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이윽고 바다로 흘러가노니

칠흑 시점 아젬에메(+약 휘틀에메)

UND by 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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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월의 종언까지의 스포일러

- 효월 앙코르 비화 ‘언젠가 돌아갈 생명’ 스포일러 주의

그것은 마치 수채화에 잘못 떨어뜨린 검은 물감처럼 마카렌세스 광장에 존재하고 있었다.

드높은 첨탑 사이로 물그림자가 어슴푸레 쏟아져 내렸다. 햇빛도 바람도 없는 심해의 하늘에 에테라이트 불빛이 번지고, 재현된 환영들이 소리 없는 걸음으로 대리석 바닥을 가로질렀다. 박제된 채 되풀이되는 어느 날의 아모로트 속에서 홀로 시간이 멈춘 양, 그것이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우두커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제1세계의 미약한 어둠을 한데 뭉쳐놓은 듯한 칠흑빛이었다. 도시 외곽을 떠도는 마력 덩어리와 유사한 모양새였으나 그것은 덩어리라기보다는 차라리 구멍이었다. 공허에 가까운 어둠이 주변 색채를 빨아들였다. 형태는 있으되 질량이 없었고, 존재는 있으되 자취가 없었다. 눈으로 보고 있는 순간조차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력으로 불을 밝힌 이 도시에는 틀림없는 이물질이겠으나, 기이하게도 어떤 위화감도 없이 그가 가꾼 정경에 녹아들었다. 마치 본래 있어야 할 자리인 것처럼.

“……저건 뭐야.”

저런 것을 창조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느껴지는 것은 필시 자신의 마력이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초점을 흐리게 했다. 육신의 시야를 대체하듯 에테르의 흐름이 눈꺼풀을 덮었다. 그리고, 여전히 칠흑이다. 견고하게 도시를 지탱하는 에메트셀크의 마력 한가운데서 그것은 변함없이 정체불명의 얼룩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어불성설이다. 완전했던 세계에서도 무엇이든 ‘볼’ 수 있었을 터인데, 이 불완전한 세계의 물질이 보이지 않을 리 없다. 하물며 스스로의 마력으로 짜였을 구성을 해명할 수 없다는 것은……. 본능적인 불쾌감이 앞섰다. 에메트셀크가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딱, 손끝이 부딪히며 소리가 튀었다. 일순 주변을 둘러싼 에테르가 요동쳤으나, 눈앞의 무언가는 흩어지지 않았다. 또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변함없이 그것은 존재하고 있었다.

이어 직접적인 공격이 그것을 향했다. 마력으로 빚어진 화염구, 화살, 어지간한 도시쯤은 간단히 찢어발길 거대한 바람이 무용하게 쏟아졌다. 타격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것에 당도하였으나 그 어떤 공격성도 유지하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직접 빚은 거대한 검이 흐물럭 그것의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에메트셀크는 오른손을 내렸다. 도시를 둘러싼 보호막을 회수하고 나니 눈앞의 광경은 공격 전과 완벽하게 동일해졌다.

서늘한 분노가 머리를 휘감았다. 에메트셀크는 몹시도 오랜만에 목 끝까지 차오른 호흡을 느꼈다. 심장 박동이 거세게 가슴팍을 두들기고 있었다. 버거울 정도의 마력 소모는 결코 아니었으니 이것은 심리적인 영향이다. 기억의 표상이 흙발로 짓밟혔는데 침입자를 끌어낼 수 없었다. 에메트셀크가 눈앞의 무언가를 노려보았다. 여전히 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제 마력으로 빚어진, 목적조차 가늠되지 않는 저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에메트셀크는 ‘그것’을 그림자라고 부르기로 했다.

명명조차 없으면 한낱 피조물 따위를 무엇 하나 규명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꼴이 아닌가. 에메트셀크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이름 하나 붙는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최소한 그의 불쾌감이 어디에서 유래하였는지는 명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터였다.

성큼성큼 아모로트의 거리를 가로질렀다. 허리를 펴고 곧게 걸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까마득하였다. 환영으로 구현된 선량한 사람들이 의아한 듯 발걸음을 늦추었다. 그들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응당 그러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구 하나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기억하던 것과 원하는 것이 분간 없이 혼재된 아모로트에서 기억에도 없고 원하지도 않았던 것이 거듭 심기를 어지럽혔다.

그림자는 에메트셀크를 뒤따르지는 않았으나 동떨어지지도 않았다. 멀어졌다 하면 다시금 시야 한구석에 출몰했다. 원치 않은 동행을 매단 채 아모로트 곳곳으로 발 디디며 에메트셀크는 이따금 그림자를 공격했다. 스스로의 그림자를 짓밟는 것과 같이 무의미한 행위였다. 그럭저럭 적절한 작명이었음이 판명되었으므로 에메트셀크는 다시 한번 불쾌해졌다.

