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요정, 마법사 그리고 인형 #1
구전으로 전해지는 이야기
Aqualina - Orange Huse
태어남은 곧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라. 태초부터 존재한 창공과 만물의 대지엔 통용되기 어려우나, 적어도 유난하게 긴 삶을 사는 자에겐 무게감이 있는 문장이었다. 겨우 눈 깜빡할 시간만 살다 가는 하루살이, 오랜 시간을 땅 밑에 묻혀 살다 피어나는 곤충. 부모의 품 안에서 깨어난 늑대와 알을 쪼고 일어나는 딱다구리. 저마다의 시간을 살다 가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귀가 뾰족하고 언어로 소통하는 자들은 그들의 어머니인 거대한 나무에게서 기나긴 생을 부여받았다.
가지에서 태어나 과실이 싱그러워지듯 성장하는 존재들. 그들에게 추위를 덮어주는 털과 강인한 턱뼈는 없었으나 '어머니'가 그러했듯 이파리와 뿌리, 비 내리는 하늘과 엉겨 살아가는 법,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바에 큰 뜻을 품었으니. 구름이 내리는 첫 번째 빗물, 막 결실을 틔운 새싹과 같은 정순함을 가장 중요시했으므로 그들은 서로를 가족 삼고 제 몸과 같이 여겼으며 이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유를 모아, ―그들은 '인간'을 혐오했다.
"장로님, 장로님. 저쪽 숲 입구 방향에서 피 냄새를 맡았어요. 동물이 다친 게 아닐까요?"
"그럴 테지. 우리야 모수(母樹)께서 지켜주시지만 바깥 동물들은 다르잖느냐."
귀가 길고 뾰족하게 난 아이가 순진한 눈망울을 올리며 물었다. 순한 눈동자에 비친 사내는 희고 긴 천을 접어 두르고 호박으로 만든 장식을 허리춤에 묶은 이였다. 소년처럼 귀 모양이 날렵하고 눈매 또한 곧고 서늘하여 상당히 냉랭한 인상을 주는 사내. 그는 볕이 내리는 바깥에서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으며 아이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하지만 어제도 비릿한 냄새가 났는걸요." 아이는 신경 쓰인다는 듯이 풋풋한 티가 나는 볼을 우물거렸다. 그에 묵묵히 입구 언저리를 살피던 시선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는 그의 낌새를 눈치채고 어깨를 움츠렸다.
"죄송해요…,"
잠깐의 망설임, 쥐어짜듯 나오는 고백. 두 감정이 뭉개지며 새어나온 목소리에 보랏빛 동공이 낮은 채도로 사그라든다. 그리 입구 쪽으로 가지 말라 일렀건만. 마음 같아선 따끔한 충고라도 서너 번은 하려 했으나, 사내는 제 경고를 무시한 아이의 머리를 가만 바라보다 다시금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애당초 혼날 것을 알면서도 생명의 경중을 더욱 따진 아이를 꾸짖을 생각 따윈 없었다. 다만 제 곁을 떠나기 싫은 양 할일을 놓고 있는 게 마뜩잖을 뿐.
"찾아보마. 이제 수업 시간이니 가서 네 본분을 하거라."
"네에."
아이는 혼날세라 조급한 투로 답하며 벌떡 일어났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는 내가 몇 세대나 뛰어넘은 줄 알기나 하는지. 아이가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야 벌어진 책등을 다시금 바로 펴며 편히 기댄다. 저 아이처럼 가끔씩 엘프라는 종족과 본인의 수명에 대해 무지한 아이들은 늙지 않는 어른의 나이를 혼동하곤 했다. 심한 경우는 성장 중에 연정을 품기도 할 정도로. 따스한 볕에 나른히 하품을 하면서도 의자에 팔꿈치를 얹어 비스듬이 등을 눕혔다.
"뭐…, 저것도 한 순간이지."
