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켄마유, 실험체를 실험체로 사랑하느냐
커미션 7000자 / BL 2차
이건 예상에 없던 일이다. 온전하게 저만의 실험일 줄 알았다. 쿠로츠치는 인상을 쓴 채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성질 같으면 발을 탁탁 굴리면서 티를 냈겠지만 상대는 우라하라 키스케였다. 안 그래도 눈치가 빠른 사신인데 지금 제 불쾌감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발까지 굴리면서 티를 내면 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짜증이 나는 걸 어쩌자는 것인가. 온전히 제 것인 줄 알았던 이를 나눠 가지면서 실험을 해야 한다는 게..
“자아, 팔 드시고요.”
“귀찮아.”
“네에. 반대쪽 팔도 드시고요.”
투덜거리는 자라키 켄파치의 말을 들은 척 마는 척 하며 실험을 이어나가는 우라하라는 좋게 말하면 프로에 가까웠고, 나쁘게 말하면 그의 말을 완전하게 무시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있나? 조금이라도 걱정을 하게 되지 않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본래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미 소용없게 됐다는 걸 알지만.
우리, 아 기분 나쁘다. 우라하라와 제가 자라키 켄파치를 실험으로 하는 대상은 참백도의 시해에 관한 것이었다. 참백도가 단독으로 시해가 가능한 것인지, 그렇다면 그것은 참백도의 시해라고 봐야 하는지, 참백도 주인인 사신의 시해라고 봐야 하는지.
지금까지 시해는커녕 가진 칼로 여기저기 베고 다니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던 남자였다. 지금도 본인의 참백도에 대해서 잘 아는지 아닌지 모른다. 주장에 의하면 원래 11번대 부대장이었던 어린 아이가 본인의 참백도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의 눈에 다 보였는데, 이렇게 남의 눈에 보이도록 참백도의 실체화가 가능한 것인가? 그것보다도 이렇게 장시간 실체화가 가능하다는 말인가?
궁금한 게 많았다. 그저 강한 영압만을 생각했는데, 파면 팔수록 흥미가 넘치는 남자였다. 실험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더욱 그에게 눈길이 갔다. 일단은 그런 줄로만 알았다. 솔직히 그 이외에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왜냐하면 대체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모르겠는 우라하라가 곧바로 소울 소사이어티로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그 불쾌한 영압은 천계문을 넘어서는 순간부터 느껴졌다. 순간 짜증으로 표정이 굳어졌으나 괜찮았다. 어차피 제게 볼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자라키 켄파치에게 집중을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불쾌하기 짝이 없는 우라하라 키스케가 기술개발국 문을 슬쩍 열면서 들어올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오랜만입니다, 쿠로츠치씨. 재미있는 실험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저도 껴도 되겠습니까?’
능청맞은 목소리에 울컥 화가 올라왔지만 혀를 살짝 깨물어 참았다. 무슨 소리야. 자라키 켄파치를 실험한다는 사실을 어디서 듣고 온 거지? 생긋 웃는 얼굴과 기대하는 빛이 도는 회녹색 눈동자. 설마 제가 있는 곳에 엿들을 수 있도록 기계를 설치해 놓았나? 아니면 눈치로? 눈치로 대체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어쨌거나 불쾌하고 짜증이 났다.
그는 제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해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자라키를 향해 웃어보였다. 그는 흥 하고 콧방귀를 끼면서 말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어차피 하나나 둘이나 똑같은 거 아니겠냐고.
이상함을 느낀 것은 거기서였다. 그 발언이 굉장히 불쾌하고, 불쾌해야 맞는 거지만 그보다는 다른 감정이 먼저 들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질투 같은 것? 이 감정을 질투라고 해야 맞는 것인가? 두 사신이 언제 저렇게 친했는지 몰라도 서로 죽이 맞는 대화를 잘 나누고 있었다.
‘네놈이 이치고의 선생이라고 들었는데.’
‘네? 아.. 처음에는 그랬죠. 제가 알려드린 것은 별로 없었어요. 워낙 알아서 잘 하시는 분이라..’