어느덧 아고라의 탑 근방이었다. 그림자는 광장 우측의 어둑한 구석에 나타났는데, 진짜 그림자라도 되는 양 가로등 불빛 아래로 비스듬히 위치하고 있었다. 물속에서 어른거리는 희미한 불빛이 그림자 위로 비껴 내렸다. 빛이 쏟아지는 속에서도 지독하게 어두웠다. 흡사 그림자가 빛을 좀먹는 형상이다. 홧김으로 손가락을 튕겼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단념과도 같은 한숨과 함께 눈꺼풀이 여닫히는 찰나, 그림자가 홀연히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제야 그것이 저와 엇비슷한 눈높이였음을 알았다.

에메트셀크는 목전에 들이찬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질감도 부피도 없는 까마득한 심연이 저를 집어삼킬 듯 가까웠다. 묵묵히 그것을 직시하다가, 한 걸음 내딛었다. 동시에 그림자가 저만치 멀어졌다. 순식간에 탑의 돌출된 외벽으로 옮겨간 그림자를 올려보았다. 불현듯 지긋지긋해졌다. 그는 의도적으로 그림자를 외면했다. 시선을 주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림자는 뒤따르지 않았다.

협곡 입구에 이르자 마침내 그림자가 사라졌다. 거대한 암벽 사이로 환영도시의 불빛이 일렁거렸다. 에메트셀크는 오랫동안 자신이 빚은 과거의 빛무리를 조감했다.

아모로트 내부로 국한되는 행동반경. 에메트셀트의 동선과 겹쳐지는 움직임. 그렇다면 이것은 아모로트에 달린 부산물일 터였다. 이 도시는 통째로 그의 미련이었으므로, 창조 도중 그가 인지하지 못한 잡념 한둘쯤 딸려 들어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나, 그것을 읽어내지도 못할 정도로 자신이 망가졌던가?

따라서 에메트셀크가 그를 떠올려버린 것도 어쩌면 필연이다. 그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저보다 잘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공교롭게도 이 도시에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에메트셀크는, 오래 전 하데스라고 불렸던 남자는 그를 창조했던 때의 거북함을 상기했다가 이윽고 떨쳐냈다. 아무렴 자기 자신을 기피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에메트셀크는 습관적으로 창조물 관리국으로 향하려던 발을 되돌렸다. 아득히 먼 옛 발걸음을 아직 습관이라 일컬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으나 그의 몸이 그 길을 기억했다. 솔의 껍데기를 뒤집어써 볼품없이 작아진 몸으로도 여전히.

아모로트의 시계는 종말 하루 전에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조디아크의 소환에 몸을 바칠 생명들은 그보다 빠르게 모집이 완료되었다. 신의 산제물로 자원했던 그는 일찍이 국장으로서의 업무를 남은 자들에게 인계하였기에 이 시점에는 더 이상 창조물 관리국에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그날 에메트셀크는 민중 사무국에서 마지막 신변정리를 위해 방문한 그를 만났다.

거대한 문이 열리며 사무국 내부를 비췄다. 제각기 태엽처럼 과거의 현상을 반복하는 가운데, 한 인영이 천천히 에메트셀크를 돌아보았다. 잠시 움직이지 않던 그가 이윽고 저를 향해 완전히 몸을 돌렸다.

보일 리 없는 가면 속 눈매가 부드럽게 웃는 듯했다.

“어서 와, 하데스.”

이래서, 오고 싶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흡사 벌거벗겨진 심정으로 잠시간 눈을 내리깔았다.

천천히 걸어 들어가 그의 앞에 섰다. 빠듯하게 목을 치켜세우자 가까스로 시선이 맞았다.

“너한테는 보일 테지.”

설명해. 성의 없는 턱짓으로 명령하자 휘틀로다이우스라 이름 붙인 것이 느리게 고개를 기울였다. 그림자는 어느덧 열린 문의 뒤편으로 이동해 있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주시하던 휘틀로다이우스가 이윽고 입매 위로 손등을 가져갔다.

“이 시점에서 내게 본업을 요구할 줄은 말이지……. 후후, 그렇구나. 네게는 보이지 않는 건가.”

“내가 방금 잡담을 요구했던가?”

“하지만 내가 순순히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도 예상했겠지. 그렇지?”

서늘해진 시선 앞으로 그가 달래듯 손을 휘저었다.

“너무 노려보지 마. 나는 정말로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어……. 넌 내가 우회적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이해할 거야.”

기억 속 인격과 창조된 목적 사이의 경계에서 어정거리는 대화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러나 어느 쪽이 휘틀로다이우스의 재현체로서 적합한 태도인지 스스로도 가늠할 수 없었다. 에메트셀크가 침묵하자, 이내 소리 없는 걸음이 에메트셀크를 스쳤다. 그가 천천히 그림자의 앞으로 허리를 굽혔다.

