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위한 첫걸음
파니메리라고 우기는 글
-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치는 글
타앙-
적막만이 가득한 성도 내부에 간결하고도 짧은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잘못 들었나 싶을 정도로 찰나의 순간이었던지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일상을 이어 나갔다. 착각으로 인해, 혹은 실제로 들렸을 총소리가 그 이후 더 이상 들리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설령 진짜였다고 한들, 성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공방에서 신무기를 제작하고 시험하다 들린 소리겠거니 하고 넘어갈 것이 분명했다. 그래, 그러니까...
" 이 소리를 신경 쓰는 건 나 뿐이라는 거군. "
라는 단 하나의 결론을 내린 채, 아이메리크는 잉크가 가득 번진 서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습게도 그 말이 진실이라는 듯, 그를 보좌하거나 경비를 서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의문을 갖지 않고 있었다. 묵묵히 자신이 하던 일을 이어 나가는 이들 속에서 동작을 멈춘 것은 사각거리며 써 내려가던 글의 흐름을 끊어낸 채 멍하니 펜촉 끝에서 잉크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있던 아이메리크 뿐이었다.
" …역시, 그때 제대로 얘기했어야 했나.. "
그러니까, 아이메리크가 스테파니비앙을 피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었다.
시작은 여태껏 눌러두었던 마음을 미약하게나마 표현하려고 했었던 날이, 갈레말과의 전쟁을 위해 이슈가르드에서도 지원군을 보내기로 한 날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날이었다.
그때의 아이메리크는 의장으로서 사절단과 지원군을 격려하고 배웅의 차원으로 기운을 북돋아 주고자 그들이 모인 곳, 비공정 승강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멀리서도 그들이 모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이메리크는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많은 인원수에 눈을 가늘게 뜨며 머릿수를 세어보았다. 확실히 많았다. 착각은 아닌 듯했다. 보고서에 누락된 인원이 있었나 떠올리기엔 루키아와 앙델루가 실수했다는 가정보다, 보고되지 않은 인원이 합류했다... 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했다. 전쟁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이슈가르드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아이메리크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기에 미간에 주었던 힘을 빼고서 걸음을 옮기며 조금 더 자세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 익숙한 갑주와 창.. 에스티니앙인가. 그리고 그 옆에는.. 기공방이군. 그리고.. '
전쟁이나 위기가 닥칠 때면 으레 그렇듯 보였던 얼굴이다. 기공방은 때때로 무기를 보급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전쟁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으니 이번에도 그렇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음을 향해 눈을 굴리다, 어쩐지 익숙한 실루엣을 마주했다.
" 스테파니비앙...? "
잘못 본 것인가 싶어 잠시 걸음을 멈춘 채로 눈을 감았다 뜨며 바라보았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의 친우인 에스티니앙이야 워낙 전쟁에 참여한 적이 많으니 이번에도 그랬으리라 생각했지만, 스테파니비앙이 갈 줄은 몰랐던 탓에-그도 그럴 것이, 보통은 기공방의 다른 이들만이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기에-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며 아이메리크는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 아이메리크님? "
옆에서 의아한 듯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아이메리크는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가자 더욱 선명해진 얼굴들이 자신을 반겼다. 검과 방패, 갑옷에 묻은 눈을 털어내고 있는 신전 기사단 병사들, 익숙한 창과 갑주를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있는 에스티니앙, 형의 자리를 이어받은 용머리 전진기지의 사령관과 동료들과 무언가를 논의하는 듯한 자경단의 대표, 그리고.. 기공방 사람들과 그 사이에서 총을 점검하며 서 있는 스테파니비앙.
" 이게 누구야. 바쁠 텐데 여긴 어쩐 일로 왔어? "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환각이나 착각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자신을 향해 밝아진 표정으로 다가와 가까워지는 그를 보니 더욱 그랬다. 현실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을 즈음, 스테파니비앙이 어느새 그의 눈앞에 서 있었다. 그에 맞춰 아이메리크는 자신의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울리는 고동을 전하는 것을 느꼈다. 크게 뛰었다가, 희미하게 작아졌다가 제 존재감을 멋대로 놀리는 심장에 문득 입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 들어 하얀 이를 내어 아랫입술을 꾸욱 잡았다가 놓아주고는 눈을 감았다 떠보면, 그의 모습이 앞에 자리 잡은 채다.
" 사절단을 배웅하러 나온 참이지. 그러는 너는? "
" 아하... 난 전쟁에 참가하려고 이것저것 점검하고 있었어. 기공방이 가는데 내가 빠질 수는 없지. "
" …꼭 가야 하는 건가? "
자신도 모르게 입술 새로 작게 내뱉어진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곤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스테파니비앙은 그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놀란 듯 동그랗게 커진 눈을 두어번 깜빡이다 고개를 기울이며 아이메리크의 이마에 제 손을 대본다. 누가 보아도 열이 있나 재는 모양새였다.
" 이상하네... 아픈 건 아닌 것 같고. "
" 그, 잠시만, 스테파니비앙.. "
" 내가 잘 못 들었나? "
뜻이 합하여지는 방향으로 해결된다면 모두가 행복해지겠지. 하지만, 사람은 본디 자신이 보고 듣는 것으로 세상을 이루며, 그에 반하는 것은 피해버리기 마련이다. 필연적으로 공존할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전쟁이란 그로 인한 결과물이었다.
