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G3/자헤아타] 하이하퍼의 방에는 초라한 안온이 싹트는가

* 자헤이라x승천아타

* 로맨스라기보다는 짝사랑에 가깝습니다

아스타리온은 때때로 자헤이라의 곁에 머물렀다. 발더스게이트 한쪽에 있는 온실 같은 작은 집. 그 집에서는 언제나 싱그러운 허브 냄새가 났다. 그 중 아스타리온이 가장 즐겨 찾는 것은 자헤이라의 방이었다. 그 작은 방은 침실이라기보다는 서재에 가까워 보였는데, 벽을 따라 즐비한 책들에서는 오랜 종이 냄새가 났고, 책장 옆의 작은 탁상 위는 언제나 이런저런 서류들로 어지러웠다.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배치된 침대는 어찌나 낡았던지 엉덩이를 붙이기 무섭게 삐걱거리기 일쑤였다. 어디 그 뿐인가. 침대의 주인은 십중팔구 귀한 손님을 마다하며 박대하였으니, 어떻게 보더라도 안락한 휴식을 기대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을 것이다. 

영리한 아스타리온이 이 사실을 어디 몰랐으랴마는, 천치 같은 발은 자꾸만 그리로 나가는 것을 어찌하랴. 어떠한 불가항력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몰랐다. 파도가 달에 이끌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간에 그건 참 이상했다. 그 성미에, 그 자존심에, 자길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로 자꾸만 마음이 기울고 말다니.

괄괄한 하퍼 가족이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을 반겼을 리 만무했지만, 이 창백한 엘프는 버티는 데에 이골이 난 사내였다. 흐르는 시간을 하릴 없이 보내는 것. 그건 필멸의 굴레를 벗은 이에게 가장 따분하고도 쉬운 숙명이었으므로.

그러므로 자르성의 새 주인은 때때로 자헤이라의 방을 찾았다. 도시 재건 사업으로 바쁜 방 주인을 대면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방에는 언제나 방 주인의 영혼 한쪽이 남아 있는 법이니까. 왜, 오래 쓴 물건에는 영혼이 깃든다고 하지 않나?

주인의 허락도 없이 침대에 몸을 뉘노라면 아스타리온은 부재한 하이 하퍼의 향취를 보았다. 정갈함과 무질서함이 혼재되어 있는 날 것의 자헤이라. 그 방에는 그 하퍼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고 뱀파이어 로드는 그 각각에서 풍기는 싱그러운 향을 알았다. 이불 대신 쓰는 얇은 모포에는 허브와 향 내음이 배어 있었다. 마치 드루이드 사원의 한복판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이곳이 사원이라면 자헤이라는 그곳의 가장 오래된 사제일까? 그가 섬기는 이는 위대한 자연, 그 뿐일까? 그런 아득한 무언가를 우러러본다는 건 버겁고 끔찍하지는 않을까?

이따금 답이 정해지지 않은 물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아스타리온은 그것들에 일일이 대답하는 대신 목적 없는 물음들을 마냥 늘어놓은 채 모포 아래를 파고들었다. 그 낡은 천이 몸을 속박하면 아스타리온은 덫에 사로잡힌 짐승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그러면 시야는 어두워졌고, 흡혈귀는 방을 채운 많은 것들을 들었다.

창가에 놓아둔 어린 무화과 나무는 오후 2시가 되면 바람결이 스치지 않았는데도 사락사락 잎을 흔들었다. 그 작고 부드러운 소리가 방을 울리면 저 다른 편에 있던 넝쿨도 너울거렸다. 그것들이 제멋대로 자라나 제멋대로 수다 떨고 있노라면 창밖의 때까치 부부는 제 새낄 먹이느라 분주했다. 아스타리온은 언젠가 자헤이라가 그 부부를 소개했던 것을 기억했다. 어미 발이 둥지에 닿자마자 달 꽃처럼 벌어지던 새끼 새들의 노란 입도, 저 혼자서는 몸조차 가누지 못하던 어린 새의 빨간 나신도. 연약하고 불안정한, 그러나 어쩌면 고독하지만은 않을 그 어느 유년 시절이었다.

소란한 고요의 한복판에 있노라면 뱀파이어 군주는 으레 '깨달은 자'들이 누리는 공허를 얼마간 내려놓았다.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평온 사이에서. 그 안온함은 자헤이라와 그 가족들에게는 으레 있으나 자르 성의 주인에겐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때때로 아스타리온은 늙은 하퍼가 더 늙기 전에 그를 박제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그의 목을 물고 덥거나 차가운 피를 맞바꾸면서. 필요하다면 그 하퍼가 좋아하는 다른 것들도 그렇게 박제해 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질박한 평화는 필멸의 샘에서만 샘솟았고, 아스타리온은 자신과 제 스폰들의 사례로 말미암아 그 사실을 알았다. 그토록 경멸하고 도망치고 싶던 필멸성이란 것은, 적어도 이 늙은 하이 하퍼만큼은 찬란하게 하고 있었다. 그것이 거세되는 순간 하퍼는 더 이상 찬란하지 못할 것이고, 그건 너무나 아까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 늙지 않는 사내는 연인도 무엇도 아닌 늙은 드루이드의 목에 송곳니를 대는 대신 그의 베개에 머리를 기대었다. 잠을 잘 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눈꺼풀 너머의 아득한 세계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마침내 방 주인이 돌아와 환영 대신 핀잔을 건넬 때까지. 

익숙한 핀잔에 눈 뜨면 그곳엔 자헤이라가 있었다. 그러면 아스타리온은 저보다 어리지만 저보다 늙어버린 여인의 눈을 들여다보며 차마 그는 이해하지 못할 질박한 생의 의지와 그 하퍼의 몸 곳곳에 나이테처럼 남은 투쟁의 흔적들을 훑었다. 으레 눈이 마주쳤고 아스타리온은 저를 초대하지 않은 주인에게 기꺼이 손 내밀었다.

"오래 기다렸어, 자기야."

기다림에 비하면 아주 가벼운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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