“엉망진창이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창조는 으레 이렇게 되기 십상이지. 하지만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야. 구성이 읽히지 않는다면 아마 그건 네가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일 거야.”

말할 것도 없이 네가 가장 잘 알고 있겠지만. 그렇게 덧붙이며 휘틀로다이우스가 저를 돌아보았다.

“내가 뭘 말해주면 될까?”

“이걸 소멸시킬 방법.”

“그거라면 구태여 나를 찾아올 것도 없겠는걸. 파괴에 이해가 동반되어야 할 이유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휘틀로다이우스가 목 안으로 웃음 지었다. 익숙한 동작이, 목소리가, 그리운 애정의 온도가 물거품처럼 부풀었다. 이것을 다시 보고 싶어 그를 만들었을 터인데, 끔찍하도록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졌다.

“없앨 목적이라면 구태여 파헤칠 필요도 없을 텐데. 과연 너답다고 해야 할까…….”

“그만, 본론을 말해.”

방어적으로 시답잖은 수다를 잘라냈다. 그 또한 예상했다는 양 휘틀로다이우스가 또다시 웃었다.

“그냥 그대로 둬. 그러면 자연히 흘러갈 거야.”

“움직이지 않던데.”

“네게 종속된 존재라서 그래. 목적이 없으니 당장은 뒤따르는 것만 생각하겠지. 네가 앞서지 않고 가만히 지켜본다면 그 아이가 알아서 할 일을 찾게 될 거야. 음, 역시 그 편이 자연스러울 거라 생각해.”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을 도출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를 계속 마주하는 것도 고역이었던 탓에 에메트셀크는 그쯤에서 뒤돌아섰다. 등 뒤에서 웅웅거리며 목소리가 울렸다.

“돌아가는 거야?”

대답하지 않고 느릿느릿 걸어 나갔다. 그러자 다시 한번 목소리가 울렸다.

“잘 가. 또 만나, 하데스.”

아, 내일의 그가 그렇게 말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침전한 그리움을 내버려둔 채 관리국을 떠났다. 재현체일 뿐이라 한들 그의 목전에서 정체 모를 그림자와 씨름하는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거리를 벗어나고도 하염없이 걸었다. 그림자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아모로트 곳곳에 흩뿌려진 얼룩처럼 점점이 그를 뒤따랐다.

공교롭게도 다시 마카렌세스 광장이었다. 그림자는 또다시 부드러운 풀밭을 발밑에 집어삼킨 채 서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묵묵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자연히 흘러가리라고. 어디로? 무엇을 한단 말인가, 정제되지도 못한 무의식 따위가. 냉소적으로 튀는 사고를 그러안고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림자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다소간의 무료함이 깃들 때쯤, 눈꺼풀을 여닫는 그 찰나에 그림자가 사라졌다.

에메트셀크가 퍼뜩 사위를 돌아보았다. 아모로트 시내로 오르는 길목 앞에 그림자가 있었다. 과거의 대화를 재현하는 사람들의 지척에서 그것만이 홀로 다른 세계인 양 이질적이었다. 익숙한 불쾌감이 내려앉았다. 스스로의 파편이되 본인의 의지가 없는 것이 그의 기억을 헤집어 들어가고 있었다. 에메트셀크는 잠시 주저하였으나, 천천히 그것을 뒤따랐다. 쉰 걸음, 마흔, 그 다음은 서른……. 다시 한번 그림자가 사라졌다. 석교의 층계 위에서 잠시간 머물더니 곧장 시야를 벗어났다. 느긋한 걸음으로는 더 이상 뒤쫓을 수 없었다. 그림자의 자취를 뒤따라 돌바닥을 박찼다. 좁다란 오르막이 끝나는 순간, 환영도시의 심부가 아득하게 펼쳐졌다.

망망대해처럼 까마득한 기억이었다. 그 추억 속에서 오직 그만이 홀로 초라하게 작았다. 일순 도시에 내리눌리는 듯하여 에메트셀크가 멈추어 섰다. 표류하는 그를 기다리지 않고 그림자가 멀어졌다. 점멸하듯 깜빡거리며 그림자가 그의 도시를 가로질렀다. 보랏빛이 너울거리는 가로수 아래에 흑점 같은 자취를 남기더니, 다음 순간에는 대의사당으로 진입하는 어귀에 있었다. 도시의 환영을 헤치며 빠르게 걸어 나갔다. 아모로트를 거닐던 거대한 인영들이 잔상처럼 그를 스쳐 지나갔다.