하여, 스테파니비앙이 가는 것은 평화에 한 발자국 더 다가서는 일이다. 으레 그렇듯, 그가 서늘하다 못해 시리도록 갈라진 체온을 지닌 채 돌아올 리는 없었다. 아이메리크는 스테파니비앙을 믿었고, 무사히 살아 돌아오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 미안하다. 그저 조금... 피로가 꽤 누적되었던 모양이야. 답지 않게 네게 어리광이라도 부리고 싶었나 보군. "
생각과 다르게 입에서 내뱉어진 것은 자신이 생각해도 모순이 가득한 주장이었다. 어리광이라니, 그에게 그보다 더 안 어울리는 단어는 없으리라. 아이메리크는 입 안쪽 여린 살을 짓씹으며 고개를 저었다. 얕게 들어온 빛을 따라 눈 끝에 달린 이슬이 반짝였다. 아이메리크는 황급히 소매로 감정의 잔해를 지워내었다. 그리고 감히 바랬다. 갑작스러운 기적이 내려와 그가 자신의 말대로 가지 않기를.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음에도.
" 아이메리크. "
그 마음에 전해지기라도 했는지, 혹은 제 눈동자에 담겼던 것인지, 작은 한숨과 함께 결의가 내뱉어졌다.
단호하게 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곱씹어볼 필요는 없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생각을 헤아려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이메리크는 스테파니비앙이 눈을 찌푸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끝끝내 그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그것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양, 그저 놓치지 않을 것 처럼 간절하게 붙잡고 있었다.
" 난 전쟁에 참가하겠다고 다짐했고, 이 결심을 바꿀 생각은 없어. "
" ……. "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작게 피어난 불꽃이 이제는 온 몸을 덮을 정도로 커져 진득하리만치 선명한 형태로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의 이성은 스테파니비앙이 전장에 합류한다면 무기 보급이라던가, 이동 시설과 같은 전시에 필요한 물품들을 적재적소에 보급할 수 있으니 그가 가는 것은 옳은 일이며, 보내야 한다고 끊임없이 반복하여 외쳐댈 뿐이다. 아이메리크는 입 안에 맴도는 그의 이름 조차 비릿한 맛이 감돌 정도로 가득 깨물고서 그저 손을 꽉 잡은 채로 고개를 숙였다. 입을 열면 금방이라도 가지 말라고, 내 곁을 떠나지 말아 달라고 애원에 가까울 법한 부탁을 내뱉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메리크는 입을 꾹 다물며 목 근처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들을 집어삼켰다.
전장에 나서려는 스테파니비앙을 막을 권리는 아이메리크의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아이메리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스테파니비앙, 나는... "
" 내가 걱정돼서 이러는 마음은 알겠지만... 난 가야만 해, 메리. "
파고들 틈새 조차 없이 굳게 닫힌 문을 마주하는 것과도 같다. 스테파니비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진중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그것은 어떠한 결의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맏형으로서의, 기공방의 책임자로서의 결의. 그에게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한 다짐. 고국을 떠나 전장으로 나아가려는 그의 모습에선 그 모든 것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었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아이메리크가 가장 좋아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이 곱게 다 잡힌 날이 오늘이었다는 사실을 가장 절망케 만드는 모습이기도 했다.
아이메리크는 지금, 이 순간, 감히 전쟁신을 향하여 원망을 쏟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정치와 암투를 겪고 그 속에서 지내온 탓에 제 감정을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다면 진즉에 흔들리고 무너져 비참할 만큼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 여실하게 드러났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는 것에 다행으로 여겨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요동치는 마음을 잡아 짓누르며, 언제 나와 같은 미소를 지은 채 스테파니비앙을 마주 보는 것 뿐이었다.
" ...알겠어. 조심히 잘 다녀와. "
아이메리크는 말을 마친 후에 줄곧 잡고 있었던 그의 손을 놓으며 두어 걸음 물러나 자신의 손과 그들 사이에 생긴 간격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다. 스테파니비앙은 무언가를 말하려다 주저하는 듯 입술을 짧게 달싹이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꾸욱 다물린 탓에 더 이상 그가 전하려는 말은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고, 아이메리크는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본래 하려던 말을 삼킨 저 입에서 나올 말은..
" 금방 다녀올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메리. "
이별을 고하는 무언가에 불과할 테니.
들려오는 대답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잘 다녀오라 인사까지 건네지 않았던가. 그저 다만 품 안에 고이 숨겨놓은 마음과 반짝이며 은은하게 빛나던 설렘을 밖으로 꺼낼 용기가 찰나의 순간이라도 닿을 수 없었던 채로 스러져간다는 사실이 조금, 아주 조금, 서글퍼졌을 뿐이다. 전시에 나가는 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여 심란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이메리크는 이리저리 널브러져 어지럽혀진 감정들을 반듯하게 접어 정리하고는 고개를 들어 스테파니비앙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 그래, 그러지. 너도 다치지 말고. "
스테파니비앙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뒤를 돌아 급히 뛰어가기 시작했다. 아이메리크는 멀어지는 스테파니비앙의 모습을 보며 그저 웃었다. 새삼스레 사랑이란 게 세상을 이리도 변하게 하는가 싶었다. 하늘에 구름이 끼고 밤이 내려앉든, 한없이 푸르고 노을이 지든 변함없이 한 사람 만큼은 눈이 시큰거릴 정도로 반짝반짝 빛이 나거나, 아름답게만 보이니 말이다. 아이메리크는 굳게 다짐했으나 한 순간에 풀어지고 헤어져 버린 마음을 주워 담으며, 우습게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이 저편으로 사라진 것만으로도 노을이 지고 있다고 느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버렸다고 말이다.
