식의 정신을 손수 들쑤시는 살인의 신은 없던 시절이었다. 가정은 무의미할 뿐이지만 생각은 빠르게 치닫는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오린은 선택 받은 자의 지위를 건 결투를 제안했고 D는 승낙했다. 패배했을 때의 결과는 자명하다. 죽음이거나, 죽음보다 더 끔찍한 최후일 테지. 하지만 결투에서 승리하면, 그땐 어떻게 되는 걸까? 성소에서 아버지가 친히 내리는 축복을 바알스폰이 거부하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만약 거부한다면, 그때는?

자헤이라는 그쯤에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공연히 심란해질 뿐이다.

오후가 되자 네 사람이 돌아왔다. 알록달록한 털실과 뜨개바늘이 가득 담긴 종이봉투 외에도 우유 세 병, 본클록 약재상에서 구한 각종 약초와 허브, <숙면을 위한 연금술> 과 <우리는 왜 잠을 자는가> 따위의 제목이 붙은 책 서너 권까지 든 채였다. 덕분에 자헤이라는 동료 뱀파이어 스폰으로부터 삐죽한 시선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요양원이라. 사실 그리 틀린 말도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지금 심정으로는 요양원이든 뭐든 상관없어. 공동묘지에서도 잠들 수 있을 것 같거든.”

“불평만 하지 말고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다른 방법이라도 구상해 봐, 아스타리온. 지금 여기서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는 사람은 너랑 할신 뿐이니까.”

다들 절박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급한 맘에 던진 말을 이리 진심으로 받아줄 줄이야. 자헤이라는 코웃음을 쳤다. 몇 시간 전 그 자신이 했던 심각한 조언을 재치 있게 깎아내릴 법한 신랄한 농담 몇 마디를 생각하고 있는데, 다가온 D가 대뜸 털실 두 뭉치를 건넸다.

“뭐냐?”

“말 꺼낸 사람도 같이 배워야 하지 않겠어? 모범이 되셔야죠. 고위 하퍼 님.”

쾌활한 어조였다. 지난 며칠간 생기를 잃고 가라앉아있던 푸른 눈동자가 명백한 의도를 띄고 빛났다. 하여간 건방진 녀석. 

“하! 좋아. 어디 줘 봐. 게일이 얼마나 괜찮은 선생님인지 보자고.”

* * *

제대로 된 계획도 없이 무작정 시작한 일이지만 놀랍게도 성과는 있었다. 이전까진 강제로 잠들게 할 뿐 꿈을 막지는 못했던 수면 물약이 악몽을 어느 정도 억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행이 섭렵한 각종 도서는 악몽을 멈추는 데 필수적인 요소로 하나 같이 숙면을 언급했다. 아마 뭔가가 수면 물약의 효과를 강화해 복용자를 더 깊이 잠들게 해서, 결과적으로 꿈을 잦아들게 하는 듯했다.

덕택에 한밤중에 모두가 깨어나는 일이 사나흘에 한 번 정도로 줄어들었다. 온갖 방법을 한꺼번에 시도했으니 그중 정확히 무엇 덕택인지 알 수 없었지만, 굳이 세부 조건을 시험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에 다들 D의 복잡해진 일과를 성심껏 도왔다. 섀도하트는 주기적으로 약재상에 들러 물약 재료를 주문했고, 윌은 식료품점에서 꼬박꼬박 신선한 우유를 사 왔으며 할신은 향초를 위한 허브를 채집해 창틀에 말렸다. 아스타리온은 어디선가 자꾸 새로운 오르골을 ‘발견’ 해 가져왔고 칼라크는 엔진의 열기로 우유를 적당하게 데우는 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게일의 뜨개질 수업은 계속되었다. 

처음엔 네 명이었던 수강생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곁에서 응원만 하던 섀도하트와 윌이 관심을 보이고, 뒤이어 민스크가 합류하더니, 어느새 게일의 현란한 솜씨를 흥미로워하던 레이젤과 분위기에 대해 불평하던 아스타리온의 손에도 뜨개바늘이 쥐어져 있었다. 곧 하루의 모험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오면 저녁을 먹은 뒤 중앙의 소파에 앉아 다 같이 뜨개질을 하는 것이 일행의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 열 명이나 되는 인원이 경쟁적으로 바늘을 놀리다 보니 스크래치와 아울베어 새끼에겐 매일 새로운 털실 모자와 양말, 목도리가 생겼다. 

“절대자 문제 해결하면 다 같이 뜨개질 가게라도 하나 차려야겠어. 게이트 근처에 괜찮은 자리를 봐 뒀는데 어때?“

“그럼 제이스 씨랑 경쟁자가 되는 거잖아. 요즘 한달치 매상 우리가 일주일 만에 다 올려준다고 얼마나 들떠있는데.”