엘프란 모름지기 어머니 모수의 뿌리에 근원을 둔 종족이다. 그런 '엘프' 사이에서도 작은 단위의 가족 개념은 존재했다. 긴 수명에 대부분은 평생의 반려보다 개인의 삶을 이어가는 빈도가 높은 편이나, 유별나게도 부부를 이루는 자들도 종종 나타난 덕분이었다. 그 중 모수의 가지에 서로의 마력을 불어넣어 하나의 결실을 만들어내면 그 아이를 곧 자식이라 불렀는데 이는 한 나무에서 맺는 과실의 이파리 무늬가 다 다르듯 엘프들도 저마다의 마력 체계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유별난 이들의 애정으로 태어난 아이가 유독 말 못할 감정으로 웃어른에게 친근히 굴 때마다 아이의 어미는 잘 익은 사과와 포도주를 들고 찾아와 연신 사과하곤 했다. 머리가 크면 나아질 거라며. ―물론 그녀의 주장대로였다. 각자의 마력 총량에 따라 수명이 갈리는 종족인 만큼 장로로 우뚝 선 자리야말로 오랜 지혜와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하여 아이들은 성장하며 주변의 어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자각하고 '언급하기 부끄러운 과거' 정도로 묻는 게 일반적이었다. 겉모습에 홀리기 쉬운 어린아이의 실수. 한 50년쯤 지나면 저 아이도 곧 어른 공경하는 법을 알리라.
"피 냄새라……."
그래도 한 번 찾아보는 게 좋겠지. 본래 먹고 먹히는 자연의 순환에 손 대는 짓은 달갑지 않으나, 며칠 동안 상처 입은 채 천천히 죽어가는 몰골을 내버려두는 짓 또한 인도적이지 못하다. 여러 잡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기 시작하자 곧 책 속의 철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못하고 붕 떠버리기 시작한다. 아, 나도 성정이 많이 누그러졌군. 무덤덤하던 입가가 헛웃음이 흘렀다. 읽고 있던 책을 덮어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올려두고서 산책이라도 하듯 숲으로 향했다.
거대한 벌레와 날카로운 독니를 가진 이들을 고루 품은 숲은 모수 사이로 쬐는 햇살과 달리 새까만 입을 지닌 듯 불길하기 짝이 없는 빛깔이었다. 손 안에 남아나는 마력으로 숲의 단단한 줄기와 가시 박힌 이파리를 옆으로 밀어내며 혈향의 근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이의 말대로 입구 가까이 다가서자 지독한 시취와 굳은 피 냄새, 그리고 이와 어울리지 않는 희미한 분향이 코끝을 찔렀다. ……분내? 눈가를 찌푸리며 마지막 이파리를 치우자 악취와 함께 분내의 원인이 눈앞에 드러났다.
"이런 곳에 아이가……."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보자기에 싸인 아기의 모습을 담았다. 작은 체구, 큰 눈망울, 무엇보다 둥그런 귀가 아기의 정체를 쉬이 알렸다. 그건 다름아닌, '인간'이었다. 눈앞에서 호흡하며 살아있는 인간. 그 옆자리엔 머릴 풀어헤친 채 죽은 여성이 있었고, 또 그녀의 주변은 기사로 추정되는 판갑의 사내가 목에 단검이 꽂힌 채 죽어있었다.
…아, 그렇군. 귀족의 것으로 판갑에 새겨진 문장을 발견하자 어찌 된 영문인지 알 만했다. 인간들이 만든 지도에서도 큰 면적을 차지하는 숲은 '세상의 경계'라 불리는 지역이었다. 대지의 끝자락,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는 미지의 영역. 다만 인간들의 시선에서 만든 '끝자락'인 탓에 정작 터를 놓고 사는 엘프 입장에선 우스울 따름이지만, 인간에겐 그리도 신비로운 지역인 모양이었다. 이런 이유로 처형이든 빚이든 무언가를 피하기 위해 '세상의 경계'까지 오면 조용히 지낼 수 있을 거라 여긴 인간들이 간혹 존재했다. 그러다 실랑이로 객사하거나 짐승의 먹이가 되거나, 혹은 환경 차이로 풀독이 옮아 죽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이들도 그런 경우 중 하나겠지. 겨우 백 년 남짓 사는 인간사란 복잡하고 기구했다.