" 에스티니앙이 들으면 미쳤다고 하겠어. "
물론, 그의 하나뿐인 친구는 이런 제 말을 들으면 혹시 대낮부터 술이라도 마셨냐 하겠지만.
" 자... 그럼, 출발할 시간이군. 그대들의 여정에 전쟁신 '할로네'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바라지. "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절단과 지원군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배웅의 말을 건네자,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등의 반응을 보였다.
어찌되었건 출발할 시간이다.
이로써 좋든 싫든, 전쟁의 승패는 가려질 것이다. 또한 여기 있는 이들의 생사 역시도. 작은 인사와 함께 사절단과 지원군은 뒤를 돌아 성도를 나서며 걸음을 옮겼다.
" ... 배웅도 마쳤으니 이만 돌아가지. "
점점 멀어져 사절단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아이메리크는 뒤를 돌아 성도의 안쪽으로 향하며 자신의 품속에 있는 푸른 벨벳 상자를 주머니 안쪽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전시에 직접 나서는 것 외에도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은 많았다. 감정을 숨기고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그래. 아이메리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도하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었으니까.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성도는 여전히 고요하기만 했다. 사절단이 떠날 때의 시끌거리는 소리와 온기는 이미도 지워진 지 오래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일상을 이어 나가고 있었고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다. 그래, 성도는 여전했다. 그리고, 아이메리크도 마찬가지. 어김없이 신전기사단 총장실에 켜진 불빛은 여전히 아른거리며 흔들리고 있었다.
가벼운 노크 두 번, 그 후엔 벌컥 열린 문과 함께 집무실로 누군가가 들어선다.
아이메리크는 서류로 향하던 시선을 들어 눈을 깜빡였다. 앙델루였군. 익숙한 얼굴을 마주하고서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린다. 손목을 놀리자 깃펜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종이 위로 발자국을 남겼다.
" 무슨 일인가, 앙델루. "
" 아이메리크님, 갈레말로 향했던 사절단과 지원군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합니다. "
" 그래... 좋은 소식이군. 부상자나 사상자는 없나? "
" 다행히 부상자나 사상자 없이, 모두 무사 귀환 했다고 보고받았습니다. "
" 다행이군... 조만간 따로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라도 열어야겠어. 수고 많았네. 물러가도 좋아. "
" 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언제든 불러주십시오. "
짧은 예를 담아 인사를 마친 앙델루가 걸음을 옮겨 집무실을 나서자,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다시금 고요만이 가득해졌다.
그와 동시에 사각거리는 움직임 역시도 멈춘다. 검은 잉크가 종이 속을 파고들어 굳어가는 몸짓만이 눈동자에 담겼다. 아이메리크는 처리해야 하는 서류를 한 번, 제 손에 쥐인 깃펜을 한 번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 그렇다면, 스테파니비앙도 돌아왔다는 이야기로군. "
그가 돌아왔다.
짧은 문장이었으나 다시 한번 묵음을 통해 입술을 달싹이며 되뇌었다.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벅찬 행복이 넘실거렸다. 평소라면 쓰게만 느껴졌을 미소를 간간이 머금다가, 다시금 깃펜을 들고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일이 손에 잡힐 리가 만무했다. 결국 내려놓고만 펜의 끝을 바라보던 아이메리크는 숨을 가늘게 내뱉었다. 역시... 제 눈으로 보고,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잠깐만 보고 오자. 또 다시 잉크를 쏟아 중요한 서류를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대로 있다가는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까. 속으로 변명하듯이 내뱉은 말들이 온통 엉망이었다. 아이메리크는 기공방으로 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물론, 충동적으로 걸음을 떼어 집무실을 나선 것 또한 계획에는 없는 일이었다.
" ...답지 않게 이게 뭐 하는 짓인지. "
마음이 급했던 탓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사육장에 도착한 아이메리크가 검은 초코보를 쓰다듬어주며 위를 바라보자, 즐겁게 웃으며 기구를 점검하는 스테파니비앙의 모습이 보였다.
전장을 다녀온 이후, 전보다 조금 더 생기가 도는 듯싶었다. 쌍사당과 불멸대, 흑와단과 도마, 그 외의 많은 단체 속에서 분명 다른 사절단과 지원군 뿐만 아니라 기공방도 크게 활약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니 어느 때보다 여운이 길게 남겠지. 좋은 일이다.
문득 심장에 자리했을 반짝임을 떠올려보면 고작 그와 만난 평생의 시간을 함께했던 마음이었다. 꾹꾹 내리눌러 그 크기보다 한없이 작은 심장에 억눌려있던 마음은 이미 그 예쁜 형태를 잃어버린 채 갈라지고 비뚤어져 있지 않던가. 이런 마음을 그에게 내보일 수는 없었다. 못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어찌 따스한 햇살과도 같은 그를 마주 볼 수 있을까.
아이메리크는 초코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손과 위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었다. 돌아갈 시간이다. 그가 무사한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오늘따라 걸음을 옮기는 몸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아직까지 발목을 잡은 채 밑으로 끌어내리려 발악하는 감정의 잔재 때문이리라 생각하며, 그대로 언덕을 올라 신전기사단 본부로 향했다.