‘그렇다면 네놈과도 한 번 싸워보고 싶으니까 준비해둬.’
‘..이야기가 어떻게 그렇게 흘러가는 거죠?’
자라키는 웃지도 않고 농담을 했다. 아니, 저 성격을 보면 분명 진심일 것이다. 그는 쿠로사키 이치고와 싸우는 것을 좋아하니까 그를 그렇게 만들어낸 스승과도 함께 싸움을 해보고 싶어 하겠지. 우라하라가 싸움을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스타일에 맞게 싸우는 남자 또한 아니었다. 머리로 만들어낸 실험 도구를 이용해 싸우는 것을 좋아했으니까. 어쩌면 비겁하다는 말을 들을 지도 모른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했다. 비겁한 사신 같으니. 이런 시간을 골라서 딱 쳐들어오는 꼴이 비겁하지 짝이 없다.
싸우는 방식에 대해서는 비교해서 논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그것을 실험이라고 생각을 했다. 전투는 일종의 실험이다. 어떠한 약을 만들어서 써볼 수 있도록 하게 만드는 기회 같은 것. 당연하다. 평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마구 일어나는 공간에서, 과학자 된 이가 어떻게 군침을 흘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라하라는, 빌어먹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저보다 머리가 좋은 사신이고, 과학자이다. 그러니까 저랑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저처럼 생각한 적이 있었을 거라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도 모르는 쿠로사키 이치고를 키워서 이용해 먹을 생각을 했겠지.
욕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고, 그를 알았더라면 저 또한 그런 식으로 행동을 했을 테니까. 그의 윤리가 어쩌고 논할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실 제가 신경 써야 하는 부분은 전혀 아니었다. 관심도 없었다. 우라하라가 뭘 하던 저랑 무슨 상관이라는 말인가. 관심도 없었고 관심을 가지고 싶지도 않았다.
자라키 켄파치는 시키는 대로 잘 했다. 우라하라 키스케의 말에 귀찮다고 투덜거리면서도 팔을 잘 들어 올리고 내리고를 반복했다.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지만 실험을 도와주고 있는 아콘에게 참백도를 잘 주었고, 그는 우라하라에게 이것저것 말을 하면서 실험을 진행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제 부대장은 어째서 저놈이랑 대화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물어볼 것이 있어도 제게 와서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
팔짱을 끼고 있던 쿠로츠치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아주 작고 가는 바람이 잇새로 슬그머니 새어나왔다. 심정 같아서는 푹 내쉬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자라키 앞에서 웃기는 꼴을 보이고 말 것 같아서 관두기로 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앞에서 웃기는 꼴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우라하라가 아니었다. 그 새끼는 무슨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제가 무시하면 그만이지만 자라키는 그게 되지 않았다. 그랬다. 그게 되질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저는 늘 제 의견을 앞세워서 하고 싶은 일이라면 반드시 해내야만 했다. 제 마음대로였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고 마음을 먹었다. 저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 우라하라도 이런 것은 예상했을 거라고 알았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브레이크가 걸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저 실험을 할 수 있는 걸로 기뻐했던 존재였는데, 어쩌다가 약간 다른 곳으로 방향을 틀어서 저를 이렇게 기분 나쁘게 만들까. 나쁘게만 만드는 게 아니었다. 기분이 좋아지게도 만든다는 게 문제였다. 그는, 자라키 켄파치는 그저 싸움에 미친 혹은 제 동료인 대장들 중 하나이지 않았나. 그런데 무언가가 바뀌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겪어본 적도 없지만 심장 부근이 뻐근하면서 답답해져 오는 이 감각을 사랑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알았다.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읽어본 적이 있다고 해야 하나?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 정말 쓸데없는 걸 하고 싶을 때 심리학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현세에서 가져왔으나 인기가 없어서 거의 새 책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 책에서 봤었나? 하여간 그런 책들 사이에서 봤다. 과학적 지식에는 전혀 쓸모가 없던 책들. 머리가 너무 아파서, 혹은 비슷한 연구 결과들을 보는 것이 지루해질 때 즈음, 저를 다시 되살리기 위해서 읽었다.
