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다알캐스구다] 어떤 성탄절의 만찬

인리보조장치의 ■■

好きなヒト by 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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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B6 스포일러 및 설정 날조有


문득 눈이 떠졌다.

습관처럼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 후지마루 리츠카는 보이는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연분홍빛 꽃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리츠카 본인은 얕은 연못에 풀썩 앉아있었는데, 기이하게 차갑거나 찝찝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연못 주위에는 빛들이 불규칙적으로 깜박거려 이곳의 신비로움을 돋구고 있었다.

막 깨어났을 때는 모르는 장소라고 생각했었는데 자세히 보니 그런 것도 아니였다. 리츠카는 조금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언젠가의 여행에서 이와 비슷한 곳을 간 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음, 여행? 기시감이 든다. 지나치게 머리가 맑고 가벼웠다. 손을 움직여보았다. 열 손가락 하나하나 감각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리츠카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름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또렷이 기억나는 게 없었다. 마치 뿌연 안개라도 머리에 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막연히 닥쳐오는 공포감에 소리를 내지르려고 했지만, 입술이 딱 붙어버린 것처럼 움직여이지 않았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는 바람에 이젠 아예 앉은뱅이의 자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적어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이 땡땡 울리며 알렸다.중앙에 우뚝 선 탑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한 리츠카는 이내 마음을 굳혔다. 일단 움직이자. 신발에 흠이 진 곳도 없고, 이곳에 태양은 보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당장 어둠이 찾아올 것 같진 않으니 움직이지 않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렇게 막 일어나려던 순간이였다.

 

"마스터, 이곳에 계셨군요.“

 

리츠카는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눈을 굴려 제게 말을 건 이를 바라보았다.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가 눈이 마주치자 연둣빛 눈망울을 곱게 휘어주며 마주 보아주었다. 늘어뜨린 금발과 이마 정중앙의 표식을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 기사님 같은 존재. 익숙하지만 낯설게 느껴지는 존재를 홀린 듯이 쳐다보던 리츠카는 입술을 달싹여 머리에 맴돌던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이게 이름이 맞는지 아닌지의 확신도 없었지만, 누군가가 지금 당장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으라고 속살거리는 것 같았기에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아르, 토리아?"

"네, 주인. 당신의 검입니다. 그나저나 우선 일어나셔야겠습니다. 아무리 낙원의 연못이라 하지만 그대로 계시다간 감기에 걸리겠는걸요."

아냐, 나는 감기에 걸릴 수가 없는데.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반박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못했다. 방금 이름을 불렀으니 입술이 움직여진다는 것을 확인했는데 또다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게 이상했다. 움직여지지 않는 입을 제외하고도 논리적으로는 제 앞의 아르토리아의 말이 맞는데, 리츠카에게는 기묘하리만큼 강렬한 확신이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절대 감기에 걸릴 수 없을 거라는.

하지만 왜지? 또 다시 낯선 느낌이 리츠카를 덮쳤다. 다행히 아르토리아는 이상함을 딱히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는 사이에 다정한 손길이 리츠카에게 와닿았다. 아르토리아의 단단한 오른손이 리츠카를 힘껏 붙잡고 그대로 끌어올렸다. 눈 깜빡할 사이에 힘 하나 들이지 않고 리츠카는 연못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손이 조심스럽게 붙잡힌 채로 걸음을 옮기자 아무 무늬 없던 고요한 연못에 리츠카를 중심으로 동그라미가 생겨났다. 무심코 그것에 시선을 주던 리츠카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무슨 일? ... 무언가가 이상했다. ‘후지마루 리츠카’는 확실한 기시감을 느꼈다. 아까와 똑같은 느낌이였다. 분명 상황에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리츠카는 그 문장을 내뱉으려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기억도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되는대로 말을 내뱉고 있는 상황이 정상적일 리가 없었다. 심지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턱턱 막혔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상황 같았다. 도움을, 청해야겠다. 리츠카가 아는 ‘후지마루 리츠카’라면 응당 그랬을 것이다. 입술을 달싹여 말을 꺼내려는 순간에 귀에 꽂히는 음성만 아니였다면, 그 내용이 조금이라도 달랐다면 그대로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야, 오늘은 마스터의 생일이시잖아요. 성탄절은 가볍게, 맞죠? 아까 미리 말씀드렸다 싶이 아발론의 가장 높은 탑 위에 좋은 자리를 마련해두었어요.“

 

아, 그렇구나. 번개 같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쳤다. 방금 들은 내용을 복기하던 ‘리츠카’는 역시 상황이 이상하다는 질문은 그만두기로 하였다.

