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L

에이벨, 평범한 날

커미션 3000자 / 오마카세 / HL 드림

커미션 by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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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가 휘청거렸다. 표현을 하자면 그렇다는 뜻이다. 아니, 어쩌면 정말 휘청였을지도 모른다. 잠을 자다가 깜짝 놀랄 정도로 큰 소리를 듣고 급하게 뛰어나온 거니까.  올라오면서 슬금슬금 탄내가 날 때부터 불안했다. 심각하게 조용한 것도 문제였다. 방금 배가 휘청인 것 같은데, 아니, 분명히 휘청거렸는데 너무 조용했다. 불안하다, 불안해.. 그리고 역시나.

 벨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에이스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무릎을 굽히고 쪼그려 앉아있던 그는 흠칫거리며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을 하면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데, 귀엽게 군다고 누가 봐줄 거라고 생각해?!


 “들었어?”

 “.....”

 “야, 이 불망아지야. 안 들려?! 저게 왜 저렇게 됐냐고 묻잖아!”


 제 손끝이 쭉 뻗어나간 곳 끝에는 아직도 연기가 풀풀 올라오는 배 난간이 있었다. 구멍이 아주 시원하게 뻥 뚫려 있었다. 저런 구멍은 아무리 잘 다듬어도 낼 수 없는 구멍이다. 망치를 이용해서 섬세하게 깎아낸다고 해도 오래 걸릴 작업이었다. 저도 꽤 실력이 있다고 자부하는데, 저건 정말 단시간에 낼 수 있는 흔적이 아니다. 즉, 엄청난 공격을 받았거나 아니면.. 이 불망아지 자식이 엄청난 공격을 했거나.

 불이 활활 타올라 바람에 흔들리는 돛까지 잡아먹기 전에 후다닥 바닷물을 부어 불을 껐지만, 그가 내뿜어대는 불은 장난이 아니었다. 이런 작은 배 한 척 정도는 가볍게 잡아먹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럼 사람이, 조심을 할 줄 알아야지. 여기서..!


 “하, 있잖아, 에이스. 여기는 바다 한 가운데야.”

 “알아아..”

 “아는 놈이 이런 짓을 해?! 배가 홀라당 다 탔으면 어쩌려고 이래? 너 그러면 여기 있는 거 다 책임지고 물에 안 젖게 짊어질 수 있어? 왜 저래놨냐니까. 말을 해봐. 변명이라도 좀 해보라고!”


 차근차근 말을 하다 보니 화가 났다. 아니, 여기서 그렇게 큰 소란을 일으키면? 근처에 해군이라도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보다 다른 해적이 공격해오면? 놀란 해수가 나타나서 공격을 하면? 불에 활활 타오르는 돛을 달고 도망치자고? 으으, 정말..

 울컥하는 마음에 소리를 지르자 가만히 듣고 있다가 어깨가 귀 옆에 붙도록 움츠린 그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제가 잠들었다는 것을 알고 조용히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엄청나게 큰 물고기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얼마나 큰 지, 이 배를 다 가릴 만큼 크고 엄청난 물고기라는 것이다.

 그래, 여기는 그런 게 엄청나게 많다. 배 한 척 만한 물고기는 물론이고 거대한 해군 군함을 한 입에 집어 삼킬 수 있을만한 괴물들이 득실득실한 곳이다. 당연하지, 이 바다는 세계에서 가장 험하다고 소문이 난 바다니까. 하지만 그 물고기가 뭘 어쨌다고.

 팔짱을 끼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어디까지 하는지 보자는 식으로 발을 탁탁 굴리자 그는 힐끔 눈치를 보고 다시 왼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면서 중얼거렸다.


 “아니, 맛있어 보이길래..”

 “맛있어 보이길래?”

 “잡으려고 했지. 그런데..”

 “그런데?”

 “그게 생각보다 빨라서 나도 모르게 힘 조절을 못했지, 뭐야..”

 “웃음이 나와?”

 “아뇨.”


 하아..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리도록 이마를 꾸욱 눌렀다. 단번에 대답을 마친 그는 입술을 꾸욱 다물면서 바닥에 검지로 원을 그렸다. 배 갑판 위에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리면서 어떻게 하면 용서해줄 거냐고 묻는 그에게, 저는 먼저 물어보고 싶었다.


 “이 배보다 큰 물고기를 잡아서, 도대체 어떻게 보관하려고 했어?”

 “그거야, 배 뒤에 묶어 놓으면 되지 않을까?”

 “되긴 뭐가 돼. 피냄새 맡고 쫓아올 해수들은 생각 안하고?”

 “아, 그러네.”


 속 편한 대답을 들으니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으. 벨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지금 남아있는 목재의 양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걸 고칠 수준은 되지 않는 걸로 보였다. 가장 가까운 섬이 어디였지? 거기서 목재를 좀 구할 수 있나? 그랬으면 좋겠는데.

