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아름다움에게

Violet space by 린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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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떻게 말해야 하지. 난 그냥…,

그냥 네가 좋았어.

예쁘고, 활발하고, 똑똑하고. 나한테는 없는 것들을 네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너랑 친하기라도 했다면 별 용건도 없이 먼저 연락하고 그랬을 텐데. 그런데 친하기는 커녕 우리 대화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어. 그마저도 다 네가 먼저 말을 걸었지. 나는 반에서도 서너 명 정도의 친구들과만 어울렸고, 너는 반 친구들 모두와 두루두루 잘 지냈지. 같이 다니는 무리는 따로 있어도 다른 아이들과도 시시콜콜 장난을 치기도 하고 어색하지 않게 잘 어울렸잖아. 그런데도 나한테는 괜히 선을 지키는 것 같고 나를 어려워하는 것 같아서 꽤 서운하기도 했다? 학기 초쯤에 친구가 그러더라고. 반 친구들이 나를 무서워한다고. 내가 조용한 성격이라 그런가. 사실 그런 말 잘 신경 안 쓰는 편이었는데, 그 말 듣자마자 왠지 네가 생각나더라고. 너도 나를 무서워하나, 나한테 다가오기 꺼려하나.

나는 원체 다른 사람들한테 먼저 다가가는 걸 못 했고, 게다가 널 좋아하고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더 못 다가가고 티도 못 내고 그런 사람이더라. 그래서 우린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이로 계속 남았고 그냥저냥 시간이 지나갔지. 그래도 난 다음 학년으로 올라가서도 가끔 복도에서 너 보면 혼자서 움찔하곤 했어. 너는 나라는 애가 있었다는 것도 진작에 까먹어 버렸을지 모르지만. 나한테는 네 존재가 아직도 남아있거든.

지금도 좋아한다는 건 아니야. 그냥…. 그냥 그랬다고. 말하고 싶었어. 그런데 친하지도 않고 대화 몇 번 한 게 다인데 갑자기 고백을 할 수는 없잖아. 지금은 그래도 조금은 친해졌으니까. 좋아했다는 말을 할 정도는 된 것 같아서. 그래서.

애매하게 말을 끝맺어버리고, 어색해진 분위기에 괜히 말을 꺼낸 것 같아 후회가 되었다. 혼자 너무 들떴었나 봐. 별로 친하지도 않던 동창과 우연히 다시 만나서 학창시절보다 훨씬 친해진 것뿐인데. 아무것도 아닌, 그저 다른 사람들에게도 흔한 상황일 뿐인데. 많이 당황한 듯, 멍하니 얼어있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조용히 그의 잔에 내 것을 부딪었다. 그리고 한 잔의 술을 모두 입에 털어넣었다. 알코올 특유의 찌릿하게 쓴 맛이 목구멍을 울리며 지나갔다. 술을 잘 하지 못하는데도 네가 부르니 이렇게 또 달려나왔다. 난 아직도 너한테 잘 보이고 싶나 봐.

“갑자기 말해서 미안. 그냥 못 들은 걸로 해도 돼. 너 불편하면 이제 연락 안 할게.”

“아니, 아니야. 괜찮아. 안 불편해.”

나는 그저 작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넌 학생 때도 다정한 사람이었지. 장난스럽기도 하고 활발한 아이였지만 또 그만큼 생각이 깊고 진지한 아이였다. 그러니 친구에게 안 좋은 말 한 마디도 제대로 못할 수도 있지. 나는 너 안 좋아해. 미안, 난 너 그렇게 본 적 없어. 뭐 이런 말들이 나오려나 생각했었는데,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잠시 잊고 있었네. 그는 내가 했던 것처럼 내 잔에 자신의 것을 짠, 하고 부딪었다. 그리고 그 한 잔을 한 번에 삼켰다. 그러나 나와는 달리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네 이야기 했으니까 나도 내 이야기 할래. 너도 아무 말 말고 들어.”

나는 또 한 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으로 테이블에 팔을 걸치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의 눈을 마주치는 것이 이젠 조금 익숙해졌다. 언제 봐도 참 예쁘네.

“내가 널 무서워하나 싶었다고 했지. 어, 맞아. 나 사실 너 좀 무서워했어.”

솔직히 좀 놀라웠다. 진짜 나를 무서워했다니. 대체 내가 왜 무섭냐고 물으려는데 그가 쉿, 하며 검지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입을 달싹거리기만 하다 다시 꾹 다문 채로 그의 말을 기다렸다.

“그냥, 넌 뭔가 분위기가 있어. 아우라라고 해야 되나. 좀 다가가기 어려워 보였어.”