하여간 어떤 책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알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물에 빠졌을 때 귀가 먹먹해지는 것처럼 아득하고 먼 느낌이 든다고. 흥. 웃기는 소리. 이런 멍청한 소리가 나오는 걸 보면 책이라는 것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제가 뭘 몰랐다.
인정한다. 몰랐다. 정말 사신이라는 게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될지를 몰랐다. 어느 순간이었나. 아득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물에 빠진 것처럼 아득해지는 느낌이 저를 감싸고 도저히 이런 것은 살아서 겪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감정이 거짓말처럼 제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그를 실험하던 날이 기억난다. 어디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짜릿했던 기억. 그는 질질 흘러나와서 차마 제대로 감추지도 못했던 영압을 버틸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제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의 통쾌함. 잊을 수가 없다. 동시에 느껴지던 묘한 감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최대한으로 영압을 쥐어 짜보라는 말에 그는 온몸에 힘을 주며 애를 썼다. 그냥 편안하게 내 몸을 열어놓는다고 생각하면 될 것을. 그러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애를 쓰는 모습이 너무 웃겨서 웃음이 나왔다.
제가 그렇게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는 다른 대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느꼈지만 터져 나오는 소리를 쉽게 멈출 수는 없었다. 어쩌면 좋을까. 심장이 저릿해지는 이 느낌을. 얼굴이 붉어진 채로 숨을 헐떡헐떡 몰아쉬던 자라키 켄파치는 짜증스럽게 표정을 구겼다. 대체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옆에 있는 네무를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나서 얼굴에 붙은 스티커를 떼어냈다. 그러자 삐용삐용하는 소리가 울렸고, 당황한 대원들은 그를 말리기 위해 애를 써야했다. 그런데도 저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짜증스러운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낼 수도 없었다.
어디 안 갈테니까 저리 비키라고, 본인 나름대로 부드럽게 말하고 있는 그를 보자니, 아 그때 읽었던 책이 떠올랐다. 제가 비웃었던 그 내용이 고스란히 저에게 일어나고 있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아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을 느끼던 저는 허리를 숙여 숨을 고른 다음, 정색을 했다. 큰일이군. 이거 만만치 않은 일이 되겠어.
어쩌면 당연한 거였다. 상대는 무려 머릿속도 싸움을 하겠다는 근육으로 가득 찬 남자였다. 제게 호감은커녕 기분 좋은 모습조차 보일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와 싸움을 해봤자 제가 들을 이야기는 뻔했다. 치졸하고 우습게 싸움을 하는군, 쿠로츠치 마유리. 웃기지 마라. 이것은 제 방식이었다. 전투장은 저에게 또 다른 실험 현장.. 하, 됐다. 그만 하자. 어차피 그와 싸울 일도 없는데 이런 걸 생각해서 뭘 하겠나.
하여간 문제가 일어났으니 해결을 해야 했는데, 그 책에는 해결책이 쓰여 있지 않았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남사스러운 감정이었다. 아니, 어쩌면 비웃음을 살지도 모를 일이다. 냉정해야만 하는 과학자가 이렇게 스스로를 조절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감정에 빠져서 허우적거린다고. 일단 기술개발국 대원들부터 비웃을 거라고 생각을 하니까 절대 입 밖으로 그 감정을 내지 않겠다는 다짐이 절로 들었다.
언제까지 이럴까. 그가 얼굴이 붉어지면서까지 영압을 뿜어낸 것은 꽤 오래 전 일이다. 금방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했던 가슴의 통증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부대장이 네무였고, 아콘은 3석이었다.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우라하라 키스케는 저를 한 번 힐끔거리고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오늘따라 잡생각이 많으시네요. 그러다가 사고 난다고 전에 한 번 말한 적 있었던 것 같은데.”
“아, 따갑잖아.”