하여 어리석은 자들의 시체를 초입에서 찾아내는 일은 기나긴 생에 놀랍지도 않은 일이요, 이 또한 자연의 순환에 맡겨야 하는 일이 분명했다. 아이는 안타까우나 인간인 이상, 우리의 손길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왜 울지도 않는지."
어미의 악바리가 영 쓸모 없진 않았던 건가. 벌레와 독사가 득실대는 숲에서 아이는 낯선 이와 시선을 마주치고도 울지 않았다. 그저 석류알처럼 붉은 눈동자를 꿈벅이며 바라볼 뿐. 숲에서 내지르는 울음 만큼 죽음과 밀접한 게 없단 사실을 영아에 불과한 아이가 알 리 만무하다. ―놓고 가면 죽을 것이다. 그러나 데려가면 화가 될 테지. 아이의 시선이 공중에서 얽혀 점차 색이 선명해질 때마다 어딘가 가슴 한 구석이 내리 눌린 듯한 거북함이 울컥였다. 마치 이대로 두고 갈 것이냐 묻듯 순하게도, 그리 맹랑하게도 한 점 울음 없이 바라본다. 그 점이 석연치 않을 뿐더러 뱃속마저 술렁거려 쉽사리 어깨를 돌리지 못했다. 본능적인 가늠질이 시야를 흐렸다.
"이리 두고 가면 원망할 테냐."
아니, 그럴 수 있을 리 없지. 한 살배기에 불과한 아기에게 감정이란 허상에 불과하리라. 그럼에도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갈수록 새빨간 빛을 머금은 아이가 재촉하듯 짧둥한 팔을 뻗어 버둥거렸다. 어쩌면 살갗에 맺히는 습기를 알아챘는지도 몰랐다. 하필 비가 한바탕 쏟아진 이후의 바닥은 질척했고 모진 구름은 아직도 부족하단 듯이 그득한 회색 물기를 머금은 채 우글우글 몰려오고 있었으므로.
그래, 이런 날씨에 널 이리 두고 가면 어린 짐승을 진창에 내버리는 꼴과 같겠구나. 오래 살면 이런 점이 아쉬웠다. 스스로를 너무도 잘 알아 예정된 결과를 의미없이 가늠하는 짓. 이미 저 아이를 품에 안고 데려갈 생각으로 가득했으면서, 무얼 그리 쟀는지. 허리를 숙여 두 손 가득 미지근한 체온을 품는다. 아이는 가벼웠고 선명한 붉음은 더욱 선량한 빛으로 휘어지며 웃음을 머금었다. 울지도 않고 그저 날 바라보며 웃는 아이라.
"넌 마치 나를 잘 아는 듯하구나."
함께 갈 테냐. 인간을 반기지 않는 자들과 정녕 함께 살 것이냐. 아이의 부드러운 볼살을 톡 건드리며 묻자 그제서야 나이에 맞는 웃음소리를 낸다. 손가락 반마디도 되지 않는 체온으로 숲의 생애를 함께한 이의 손을 그러쥔다. 희미하고 따스한 것의 체온은 오래도록 그 온도를 유지할 듯이 아주 미세하고도 기나긴 존재감을 뇌리에 남겼다. 그럼 함께 가자. 네가 버틸 수 있는 날까지, 내가 널 보호할 테니. 나지막이 읊조린 결심에 다시금 야트막한 웃음소리가 하늘 높은 가지에 맺혔다.
"인간 아이를 마을에 들이신다니요."
"이후 큰 폭풍이 불 겁니다!"