그가 내 표정을 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친해지고 보면 이렇게 재밌는 앤데. 키도 작은 게 어디서 그런 아우라가 나오는 거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 말에 또 발끈하여 뭐라 받아치려다가, 아무 말도 하지 말라던 것이 생각나 꾸욱 입을 다물었다. 그는 그걸 보고는 또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어?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키 작다고 놀리냐?”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는 씩 웃으며 물컵에 술을 가득 따라 건넸다.

“말하지 말라니까. 너 말 한 번 할 때마다 이거 한 잔씩 마시기.”

“그런 게 어디있어.”

“이번엔 봐줄 테니까 이젠 조용히 내 말만 들어. 앞으로 또 말하면 안 봐줘.”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물컵 가득 따른 술을 진짜 물이라도 되는 듯 벌컥거리며 마셨다. 그러고보니 우린 이것도 달랐다. 나는 술을 잘 못 마셨고, 그는 술을 잘 마셨다. 나는 조용히 집에서 홀로 술을 마시는 걸 좋아했고, 그는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생긴 것부터 해서 죄다 다르구나 우린. 금방 물컵을 비운 그가 그것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나 취한 거 아니야. 이 정도로 안 취하는 거 너도 알지?”

고개를 끄덕이니 그가 따라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근데 있잖아.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너한테 말 걸고 싶어졌어. 너랑 같이 다니는 애들 있잖아. 걔들이랑 있을 때는 너 엄청 말도 많고 웃기도 많이 웃고 했거든.”

나는 그 당시 친했던 친구들을 떠올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 대학교를 다 다른 곳으로 가면서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는 이젠 자연스레 멀어지게 된 친구들. 같은 동네에서 살아서 초등학교도 같은 곳을 나왔고, 중학교도 같은 곳에 다녔고. 그러니 고등학생 때는 엄청 가까운 사이였는데. 그 친구들을 생각하니 조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내일 연락 한 번 해봐야겠다. 잠시 딴 생각으로 빠져있다가, 그가 다시 말을 이어나가는 덕에 잡생각을 떨쳐내고 집중했다.

그거 보니까 왠지 너랑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근데 다른 애들한테 하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가는 게 안 되더라. 그 아우라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너한테는 쉽지가 않았어. 나 좋아한다고 했지. 난 네가 나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내가 애써 말 한 마디 걸어도 너는 얼떨떨하게 대답하고는 금방 자리를 피했잖아. 그러니까 괜히 오기 같은 게 생겼는지, 꼭 너랑 친해져야지 싶었거든. 근데 내가 말 걸 때마다 그러니까 너는 나랑 친해지기 싫나보다 했어. 계속 친한 척 하면 진짜 네가 날 싫어할까 봐 그러지도 못 하고. 괜히 너랑 친한 애한테 더 친한 척 하고 장난치고…. 그래도 너는 별 반응이 없어 보이고, 가까워질 기미도 안 보이고. 그래서 그냥 됐다 하고 관두려 했거든. 근데 너 ○○이 기억나지. 너랑 같이 다니던 애들 중에 한 명이었잖아. 둘이 맨날 붙어 있고, 무릎 위에 앉아 있고. 강당에서 뭐 할 때마다 꼭 둘이 앞 뒤로 앉아서 네가 걔한테 기대고 너는 걔 끌어안고 있고. 그런 거 보니까 못 그만두겠더라. 나도 너랑 그만큼 친해지고 싶었어. 그때 이미 너 좋아하게 됐나 봐. 그때는 몰랐는데. 아무튼 그러고나서도 전이랑 달라진 건 없었지 우리. 가끔씩 겨우 너한테 말 한 번 붙여보고, 너는 전처럼 어색해하지는 않았지만 대화는 금방 끝나버렸고. 그렇게 일 년이 끝났고, 우린 다른 반이 됐고. 이번에도 너랑 같은 반 되면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야지 했는데. 결국 우리 딱 한 번 같은 반 된 게 다였지. 다른 반으로 갈라지고서는 오다가다 가끔 너 봤는데, 그럴 때마다 옆에 있는 친구들이랑 너무 친해보이더라. 웃기도 잘 웃고 말도 많이 하고. 친구가 어깨에 팔 걸치는 것도 그냥 가만히 두고. 너 내가 그러는 건 금방 쳐냈으면서. 아무튼. 우리 반 갈라지고 나서 슬슬 깨달았어. 내가 너 좋아하는구나. 처음에 무섭다고 생각했던 그 분위기가 점점 끌렸던 것 같아. 근데 그걸 깨닫고 나니까 전보다 더 너한테 다가가기가 조심스러워져서, 이젠 같은 반도 아니고 접점도 없는데 대뜸 친한 척하기도 좀 그렇고…. 결국엔 아무것도 없이 졸업하고, 그렇게 끝나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서 너 다시 만났을 때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했어. 그때나 지금이나 너 그 분위기는 그대로거든. 이렇게 친해진 것만으로도 난 좋았는데. 갑자기 이렇게 고백을 받아버릴 줄은 몰랐네. 네가 나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그때 좀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거였는데. 좀 아쉽다.