 

”내해의 풍경을 바라보며, 조용하게 식사를 해요. 식사를 하고나면 피크닉이라도 갈까요? 지금 보시는 것과는 똑같은 풍경이겠지만 그래도 이야깃거리와 맛있는 간식만 있다면 충분히 즐거울거에요. 거기다 여기는 방해도 없으니까.“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면 지금 리츠카의 눈 앞에 있는 아르토리아의 감정이라던가, 생각 같은 것들. 그러고 보니 처음 일으켜줄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눈이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득 상기해냈다. 아르토리아도 마찬가지네, ‘리츠카’ 는 소리없이 크게 웃었다. 더이상 이 현상을 복잡하게 분석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알아차리자 머리에 따라서 마음도 가벼워졌다. 어차피 상황은 알아서 자연스럽게 흘러갈테니, 지금의 ‘리츠카가’ 무엇을 할 필요는 없었다. 애초에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좋은 생각이야! 배는 부르겠지만 역시 피크닉 간식이라면 샌드위치가 좋을까?“

또 생각하지도 않는 말이 튀어나갔다. 이제는 멋대로 입술이 움직인 것에 딱히 공포심이 느껴지지 않는다. 하고 싶은 말을 하려 해도 움직여지지 않던 입에서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올해는 상황파악이 조금 느렸던 것 같다. 아르토리아가 즐겁게 말을 맞받아치는 것을 듣고 착실하게 대답을 해주며, 리츠카는 소소하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

올해도 찾아와줬구나, 주인?

*

리츠카는 아르토리아의 마술 덕에 순식간에 탑을 올라올 수 있었다. 아르토리아의 생각보다 빠르게 고공해서 그런지, 아르토리아는 리츠카를 걱정했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당사자는 하나도 놀라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이 나갔다. ‘후지마루 리츠카’는 굉장한 인간이기는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보통의 인간이였으면 꽤나 놀랐을텐데! 존재의 과거를 더듬어보는 일은 즐겁다고 생각하며, 리츠카는 아르토리아가 이끌어주는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도착한 방에서 보이는 풍경에 리츠카는 감탄을 내뱉었다.

”와....“

드물게 생각과 말이 일치하는 순간이였다. 아르토리아의 말에는 허언이 하나도 없었다.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낙원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풍경을 감상하는 리츠카를 웃음기 어린 얼굴로 바라보며, 아르토리아는 테이블 위 그릇들에 덮여있던 보자기를 회수했다. 이러다 식겠어요, 마스터. 잔잔한 웃음과 함께 들린 목소리에 리츠카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테이블 위에는 서양식의 식사가 마련되어 있었다. 토마토 수프, 포도잼과 잘 굽힌 토스트, 써니사이드업 계란과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소세지까지. 화려하진 않았다. 가볍다면 가벼웠지만, 아르토리아가 직접 만들어준 순간부터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지 않을까? ‘후지마루 리츠카’도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다. 리츠카의 입에서 채 숨겨지지 못한 감동 섞인 반응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갔으니까.

식사는 즐겁게 이뤄졌다. 아르토리아가 이야기하면 리츠카가 그것을 받고, 또 다시 리츠카가 주제를 꺼내면 아르토리아가 다시 이야기를 받는 수다가 계속 이어졌으니 당연히 즐거웠다.