 한숨을 내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보이는 건 바다뿐이었다. 지도가 어디에 있더라. 가만히 저를 올려다보는 에이스를 무시하고 뒤를 돌았다. 아마 제가 잠을 자고 있던 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믿을 수는 없지만 누군가 이 길을 가본 적이 있다고 떠들고 다니길래, 같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척하다가 슬쩍 했던 지도였다. 진짜 맞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상황이라면 무조건 맞기를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정확하게 난간의 1/3이 사라졌는데, 이 상태로 어떻게 계속 항해를 한다는 말인가. 

 꾸준히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을 보고, 지도를 살폈다. 가슴 내밀고 떵떵거리면서 하던 말이 다 거짓은 아니었는지, 그 방향을 향하고 있기는 했다. 이럴 때는 간단하게라도 지도를 볼 수 있는 스스로가 얼마나 다행이던지.

 그나저나 육지는 질색인데. 정말 귀찮을 정도로 멀미를 한다. 발을 섬에 내리기만 하면 온 세상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미리 필요한 물건을 많이 사두는 건데, 배는 가벼워야 좋다는 둥 이런 건 다 필요 없다는 둥 하면서 옆에서 참견을 하는 바람에 결국에는 또 육지에 가게 생겼잖아.

 짜증이 났다. 왜 이런 남자를 따라왔지? 그야 오로지 그 혼자만이, 아니, 그의 동료와 함께, 하늘섬을 믿었으니까. 결국에는 거기에 데려다주기도 했고. 그래, 지금 불평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이미 우리는 동료로, 임시 동맹이 아닌 동맹으로 시작해버린 사이였으니까.

 다행히 불에 타지 않은 돛대의 방향을 살피고, 타다 남은 나무 잔해를 발로 밀어서 바다로 떨어뜨리면서 슬쩍 해온 지도를 확인했다. 나중에 그 사람에게 감사 인사라도 해야겠네. 물론 다시 만난다면 말이지만.

 그가 난동을 피운 것치고는 배는 잘 가고 있었다. 주변에는 꼬이는 해군도 없었고, 해적도 없었다. 배 만큼 커다란 물고기가 나타났다는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바다는 잔잔하고 조용했다. 거짓말 한 거 아니야? 장난치다가 태워 먹고서 혼날까봐?

 ..하. 아니다. 그는 제게 혼날까봐 걱정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눈치를 보는 에이스? 그런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고, 이 속 타는 마음 속 불길도 잡아 보자는 마음으로 시원한 음료수를 찾으려고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고개를 돌리자 그는 어느새 제 뒤를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냉큼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날카롭게 말했다.


 “뭐야?”

 “계속 화낼 거야?”

 “뭐?”

 “얼마만큼 있으면 화 풀 거야?”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오른쪽 볼에는 손바닥을 얹은 채 눈을 깜박깜박하는 이 모습은 설마.. 애교를 부리는 거야? 나를 대상으로? 불망아지가 미쳤나.

 그런데 잘 보니까.. 귀여운 것 같기도..

 …

 벨은 허.. 하고 소리를 내면서 스스로 지었을 표정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 이 생각을 들키면 죽을 때까지 놀림감으로 남을 것이다. 절대로 들킬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의외로, 정말 예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눈치가 빨랐다. 그러니까 이런 걸 잘 눈치 챌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아주 찰나였는데, 제 표정이 어땠을까. 이럴 때는 앞에 서 있는 것이 그가 아니라 거울이었으면 했다. 그러면 적어도 제 표정 하나는 잘 보였을 텐데. 어쨌거나 이건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을 것이다. 턱을 들고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려 보는 것처럼 해서 상대를 깔아보는 표정을 지은 다음 툭 뱉어냈다.


 “몰라.”

 “몰라? 정말 몰라?”


 큰일이다.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뒤를 돌아서면서 모르는 척을 했다. 솔직히 이제 차가운 음료 생각은 후다닥 날아가 버렸다. 귀여운.. 아니, 아니야. 안 귀여워. 안 귀엽다구. 하여간 그의 행동을 보니까 마음속 불을 끄는 것보다 웃음을 참는 게 먼저 해야 할 일이 되고 말았다. 이를 악 물고 있는데 그가 빙글 돌아서 앞으로 다가왔다. 뭐야. 다시 얼른 표정을 지우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왼쪽 볼에 손바닥을 대고 눈을 깜박거린다.

 결국 참지 못하고 깔깔깔 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마치 작전에 성공한 해적처럼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에이스, 진짜 바보 같아. 숨기지 못한 웃음을 다 털어내기라도 할 것처럼 저는 계속 웃었다. 난간이 1/3 타고 남은 배는 앞으로 잘 나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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