내 얼굴을 보며 씩 웃어보인 그는 소주잔이 아닌 물컵에 술을 따랐다. 가득 채우지는 않았지만 반 정도 채우고는 그걸 한 번에 꿀꺽꿀꺽 넘겼다. 조금은 씁쓸해 보이는 표정으로 컵을 내려놓은 그는 애써 웃어보이며 내게 이젠 말을 해도 된다 허락했다. 그러나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너도 날 좋아했다고…?”

멍해진 머리로 겨우 문장을 생각해내 입밖으로 뱉어냈다. 그는 가만히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어니라고? 그럼 뭔데, 내가 착각한 건가…. 한층 더 멍해져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그가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방금처럼 애써 지어보이는 그런 웃음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올라가있는 입꼬리가 새삼 예뻤다.

“좋아했던 것도 맞는데, 좋아한다는 게 더 맞지.”

“그게 무슨…. 야, 너…, 너 지금도 나 좋아해…?”

“너 학생 때 다른 건 몰라도 국어는 잘했던 것 같은데.”

“그럼 너는 지금 만족해?”

그가 무슨 뜻이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그는 소주잔을 두고 또다시 물컵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그가 술병을 내려놓자마자 잽싸게 그 물컵을 집어들었다. 반 조금 넘게 찬 술을 모두 탕에 쏟아버리고 내 앞에 컵을 내려두었다.

“술 먹지 말고 조금이라도 제정신으로 얘기해. 너 지금 나랑 친구라서 좋아?”

“뭐…, 그렇지. 학생 때는 머뭇거리느라 제대로 말도 못했는데 지금은 별별 얘기 다 하고 있잖아.”

“…. 나는 안 좋아. 너랑 친구인 거.”

그의 눈이 똑바로 나를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듯 조금 커진 두 눈. 티나게 굳은 얼굴 표정. 그런 그를 나도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제는 조금 보이는 것 같다. 그 표정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

“지금은 안 좋아한다는 거…, 그거 네 표정이 너무 안 좋아보여서 거짓말한 거야. 근데 너도 나랑 같은 마음이면…. 그럼 나 친구로 만족 안 할래.”

조금 놀란 듯이 커진 눈. 안 그래도 큰 눈을 그렇게 똥그랗게 뜨고 있으니 더 예뻤다. 그와 친해져서 시답잖은 얘기들로 대화를 하고 매일 연락을 하고 함께 공부를 하거나 같이 놀거나. 그런 장면들을 늘 상상했었다. 그러나 내 상상 속에서도 그가 날 좋아한다는 가정은 없었다. 그런 일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조차도 못했었다. 그에게 나는 그저 기억이 희미한 고등학교 동창, 혹은 이미 잊혀진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런 그가 내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를 특별하게 여기고 있었을 줄이야. 머리도 마음도 하나같이 멍했다. 심장마저 멈춘 듯이 아주 고요했다. 생각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심장도 요란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좋아했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털어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된 것만으로도 이미 만족했었는데, 벌써부터 더 욕심이 났다. 이번엔 내가 먼저 다가가고 싶었다. 늘 네가 먼저 다가와 주었으니, 마지막은 내가 하고 싶었다.

“별 다른 용건 없어도 그냥 보고싶다는 말로 불러내고, 예쁜 걸 보면 네 생각이 나서 샀다고 별다른 핑계 없이 선물해주고, 친구끼리도 이런 걸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손 잡고 끌어안고. 난 너랑 그러고 싶어. 너도 이 정도로 나 좋아하는 거면….”

“응, 좋아. 우리 만나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활짝 웃어보였다. 결국 마지막 한 걸음도 네가 와줬구나. 그의 얼굴을 보며 나도 자연스레 웃음이 나왔다. 학생 때는 너를 좋아해서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했는데, 널 좋아해서 다행이야. 너를 좋아해서 행복해. 나는 그의 잔을 가져와 내 잔의 왼쪽에 두고, 두 잔에 모두 술을 따랐다. 오른쪽의 잔은 그에게 건네고, 왼쪽의 잔은 내가 들었다. 잔을 든 손을 그에게 내밀자 그는 웃으며 잔을 부딪었다. 서로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와 함께 그의 눈을 마주했다. 한 잔 가득 채운 술을 남김없이 모두 목구멍에 흘려보냈다. 찌릿한 쓴맛이 기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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