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疑敏 : Rain
형이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했거든요.
Piano Solo - Ennio Morricone
두꺼운 소나기가 빗발치는 밤.
어두운 하늘이 곧 추락하기라도 할 듯이, 날카로운 빗줄기로 세차게 내리친다. 차가운 한기가 골목길 벽돌마다 스며들어 물기를 이루고, 채 흐르지 못해 고여버린 웅덩이가 시궁창으로 흘러간다.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만 같은 하늘의 울음 아래, 검은색 우산을 뒤집어쓴 사내가 좁은 골목길을 스친다. 빗줄기의 잔해를 밟아 짓누를 때면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날 법도 하건만, 요란한 밤의 소음 앞에선 그조차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새까만 코트에 단정한 걸음. 어떤 이의 흔적도 남지 않은 이곳에서 그의 보폭은 느릿하기 짝이 없다. 참으로 당연했다. 바짓단까지 물들여가며 흘러가는 물줄기야, 화마로 타오르는 고통에 비하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이와 같은 지독한 표현처럼 검은 우산을 든 그는 천천히 죽어가는 사람의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과 생기라곤 한 점 없는 입술. 이대로 물줄기와 함께 어딘가로, 혹은 저 먼 검은 바다로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절망을 안고 살아가는 자의 얼굴.
“…….”
엉망으로 젖어버린 구둣발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쓰레기 무덤이었다. 누구에게나 버려져 누구에게도 원해지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눈이 어둑하다. 허나 그가 바라보는 것은 그저 제 주변 따위의 감상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고귀하고 존중받아야 할 것. 허나 누구보다 차별적으로 살아가는 이들. 우산이 느지막이 기울어 올라가면, 검정과 빗줄기 사이로 침잠해버린 눈동자가 드러난다. 그의 시선은 무덤 위에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한 사람에게 향해 있었다. 새까맣게 젖어버린 긴 머리칼과 온통 피와 멍으로 번져있는 여자. 우습게도 가슴이 색색거리며 부풀었다 꺼지는 것이, 곧 죽을 것만 같은 처참한 모습이었음에도 단지 숨이 붙어서 살아있는 듯했다. 자신처럼 죽지 못해 연명하는 이의 모습이 덧그려질 무렵. 곧 죽으리라 생각했던 시체에서 나지막한 욕설이 짓이기듯 새어 나온다.
“씨발, 쓰러진 사람 처음 보나….”
“당신, 곧 죽을 것 같네요.”
“하, 개새끼… 씹…. 좆같이, 말하네….”
그는 제게 대답을 하는 건지, 혼잣말하는 건지 모를 욕설로 목소릴 대신했다. 이미 터져버린 입술과 온통 멍울져 있는 몸이, 막 태어나 연약한 것을 들쥐 사이로 던져 놓은 꼴이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면, 어찌 된 영문인지 묻지 않아도 훤했다. 대출, 술, 도박 등으로 인생 망친 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살아가는 달동네가 근처였기에. 시큼하게 올라오는 하수구 냄새도 동네의 특징 중 하나였다. 조직 허드렛일에서 조금 쓸만한 잡부가 되었을 적엔 자주 드나들었던 동네. 수많은 이들이 제 고향도 아닌 땅에서 숨 멎어 죽어가는 곳. 단지 죽음을 기다리는 묫자리나 마찬가지였다.
이 사람도 지금 살아 골목을 나간다 하더라도 곧 어떤 방식으로든 죽고 말 테지. 그런데도 살겠다고, 자신이 움직이기 전에 멍울과 피로 얼룩진 손가락을 바르작대는 게 눈에 띈다. 현실이라는 시궁창에서 일어나려는 이의 의지가 너무도, 너무도…. 속이 쓰라릴 만큼이나 안타까워서. 질리도록 강한 생존 본능, 그것에 늘 시달리며 괴로워했던 이는 눈앞의 등불을 스치지 못했다. 하여 한 줌의 기름이라도 내어주자고. 새까만 우산이 슬그머니 기울어져 희끄무레한 등불을 지키기로 한다. 매섭게 쏟아지던 물줄기는 이제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의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같이 갈래요?”
“… ….”
뺨이며 어깨로 내리치는 굵은 빗줄기가 아릿하게 내려친다. 그렇게 눈가며 뺨, 턱 언저리를 넘어 금세 어깨까지 젖어버린 이의 얼굴이 그녀에게도 드러난다. 침몰한 색을 두른 눈동자, 창백하게 달싹이는 입술, 힘이라곤 없는 손짓. 그가 바라보는 시선은 오래도록 밤 내리지 못한 사막처럼 삭막하기만 하다. 그녀로서도 평소라면 믿을 수 없는 이나 마찬가지였다. 거칠고 냉담하기만 한 이 동네에서 얼마나 숨죽이며 살아왔던가. 무법지대나 다름 없는 곳에서 눈치껏 피해 다닌 사건만 수없이 많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 사내가 실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그의 뺨으로 흘러내리는 물방울 만큼은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슬퍼 보여서. 마치 울 수 없는 이에게 울음을 덧씌워주는 듯했다. …씨발, 역시 좆같아. 세차게 내리는 비와 달리 바싹 마른 입술이 목소리조차 잃어버리고 벙긋거린다. 그렇게 열심히, 쥐 죽은 듯이 살았는데도 결국 이 꼴이다. 그러니 이제 사내에게 무얼 의지한다 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다. 그녀는 무너지는 자존심이 거센 비에 섞여 흐르는 것을 다행이라 여기기로 했다. 오로지 세상을 침수시키기 위해 내리치는 듯한 비라니. 이리도 시끄러우니 겨우 욱여 넣을 뿐인 제 울음도 들리지 않겠지.