" 언제까지 날 피할 생각이야, 메리. "
그래, 짓씹듯이 내뱉어진 듯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이메리크는 비스듬히 아래를 향했던 시선을 위로 들었고, 미간을 찌푸린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을 마주했다. 숨을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아이메리크는 난처한 듯 웃어 보였다. 아직은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 이젠, 직접 찾아와서도 얼굴조차 보지 않고 갈 생각이야? "
" 스테파니비앙, 그게.. "
" 신전기사단 본부로 찾아가도 너는 없고, 바쁜가보다 넘기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어. 대체 이유가 뭐야. "
맑고 푸른 눈동자에 채 완성되지 못한 어색한 웃음을 짓는 이의 모습이 비친다. 아이메리크는 황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스테파니비앙에게로 한 걸음 내디뎠다.
" 잠깐... 오해야, 스테파니비앙. "
" 무슨 오해? "
일주일? 그는 앙델루로부터 사절단이 복귀했다는 사실을 지금 막 들은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해야 할 일이 유독 많았던 탓에 요 며칠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자신의 방에서 일을 처리했던 것 같은데... 설마 그 때문인가?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앙델루가 이런 중요한 사실을 늦게 전할 리 없다. 파득거리며 고개를 든 아이메리크의 눈이 혼란스럽게 울렁였다.
" 방금 전에 사절단이 복귀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
어떻게, 감히. 너를 잊을 수 있을까. 어물거리는 말은 끝내 심장 너머로 숨어버렸다. 아이메리크는 여전히 삐죽거리고 있는 스테파니비앙을 보며 숨을 한 번 삼키고는 늘 그러하듯 그린 듯한 미소에 마음 한 스푼을 담아 웃어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친구를 보는 듯이.
"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리 없잖나. "
" …흥, 됐어. 파니는 이미 삐졌네용. "
연신 툴툴거리는 목소리로 말하곤 있지만, 오해가 풀렸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에 따라 아이메리크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사르륵 예쁘게 휘어진 눈매가 초승달을 자아내며 밤하늘이 피어났다.
" 왜, 애틋하게 너만 생각하기라도 할까? "
" 뭐?! "
" 하하, 농담이야. 농담. "
누가 들으면 오해할 수도 있을 법한 말을 내뱉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 아이메리크는 황급히 고개를 내렸다. 스테파니비앙의 어깨 위로 이마를 콩, 하니 가볍게 부딪히며 얼굴에 살포시 가라앉았던 푸른 나비의 마음을 익숙한 듯이 갈무리했다. 고개를 들자 다소 놀란 듯한 기색의 스테파니비앙이 눈에 담겼다. 이미 나비를 저 높은 하늘로 날려 보낸 지 오래였으니 그런 그가 사랑스럽다며 외치는 말은, 속으로만 중얼거렸을 터다. 그럼에도 아이메리크는 조심스레 스테파니비앙의 손을 잡고, 으레 귀족들이 그러하듯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흘러내리는 모래와 같이 손을 거뒀다.
나를 잡아줘, 스테파니비앙.
있을리 없는 미래를 간절하게 꿈꾸며, 감히 전쟁신께 바란다. 기적이라는 것이 임하기를, 그리하여 모든 것이 행복하게 이루어지기를. 감히 푸른 창과 검, 방패가 아닌 제게만 온전히 보일 따스한 태양과 함께할 수 있기를.
여전히 놀란 듯 이쪽을 바라보는 눈을 보며, 아이메리크는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못 말리겠군. 그 말이 누구에게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오랜만에 널 봐서 좋은걸. 아쉽지만 오해도 풀렸으니 이만 돌아가 봐야 할 것 같군. 사절단의 복귀와 관련된 일로 처리해야 할 것이 있어 당분간은 바쁠 테니... 그래, 한가해지면 제일 먼저 찾아올 테니 걱정 말고. "
" 정말이지, 바빠도 너무 바쁜 의장님이시라니까. 일하다 속이 답답하면 손에 있던 펜을 내려놓고 기공방으로 와.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
" 그래, 고맙다. 그럼... 다음에 봐, 스테파니비앙. "
손을 흔들며 작별을 건넨다. 의무를 행하려 걸음을 옮길 시간이다. 아이메리크는 팔을 붕붕 흔들며 멀어져가는 스테파니비앙을 보며 먼저 등을 돌렸다. 만남이 그렇듯, 이별 역시도 명료하기 그지없었다. 평소와 같이 금방 처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금방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둘이 다시 만나기까지는 생각보다 늦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현재,
그로부터 일에 중독된 사람처럼 전념하여 파묻혔던 것도 일주일. 슬슬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스테파니비앙을 마주할 때도 되었다. 무엇보다, 작은 총 소리 하나에 이렇게나 신경이 쓰일 정도라면
과거를 회상하던 아이메리크는 어느새 손안에 구겨진 종이 더미가 쥐어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 근래 자신답지 않은 행동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이유는 단 하나이고 대상도 단 하나이건만, 입술은 꿀을 발라놓은 양 떨어지질 않으니 달큰한 것이 진저리가 날 정도로 입 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평소 일상의 작은 욕심으로 즐겨 먹었던 자작나무 시럽 조차 지금은 눈길도 가지 않을 정도로 온 몸의 신경이 단 한 사람을 향해있는 기분이다. 그의 세상이 오직 한 사람을 위해 돌아가고 있었다.