“흠, 기왕이면 경쟁자가 있는 쪽이 재밌지. 난 찬성이야. 발더스 게이트 최고의 뜨개질 가게는 어느 쪽이 될지 한번 겨뤄보자고.”

“우린 가게 문 닫을 필요도 없겠다! 밤엔 아스타리온이 있으면 되잖아.”

“하! 밤에만 손님이 오는 가게로 만들고 싶나 보지?” 

처음엔 그리 내키지 않아 하던 동료들까지 뜨개질 중독자가 되어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다. 스크래치를 위한 노란색 털실 목걸이를 뜨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카서스의 왕관이나 고타쉬와 오린, 삼악신, 엘더 브레인 같은 두통 유발자들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거기에 할신이 심혈을 기울여 최적의 배합표로 만든 향초의 은은한 향기, 꿀 한 스푼을 넣고 데운 우유의 부드럽고 달콤한 냄새, 벽난로의 따끈한 주홍색 온기, 가벼운 웃음소리.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자헤이라는 생각했다. 이런 순간을 일생에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 또는 겪었으나 모두 잊어버린 몇몇 불운한 녀석들에겐 더욱 오래 남을 것이다.

“봐! 내 세 번째 컵 받침이야.”

“훌륭해, 섀도하트! 지난번보다 훨씬 균형이 잘 잡혔네. 무늬도 예쁘게 잘 들어갔는걸.”

“게일, 이거 어떻게 해?”

“잠깐, 게일, 이것부터 좀 봐줘, 코가 빠졌어!”

“자, 자. 걱정 안 해도 된다니까. 정 안 되면 풀면 돼.”

게일은 본인이 자부하는 대로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구멍 나거나 우글거리는 편물도 마법처럼 고칠 줄 알았고, 칭찬에 후하고 실수에는 관대했다. 뜨개질이야 풀고 다시 뜨면 그만이니 ‘뭔가 잘못되어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 다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가혹한 환경에서 자란 몇몇 불운한 녀석들에겐 그야말로 완벽한 취미였다. 자헤이라는 실 끝을 잡아당겨 짜여 있던 편물을 죽 풀다 말고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보니 여긴 온통 불운한 놈들 뿐이로군. 

“자헤이라! 또 푸는 건가? 그래서 언제 완성하겠어? 민스크를 봐라. 벌써 부의 스물일곱 번째 모자를 완성했지!”

“츠크, 믿을 수가 없군. 대체 그 큰 손으로 어떻게 저 작은 모자를 스물일곱 개나 만드는 거지?”

“마음에 드는가, 레이젤? 다음엔 너의 머리통에 맞는 모자를 만들어주마! 부와 함께 쓰고 다니면 되겠어.”

“… 흠. 검은색이 좋겠어. 피가 묻는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래서, 자헤이라는 본인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 뜨개질 유행에 아무 불만이 없었다. 심지어 자랑스러워할 만하다고도 생각했다.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면 민스크의 뜨개질 실력이 지나치게 훌륭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인 게일을 제외하면 일행 중 가장 솜씨가 좋은 축인 아스타리온과 할신에 비견될 정도였다.  

자헤이라는 친구의 실력과 업적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종류의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제 손바닥보다 작은 코바늘로 완벽한 햄스터 사이즈 털모자를 만들어내는 친구를 보고 있자면 형언할 수 없는 미지의 불가사의를 목격한 듯한 기분이 되곤 했다.

“민스크 말 듣지 말고 빨리 마저 풀어요. 구제의 여지가 없어 보이니까.”

퍼뜩 뒤를 돌아보니 이 불운한 요양원의 리더가 서 있었다. 자헤이라는 그가 들고 있는 노란색 털실 덩어리를 향해 고갯짓을 했다. 

“네가 할 소리냐.”

뜨개질 유행의 선두 주자인 것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의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나란히 형편없었다. 바알스폰은 레무어의 토사물처럼 생긴 그 흉측한 덩어리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민스크한테 실력의 비결이 뭔지 물어봤더니 부가 도와준다고 하던데. 당신도 가서 소형 거대 우주 햄스터에게 조언을 좀 구해보든가.”

“역시 너희 둘을 만나게 한 건 실수였군. 민스크랑 얘기 그만해. 대화할 때마다 머리 아프게 하는 건 하나로 족하니까.”

D가 미소를 지었다. 얼굴에 통 표정이 없던 놈이었지만 근래에는 조금 더 자주 웃는 듯했다. 우유와 향초와 뜨개질의 힘이란.

