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온유성

유성우

재온유성 1주년

복지사업 by 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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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여행갈까? 졸업하기 전에. 

별이 가득 내려앉은 곳으로 가자. 네가 좋아하는 별이나, 그런 것들이 많이 보이는 곳으로. 풀벌레는 좀 울겠지만, 그래도 우리 목소리밖에 안 들릴 그런 곳으로.

하루는 현장 체험학습 보고서로 대충 때우고, 주말을 껴서 3일 정도로... 졸업 하기 전에 다녀올 일정을 짜기 위해서는, 겸사겸사 학교도 빼고 다녀오려면 시험도 숙제도 없는 지금 빠르게 다녀와야지. 겨울이 더 가까워지기 전에. 혼자 이런저런 구상을 하다가 네게 천천히 생각을 늘어놓았다. 잔잔한 일상을 얘기하거나, 혹은 얘기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있는 것이 좋아 가만히 걷기만 하던 등하굣길에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추가되니 자연스럽게 붙어있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내일 빠질 거예요, 하고. 기가 찬다는 듯이 바라보는 선생님에게 자신의 것을, 그 옆에 있는 제 애인의 담임 선생님에게도 한 장의 종이를 내민다. 마침 같이 계시네요, 너스레를 떨고 네 이름이 적혀있는 종이.

사실은 네가 내는 게 맞겠지만, 기 싸움 하는 건 나 혼자로도 충분하지 않나... 그런 생각에 가는 김에 겸사겸사 내겠다며 네 종이를 가지고 왔다. 안 그래도 종종 기사를 쓴다며 자리를 비우던 신문부가, 대뜸 이렇게 또 빠진다고 현장 체험학습 처리를 해달라며 교무실에 박차고 들어왔으니 꽤 안 좋게 보였을까. 뭐 어때. 대충 웃음으로 무마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 곧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너의 1년의 시간을 볼 수 없게 되는 게 제법 아쉬웠다. 공백이라고 느껴지기도 했고, 중학교 3학년의 네 학교생활을 볼 수 없다는 게 좀 아쉬운 듯도 했다. 어떤 방식이건 네 옆에 있겠지만... 그냥 이건 내 질투심이 큰 탓이라고 해둘까. 졸업하기 전에 너와 단 둘이 여행을 가고, 둘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었기에.

***


빼곡하게 늘어진 버스들이 낡은 소리를 내며 작게 몸을 흔든다. 사소한 대화를 하며 아침 일찍 만나서 학교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지하철을 탔고, 버스를 또 타고, 중간중간 멈춘 휴게소에서는 알감자도 먹었고, 핫바도 먹었고, 어묵도 나눠 먹었다. 한 입씩 나눠먹는 애정이 있었고, 다정함이 남아서 내내 웃었다. 그렇게 걷다가, 또 버스를 타고.

이 잔잔함이 주는 행복에 더 큰 뜻이 어디 있을까. 너와 나누는 모든 순간들에 의미를 새긴다. 손깍지를 잡고 나란히 앉아 낡은 버스에서 졸던 순간은 따듯했고, 나란히 걸으면서 재잘대던 입에는 미소가 있었다. 그렇게 길을 걸어서 도착하면, 정말 시골 끝자락이어서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시골치고는 꽤 커다란 마을이어서 집들이 다 큼직하게 떨어져 있는 것도 한몫했을 터다.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저녁이어서 노을이 뉘엿하게 지고 있었는데, 밤도 아니었는데 일찍이 모난 곳을 구름에 감춰, 살짝 뜬 초승달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싸늘한 바람결에 외투를 꾹 부여잡고 잠시 숨을 참았었나. 그리고 그 순간에 네가 옆에 있는 게 너무 좋아서, 벅차서, 그냥 그런 기분이라서. 곧 네 양 뺨을 잡고 그 길가에서 입을 맞췄다.

유성아, 내가 널 생각보다 더 좋아하나 봐.

***

민박집은 아무나 쓸 수 있을 것처럼 작고 단출했다. 그래도 방 안은 금방 따듯해졌고, 굳이 이불을 깔지 않아도 외투가 푹신해서 그대로 누워서 너와 같이 마주 보았을 때, 작은 해방감을 느꼈던가. 그대로 대충 이불을 깔고 그대로 지쳐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손을 꼭 마주 잡고 나란히 그대로 잠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약간 출출했고, 따듯한 방과 다르게 시원한 초겨울의 공기가 불어왔고, 네가 내 옆에 있었고...