" ...정말로 미치기라도 했나. "
아이메리크는 애써 신경을 집중하며 급한 안건과 처리해야 하는 서류를 적어 내려갔다. 차라리 일이라도 해야 머리 속을 가득 채운 누군가의 존재감이, 그를 향한 감정이 조금이나마 진정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애정이란 파도와 같아서 갑작스레 모든 것을 휩쓸기도 하고, 혹은 여러 번 스치듯 지나가기도 한다던가.
그래서 이렇게 심장이 아리듯이 아픈 것인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벌써 해가 지평선 뒤로 저문 것을 보며 주변을 물렸다. 홀로 남은 집무실에는 팔락이며 종이를 넘기는 소리와 사각이며 그 위에 흔적을 남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문득 아무 생각 없이 놀리던 펜촉의 끝을 바라보자, 내일 해야 할 일을 정리하기 위해 써 내려간 글의 마지막 단문 끝에 자그마한 글씨로 경애, 사랑 따위의 단어가 쓰여 있었다. 말 없이 그것을 바라보다 이내 서류가 쌓인 더미 위로 얹어버리고 만다. 의지를 따라 한 일이 아니었다. 단순한 선택일 뿐.
떨리는 제 손을 바라보며 주먹을 꾸욱 쥐어본다. 알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 숨겨야 하는 감정이라던가, 이성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던가, 굳게 다짐했던 마음이 이미 속절없이 허물어져 버리고 말았다는 것을. 아이메리크는 다시금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심장을 메우다 못해 흘러넘치는 이 감정은, 그래. 사랑이 분명했다.
어릴 적부터 자신이 느끼는 것을 교묘하게 감추고 친절을 가장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오는 것에 익숙했으나, 때때로 어떠한 감정들은 쉽게 잊히는 것은 아니다. 사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정의해보자면, 한없이 뿌리를 내려 심장을 장악하곤 했으니.
다만 사랑이라 정의할 수 있는 감정이 비한 어떠한 이유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작은 햇볕 한 줌, 싱그러운 풍경 한 숟가락이 존재하는 것 만으로도 사랑이라는 감정을 깨달을 수 있듯이, 다른 무엇도 아닌, 스테파니비앙과 처음 만나던 순간이 그러했다. 그의 눈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과도 같아서, 서로 다른 극이 끌어당기는 것 처럼 속절없이 그에게로 빠져들었지. 호의가 호감이 되고, 호감이 애정이 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소중하게 간직해온 마음이었다.
" 이 순간에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나도 참 중증이군. "
근래 들어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 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의자에 기대어 밭은 숨을 내쉬다 눈을 꾸욱 감자, 이슬처럼 맺혀있던 작은 눈물방울에 눈 안쪽으로 스며들어 본래의 형태를 버리고 몸을 숨긴다. 아이메리크는 그대로 의식을 서서히 놓으며 몸에 담겨있던 힘을 뺐다. 늘어진 손 끝에 담겨있는 것은 그리움과 비탄이었다.
잠시후,
수면 아래로 사라졌던 의식을 끌어올리며 아이메리크는 눈을 떠 주변을 바라보았다. 밤이 깊고도 새벽이 가까워져 오는 시각인지, 창밖에는 유난히 별과 달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법 이름이 날렸을 누군가의 손길이 닿은 와인이 들어있는 잔을 툭, 손으로 밀어 떨어뜨리자 무력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남과 동시에 주변이 붉게 물든다. 흩어진 유리 조각이 달빛을 머금고 날카롭게 빛나는 것을 물끄러미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집무실 안에 있는 모닥불을 꺼뜨린 탓인지 작게 하얀 김이 새어 나와 공중에 흩어지고 있었다. 아이메리크는 와인병의 표면을 따라 손가락으로 주욱 그어보며, 손 끝에 닿는 서늘한 느낌을 머금어보았다.
" 왜 혼자 있어, 메리. "
그리움이 현실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아이메리크는 지금 자신이 들은 것이 환각이 아니었으면 하고 잠시 바라며 손 끝에 느껴지는 감각에서 물러나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바닥을 향해있던 고개를 들었다. 앞을 향하는 시선은 한없이 올곧았다. 그의 마음과도 같이, 늘 그랬던 것 처럼 미련하면서도 퍽 충직할 만큼. 그리고 그 끝에는, 기다리다 못해 다만 곁에 있음을 감사할 만큼 기꺼이 여기는 존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 늘 그러지 않았나. 새삼스럽게. "
" 와인잔을 깨뜨리면서 말이지. "
파작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 하나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위를 따라 올라가 보면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스테파니비앙의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푸르고, 맑은 눈이다. 아이메리크의 얼굴에 잠시 안심한 듯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 생각이 깊어지다 보니, 깨어날 구실이 필요했어. "
" 왜, 무슨 고민인데? "
의도와 마음을 헤아려봐야, 제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 문을 두드리고, 열고, 그 안으로 고개를 내밀어 주위를 살펴본들 깊은 속은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깊게 패여진 것은 자신의 의지요, 그것을 다시 메운 것은 온갖 것으로 뒤섞여 깨끗한 형태를 찾아볼 수 없는 감정에 불과하니 이윽고 이루어낸 결론은 결국 도망가는 것에 그쳐버릴 수 밖에.