재현된 사람들이 그러하였듯 대의사당의 문은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했다. 아모로트의 감지 시스템을 대신하여 에메트셀크가 문을 열었다. 물그림자에 덮인 황금빛이 문 바깥으로 어슴푸레 흘러 나왔다. 그림자는 대의사당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 자리에 붙박인 양 한참을 그 거대한 문 앞에 있었다. 그것은 제대로 된 형태가 없기 때문에 대의사당 내부를 보고 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환영도시를 조감하던 자기 자신이 그림자로 겹쳐 보였다.

결국은 시답잖은 감상이다. 하지만 그 시답잖음으로 인해 에메트셀크는 또다시 그림자를 놓쳤다. 기척 없이 그림자가 사라진 문 앞에서 에메트셀크가 주변을 살폈다.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시야를 반전시켰다. 사방을 가득 메운 스스로의 마력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읽히지 않는 한 지점이 구멍처럼 비어 있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며 몸을 이동시켰다. 몸이 재구성됨과 동시에 육신의 시야를 되돌렸다. 견고하게 쌓인 스스로의 마력 대신 기억 속 건물들이 다시금 눈꺼풀을 덮었다. 가로등 불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한순간 눈이 부셨다. 새하얗게 번지는 시야로 그림자를 찾았다.

 깎아지른 협곡의 절벽을 등지고 그의 눈앞에 그림자가 있었다. 템페스트의 해저곡과 연결된 드높은 탑이 시야 끄트머리에 비쳤다. 아코라의 탑에 연결된 텅 빈 공터, 아모로트의 최서단. 이곳은 환영도시의 경계점이다.

묵묵히 움직임을 주시하는 에메트셀크의 눈동자 속에서, 한순간 그림자가 크게 부풀었다. 길게 몸체를 늘린 그것이 허공을 낚아챘다. 동시에 도시의 경관이 뜯겨 나갔다.

“…….”

다시 한번 그림자가 뻗쳤다. 그림자의 갈퀴가 닿는 공간마다 아모로트가 엉망으로 찢겼다. 할퀴어진 건물의 상흔 틈새로 먼 옛날의 유적이 낡은 뼈대를 내비쳤다. 흐트러진 환영도시의 마력이 그림자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도시를 삼킬수록 그것은 빠르게 비대해졌다. 잠깐 사이에 옛사람만큼 거대해진 그림자를 올려다보며 에메트셀크는 실소했다.

“뭘 하려는가 싶었는데…… 고작 포식인가.”

그렇다면 뭘 기대했단 말인가? 자아 없는 창조물에 본능 이상의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마땅히 이렇게 될 법한 이야기였다.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소리 내어 손가락을 튕겼다.

휘틀로다이우스, 정확히는 그의 기억을 담은 재현체의 말마따나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직접적인 손속이 닿지 않는다면 간접적인 방식을 택하면 된다. 그림자를 가둔 거대한 에테르 감옥을 말없이 올려보았다. 공간째로 가두어 옥죄자 그림자는 어렵지 않게 포획되었다. 정말이지, 너무나도 쉬웠다. 고작 이 정도의 일이었다.

이대로 감옥째 으스러뜨리거나 어디 해구 깊숙이라도 처박아두면 이것은 소멸한다. 파괴에 이해 따위는 필요치 않다. 읽히지 않는다면 어떻단 말인가. 이름 따위가 무어란 말인가. 그것이 무엇을 생각하든, 무엇을 바라든 사라진 뒤엔 의미 없는 사념일 뿐이었다. 알면서도 온종일 수고롭게 이것을 뒤쫓은 이 미련스러운 감정을, 대체 무어라 명명해야 하는가.

에메트셀크는 문득 지독하게 피로해졌다.

결국 에메트셀크는 감옥을 으스러뜨리지도, 해구로 처박지도 않았다. 그는 그림자라 이름 붙인 무언가를 없앨 수 있는 수많은 방법들을 알고 있었지만 끝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에테르 감옥을 그 자리에 방치해둔 채, 묵묵히 찢겨 나간 아모로트를 수복하고는 뭍으로 떠났다.

제1세계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원초세계의 영웅은 거의 한계까지 빛을 받아냈다. 과연 모든 빛을 쬐고도 부서지지 않을까. 그 혼은, 그의 파편은 인간일 수 있을까.

도대체가, 아직도 뭘 기대하고 있단 말인가?


몇 번이고 기대하고 몇 번이고 실망하며 스스로의 아둔함에 진저리치는 것을 반복한다. 세계와 생명이 갈라져도 인간의 감정만은 쪼개지지 않았으므로 어쩌면 이 미련이야말로 인간의 본성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으레 뒤따르는 자조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기에, 에메트셀크는 스스로의 미련을 매달고 또다시 심해에 가라앉았다.

이변 없이 영웅은 무너졌다. 세계는 다시 빛에 휩싸였다. 상정 내의 결과에 비참해지는 것은 그 혼이 언제나 상정 밖의 존재였던 탓이다. 이 어리석음이, 집착과 집념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또 한 번 미련스러워져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며, 에메트셀크는 다 부서져 가는 영웅에게 구태여 이 장소를 일러주었다.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에 그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를 포기했다.