그런 것들이 한참 좋아서 또 마주 보고 한참 웃고,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이어가고, 어디에 갈까, 아니면 뭘 할까... 재잘재잘. 전자레인지에 데워먹는 밥은 맛있었고, 대충 구운 스팸 같은 것도 맛있었다. 전부 여행 와서 먹기에는 한참 아쉬웠지만, 그것과 별개로 어린 우리 둘만 와서 이런 저런 것을 먹었고 즐겼다는 게 즐거워서. 그리고 밖에 나가 한참을 주변에서 돌았다. 사진을 한참 찍고, 겨우 만난 길고양이를 구경하고, 그러다 보니 밤이 되어서 또 하늘을 실컷 보고. 별이 정말 무수하게 많아서, 네 눈에도 별이 박혀있는 것만 같아서 그렇다고 농담 식으로 말을 던지고, 또 사소한 농담과 작고 유쾌한 이야기들을 하고, 또 손깍지를 끼고 한참을 같이 서서 하늘을 보고.

그리고 그날 밤에는 눈이 왔다.

천천히 돌아가고 있을 때에 천천히 콧잔등으로 차가운 게 내려앉았다가, 깍지 낀 손등으로도 내려앉기에 깨달았다. 이게 첫눈이던가? 어린 아이들의 장난으로, 누가 그랬는데. 하고 말을 잇는다. 첫눈을 같이 맞으면 평생 사랑하게 된다고. 우리 앞으로도 오래오래 보겠네. 농담으로 그런 말을 가볍게 던졌지만, 결코 농담은 아니었다. 진심이야, 어디까지나 함께 하고 싶은 거. 손을 들어 작은 네 손등, 그 위에 작게 입을 맞춘다. 사랑이 이렇게 달콤하다면 평생 빠져 죽어도 좋다.

***

아주 오래 전에, 기사를 써서 돈을 벌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에. 나는 유독 자극적인 단어로만 기사를 가득 채워서 남의 시선을 팔아 먹는 직업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에. 돈에 대한 집착이 나를 낳았을까, 싶었다. 부정부패 뿐인 기자가 되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구나 싶어졌다. 그런데도 썩 유쾌한 척 굴은 것은, 그 외에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길이 별로 없어서. 그냥 돈만 벌어오면 그만인 거 아니냐며.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너를 만나고 잠시 다른 생각을 했다. 네가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하늘의 별과 달, 천체와 우주의 흐름을 보는 사람이라면, 나도 사람을 그만 보고 우주에서 영감을 받아 그런 것들에서 기사를 잔뜩 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과,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 그 간격이 멀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당장에 그런 것을 이루기에 나는 아직 어렵지만, 그냥... 너랑 같이라면 그런 것들을 좀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더라고.

어쩌면 오늘 너를 데리고 이 곳에 온 것도, 갑작스럽게 가벼운 눈이 날리는 오늘이 되는 것도, 이 모든 것이 다 운명처럼. 그런 것들을 믿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정말 이 모든 게 당연히 그랬어야만 할 일들이 일어나는 것처럼 당연했고, 또 놀라워서 자꾸만 네 손을 꽉 쥐었다.

정말, 정말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나 봐. 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찰 정도로 뚜렷하게 느껴지는 걸 보니.

그렇게 하룻밤이 하얀 눈발에 묻혀 사라진다면, 다음 날에 갈 준비를 하고 문을 열었을 때에는 자연스레 소복하게 쌓인 그 눈밭을 마주할 수 있었는데, 바닥이 정말 새하얗게 물들어서 소동물들의 발자국 정도나 남아 있었다. 짐을 다 챙기지도 않았는데, 무턱대고 그 위에 같이 나란히 누운 것은 그 누군가 물어보거나 하자고 하지 않았음에도 자연스럽게 나온 행동이었다. 마주 보고 누워서 나란히 눈을 마주했을 때, 다시금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고. 또 난 네게 사랑에 빠지고.

우리, 나중에 같이 살까?

당장이 아니라... 성인이 되거나, 뭐... 대학교에 가면 말이야. 같이 동거할까?

무턱대고 계획 하나 없이 그런 말을 내질러버렸다. 계획은 없었어도, 그냥 언젠가는 너랑 같이 사는 걸 한 번 정도는 꿈꿨기에, 나중에 크면 말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이르게 그런 말을 내뱉어버렸다. 말하고 나서도 스스로 당황스러워서 되려 눈을 크게 떴다가 질끈 감았던 것 같은데. 대답을 기다리기에는 그 상황이 생각 이상으로 낯부끄러워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있지, 그런 거 당장 결정 안 해도 되니까... 우선은 갈까, 집으로.

또 한참을 버스를 타고 내달리고, 몇 번을 갈아타고, 기진맥진해서 겨우 집에 도착하겠지만, 그래도 나는 너와 있던 순간들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그런 힘든 것도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내 사랑을 올곧게 만들어줘서, 너를 사랑할 수 있게 해줘서 감사해.

내년에, 또 그 후에도 같이하자. 앞으로를, 매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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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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