당사자를 앞에 두고서 내뱉은 고민은 눈을 감았다.
아이메리크는 차라리 취한 척, 기억이 안 나는 척 무책임하게 일을 벌인다면 편해질까 싶기도 했다. 그렇게 함부로 다룰 만큼 가벼운 마음이 아니었기에 이내 종이 접듯 조심스레 각을 맞추어 반듯하게 접으며 웃었다.
포기라고 하기엔 이르고, 이별이라고 쓰기엔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다.
" 별거 아니네. 걱정하지 않아도 돼. "
" 또, 또. 그렇게 넘어가려고 그러지. "
" 친한 친구에게 짝사랑 상담을 하기엔, 부끄러워서 말이지. "
" 뭐? 짝사랑? "
" 그래. 의외인가? "
아니, 너라고 해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조금 놀랐을 뿐이야. 고개를 갸웃거리는 스테파니비앙을 보며 긴장된 어깨를 늘어뜨린다. 달싹이던 입술의 끝을 끌어당기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지어내었다.
잔인하리만치, 상냥한 사람 같으니.
" 괜찮다면, 얘기를 들어주겠나. "
" 그럼. 당연히 괜찮지, 메리. "
쉼 호흡 한번, 짧은 고민 끝에 다다른 서론과 그에 맞춰 울리는 심장 소리가 몸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시선은 아래에서 약간 왼쪽, 책상 모서리가 보일 듯 말 듯 한 애매한 위치에 멈추어 고정되어있었다.
" 그는 나와 달리, 아주 눈부시게 빛나는 사람이야.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보더라도 늘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고, 불의와 기꺼이 맞서며,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찬란하게 빛나는 그런 사람이지. "
" 멋진데? 새로운 것에 주저하지 않고 불의에 맞선다니... 그래서, 어쩌다가 좋아하게 됐는데? "
" 첫 눈에 반했다는 말이 맞겠지. 처음엔 착각이라 생각했다. 그 다음엔 그저 동경이라 생각했고. 그런데... "
" 그런데? "
" ...웃는 모습이 예뻐보였다. 시선이 절로 그를 향하고, 어느새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더군. 함께 지내는 시간이 점차 쌓이다보니 어느새 마음이 깊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잊거나, 주의를 돌려 볼 생각도 했어. 왜, 동경이나 친애와 같은 감정을 착각할 수도 있지 않나. "
" …흐음, 그렇지. "
" 2년 정도는 그렇게 스스로의 감정에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방황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가 노을을 등진 채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며 깨달았지. 내가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
" 정말 진심인가 본데. "
" 그럼, 당연하지. 그 후로도 지금까지, 변함없이 좋아하고 있다. 하지만... 그래, 마음이 깊어져 가는 것과 달리 전해지는 것은 하나도 없으니 조금은 답답하더군. "
그래서 결국 와인 잔을 깨뜨렸다는 이야기다. 스테파니비앙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다 몸을 낮춰 책상에 손을 짚으며 아이메리크를 바라보았다.
" 고백을 해볼 생각은 없어? "
" …거절당할까 봐 무섭다는 쪽이 더 맞겠지. "
" 그 사람도 마음이 전해지기를 원한다고 생각하진 않고? "
" 글쎄. 잘 모르겠네. 그는 나와 정반대의 성격이기도 하니 말이야. 무엇보다, 실제로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상대가 나와 같은 마음이길 바라는 건 굉장히 실례되는 일이지 않나. "
눈물을 흘리기엔, 눈앞의 찬란한 이에게 그러한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욕심이라고 해도 좋았다. 사랑하는 이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 리가 있겠는가. 비록 상대방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피어나고 있는 마음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결국 아이메리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대상이 너라고, 나도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을까.
조금이나마 말을 뱉을까 생각도 했지만, 역시나 너무나 큰 짐을 지우게 될 것만 같았다. 아니, 정확히는 아이메리크 그 자신이 참지 못하고 마음을 쏟아내 버릴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스테파니비앙은 여전히 올곧게, 그러나 담담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이메리크는 두어번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 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
" 아니, 그건 본인이 결정해야 되는 몫이지. 누군가 등 떠밀어 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
" …역시 그렇겠지. "
" 하지만 나라면, 적어도 후회는 없을 선택을 할 것 같네. "
후회는 없을 선택이라. 아이메리크는 새삼스레 스테파니비앙 답다는 생각을 하며 책상을 두어번 톡톡 두드렸다.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새로운 길이요, 관계이며 미래다.
뒤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신의 선택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스스로를 원망하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이리라. 아이메리크는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다면 자신은,
" 나는...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확신이 없는 한, 아마 마음을 접는 쪽을 선택할 것 같군. "
어찌 보면 현명하고 신중한 선택이나, 다르게 말하자면 미련한 선택이었다.
꺾여질 미래가 두려워한 발자국 물러서고 마는 것은 이미도 한 번의 실패를 겪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사랑 뿐만이 아닌, 누군가를 특별하게 여기는 마음을 무차별하게 꺾어야 했던 기억은 여전히 아이메리크의 심장에 남아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불가피하게 상처를 입히게 되는 일임을 모를 리 없다. 꾹 다물어진 입처럼 굳게 쥐어진 주먹이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얼마 간의 침묵이 지났을까, 그런 아이메리크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스테파니비앙이 조용히 말했다.