마을 깊은 자리에 우뚝 선 나무, 모수(母樹). 숲의 중심이며 엘프의 어머니 역할을 하는 거대한 나무. 모수는 고대서부터 땅에 깊이 박아넣은 뿌리 하나로 크나큰 영향을 흩뿌리는 존재였다. 장정 여럿이 누워야만 채울 수 있는 줄기는 마을을 둥글게 둘러안아 방패 역할을 했고 하늘까지 뻗은 잔가지에 알알이 엮인 씨앗은 늘 은은한 불빛을 내뿜어 한밤에도 그리 어둡지 않았다. 그 속은 마치 개미집처럼 뚫려 여러 개의 회당이 존재했는데, 가장 큰 회당은 몇 안 되는 마을의 장로들이 모여 머리를 맞대는 대회의장으로 쓰였다.
바로 지금 같은 경우가 그 쓸모였다. 가령 웬 장로 한 명이 인간 아기를 들고 나타나 마을에서 키운다고 주장한다든지, 말이다. 화려한 샹들리에처럼 씨앗이 줄줄이 매달린 대회의장은 아닌 밤중에 긴급 회의에 참석한 장로들로 붐볐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으로 주린 배를 붙들고 모여든 장로들은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자 이젠 졸도라도 할 듯이 이마나 뒷목을 짚고 있었다.
"셰 위,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건 용납할 수 없소."
"성인이 되면 내보낼 예정입니다. 저도 인간이 죽을 때까지 키울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돼요!"
도통 늙는 일이 없는 엘프들의 외모란 실로 개인의 취향에 기반했다. 그들 중 몇은 인자하고 고지식한 현자의 기품을 뽐내고 싶어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장로도 있었고, 반대로 팔팔한 체력과 재빠른 몸이 좋아 십 대 소년의 모습을 한 장로도 있었다. 다소 개성적인 대회의장의 중앙, 오랜 시간에 걸쳐 이모저모 다 경험한 논란의 장로는 흡사 질린다는 양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즘 어린 것들이 더하다더니, 어째 사고력이 얼어붙은 도토리보다 딱딱하다. 그와 긴 시간을 함께한 장로 몇 명만이 시선의 의미를 알아채고서 어물쩍어물쩍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대의 책임이 곧 우리의 책임이란 걸 잊으셨소."
"그래. 한 가지에서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책임을 나눈단 말이야."
셰 위, 마을에서 세 번째로 오랜 시간을 산 장로는 이렇듯 엘프들이 자신과 한 몸인 양 굴 때마다 우습기 그지없었다. 보라, 말만 맞는다면 한 침대까지 쓸 것 같은 태도 아닌가. 이미 한 차례 서늘하고도 따가운 눈총을 받아 넘긴 장로들은 이제는 옆자리 장로까지 진정시키며 성난 엉덩이들도 붙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이들이 못 이긴 척 헛기침하며 착석했을 무렵, 마을의 대장로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나이의 무상함을 온몸으로 겪은 이. 그는 일부러 주름을 멋들어지게 만든 노인의 모습도 아니었고 움직이기 편한 아이의 모습도 아닌, 그저 제 나이에 알맞다 여기는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마을의 대장로에게만 전해지는 모수의 지팡이를 든 채.
"추후 마을에 해가 된다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겠는가."
"물론입니다. 그저 짐승의 새끼를 거둬 기르듯 키우겠단 뜻입니다. 인간은 인간의 세상으로 보내야지요."
"…하면 허락하겠다. 부디 오늘의 발언을 잊지 않길 바라네."
대장로님! 곳곳에서 만류하는 목소리가 커졌으나 대장로는 지팡이를 어깨보다 조금 높은 정도로 들어올려 논란을 종식시켰다. 이미 끝난 논의에 더이상의 이견은 듣지 않겠다는 듯이. 평소 온화하나 내린 결정에 토를 다는 행위 만큼은 반기지 않는 대장로의 성격이란 마을 내에서 자자했다. 이를 아는 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대장로는 그들의 지도자였다. 이 거칠고 어려운 자연의 섭리 속에서 수십, 수백, 수천 년의 지혜로 자연을 이해한 자. 논의 따위는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일 뿐, 대장로의 판단 하에 이루어지는 투표가 아닌 이상 그의 결정은 절대적이었다. 장로들은 모르쇠로 아기의 투실한 볼살이나 만지는 논란의 중심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이름은 정했는가?"