아고라의 탑 하층부에는 에테르 감옥이 사라져 있었다. 어쩐지 놀랍지 않았다. 에메트셀크는 그림자의 행적을 좇을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아무렴 어떤가. 이젠 정말 아무래도 좋았다. 기껏해야 건물이나 좀 뜯어먹고 말 존재였다. 하찮고 보잘것없는, 불완전한 조각들…….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해하고 싶지 않았다. 판정은 끝났다. 텅 빈 상자를 끝없이 열어젖히는 무의미한 소모는 이미 지긋지긋하도록 겪었다. 그는 또 한 번 빈 상자를 목도하고 돌아온 차였다. 어차피 이번에도 비었을 터다. 그러니 이번만큼은 닫힌 채로 내버려둘 요량이었으나.

에메트셀크는 아주 희미하게 피부를 간질이는 마력의 흐름을 느꼈다.

인지하는 동시에 에테르의 파장이 천천히 그를 둘러쌌다. 마력 구조가 재배치되고, 술식을 전개하여 이윽고 발치로 퍼져 나간다. 에메트셀크는 핏기 없는 얼굴로 제 발밑을 내려보았다. 황금빛 마법진이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잊을 리가 없다. 오직 저만이 그 술식을 기억하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것은 소환술식은 아니었다. 터무니없이 부족한 마력으로 소환식을 엇비슷하게 흉내 낸 것에 가깝다. 마법진의 빛은 몹시도 흐리고 미약하였으며, 대상자가 공간을 뛰어넘도록 잡아끌 힘이 없어 가까스로 자신의 좌표만을 전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시전자의 의지를 전하기엔 충분했다.

종말 하루 전을 무한히 되풀이하는 그의 정원에 있을 리 없는 존재. 그러나 한때, 오래 전, 지금까지도 그 누구보다 이곳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랐던 존재. 에메트셀크는 그를 빚으려는 시도조차 해본 적 없었으나, 자신이 읽을 수 없는 존재는 늘 한 명뿐이었다.

아젬이 그를 부르고 있었다.

꿈속을 헤매듯 그리운 부름에 응했다. 에메트셀크는 해수면 위로 올랐다. 밤바다의 파도 소리가 고요하게 귓전을 적셨다. 저 멀리 안개 너머로 율모어의 불빛이 번져 어슴푸레 수면을 비추고 있었다. 그 어두운 바다 위에 그림자가 있었다. 도시의 마력에 에테르 감옥까지 집어삼켰을 테니 어지간한 크기가 되었겠으나 눈앞의 그림자는 오히려 물속에서보다 작았다. 술식으로써 저를 불렀기 때문이리라. 이윽고 그림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바다에 출렁거리며 그림자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하데스. 바다를 여행해 본 적 있어?’

그렇게 말하며 아젬은 손수 만든 자그마한 나룻배를 선보였다. 옛 시대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맨몸으로 바다를 횡단할 수 있었으므로 배라는 것은 오히려 생소한 수단이었다. 어디 머나먼 섬 지방에서 마력 운용에 서툰 부락민들이 사용하던 것을 적당히 따라 만들었다며 그가 멋대로 저를 잡아끌었다. 당연히,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모양새만 흉내 낸 배는 물에 뜨지 않았다. 밤을 새워서라도 물에 뜨는 배를 제작하겠다는 그의 의욕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에메트셀크는 손가락을 튕겼다. 중력을 거스르지 않되 가라앉지는 않게끔 부력을 극대화하여 선저에 깃들이자 마침내 배가 떴다.

다음번엔 진짜 제대로 만들어 올게. 그가 멋쩍게 중얼거렸다. 무어라 대꾸했더라. 그날의 온도와 습도, 닻을 올리는 순간 뺨에 부딪히는 바람결과 소금기 어린 내음부터 그의 표정과 어조까지 모든 것이 선명하였으나 제가 어떠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마 그 시절의 일이니 으레 그러했듯 퉁명스레 굴었을 터다. 더 귀찮게 말라고 배를 띄워준 거라는 둥 갑옷처럼 핑계를 둘렀겠지.

하지만 사실, 훗날 그가 배를 만들어 오면 못 이기는 척 오르게 될 것도 알고 있었다.

부실한 나룻배는 파도가 출렁이는 대로 형편없이 휘청거렸다. 그가 재빠르게 노를 잡았다. 에메트셀크도 배가 뒤집히지 않게끔 세밀하게 마력을 움직였다. 비행이 아닌 부유는 시전자의 세밀하고도 꾸준한 조정을 요구했다. 에메트셀크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

‘발 닿는 대로?’

기억 속의 그가 뻔뻔스레 미소 지었다.

