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나쁜 놀이에 휘말렸다고 생각해!
악몽 테마
앞이 흐렸고, 온몸이 아팠다. 주변은 시끄럽기까지야 했다. 일정한 박자로 떨어지는 빗소리, 충격과 걱정이 뒤섞인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뒤늦게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사이렌의 비명. 얼음장보다 차가워진 손으로 귀를 막으려 애썼으나 도무지 팔에 힘이 실리지를 않아 손끝을 움찔거리는 것이 다였다. 그 아이한테 가야 하는데….
문득 미로는 등에 닿은 바닥이 지나치게 부드럽고 따스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꿈이구나. 악몽이라는 걸 알아차렸으니 잠에서 깨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온 소음이 귓가에서 멀어져갔다. 눈을 뜨기 위해서 셋, 둘, 하나.
흰 형광등이 보였다. 맑고 화사한 빛이 눈꺼풀 위로 쏟아졌다. 미로는 물기도 없이 뻑뻑한 눈을 비볐다. 온 뼈마디가 앓는소리를 냈다. 어젯밤, 야근으로 피로했던 걸까? 사흘 밤낮을 누워만 있다가 일어났던 때에도 이렇게 힘겹지는 않았는데. 의아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키자 지지대가 부실한 침대가 삐걱거렸다. 찬찬히 주위를 둘러봤다. 따스한 상아색의 천장과 벽, 창문을 가리는 하얀 커튼, 침대 옆에 놓인 협탁과 빈 화병. 분명한 건 제 집은 아니었다. 당혹감이 몰려왔다.
대체 여기는 어디지?
이곳에 왜 있는지, 무얼 하다가 잠들었는지. 연달아 떠오른 의문 속에서 터무니없는 상황에 부닥쳤다는 걸 깨달았다. 기억이 없었다! 그저 이곳을 나가야만 한다는 강렬한 집념만이 생겨났다. 오래도록 간절히 바랐던 숙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미로는 이 방의 유일한 문으로 느릿하니 걸음을 옮겼고 미닫이문을 밀었다.
덜커덕덜커덕, 아무리 밀어내고 쾅, 주먹질을 해도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밖에서 잠겨 있었다.
여기 사람이 있-…단다, 가둬졌어요, 밖에 누구 없-…습니까? 맥아리 없는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며칠 배라도 곯았는지 그새 힘이 빠져 벽에 쓰러지듯 기대앉았다. 사람은 배고파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누가 그랬더라.
누군가를 찾아대며 의식이 가물거려 오는 무렵, 한사코 열리지 않았던 문이 열리고.
“이럴 줄 알았다. 이 바깥으로 나가기에는 백 년은 일러.”
장난기 넘치는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고개 들어 올려보면 제 눈썹에나 닿을까 싶은 키를 가진 청년이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흉 없이 멀끔한 갈색 피부, 어둑한 검은 머리카락과 선명한 회색 눈동자. 평범하게 생겼다는 짧은 감흥이 일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가야 하는데, 더는 의미가 없는데. 속으로는 고요하고도 격렬하게 발악했으나, 무안하게도 정체 모르는 이가 제 몸을 안아 올리면서 침대에 다시 눕히는데 저항을 못 했다. 수발을 드는 게 익숙한지 자신을 안아 든 자세가 안정적이었고,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제 몸은 고작 문을 두드리느라 기진맥진 힘이 다 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전부여야만 했다. 수마에 사로잡혀 물먹은 솜이 된 것도 낯선 이가 곁에 있는데 편안한 까닭도. 아, 그래도 이 말만은 입버릇 되어 되풀이했다.
“나가야만 해. 그 아이가 기다린단다.”
눈꺼풀이 닫히는 틈으로, 제 발목에 무언가를 채우며 울듯 말듯한 미묘한 표정을 짓는 이가 보였다.
* * *
“나가게 해주렴.”
“벌써 다섯 번이나 답했잖아. 우리가 무슨 사이였는지 알아맞히면 풀어주겠대도?!”
미로는 어이가 없어 노려보았다. 다짜고짜 발목에 가죽띠를 족쇄 삼아 채운 것도 이해를 못 할 지경인데, 하물며 이 상종하고 싶지 않은 취향을 가진 애와 아는 사이였다고? 한 손으로 벽을 짚고 상체를 늘어뜨려 가며 문을 밀려고 해도 팔이 닿지 않았다. 짜증이 치밀어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방을 돌아다닐 수 있어도 문까지는 못 다다르도록 섬세히 족쇄의 끈 길이를 재단한 것이다. 참 음침하기 짝이 없었다. 정작 이 족쇄를 채운 이는 뭐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로 애처럼 어거지나 부리고 있었다.