"제가 도와줄게요."
이상하게도, 그녀는 사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 때면 이 세상의 모든 잡음이 사라진 듯이 선명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창백한 입술이 희미하게 비틀린다. 본래는 저리 괴로운 낯이 아닌, 몹시도 다정한 웃음이었으리라. 그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내뱉는 목소리에서 어딘지 모를 외로움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는 이런 목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얼마 전에 목매달아 죽은 옆집 청년이 딱 이러했으니까. 도와준다면서, 어째 자신이 도와주는 처지가 된 것 같아 웃어버리자 차가워진 숨이 수분에 휩싸여 희끗희끗한 입김을 내었다.
“내가… 도, 와…주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재수 없, …는, 새끼."
몇 번이나 입술을 지분거려 내는 목소리가 욕설이다. 사내는 피식거리는 소릴 내며 잡으려면 잡으라는 듯이 한 손을 내밀었다. 쓰러져 옴짝달싹 못 하는 이에게 하는 배려치곤 다정함이 부족했으나, 아무렴. 그는 원래 이런 치였다. 제게 소중한 이가 아니고선 관심 한 톨 없고, 미친 자처럼 예속을 사랑하는 이. 그러니 지금의 변덕조차도 그러했다.
“거짓말이나 하고….”
그럼에도 바들거리는 팔을 뻗어 잡는 손길엔 간절함이 가득했다.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에게 도움이 되어줄게요. 생애 마지막 희망을 붙잡듯 잡아챈 손바닥을 함께 그러쥐며 그는 한없이 속삭였다. 그건 마치 그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려서, 그녀는 어딘지 모를 아릿함을 느꼈다.
당신 만큼은 떳떳하게 살아가도록.
“아, 메이. 깨어있었어요?”
[개자식, 이제야 전화하고 자빠져?]
“하하, 미안해요. 이제야 휴대폰을 다시 얻었거든요.”
신호음이 끊기자마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가 퍽 반가워 웃는다. 이런 식으로 말해도 결국은 제 걱정으로 이어지는 게 장 메이라는 사람이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아서 좋다니까.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불만이 가득한 것이, 적잖이 제 연락을 기다린 듯해 서둘러 미안하다며 사과를 전했다. 그럼에도 눈길만큼은 무수한 물줄기를 쏟아내는 남청색 하늘에 머물러 있었다. 얇고도 단단한 유리창에 달라붙는 물방울이 그날의 밤처럼 매서울 따름이었다. 톡, 손톱 끝으로 유난히 둥근 모양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건드려본다. 그래 봤자 닿을 리 없지만.
[네가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이야.]
성난 게 조금은 가라앉은 모양인지 한층 다듬어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냥, 비가 와서요. 가만히 오르는 미소와 함께 검지가 추락하는 물줄기 위로 이어지듯 흘러내린다. 그의 목소리가 빗소리와 섞여 들릴 때면, 오래 지나버린 향수가 한 점씩 떠오르곤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를 집에 데려와선… 생각보다 많은 걸 해줬는데. 밥도 먹여주고 재워주고 빚도 갚아주고. 여러 방면으로 새 사람 만들었구나 싶을 만큼 챙겨줬었지.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 스피커 너머가 잠시 고요해진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이. 톡, …톡. 손톱 부딪히는 소리가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애꿎은 유리창을 두드린다.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광경이라, 안 좋은 기억인가 싶어 화제를 바꾸려던 때. 망설임과 짜증, 그 사이에 머무른 목소리가 스피커의 전자음을 타고 흘러나온다.
[넌 내가 아니었으면 죽었어. 알아? 나도 너 아니었음 죽었고.]
“…….”
그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 답하자 메이는 곧장 성질을 부리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망할 놈. 그럼 죽어오든가. 퍽 거친 욕까지 듣고 끊기자 당황 어린 시선이 제 영업용 핸드폰에 머무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구해준 것이지, 그가 날 구한 적은 없는데. 오히려 성내며 끊어버리자 의아한 건 제 쪽이었다. 도저히 모르겠네. 메이는 언제나 의뭉스러운 방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곤 했으니, 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이제 곧 내일이면 저 비도 그칠 테니 말이다.
있잖아. 왜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야?
형이 어려운 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했거든요.
…거짓말. 당장에라도 죽고 싶어서 환장한 얼굴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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