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우님은 생각이 참 많다니까.
아주 오래된, 누군가는 기억하지도 않는 사소한 일.
함재이 * 페이버릿
뭐 어때. 사우님, 좀 여유롭게 가지?
그렇게 구는 거, 7팀장님밖에 없으십니다.
나태하기 짝이 없어서는 아침에 출근을 하는 둥 마는 둥. 와서는 휴게실에 한참을 박혀 있다가 나중에 느지막이 나와서는 한참 집중해서 뭔가를 달싹거린다. 일을 다 마무리 지어놓고 그러는 걸 보면 또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사원이 팀장에게 무슨 권한으로... 기꺼이 사원들과 아무렇지 않게 여러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라 별 탈 없이 하고 싶은 말 몇 가지 정도는 늘어놓는다고 하지만서도. 실상 그렇게 할 수 없는 조직도인데.
함재이는 오늘도 속에 불만 사항을 꽤 썩히고 있었다. 정작 본인의 팀인 1팀보다, 저렇게 태평하게 굴어대는 7팀의 안위가 궁금하니 제법 문제가 될 듯싶었다. 최소한 저 팀장이 일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는데. 알 필요도 없는 저 사람의 태도가 함재로서는 많이 거슬렸다. 일을 사랑하기도 하거니와, 일을 못하는 사람을 싫어하기까지 하는 워커홀릭이라서 유독 더욱. 그렇다고 차마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페이버릿은 일은 정말 잘 했다. 그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빠르고, 정확하고, 깔끔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자신보다 직급도 높고. 자신보다 오래 전에 들어왔고. 함재이는 매번 입을 꾹 다물고 혼자 묘한 이질감을 삭혔다.
정작 페이버릿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썼다. 누구든 자신을 싫어할 수 있고, 누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그런 걸 신경 안 쓴지 너무 오래됐다. 페이버릿은 주기적으로 인간들과 대충 어울리는 것들을 좋아했는데, 아무래도 그 특성이 그대로 몸에 밴 듯이... 노는 것이 너무 좋고, 한 때 인간이었던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기억이라도 하고 싶다는 듯이 굴었다. 함재이가 자신을 뒤에서 깐다고 했어도 사실 페이버릿이라면 신경도 안 썼을 거다.
7 팀장님.
응, 사우님~ 왜 부르세요~?
일 좀 부탁드릴까 해서요.
어? ... ... 음, 그래요~ 내 자리 알죠? 두고 가면 오늘 중으로 처리해둘게요.
아뇨, 가능하면 지금... 바로.
인사과에서 일이 많은 건 누구든 알고 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고, 소문난 사실이라서. 그래서 인사과에 업무가 배정될 때는 정말 긴급한 업무가 아닌 이상, 순서가 있고, 각자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있다. 더군다나 페이버릿은 그 강도와 방식이 정말 특이했다. 빠르게 집중해서 한 번에 모든 걸 쏟아붓고는 일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버리는 태도. 당연히 일에 순서를 하나하나 두고 한 일을 하면 한 일만 하는 함재이와는 사고방식도, 처리방식도 너무나도 달랐다. 그럼에도 함재이가 지금 페이버릿에게 고집을 피우는 건, 어쩌면 오늘 아침에 긴급하게 들어온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실수를 한 것 처럼 되어서 자신의 상사도 아닌 타 부서 팀장에게 쿠사리를 먹어서. 점심시간에 점심도 못 먹고 일을 해야 할 정도로 일이 밀려서. 그 모든 것들이 중첩해서.
사실은 한 대를 크게 맞으면 천천히 회복이라도 가능하다. 그런데 자잘한 잽을 여러 번, 반복해서 계속 맞으면 어느 순간 녹다운이 되어 버리는데, 함재이한테는 그게 오늘이었다. 그러다 결국 옥상에서 담배를 입가에 걸고, 벤치에서 따듯한 일광욕을 하는 꼴을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열이 받았다. 함재이는 적어도 자신이 무식하게 굴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음에도, 결국 나약한 인간의 정신상태는 그 무엇도 돕지를 않았다. 함재이는 이 선택을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후회했지만, 결국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었고, 제법 딱딱하게 식은 페이버릿의 표정을 본 순간.
진심으로 그 모든 선택을 후회했다.
원래 일을 이렇게 하나, 1팀은?
예? 아니,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 ...
페이버릿은 꽤 유명했다. 발갛게 달아오른 홍조를 가진 얼굴로 나긋나긋, 상냥하게 구는 그 태도가 변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그런데 지금, 자신의 한 번의 실수로 자신만의 잘못이 아니게 되었다. 차갑게 식은 표정이 적나라했다. 홍조는 똑같이 있어도, 내려앉은 눈꼬리가 선명하게 자신을 마주했다. 수축한 동공이 자신을 언뜻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다. 함재이는 적어도 제 상사가 욕을 먹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둘의 나이 차이가 몇이더라, 윤 팀장님이 혼나실 처지가 되는 걸까, 잘리게 되는 걸까, 타 팀으로 넘어가야 하나. 잠깐 사이에 함재이의 머리는 정말 빠르게 돌았다. 페이버릿이 한숨을 뱉는 그 순간까지도, 움찔대며 한쪽 눈을 가린 머리카락이 중력에 아래로 길게 내려앉을 때까지 고개를 수그렸다.
함 재이, 사우님.
석 자 이름을 나긋하니 부르고, 제 어깨를 가볍게 쥐는 손을 내려다봤다. 그 잠깐 사이에 표정을 갈무리한 페이버릿이 제 눈앞에서, 입 모양을 동글게 말아 말을 이었다.
너무 유난스럽게 굴지는 말죠? 어차피 일은, 각자 알아서 하는 건데.
눈썹을 잘게 찌푸리고, 제 귓가에 마지막 말을 뱉는다. 진하게 꺾인 눈썹이 인상에 제법 깊게 기억되었고, 함재이는 불현듯 그 순간 그 생각을 했다. 나는 이 일을 절대 잊지 못하겠구나.
우리 사우님은 참, 생각이 많다니까. 그럼 먼저 들어가 볼 테니까,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가져오시고.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이 가벼웠다. 왜 나한테 그런 무거운 짐을 던지고 자신은 가볍게 굴며 사라지는지. 그 이유 모를 책임감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팀장이라는 직책에 뭐가 있긴 한 건지. 7팀 팀원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건지. 어깨에 손이 다시 닿는 순간 모든 질문을 담았던 머릿속 메모지가 하얀 백지로 변했다. 순간, 자신이 부끄러워졌고, 함재이는 그 이후로 두 번 다시 7팀 자리 근처는 가지도 않았고, 근 몇십 년 동안 페이버릿과 독대한 적, 같은 장소에 같이 있은 적 없이 무조건 그 근처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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