대장로의 마지막 질문에 보랏빛 눈동자가 하얗고 붉은 아이를 시야 가득 담는다. 비록 힘들었는지 석류알 같은 눈동자는 폭 감긴 채 잠들어 있지만 아직도 눈앞에 그 선명함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그는 한 팔에 든 아기의 뺨과 눈가를 살살 문지르며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입가에 맺힌 잔잔한 미소는 적잖이 아기를 예뻐하는 모습이었으나, 그의 평소 성정을 아는 장로들은 어렵지 않게 기색을 알아챘다. 저 놈, 이제 막 지은 게 분명하다.
"백 인. 우선 하얗고… 칼을 박아넣은 어미의 힘으로 살아남았으니, 백 인이라 짓겠습니다."
"그건 우리의 작명법이 아닌가."
"이름 따위가 무어 중요하겠습니까. 밖으로 나가서 마음에 안 들면 바꾸겠지요."
바꾸지 않으면 그것도 나름 괜찮겠군요. 그의 흰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이제부터 인간과 함께 살 마을 아이들을 떠올린 장로들은 결국 하나같이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장로님. …계세요?"
탐탁지 않았던 아이의 어미, 셴은 어느 날을 기점으로 사과와 포도주보다 푹 끓인 야채 스튜나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가져오는 일이 잦아졌다. 바로 그 엄하시다던 세 번째 장로님께서 인간의 아이를 데려오셨다지. 그녀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굴뚝을 한 번, 두 손에 꼭 챙겨 온 스튜를 한 번 번갈아 보고서 조심스럽게 현관으로 들어섰다. 항상 책을 읽거나 마을 일지를 쓰던 이의 집안은 어느덧 고즈넉한 종이 향기보다 포근한 이불 향으로 덮힌 지 오래였다. 겨우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뀐 변화에 생경해진 셴은 부엌 한 구석에 스튜 그릇을 놓고서 요리책에 구멍이 뚫릴 만큼 노려보고 있는 남자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남자는 밤이라도 내려앉은 듯 새까만 머리칼을 정돈조차 못한 채 무언가 골몰히 고민하는 듯했다.
"장로님?" 셴이 그를 부른 찰나, 그녀는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쥔 칼을 보고서 몇 마디 조언을 건네고자 결심했다. 아무리 긴 수명을 살고 지혜에 통달한 장로라고 하나, 그녀가 알기로… 저 모습은 요리라곤 해본 적 없는 초보의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아기의 입은 여리니 잘못하다간 화상이라도 입을까 걱정이었다.
"아…, 셴. 이번에도 나눠주려고 온 건가. 항상 수고가 많아."
"저희 애가 장로님께 실례하는 일도 많잖아요. 그리고 아무래도 인간, 아니… 인이의 상태도 궁금하고요."
셴은 여전히 울지도 않고 맑은 눈망울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아기를 향해 고갤 돌렸다. 장로님의 중얼거림대로 맹랑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사내는 쥐고 있던 칼을 식탁에 내려놓고서 아이의 턱에서 조금 기울어진 이불을 다시금 덮어주었다. 말랑하고 작은 입술을 톡 건드리는 것도 잊지 않고. 입가에 미미하게 퍼진 미소가 그의 유난한 애정을 고이 보여주는 듯했다. 셴은 평생 고고한 독수리처럼 혼자서 살 것 같던 그의 변화가 썩 나쁘지 않다고 여겼다. 분명 일 년 전까지만 해도 찬 바람이 쌩쌩 불었던 사람이 이리도 온화하다니. 두 사람을 바라보던 셴은 절로 풀어지는 입가를 모른 척 당기며 부엌을 돌아봤다. 그런데 말이지…. 셴은 여전히 골몰한 본새의 사내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우선은 스프에 가까운 걸 먹이는 게 좋아요, 장로님."
