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공기가 실내를 바싹 태웠다. 시계 초침이 째깍거리며 돌아갔다. 교실에 혼자 남은 인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권여루는 지금 교실에 우두커니 혼자서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에는 달이 맺혔고 별이 빛을 흘리는 시각. 떨어진 별빛은 지상에 안착하지 않고 지평선 너머 어딘가로 사라지길 반복했다. 밤하늘이 제게로 떨어지는 걸 지켜보던 소녀
본명을 필명으로 쓰는 비주류 소설가. 이제 그의 손이 활자를 연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며, 그의 심상 세계가 현실로 다시 녹아드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제가 태어나고 나서 절필했다. 그렇게 들었다. 적어도 그녀가 살아 숨 쉬는 동안에 아버지의 이상이 재차 실현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기에. 째깍째깍. 시침이 5와 6 사이를 가리키고. 모두가 빠
아버지를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았다. 이토록 모순적인 말이 있단 말인가. 하지만 사실이었다. 사랑했지만 그리워하지도, 애타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하나 단 한 가지. 내가 진실로 연모했던 것이 있다면… 그가 만든 세계였다. 권여루는 자신의 아버지가 만든 세계를 사랑했다. 친애하는 소설가가 빚어낸 세상을 눈에 담았다. 어렸을 때는 그것만이 세상
*** 그리고 시간은 흐르고 흘러 어느덧 장마 기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도 연습으로 결석한 동아리 부원 채주현과 서하늘─결국 주현과 하늘도 나중에 고전문학부에 가입했다. 본인들의 의지가 강했다─로 인해 소연과 단둘이서 학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동아리 활동의 일환이었다. “여루야, 일단은 네가 동아리 부장이니까 주현이랑 서하늘한테 감상문 걷는 건
채주현은 불우한 가정환경을 타고난 이가 아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나름 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왔고, 그 과정에서 어떠한 신체적 정서적 학대도 없었다. 그렇게 보였으며 본인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집착의 결정체 같은 이가 생겨난 것일까? 이 광기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마냥. 그렇게 갑자기 생긴
한창 바쁜 활동 시기 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날이 하루 주어졌다. 활동 주에는 정말 드문 일이었는데, 매니저의 배려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주현은 생각했다. 그의 성과가 아닌 내 성과다. 어쨌든 내가 잡아낸 휴식의 기회니까. 아직 2월이라 날이 추웠다. 항상 차가운 음료만을 고집하는 소녀를 떠올리며 나는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딸랑- “안녕하세요.
태초에 이름 붙이길, 나는 그것을 거미의 입이라 하였고. 그것을 다시 거미의 집이라 하였네. 다양한 생명을 품은 둥지는 내 안식처 되어, 나는 지난 과거를 묻고 새 우주를 맞이하며 노래 부르네. 아아, 드디어 여기 알리노라. 옅은 봄 향기는 수런거리며 짙어지고 여름. 아름다움을 새기는(麗鏤) 계절이 진정 도래했음을. *** 여루는 눈을 느리게 감았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정말 별것 아닌 순간이다. 그런 별것 아닌 것들이 모여서, 작은 순간들이 모여서 사랑이라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만드는 것이다. 교실 창틈으로 새어 들어오던 햇빛. 그 반짝임을 머금은 눈동자 색이 아름다워서. 약간 허스키한 톤의, 저음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서.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 활짝 웃는 순간 호쾌한 미녀로 변하
변화하는 계절은 사람을 잡아먹는다. 여루는 비로소 그것을 체감했다. 그녀에게 있어서 여름이란 곧 한 소년을 의미했고, 그 더운 공기가 누군가의 안위를 위협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랗던 하늘 아래 네가 서 있었다. 너는 그렇게 네 존재만으로 내게서 인연을 앗아갔다. 너는 그저 서 있었을 뿐이겠지만, 그것이 내게는 세상이 가려지는 순간이었다. “심증밖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씨였다. 덕분에 여름인데도 조금은 싸한 공기 체온을 얼리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미팅을 끝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기분 나쁘게 내리는 비 때문에 차도 운전을 조심스럽게 하는 터라 귀가 시간이 길어지고 있는 참이다. ──오래지 않아 지나갈 환상통이라 했다. 아니, 헛소리였다. 나는 사랑에 관한 명언이라며 지껄이던 어느 방구
사방에 사진들이 가득하다. 상처난 맨발이 바닥에 어질러진 사진을 짓밟으며 일어났다. 매끄럽게 인화된 누군가의 인영 위에 희게 지문이 남았다. 마치 자기 소유물에 낙인이라도 찍듯 그렇게 마구 지문을 묻히며 비틀비틀, 다리를 움직여대는 인영. 방금 막 지문이 찍힌 것들은 모두 한 대의 카메라에서 나온 사진들이었다. 카메라의 피사체는 모두 자기 자신. 그러
내 감정은 한 번도 질주를 멈춘 적이 없었다. 오히려 지칠 줄 모르고 속도를 올렸다. 그 끝이 설령 보답받지 못하는 길로 이어진다 해도 나는 사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건 패배할 결과를 알고도 사랑한 나의 선택이었다. 찰나의 감정이 아닌 걸 알았다. 색감이 옅던 그 갈색 눈동자를 본 순간 깨달았다. 계절이 피어나
“...우리 진짜 친구 맞지?” “......” 그 말 한마디에 채주현이 입에 걸고 있던 희미한 미소조차 거두고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건 거의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주현은 아무 말 없이 여루를 응시했다. 그에 지지 않고 여루가 대답을 종용하듯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갸웃하자 주현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오른다. “...응. 친구야.”