" …그래, 네가 전할 일이 없다면 됐어. "
문득 올려다보자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에 비가 맺히고, 아름답게 일렁이던 눈동자에 투명한 막이 덧씌워져 본연의 빛을 감싸 안는 것이 보였다. 고요한 침묵만이 존재하던 공간에 이가 맞물려 짓이겨지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그와 동시에 스테파니비앙은 책상을 딛던 팔을 거두며 몸을 일으켰다.
"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런 쪽에선 둔하다니까. "
" 뭐? …이런 쪽이라니, 그게 무슨.. "
" 네가 먼저 말해줬으면 했는데, 너는 끝까지 숨기려고 하고. "
" 지금... 무슨 말을. "
" 이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얘기야. 그 이야기의 주인이, 나라는 걸. "
상처가 온통 파헤쳐진 듯한 눈이었다. 후회와 그리움, 그럼에도 숨어있는 사랑이 고개를 내민다는 것이 더욱 그러했다. 눈치채고 있었다고? 내가,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이메리크는 흔들리는 눈을 들어 스테파니비앙과 마주했다. 그럴 리가... 짧은 부정과 함께 주저하던 손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푸른 하늘과도 같은 눈동자가 거두어지고 마주 보는 것이 익숙했던 몸이 등을 돌렸다. 아이메리크는 저도 모르게 앉아있던 곳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의 손목을 잡고, 멈췄다.
" 내 계측기가 너를 향하는걸 느꼈을 때 차라리 오작동을 일으킨 것이라 생각하며 무시했어야 했는데. "
" 잠깐... 스테파니비앙, "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까, 메리.
헤집어지고, 헤집어진다. 닫혀진 마음이 짓눌리고 갈라져, 그 균열을 비집고 아득바득 감정이 차올라 가득 채운다. 체온이 맞닿은 곳에서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알려주는 맥박이 불규칙한 울림을 전하고 있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앞을 향해있었고, 아이메리크는 그저 전에 그러했던 것 처럼,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였다.
" 스테파니비앙. "
" 이거 놔, 메리. "
웃기게도, 방금 전까지 본인 앞에서조차 접으리라 다짐하였던 목소리를 내뱉은 것과 정반대였다. 붙잡고, 그러쥔다. 안 돼. 머리 속에서 간절함이 크게 울려 퍼졌다.
아이메리크는 스테파니비앙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에스티니앙의 말이 옳았다.
아이메리크는 비로소 친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 넌 지금 겁을 먹은 거야. '
그를 사랑하기에 느끼는 이 감정들이 그저 기꺼웠고, 벅찼기에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이기적이었다. 이 관계가 돌이킬 수 없어질까 두려워 어쩌면 마주 보고 있을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품 안에만 가둬두려 했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닌, 다만 오로지 자신에게 등을 돌리고 있는 이를 위했던 감정이 눈앞의 현실로부터 회피하기 위한 자신에게 물들어 변색하여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 나 참, 왜 평소처럼 뻔뻔하게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거냐? '
정말로 미련하고도 바보 같기는. 아이메리크는 후회로 점철되어 못난 마음만을 바라본 탓에 바로 앞에 존재하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넘겨버렸다는 것을 깨달으며, 또 한 번 다짐하듯이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고는 스테파니비앙의 손을 잡고 손 틈 사이로 제 손을 집어넣어 맞닿지 않은 곳이 없도록 꽉 움켜쥐었다.
' 그러다 정말 후회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는데, 넌 괜찮은 거고? '
아니, 전혀 괜찮지 않아.
늦을 때가 되어서야 꺼내다니, 참으로 미련하지 않은가. 하지만 아이메리크는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저 혼자 꼭꼭 숨겨두었던, 길고 긴 이야기를.
" 마음을 전하려고 했던, 잡으려 했던 기회를 놓친 날부터 역시 그 날, 제대로 얘기해야만 했다고 후회하는 나날들의 연속이었어. "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이메리크는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친구로서, 친우로서, 그가 주는 애정이 너무나 눈부셔서, 그래서 그랬던 것 뿐이라고. 그저 한시에 스쳐 지나갈 감정이라고 스스로 되새겼다. 혼란스러웠고, 그만큼 스테파니비앙이 소중했기에 조심스러웠다. 마주할 자신이 없어지자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어찌 다시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뒤를 돌아본 그 곳에, 누구보다 환하게 빛나는 존재가 있음에, 외면하지 못했다. 기꺼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었다. 그리하면, 언젠가 포기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했다. 자신은 무엇이든 쉽게 익숙해졌고, 포기와 체념을 배우는 것 또한 빨랐다. 그리고 늘 그랬듯,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지만.
" ……. "
" 네가 부르는 나의 이름이, 그 한마디가 눈이 범람하듯 나를 덮쳐왔다. 아버님의 앞에 섰을 때도, 목에 창이 들이밀어진 순간에도 그러진 않았는데, 겁이 나더군. "
담담하게 전하려던 진실은 꼴사납게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의 떨림을 담고 있었다.
그 말이 향하는 대상에게서 돌아오는 답은 없었지만, 아이메리크는 천천히, 그러나 너무 느리지 않게 마저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나를 사랑했으면 좋겠어.