"셴…. 나도 아기에게 이가 없다는 건 안다."
"그런데 칼은 왜 들고 계시는 건지…."
그는 셴의 질문을 듣자 눈앞이 암담해져 부쩍 늘어난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항상 무언가를 준비하고 대비하며 미래의 풍파를 고민하는 이였기에. 주민들의 머리 위에서 결정 내리는 장로란 그런 습관이 들어야 하는 자리였고, 이는 어느 날 충동적으로 데려온 인간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답지 않게 뭉근히 앓는 소릴 내며 꾹꾹 눌러 폈던 요리책을 도로 덮었다. 엘프의 시간 감각으로 봤을 때, 저 아이는 분명 눈 깜빡할 사이에 자라나 두 발로 걷고 달리며 곧 아비의 키보다 커질 테지. 스스로 사고할 때 즈음엔 인간의 세계를 궁금해 하며 떠날 것이다. 그러니 늦기 전에 어서 필요한 걸 준비해두는 게 옳았다. 이 일련의 사건은 미숙한 아비이자 부족한 스승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 그리고 오랜 시간 빚어진 버릇이 뒤섞여 증식하듯 불어나버린 걱정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치아가 나는 건 겨우 3년, 의지가 생기는 건 5년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수백 년의 수명을 이어 온 이의 감각으로는 당연히 발등에 불 붙은 듯 급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년은 살아가는 종족 안에서 장로라는 직분을 달 만큼 관성어린 삶에 이토록 낯선 일은 까마득하리만치 오랜만이었다. 셴은 그녀가 열매의 형태로 존재했을 무렵부터 장로 직을 이어 온 사내를, 그저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장로님. 조금… 조급하신 것 같습니다. 저,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이는 그리 키우는 게 아니에요."
"……그래, 내가 좀 급했던 것 같구나."
마침 비슷한 고민을 하던 차였다. 의외로 깔끔한 인정을 내린 이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눈만 마주치면 방긋방긋 웃는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일 년. 고작 일 년 사이에 자신은 저 작디작은 생명이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까 싶어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겨우 인간 아이가 뭐라고. 그런 예사스러운 생각과 달리 기침 소리 한 번이면 화들짝 놀라 새가슴으로 마음 졸이는 일이 많았다. 마음이란 게 이리도 갈대 같은 것이었던가. 근심이면 근심, 걱정이면 걱정. 그런 만면의 감정이 오르는 장로의 얼굴을 바라보던 셴은 결국 참고 있던 웃음을 터뜨렸다.
"안 되겠네요. 제 비법을 전수해 드려야겠어요."
"…부탁하마. 마을에 아이를 가진 이가 별로 없으니."
존재 자체가 숲과 다름 없는 모수의 열매는 한여름의 나뭇잎처럼 우후죽순 맺히지만 전부 엘프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엘프란 본디 순도 높은 마력의 결정체로, 지성을 지닌 생명은 미지의 조건 하에 생겨났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지내 온 대장로조차 그 조건이 무엇인지 모른다 하니, 인위적으로 '자식'을 만드는 게 아닌 한 그저 점지하듯 생겨난다고 보는 게 알맞았다. 지금도 아이들이 열 명 안팎밖에 되지 않는 상황에 셴의 도움은 사실상 불가피했다. 일 년이 지나도록 익숙해진 육아라곤 아이를 품에 부드러이 안는 일, 묽게 희석한 음식을 흘리지 않게 입에 넣어주는 일 따위였으므로.
"그래서 제가 추천드리는 건…."