“아, 죄송해요. 이게 전기가 조금 흐르고 있어서..”
전이라면 이제는 기억도 잘 나지 않을 만큼 구구절절한 과거 시절이었다. 제가 대장이기 전에, 그에게 명령을 받아서 움직여야 했을 때.
따갑다고 말하는 자라키 켄파치의 얼굴은 구겨져 있었다. 그는 상의를 다 벗고 상체 여기저기에 전압이 흐르는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였는데 유독 허리에 붙일 때 움찔거리며 짜증을 부리는 걸 보니 저기가 그나마 그의 몸에서 제일 약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우라하라의 희고 보기보다 굵직한 손가락은 자꾸만 그의 허리 부근을 쓸고 지나갔다. 일부러 그러는 눈치는 아니었다. 정확한 프로필이 나와 있다고 해도, 우라하라 또한 과학자이기에 본인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남자였다. 아까부터 줄자를 들고 그의 몸 치수를 재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거였다.
거기다가 스티커도 직접 붙이고, 신체 정보가 맞는지 확인도 하고, 적혀있는 정보와 다른 것이 있으면 아콘과 상의를 해서 고치기도 하는 등 그는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니 잠깐 손이 맨살에 스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그 꼴이 너무 아니꼽게 보였다. 마치 저를 의식해서 일부러 그러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할 만큼. 아니, 상대는 우라하라다. 저 남자라면 일부러 그러는 걸 수도 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제 몸은 제가 이성으로 판단하기 전에 먼저 움직였다.
다가가서 우라하라의 손등을 짝 하는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주제에 맞아주고 거짓으로 아픈 척을 하는 얼굴이 아주 가식적이었다. 옆에서 보던 아콘은 코로 흥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모르는 척 자리를 떠났다. 그는 우라하라와 제가 서로 싸우기 시작할 때 옆에 있으면 피곤하다는 걸 가장 잘 아는 남자니까.
“아야!”
“저리 비켜보게.”
“아이 참, 왜 이러세요. 가만히 계시다가, 아아, 알았어요 알았어.. 아파요!”
저리 비키라고 말했는데 감히 제 말에 토를 달아? 그걸 핑계로 주먹을 쥐고 그를 마구 때렸다. 아프지 않을 것이다. 아프지 않게 때렸으니까. 우라하라는 갑자기 날아드는 주먹질에 당황을 하면서 눈을 크게 떴다가 얼른 몇 걸음 물러났다. 아마 원하는 걸 다 해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물러날 리가 없지.
그가 원하는 것은 뭐였을까. 실험에 대한 것? 실험이 가야할 방향? 스티커를 붙이고 치수를 재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재수 없게도, 제가 불쾌한 마음이 드는 게 맞는.. 그것?
우라하라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눈치라면 빨랐다. 그는 지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라키 켄파치에게. 확실하다. 저처럼 실험체를 대하는 눈이기는 하지만, 그 반짝거렸던 눈동자, 호기심에 가득 차서 빛나던 눈동자는 확실히 그를 실험체 이상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지만..
문제는 처음에는 저도 그랬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심장이 콱 막히고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기 전에는 저도 그저 그를 실험체, 그것도 아주 흥미로운 실험체 중 하나로 살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저도 모르는 순간에 그 상황이 바뀌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저 남자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실험체를 사랑하게 되는 것과 실험체로서 사랑하는 것은 다르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다. 저는 그를 전자로 취급하게 되었으나 우라하라는 자라키 켄파치를 아직도 후자로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서 잘 끊어내지 못한다면 피곤해진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앞뒤 가리지 않는 사신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해냈다. 본인이 바란다면 그 자라키 켄파치를, 싸움 근육으로 뇌까지 가득 찬 저 남자를 빌게 만들 수도 있었다. 그는 그런 재능이 있는 사신이었고, 그것을 근처에서 지켜본 게 바로 저였다. 저 남자의 발밑에서 싹싹 빌고 엎드리던 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것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우웩, 사랑이라니. 아직도 입에 붙지 않는 말이다. 이런 걸 느끼고 있다는 게 거짓 같았고 꿈같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는 냉정한 과학자이고, 아무리 흥미로운 실험체라도 그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사신이다. 그렇게 자부해왔다. 하지만, 저 남자는, 자라키 켄파치라는 남자가 뭐길래.