" …혹여 이 마음을 전한다면 너를 더 이상 친구로서도 마주할 수 없게 되는 건 아닌가, 이 마음에 너에게 부담이 되진 않을까, 너를 향한 고민은 늘어만 가는데 결론은 내리지 못한 채로 그렇게 시간이 무수히 흘러갔다. 결국엔 이렇게 되어버렸지만.. "
" ……. "
" 미안하다. 하지만, 내게 단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지 않겠어. "
" …무슨 기회를 달라는 거야? "
" 네 곁에 있을 기회. 이번에야말로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기회. "
" 이제 와서 대체 뭘 하겠다고, 메리. "
" 이미 한 번의 기회를 놓친 것을 알지만... 내가 하고 싶고 바라는 건 단 한 가지야. "
자유로운 하늘과 같은 존재를 제 이기적인 마음으로 붙잡고 싶지 않아 발버둥 친다. 꼴사나운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아 한없이 부정하였다. 욕심에 불과할 감정이라며 스스로 세뇌를 걸어본다. 짧은 숨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었고, 아이메리크는 이내 고개를 떨구며 입술을 깨물었다. 한없이 깊고 잔잔하던 바다에 작은 여우비가 내렸다. 떨리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이메리크는 속에서부터 토해내듯이, 그러나 억누르고 끝없이 절제하며, 자신의 마음을 녹여내어 내뱉었다.
그 행복을, 곁에서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 닿지 않을 목소리라도 좋으니, 네게 말하고 싶었다. "
" 너를, 사랑한다고. "
아이메리크가 말을 끝맺음과 동시에 정적이 찾아온 방 안에는 그 어떤 불빛 하나 없이 달이 내리쬐는 빛 만이 어스름히 들어와 둘 사이를 비추고 있었다. 혹자는 희망이 내리쬐는 것이라 말하겠지만, 달은 누군가의 빛을 등지거나 흉내 내 비춰낼 뿐이니, 거짓된 희망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긴장으로 인해 버석거리는 입술만을 달싹거리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속절없이 기다린다. 일을 할 동안에는 어느새 이렇게 지났나 싶었던 시간이, 지금은 1분 1초가 더디게 느껴졌다. 바닥을 향해있는 시선은 올라올 생각 조차 못한 채로, 그저 질끈 감기고 만다.
일순 방심한 탓일까, 아이메리크는 손안에 있는 온기를 놓치고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온기가 그를 떠났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
황급히 눈을 뜨며 앞을 바라보자 달빛에도 닿지 못한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속에서도 푸른 하늘과 같은 눈동자는 벽과 바닥을 박찬 채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웠을,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너와.
" ……. "
침묵이 유독 길기만 하다. 시간이 멈추었다면 차라리 좋았을 것을, 눈치도 없이 째깍거리며 잘도 흘러가니 그것을 막을 길이 없었다. 언제나 잠잠하던 심해와 같은 눈동자에 언뜻 체념의 빛이 어른거린 것도 같았다. 아이메리크는 단념하듯이 주먹을 쥐었다. 늦어버린 걸까.
" 넌 진짜 끝까지... "
" 이기적이라 미안하다. 그래도... 너를 사랑해. 사랑하고 있어, 스테파니비앙. "
평생을 함께하며 사랑하고 싶다.
손 안에 남은 온기라도 간직하려 그저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쥐고 만다. 제게 남은 것은 이것 뿐이라는 듯 간절하게. 어느새 하얀 피부에는 붉은 물이 얕게 스며들고 있었다.
나의, 스테판.
딱콩!
" 진작에 이럴 것이지. 하여간,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
" 어...? "
" 파니비앙. "
이마에 전해지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한 채로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던 그를 끌어올린 것은 작은 단어 하나. 빛을 가득 끌어안은 것 처럼 따뜻한 이름이었다. 아이메리크는 그것이 신호라도 되는 듯 저 멀리 떠다니며 무너져가던 정신을 현실로 끌어내렸다. 상념에서 벗어나 제일 먼저 본 것은, 환하게 웃으며 저를 보고 있는 스테파니비앙의 얼굴이었다.
" 파니비앙, 이라고 불러줘. 메리. "
이름에서 따와, 애정을 가득 머금은 이름. 그에게 메리 라고 부르라고 했던 날과 같이, 제게만 허락될 이름을 부여받는다. 아이메리크는 울컥거리며 올라오는 감정을 겨우 삼켜내고서, 기꺼이 달빛을 피해 그늘 속으로 숨었다. 이상하게도, 빛 한점 존재하지 않는 그늘이 더욱 아늑하게만 느껴졌다. 단지 스테파니비앙이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 그래... 파니비앙. "
" 다시 한번 말해 줘, 메리. "
" …파니비앙. "
" 응, 나도 너를 사랑해. 메리. "
비로소 마주 보는 대답이 전해지고 나서야, 어둠이 걷히고 환한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고서 감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사랑을 끌어안는다. 마주 토닥이는 손길은 다정하고, 또 상냥하기만 했다. 파니비앙. 메리. 나의 파니비앙. 그래, 나의 메리. 그저 이름을 부르며, 한없이 깨어진 마음을 이어 붙였다. 아이메리크는 이마에 닿은 따스한 감촉에 그저 웃음을 터트리고선 다시 한번 자신에게 각인하듯이 내뱉었다.
" 너를 사랑해, 파니비앙. "
" 나도 진심으로 널 사랑해, 메리. "
마침내 행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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