이후 셴은 검을 잡듯 힘 실린 검지를 풀어주며 식칼 쥐는 방법과 영양가 높은 과일이 무엇인지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강의를 가르치고 나서야 뿌듯한 듯 이마를 쓱 훔쳤다. 마치 일 년 내내 부산스럽고 요란한 육아가 마음에 걸렸다는 듯이 아주 열정적인 지도였다. 그 덕분에 하나뿐인 수강생은 죽어났지만. 셴은 수업을 끝내고 돌아갈 채비를 할 적에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못 다한 수다를 떨듯 연신 떠들어댔다. 그는 셴의 조잘거리는 소리를 익숙하게 한 귀로 흘리며 안아 들었다. 어느새 저녁이 다 되어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던 아이는 안아주기만 한 게 무엇이 그리 좋은지 꺄르륵, 말간 웃음을 지었다. ―신기한 아이. 작게 오물거리는 입에 미지근히 식힌 스튜를 흘려주던 차, 채비를 마친 셴 또한 아이의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저 아이의 행동에 대한 사과, 과일보따리를 건네고 바삐 돌아가기만 하던 이가 이리도 친근히 굴기 시작한 것도 인이를 데려온 이후였다.
"그런데 장로님께서도 진심이시네요. 사실, 좀 걱정했거든요."
"걱정할 일이 무어가 있다고."
"장로님은 원래 새떼가 지나가든 애가 뛰다 넘어지든 별 관심 없으셨잖아요. 장로의 의무만으로 살아가셨으니까…."
"……."
기이하게도 그녀는 이따금 계속 지켜봤다는 듯한 어투로 말하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은 듯이 웃어넘기며, 이번에도 잔잔히 미소 지어보일 뿐이었다.
"그런 무심한 분이 왜 아이를 키우려고 하셨을까…."
"그만 돌아가거라. 시간이 늦었어."
"네에."
그녀는 재빠르게 짧은 대답을 남기곤 가벼워진 가방을 어깨에 둘렀다. 하여간, 그 아들이 누굴 보고 배웠는지 알 만했다. "그럼 다음엔 과일 꿀절임을 들고 올게요." 셴은 음식을 다 먹어 나른해진 아기의 볼살을 살살 문지르곤 다음을 기약하는 인사와 함께 노을 지는 땅거미 속으로 사라졌다. 셴, 그녀의 친근함은 퍽 괜찮은 이득을 가져다 줬으나 오늘처럼 주제 넘은 관심을 보일 때마다 급히 피곤해지곤 했다. 희미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 바라보던 중, 품에 안은 아이가 졸음 섞인 얼굴로 뒤척거리자 서둘러 문을 닫았다. 한참 시끄러웠던 이가 사라지고 나니 반쯤 감긴 눈망울로 올려다 보는 아기와 자신만이 고요한 정적에 남았다.
"그러게 말이다. 내가 왜 너를 키우려고 했는지…. 벌써 일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알 수 없구나."
아우, 하는 치아 빠진 소리에 비식거리는 웃음이 샌다. 아니, 어렴풋이 알 법도 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말도 안 되는 육아를 하고 있었음에도 한 번도 울지 않고 무엇이든 좋다는 양 웃어주는 아기를, 어찌 사랑스러워하지 않겠나. 습관적으로 복숭아빛 입술을 가만 만져보던 그때, 언뜻 손끝에 걸리는 게 있었다. 여린 살갗을 조심스럽게 열어 속을 살피자 희멀겋고 둥그런 게 보였다.
"이런…, 치아가 나기 시작하는구나. 인간의 나이는 가늠하기가 힘드니, 원."
이미 주웠을 무렵부터 두 살은 됐던 걸까. 이 순간을 즐길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아쉬워졌으나, 어서 이 아이와 유의미한 대화를 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다. 이래서 먼 훗날에 아이를 인간 세상에 내보낼 수는 있을지. 이 또한 앞선 걱정에 불과할지언정 반년 전부터 마음 한 구석을 살살 흔드는 고민이었다.
"인아, 그만 자자꾸나."
졸린지 고개를 까닥거리는 아이의 고쳐 안고서 한동안 등을 토닥거리며 침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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