“민스크는 훌륭한 대화 상대야. 누구처럼 말 끝날 때마다 핀잔을 주지도 않고.”

“아, 그러냐?”

“의외로 깊은 통찰력이 있다니까. 가끔 깜짝 놀라.”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자헤이라는 공연히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D는 잠깐 그를 바라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거.”

“음?”

“선물.”

가까이서 보니 털실 덩어리가 아니라 심각하게 못생긴 모자였다. 모양은 엉성했고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는 데다 색깔은 끔찍했다. 끝에 달린 건 털실 방울이 아니라 말라비틀어진 불가사리에 가까워 보였다. 아마 두 번째인가 세 번째로 완성한 모자일 텐데, 이 녀석도 참 어지간히 실력에 발전이 없는 모양이다.

“안 써줘요?”

그런 주제에 잘도 뻔뻔한 요구를 하기에 자헤이라는 면전에 모자를 그대로 던져주고 싶은 충동을 눌러 참았다. 

“그놈의 기억 상실로 일반 상식까지 죄다 잊어버린 모양이니 이번만 특별히 알려주지, 바알스폰. 선물은 가진 것 중 제일 괜찮은 걸 골라서 주는 게 예의란다.”

“첫 번째랑 두 번째로 만든 모자도 있긴 한데, 그건 당신이 바로 불 질러버릴 것 같아서. 숙소에서 쫓겨날 순 없잖아. 그래서 안 써줘요?”

망할 녀석. 자헤이라는 길게 한숨을 뱉고는 그 역겨운 털실 뭉치를 머리에 대충 눌러썼다. 눈이 마주치자 D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냥 웃는 것도 아니고 한참을 숨도 못 쉰 채 반쯤 흐느끼다가 결국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했다. 

이 녀석이 이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자헤이라는 굳이 분석해 보고 싶진 않은 온갖 감정이 한데 뒤섞여 물결치는 것을 느꼈다. 황당함, 놀라움, 약간의 짜증,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필연적으로 옮기는 유쾌함, 그리고 해 질 녘 엘레라틴의 집 거실을 둘러볼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한… 뿌듯함. 

“진짜 끔찍하네.”

소파 등받이에 기댄 채 바알스폰이 헐떡거렸다. 어찌나 웃었는지 눈에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자헤이라는 그를 내려다보다가 결국 헛웃음을 흘렸다.

“이 애송이가 감히 어른을 놀려?”

“웃다가 눈물이 난 건 살면서 처음이야.”

“영광이구나, 아주.”

강제로 떠맡은 광대 역할은 지나치게 성공적으로 끝마친 것 같았으므로 자헤이라는 짐짓 혀를 차며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그 흉물을 도로 내밀었다.

“선물할 거면 제대로 된 걸로 다시 만들어 와라. 난 초록색 좋아해.”

그러나 D는 모자를 받아 드는 대신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갖고 있어요.” 

“뭐?”

“이제 써 달라고 안 할 테니까.”

찰나의 적막. 순간 시선이 맞닿았다. 자헤이라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너,”

D! 아까 고무 뜨기 물어보지 않았어? 잠깐 이리 와 봐— 마치 연극처럼, 지나치게 적절한 타이밍에 위저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맹랑한 드래곤본은 기다렸다는 듯 냉큼 자리를 벗어나 게일에게 가 버렸고, 늙은 고위 하퍼는 끔찍한 모자와 풀린 털실 더미, 그리고 어떤 깨달음과 함께 벽난로 앞에 남겨졌다. 

죽을 생각이구나.

맞서 싸우라고 했지, 죽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 

그러나 그 말을 들은 바알스폰은 둘을 같은 것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자헤이라는 누군가의 유언이라기엔 지나치게 초라하고 흉측한 몰골을 한 모자를 내려다보았다.

바알의 자식은 제물이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들 한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D 역시 자신의 얼마를 아버지의 제단에 올릴지만을 고민했을 것이다. 아버지의 뜻에 굴복해 제 전부를 바치거나, 혹은 거역해 목숨만을 바치거나.

그 외의 선택지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놈에게 어떤 말을 해 줬어야 하는 걸까? 둘 중 누구도 믿지 않는 거짓된 희망을 주는 것도, 가서 예비된 결말을 맞으라는 냉정한 격려를 하는 것도 모두 부적절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자헤이라는 어느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을 조금 원망했다. 그러나 하지 못할, 하지 않을 말을 위해 일어나 바알스폰의 앞에 서지도 않았다. 그저 자리를 지킨 채 참고 견딜 뿐이다. 민스크를 남겨두고 떠날 때 그랬듯이.

결국 이 모자는 간직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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