쿠로츠치는 한숨을 쉬었다. 빌어먹을 우라하라 키스케가 스티커를 필요한 곳에 잘도 붙여놨기 때문에 제가 손 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저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핑계를 대면서 그의 몸에 손을 대고 스티커를 떼어냈다가 같은 자리에 붙였다. 둔감하기가 길에 굴러다니는 돌마냥 단단한 남자는 같은 자리에 붙였다는 걸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인지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참백도가 있었다. 그의 참백도였다.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칼날을 보면 길거리 양아치가 휘둘고 돌아다니던 칼을 아무대서나 뽑아낸 것 같지만, 저것은 강하고 단단한 자라키 켄파치의 영압을 받으면서 부러지지 않는 참백도였다. 솔직히 그가 아니더라도, 저 참백도 하나만으로도 제 흥미를 끌기는 충분했다. 어떻게 저런 참백도가 있을 수 있을까? 시해를 했을 때의 모습을 봤지만.. 아니, 그것이 진정한 시해라고 할 수 있는가. 지금까지 그의 참백도가 실체화된 모습이 해낸 시해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정말 흥미가 돋는 이야기 아닌가?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을 수 없을 만큼 몸이 근질근질한 이야기이다. 당장 실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솔직히 말하면 그가 거절할 줄 알았다. 하지만 참백도에 대해 더 알아보는 것이 자네에게도 좋지 않겠냐고 했더니 그는 조용히 본인의 칼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랑스럽고 짜릿한 순간이었다.
“가만히 있게. 두 개만 더 붙이면 되니까.”
“얼른 해.”
투박하게 말하면서도 그는 앞으로 뻗은 팔을 내리지 않았다. 저를 위해서. 그래, 이것은 저를 위한 실험이었다. 참백도에 대해서 아는 것, 그런 것은 본인의 참백도와 대화를 나누면 된다. 오랜 시간을 알고 지내면서 정성만 들인다면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종류의 문제였다.
쉽게 말하면 그가 기술개발국 의자에 앉아서 이렇게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를 꼬셨고, 이렇게 제게 시간을 쏟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우라하라 키스케만 오지 않았어도 완벽한 거였는데.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남은 스티커 두 개를 그의 복근 위에 붙였다. 단단하면서도 말랑거리는 살덩이가 제 손등 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동시에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분장을 하지 않았다면 고스란히 드러났을 그 모습은 다행히도 잘 감춰져 있었다.
표정을 한층 더 굳혔다. 솔직히 잘 관리할 자신이 없었다. 여기서 아주 잠깐이라도 긴장을 풀었다가는 앞에서 뚫어져라 저와 자라키 켄파치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는 우라하라에게 모든 것을 들켜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힐끔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런 젠장. 이미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니 무언가를 눈치 챈 것이 분명했다. 저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손을 내밀었고 그 또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제게 서류를 내밀었다. 종이를 맞잡으면서 잠깐 섞인 시선에서 알 수 있었다. 아마 그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제가 자라키 켄파치를 사랑한다는 것을. 실험체를 향한 마음이 위태롭게 꺾여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저와 비슷한 처음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다른 점이라면 사랑에 빠진 제게 흥미를 느끼고 있다는 점 정도가 아닐까.
한숨이 나왔지만 꾸욱 참았다. 역겨워서 토하려는 걸 참는 표정이 된 저를 보던 아콘은 슬쩍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섰다. 곧바로 짜증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이것도 참고 저것도 참았다. 당연하다. 지금은 자라키 켄파치의 앞에 서 있다. 그가 뭐라고, 젠장. 그가 제게 뭐라도 된다는 것처럼. 사랑이라니.. 우웩이다. 정말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는 강한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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