“─이거 놓고 얘기해!” “너 왜 권지윤이랑 친하게 지내?” 고전문학부 동아리실. 석양이 허한 교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미 하교할 시간이었다. 문가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두 명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채주현! 너 이상해. 왜 그래 진짜? 난 친구도 사귀면 안 돼?” “어. 안 돼. 이제 더 이상 다른 친구 만들지 마.”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필시 그릇이나 잔이겠지. 학습된 기억으로 움찔 떨리는 몸과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었다. 여루는 저도 모르게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밖은 엉망이었다. 소파 근처에 우두커니 서 있는 한 남성. 어디 맞았는지 긁혔는지 잘생긴 얼굴에 생채기가 나 있다. 그의 눈에는 희미한 경멸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권여루에게 사랑이란 곧 제 부모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실패한 사랑. 그런데도 그저 같이 살아가는. 아버지의 일방적인 사랑을 실패한 것이라 치부하던 여루는 사랑을 주는 것을 점점 꺼리게 되었다. 그녀는 애정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렀다. 사랑이라는 게 내게도 오긴 할까? 나도 그처럼 실패한 사랑을 겪는 것은 아닐까. 자식은 결국 부모를 따라간다잖아. 나도
* 여루는 아까 복도에서 본 옆반의 전학생을 생각했다. 앞에 마주 앉아 급식을 먹던 소연이 그런 여루를 툭 치며 불렀다. “뭔 생각해?” “어? 어 아니.” “밥이나 먹어. 우리 밥 먹고 운동장 돌기로 했잖아.” “그래...” “얘가 오늘 왜 이래? 멍하니 있고.” “...” 주현은 자신과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제가 시선이 쏠
“채주현, 이거 받아.” “이름으로 불러.” “아, 알았어. 주현아. 됐지?” “응.” 소년이 소녀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았다. 연보랏빛의 손수건은 주현의 소유물로 얼마 전 여루가 빗길에 미끄러져 넘어졌을 때 무릎에 났던 상처를 덮어준 물건이었다. 주현은 당연하다는 태도로 거리낌 없이 피가 흐르는 상처에 제 손수건을 갖다 댔었다. 세탁해서 돌려주긴 했
온 세상이 축복으로 가득했다. 신의 아들의 탄생을 축하하는 성가(聖歌)와 가요가 한밤중 거리 곳곳에 울려 퍼졌다. 오늘도 많은 이들의 행복과 들뜬 기분을 안고 고요히 흘러갈 것처럼 보였다. 색채를 입은 풍경은 포근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흰 눈이 내렸다. 흰 빛깔이 연말의 화려한 색으로 장식한 길가를 조금씩 검게 물들였다. 그와 비슷하지만 다른
* 다음 날. 여루는 오늘도 어김없이 점심시간에 음악실을 찾은 참이었다. 음악실에 가는 날이면 늘 그렇듯 평소와 같이 식사를 거르고 종이 치자마자 별관으로 달려갔다. 음악실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것이긴 하지만, 걸리면 생각해둔 대로 피아노 대회 연습을 하고 있다고 하면 될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음악 선생 덕분에 그녀가 피아노를 잘 치는 건 교내의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