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전수정/ 기회
2022. 11. 24.
어떻게 말해야 할까. '수정공'으로서의 평생은, '수정공'으로서 영웅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평생은 제 욕심을 억누르는 것이 전부였다고 봐도 좋다. 한때는 제 운명도, 제가 처한 현실도 질릴 정도로 끔찍했기 때문에 그가 원망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 와서는 굳이 그와 더 무언가를 하고 싶지도 않을 것 같아, 라고 체념하기도 했었다. 이게 나이가 들어 가는 거구나, 라고 깨닫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그를 소환하는 일에 실패해 새벽의 동료를 한 명 한 명 제1세계로 데려오면서도 수정공은 '그와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다'는 열망 외에 다른 사심을 키우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사실 수정공은, 아니 그라하 티아는 콜루시아 섬의 짧은 모험에서 제가 그렇게까지 들뜰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평생이었는데! 평생에 가까이, '너와 더 함께하고 싶어'라는 욕망을 어떻게 눌러 왔는데. 그 짧은 순간에 흥분한 저를 억누르는 일이 어찌나 힘들었는지. 조금만 더 흥분했더라면 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았던 제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흔들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제 욕심 때문에 모든 것을 그르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끝내 웃으며 그를 위해, 제 욕심을 꿋꿋하게 억누르면서는 아아 역시, 평생 동안 그 욕심을 눌러 오기를 잘했다고, 그 덕에 지금도 이렇게 잘 대처할 수 있는 거라고, 그리 생각했었다.
뭐… 그 각오를 갖고 행했던 일조차 여러모로 흐트러지고 말았지만.
스스로 생각하지 않았던 삶이 연장되는 일은, 뭐라고 해야 할까… 수정공에게도, 그라하 티아에게도… 그저 '자극'이라고 하면 좋았다. 그 이후의 모든 시간은 자극적이었다. 연장된 삶이 그러했으며, 밤을 되찾은 제1세계가 그러했고, 제가 거치고 온 시간선에서는 삶을 마감했을 터이나 여전히 살아 있는 영웅이 그러했고, 저에게 주어진… 영웅과의 모험의 가능성이, 그러했다. 욕심을 억눌러 왔던 수정공의 마음에는 그랬다. 거기에 더해진, 차마 황급히 덮어버린 후 다시는 들추어 보지 않았으나 영웅이 기어이 꺼내어내고 만 제 연심은 버거운 존재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 연심을 보고 영웅이 씩 웃으며 '나도'라며 손을 맞잡아주기까지 했으니, 어찌 버겁지 않을 수 있을까!
쪽, 입을 맞춘 영웅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씨익 웃었다. 크리스타리움의 높은 탑 위, 그만큼 가까워진 달에 비치는 영웅의 얼굴은 쑥스러웠으나 사랑스러웠다. 그의 순진한 얼굴을 보며, 수정공은 입술을 깨물었다. 순식간에 욕심에 잡아먹힌 제 마음을 꺼내 보이지 않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 했을 때는 괜찮았는데. 어떻게 너는 이렇게도 태연하게, 내 모든 것을 꺼낼 수 있는지. …왜 이걸 꺼냈어. 왜, 나에게 조금이라도 맛보여줬어. 너의 모든 것을 알고 싶다. 너와 모든 시간을 함께하고 싶다. 너의 모든 것을 받고, 내 모든 것을 주고 싶어. 이 모든 감정이 버겁고, 벅차며 힘겹고 아득하며 행복하다. 왜…… 내게 이런 기회를 주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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