‘어디로 가고 싶은 게 아니라, 어디든 갈 수 있는 거니까.’

바람을 타고, 파도에 밀려 그림자가 수면 위를 미끄러졌다. 뱃머리의 그를 보듯 앞서 나아가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물결 조금 위에 떠 있던 에메트셀크가 천천히 해수면 위로 내려앉았다. 머나먼 과거의 첫 항해처럼 허공을 부유하는 대신 발밑에 부력을 매달았다. 가라앉지 않되 파도에 비틀거릴 수 있도록 일렁이는 물결을 밟고 섰다. 잔잔한 파도가 그를 뒤흔들었다. 행선지가 없어도 바다는 멈추지 않기에, 그들은 어디든 갈 수 있었다.

그림자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뒤따르는 궤적마다 그림자가 점점이 떨어져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풀려버린 실타래처럼 에테르가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에메트셀크의 마력으로 충만한 해저와는 달리 수면 위는 그의 권역이 아니다. 아모로트에 종속된 부산물은 바깥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에테르를 소모하며 마모되었다. 파도가 크게 일 때마다 그림자가 무너져 내렸다. 제 키보다 조금 작았던 그림자는 어느덧 허리께까지 줄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았다. 휘청거리면서도 계속 나아갔다. 정강이에서 복사뼈 어림까지 부피가 줄고, 밤바다의 물결을 뒤집어써 자그마한 몸체가 쉬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어느 순간 그림자가 멈췄다. 기억 속의 그가 말했다.

‘도착했다.’

육지가 까마득히 멀어진 바다 한가운데였다. 에메트셀크가 물었다.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그래도, 봐. 주변에 광원이 없으면 정말 잘 보이거든.’

그가 하늘을 가리키며 웃었다.

‘별이 이렇게나 많아.’

언젠가의 그때처럼 에메트셀크는 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 가득 수놓아진 찬란함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갈라지지 않고 물은 가를 수 없었으므로, 조각 나 부서지고 흐릿해진 세상에서도 이 풍경만큼은 옛 바다와 한없이 닮아 있었다. 어두운 밤바다는 하늘과 수평선의 경계가 없어, 그들은 마치 밤하늘을 부유하는 듯했다. 파도가, 바람이 부드럽게 온몸을 뒤흔들었다. 온 세상이 은하수처럼 너르게 펼쳐졌다. 그리운 찬란함 속에 저만이 외따로 남아 있었다. 물 밖에서도 숨이 막혔다.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왜, 이제 와서…….”

어느덧 주먹보다 작아진 그림자가 발치에서 흔들거렸다. 허리를 굽혀 그것을 건져 올렸다. 바닷물에 젖어 척척해진 손바닥 위에 촉감도 질감도 없이 그림자가 올라앉았다. 이제는 그 내부가 투명하게 읽혔다. 애정과 집착, 원망과 비탄, 친애와 회한이 뒤엉켜 눌어붙은 스스로의 미련이었다. 무의식이 떨어뜨린 감정이 아모로트의 마력에 영향을 받아 형태를 갖췄다. 이래서야 읽히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를 재현하지 않으려 했던 걸까, 재현할 수 없었던 걸까. 지금에 와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모로트를, 우리를 떠난 그가 미웠다. 종말이 내려앉고 세계가 갈라지는 그 순간까지 자신을 부르지 않았던 그를 원망했다. 그의 마지막을 인정할 수 없었다. 조각 난 그 혼의 파편을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떻게 죽어버릴 수 있는가, 오직 그만은 그 생이 영원할 것만 같았는데. 그를 떠올릴 때마다 상념이 머릿속을 부옇게 뒤덮었다. 어떻게 그를 추억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맞아. 네가 그리워.”

그럼에도 그 모든 미련들은 결국 그리움이라서.

물체는 명명으로써 존재를 가진다.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손아귀에 얹힌 감정이 뚜렷하게 부피를 갖췄다. 에메트셀크가 오른손을 그러쥐었다.

“하지만 넌 아젬이 아니잖아.”

손아귀에서 그림자가 힘없이 뭉그러졌다. 이윽고 완전히 흩어진 그것이 에테르로 화하여 천천히 제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파도 소리가 길게 귓바퀴를 할퀴었다. 드넓게 펼쳐진 밤하늘이 발 아래 융단처럼 찰랑거렸다. 불완전한 세계에도 바람은 불고, 파도는 일었다. 그는 여전히 어디든 갈 수 있었지만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때 그 바다가 아름다웠던 것은 그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자신만이 이 세계에 홀로 남겨졌다. 고독이 다시 한번 그를 뒤흔들었다. 돌아가야 하는데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줄곧 헤매고 있었다. 돌아갈 곳을, 고향을, 그들을 찾아…….

에메트셀크는 다시 심해에 잠겼다.