그리고 언제나 즐거운 시간은 금방 지나가는 법이였다. 지금 리츠카의 손 위에 들려있던 아주 작은 토스트 조각만 먹으면 테이블 위에는 아무 음식도 남아있지 않는 셈이 된다. 먼저 다 먹은 아르토리아는 이미 냅킨으로 입가를 정리하고 있었다. 리츠카는 그것을 가만히, 냅킨이 다시 테이블 위에 놓이는 순간까지 기다리다가 빙그레 웃고서는 입을 열었다. 언제나 이 시점부터는 입 밖으로 나가는 말과 생각이 일치했으니 타이밍을 맞추기에는 편했다.

 

”주인, 기록의 열람은 여기까지야.“

 

순식간에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어이쿠야. 문득 곁눈질한 창밖은 낙원의 풍경은 온데간데 없이 단조로운 남색빛 뿐이였다. 눈 앞의 테이블의 형상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아르토리아 아발론이 입을 열었다.

”... 벌써 이 날이 돌아왔군요.“

”응, 그러게. 하여간 주인의 시간은 너무 길어. 그래도 이 기록은 몇 억년이 흘러도 소중하지? 하긴, 주인이 이 기록을 이렇게 좋아하니 기록이 스스로 생각하기까지 하는거잖아.“

 

그렇지만 이제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어. 주인의 기록이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구. 장난스럽게 이어서 말한 ‘후지마루 리츠카’는 무표정하게 변해버린 아르토리아 아발론이 빠르게 기록을 닫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

그래도 성탄절이니까, 어떻게 맞이하게 되도 매번 즐거웠지?

 

*

”...“

별해 내해 깊숙한 곳, 그저 존재하기만 하는 어딘가의 공간에서 아르토리아 아발론이 깨어났다. 인리보조장치가,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의식을 지니고 깨어나다니. 아르토리아 아발론이 가볍게 스스로를 탓하려다가 이내 관뒀다. 어차피 이런 적이 몇 번째인지 이미 셀 수도 없었다.

이제는 먼 과거가 되어버린, 후지마루 리츠카의 생일에 있던 일은 아르토리아 아발론에게 있어서 결코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았다. 어지간히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는 기억이였다. 하기사 무의식적으로 아르토리아 아발론이 일정한 기간이 흐르면 관찰도 그만두고 기록을 열람하니, 영향력을 떨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였다. 심지어는 기록을 유지시키는 무언가에 자아까지 생겨날 정도이니 그 정도가 얼마만큼인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성탄절을 무시하고 지나가는 무식한 행동은 적어도 지능과 마음을 갖게 된 인리보조장치가 할 수 없는 일이다.

후지마루 리츠카.

나의 탄생에 도움을 준 이. 그리고 한때는 제 주인이고, 제 목숨이였으며,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나’의 경애하는 인간. 그래도 결국 인간은 인간인 법이다. 후지마루 리츠카는 이미 꽤나 오랜 시간 전에 눈을 감았다. 그 영혼이 어디로 갔는지는 아르토리아 아발론이 알 수 없지만, 함께했던 기록은 언제까지나 아발론에게 있어 ‘그 애’의 기록과 더불어 중요하고도 아름다운 기록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 애’에게만 소중한 이가 아니라, 자신에게도 소중한 이와 함께했던 꿈결 같은 기록이자 기억을 잊어버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언젠가 다시 소환되는 날이 오더라도, 당신과의 기록이 나의 외견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실은 뻔했다. 그때 거울을 보면 몇 번이고 보고 들은 기록을 충동적인 그리움 탓에 속수무책으로 다시 열람하게 될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왠지 즐거운 일이였지만, 그래도 역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좋았다. 별이 멸망하기 직전이 아닌 이상 인리보조장치가 소환될 일은 없을테니까.

시덥잖은 생각을 이어나가던 아르토리아 아발론은 다시 의식을 재우기로 했다. 별을 관찰하기에는 이쪽이 편했다. 괜히 요정을 본 뜬 신체인 채로 지내는 것보다는 시야가 넓어지니까 당연한 선택이였다.

성탄절이 또 지나갔다.

아마 내년에도 성탄절만큼은 챙기겠지. 그리 생각하며, 아발론의 신체는 눈을 감았다.

고요한 무에서, 그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일어났다가 끝난 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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