거대한 공기방울이 템페스트의 밑바닥을 감싼 것을 느꼈다. 바닷물이 말라붙은 그의 도시는 보다 과거의 형태에 가까워졌다. 물이라는 장해물이 사라지자 아모로트의 불빛이 온전하게 사위를 비췄다. 고요한 우울이 고즈넉이 해저를 밝히고 있었다. 혼자 찾아왔다면 보다 손이 덜 가는 방법을 택했을 테니, 그 영웅은 기어이 불청객들을 이끌고 우르르 방문하려는 모양이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보니 대의사당의 문이 목전에 있었다. 끼익, 나지막한 소리를 울리며 문이 열렸다. 찬란한 황금빛 복도에 휘틀로다이우스가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던 것처럼 그가 자신을 맞이했다.

“돌아왔구나. 그 아이도…… 잘 떠나보낸 것 같네.”

휘틀로다이우스를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건 여기 있으면 안 돼.”

“서먹한 호칭이군. 내 앞이라서 그러는 거야?”

너는 이전부터 내게는 묘하게 속내가 읽히는 것처럼 굴곤 했지.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옅은 웃음기가 뱄다. 친근한 언사가 기어이 인내심을 갉아먹었다. 에메트셀크가 서늘한 시선으로 대화를 잘라냈다.

“넌 휘틀로다이우스가 아니야.”

그러자 휘틀로다이우스의 재현체가 웃었다.

“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내게서 휘틀로다이우스를 투영할 수는 있겠지. 이 도시가 만들어진 목적대로 말이야.”

“내가 재현한 건 그날 하루뿐이다. ……설령 네게 그 이상이 흘러들어갔어도 결국 기억의 일부를 모방하는 것에 불과해. 네 이해를 요구한 적 없어.”

“감정은 본디 기억의 부산물이지. 휘틀로다이우스를 재현한다면 자연히 그의 다감함이 뒤따르는 법이야.”

“창조자의 의지를 따르는 것이 피조물의 역할일진대.”

“말했잖아, 하데스. 나는 내 역할에 충실하게 대답하고 있어. 내가 꿰뚫어볼 거라 생각했잖아?”

에메트셀크가 이를 악물었다.

“무의미하군. 너는 그가 될 수 없는데, 네가 뭘 할 수 있지?”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너는 아직 내게서 휘틀로다이우스를 기대하는 듯 보여……. 아, 변론은 듣지 않을게. 스스로를 설득하려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이 어디 있겠어.”

말문이 막히는 것은 이 대화가 자문자답인 탓일까, 그가 하필 휘틀로다이우스의 기억을 담고 있는 탓일까. 그의 시선이 까마득히 높았다. 에메트셀크는 원한다면 그를 통제할 수 있었다. 그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었으므로.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그러지 못할 것을 알았다.

그래서 해답 없는 입씨름을 반복하는 대신 단절하는 것을 택했다. 휘틀로다이우스의 재현체를 내버려두고 뒤돌아서자, 등 뒤에서 쿡쿡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나를 축객하면 될 텐데. 이 도시의 주인은 너인걸.”

대꾸하지 않고 발을 뻗었다. 그렇게 한 걸음, 그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잘 가. ……안녕, 하데스.”

에메트셀크는 일순 망연해졌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대의사당은 텅 비어 있었다.

‘안녕’이라고……. 메아리치는 인사말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그 시기의 휘틀로다이우스는 이 인사말만큼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휘틀로다이우스를 휘틀로다이우스로서 창조한 이상 그가 모를 턱이 없다.

휘틀로다이우스가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자처한 이후, 에메트셀크는 수십 번 설득을 시도했고 몇 번의 편법을 제안했으며 개중 두어 번은 협박에 가깝도록 지성 없이 논쟁하였으나 무엇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친구를 죽음으로부터 끌어내지 못해 나날이 초조해졌다. 어느 날 에메트셀크가 흔하디흔한 인사말에 내가 지금 안녕하겠느냐며 역정을 냈던 것을 기점으로, 휘틀로다이우스는 얄밉게도 그 단어를 배제하여 성실히 안부를 묻곤 했다. 좋은 아침, 잘 잤어, 요즘은 어때, 보고 싶었어, 고마워, 미안해……. 그런 말을 원했던 게 아닌 걸 알면서도.

이것은 기억의 모방이 아니다. 실상 일어난 적 없던 일이었으므로. 에메트셀크의 소망 또한 아니다. 그가 진정 바랐던 말은 따로 있었으므로. 재현된 과거가 그의 기억과 소망을 이탈한다면, 그 행동양식을 선택한 것은 누구의 의지인가?

휘틀로다이우스는 어째서 안녕을 이야기하며, 아젬은 왜 이제 와 그를 수면 위로 끌어당겼는가?

“나더러 어떡하라고…….”

텅 빈 도시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공허한 울림이 환영도시를 떠돌았다. 재현된 기억에서, 그 녀석의 파편에서, 이 바다의 한가운데서 과거의 반짝임을 찾으려는 자기 자신을 본다. 하지만 이제 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불완전한 세계의 그 무엇도 그들이 될 수 없었다. 대체조차 불가능했다. 심해에는 바람도 파도도 없다. 고인 물은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니 그는 더 이상 표류하지 않을 터인데.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결계가 걷히는 기척에 눈을 떴다. 시야를 반전하여 저 멀리 협곡을 응시했다. 작고 연약한 생명들이었다. 그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익숙한 색채가 그를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터져 나갈 듯 위태롭게 빛을 끌어안고 있음에도 그 색채만큼은 덮이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에메트셀크는 도시에 가까워질수록 느려지다가 마침내 우뚝 멈춘 발걸음들을 기묘한 감상으로 바라보았다.

아, 그가 나에게 온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가, 우리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나의 도시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젬이 아니다. 아젬일 수 없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 혼이라서, 그 또한 이 세계에서 어떠한 반짝임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아서, 이 미욱함의 이름이 그리움이라서……. 멈춰 서 있던 흐릿한 혼들이 다시금 걷기 시작했다. 에메트셀크는 눈꺼풀을 덮고 불청객들의 침입을 용인했다.

예측은 언제나 비껴가지 않고, 결과는 늘 상정 내였으며, 불완전한 생명은 끝내 기대를 배반한다. 이변은 없다. 영웅은 괴물로 전락하여 마침내 세계는 빛으로 정체할 것이다. 에메트셀크는 달에 갇힌 친구를, 동포들을 생각했다. 그는 만 이천 년 동안 절박하였음에도 어째서인지 휘틀로다이우스가 되살아나는 것만큼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니, 기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가 조디아크의 내부에 잠들어 있다는 것뿐. 할 일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세계를…….

사랑했던 것들은 무엇 하나 남지 않은, 나의 세계를.


그리하여 패자는 순리대로 바다에 잠긴다.

한때 명계라 불렸던, 현 시대에는 별바다라는 이름을 갖게 된 에테르계의 흐름이 천천히 그를 이끌었다. ‘별의 바다’. 현상에 대한 명명치고 지나치게 낭만적이지 않은가 생각했던 때도 있었으나 직접 몸을 싣고 보니 의외로 직관적인 이름이었다. 몸이, 혼이, 기억이 물결에 풀려 나간다. 한때 그를 구성했던 것들이 부드럽게 흩어지고 있었다. 사고가 물거품처럼 녹아내렸다. 먼 옛날의 기억이 명료하게 부상하고, 가까운 기억은 까마득하게 가라앉았다. 시공간이 아득히 멀어지며 이지가 몽롱하게 잠겼다. 생명이 어룽지는 파도 속에서 에메트셀크는 오래 전 별이 쏟아지던 밤바다를 생각했다.

한 번쯤은 네게도 웃어주었다면 좋았을까.

함께 녹아내리는 휘틀로다이우스의 곁눈질이 이따금씩 피부를 스쳤다. 언젠가의 그가 속삭였던 낯간지러운 언사를 떠올렸다. 아젬과 휘틀로다이우스의 사고는 기묘하게 맞물리는 구석이 있었으므로, 아젬 또한 제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알았더라면 몹시도 즐거워했으리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필사적으로 감췄던 것도 있었지만…….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다면 역시 한 번쯤 실수처럼 내비쳤어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여행길을 기대하고 있다고, 줄곧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 번이라도 표현했으면 네가 돌아왔을까. 마지막 순간에 나를 불렀을까.

억겁의 시간을 건너 미래는 이어졌다. 아젬이 아니지만 아젬의 파편을 품은 이에게 그리운 미소를 내비쳤다. 아직 끝나지 않은 여행길을 걷는 그를 그가 모르는 형태로 배웅하는 것은 저 나름의 심술이다. 만 이천 년을 거쳐 기나긴 인연에 마침내 작별을 고하며, 에메트셀크도 마지막 회한을 내려놓았다. 이제야 비로소 아젬을 온전히 떠나보낸 것만 같다.

누군가 인생은 항해와 같다 하였다. 배가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바람이, 파도가, 이 바다가 끊임없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림자는 왜 또다시 자신을 물이 흐르는 곳으로 끌어당겼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것은 결코 그가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혹여 그림자에 의지가 있다면, 자신의 기억이 아주 조금이라도 그와 닮을 수 있다면, 다시 한번 파도에 휩쓸려 드넓은 바다로 흘러가도 좋으리라. 그리하여 언젠가 먼 훗날 우리의 항로가 다시금 겹쳐지기를.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었지만, 에메트셀크는 언제나 그가 자신을 배에 태우는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가 알아챘더라도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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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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