저 수상쩍은 파렴치한의 말로는 자신을 막는 까닭은 단순했다. 문밖에는 검은 옷을 뒤집어쓴 무서운 사람들로 가득하다. 일개 일반인인 데다 주먹 쓸 줄도 모르는 너로서는 저들을 뚫고 지나가기 어렵다. 어떤 신에게 빌더라도 저들 앞에서는 맥을 못 추고 위험한 곳으로 질질 끌려간다. 그곳으로 잡혀간 이들 모두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없게 됐다. 쫑알쫑알. 입만 열었다 하면 청년은 신나게 답을 해댔다. 보이는 낯에서 속내를 읽기란 어렵지 않았다. ‘더 물어봐 주라!’
신을 들먹거리는 이유야 모르겠으나 저 청년이 유신론자쯤은 되리라고 가뿐히 추측하였다. 다만 그가 제시한 조건에서 우리가 아는 사이라는 전제는 믿을 수 없었다. 특별할 거 하나 없는 저 외모를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귀찮게 구는 사람이 있었는데 잊을 리가. 말갛고 무구한 눈빛을 보자면, 청년이 제게서 듣기를 원하는 관계가 단지 구면인 사이거나 친구인 정도로는 그치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열세 살배기 애를 돌보는 기분-…이 든단다?” 할 말과 못 할 말을 가리지 않았다. “정말 알아내면 풀어주는 거니?”
“거짓말 같은 거 못해.”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한다, 이 말이지? 회색 눈이 도르르 굴러가는 걸 보아하니 재주가 없다는 건 알겠다 싶었다. 티가 나도 너무 났다.
“일단 이름부터 소개해 주려무나.”
그제야 답답했던 게 풀렸다는 듯이 청년의 낯빛이 밝아졌다. 내 이름은 여려니야, 재잘재잘. 발음이 어렵기는 한데 다른 애들은 세글자 다 불러주고는 해, 따발따발. 잠시도 입을 다물지 않는 걸 보면 쟤한테 적잖이도 시달렸을 거라고 생각됐다. 자신이 아니라 저쪽에서 매달려 유지됐을 관계라고 말이다.
“그래, 여려니야. 내가 잡혀오기 전까지 무얼 했는지 아니? 이 납치극에 네가 관련됐는지도 묻고 싶구나.”
“납치라니! 그런 나쁜 말을 하는 거야?”
“창문은 커튼으로 가려놨고 핸드폰은 뺏어간 건지 찾을 수가 없더구나. 여기가 어디인지, 오늘이 며칠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모르겠단다. 모든 정보를 차단했고 바깥과 소통할 수도 없어. 이게 납치-…가 아니면 무엇이니?”
“그렇게 따지면 조금 슬퍼진다고….”
“못 나가게 묶어둔 건 너-…란다?”
그가 했던 짓을 근거로 읊어대자 여려니는 고개를 떨궈버렸다. 그 거무죽죽한 앞머리가 어깨를 스쳤다. 범인과 한패라 확신을 가지면서 그를 내려다보던 미로는 불현듯 기시감이 들었다. 머리끝까지 올라온 혼란과 의문, 속을 마구 흔드는 울렁거림. 상처라도 준 걸까? 정체도 모르는 이에게 해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미로는 창문가로 몇 발짝 걸었다. 발목을 옭아매는 가죽띠가 다행스럽게도 걸음을 허락했다. 질문을 달리해야겠다.
“그러면 너만은 왜 자유롭게 드나드는 거니?”
“혼자 있으면 심심하고 외로울 테니까?”
“나를 잘 안다면서.”
홀로 있는 게 익숙하고 편하다는 걸 모를 수가 없지 않나. 미로가 의심스러워하며 흘기자, 여려니는 사고치고 눈치 보는 강아지처럼 입을 함 다물었다. 끙끙 소리를 안 내는 게 용했다.
“때로는 비밀이 있어야 매력적인 법이야. 나는 널 꼬드기는 중이니까 다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헛소리에 인상을 썼다.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면서 말로는 번드르르했다. 앞으로 하겠다는 예고인가? 설마 단서랍시고 흘린 건가? 사람 꾀는 수작질이 하찮았다. 제 추리 하나가 들어맞기는 했다. 열렬한 구애는 제 몫이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 말이다.
“어때? 멋있다거나 이 곤란한 상황에서 구해내 줄 사람이라고 의지하게 돼?!”
“이상한 소리.”
“이것만은 확실히 할게. 너한테 위험한 짓은 절대 안 해. 부끄러운 건 시킬 수 있지만.”
시킬 거리가 한가득 준비되어 있다며 그새 제 옆으로 달라붙는다. 삽시간에 기운을 차리고 허튼 말을 해대는 게, 농담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모양이다. 뭐라도 먹이면 잠깐이라도 망발을 멈추고 제정신을 차릴까. 날카로운 도구도 없어 위협으로 들이밀 무기도 없고 발목의 끈을 잘라낼 수도 없으니, 이 방에서 탈출하려면 저 입에서 뭐라도 털어내서 정체를 밝혀내야 하는데.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이용해 먹겠다는 궁리를 하다 보면, 침대 머리에 기대 누워 수수께끼 놀음을 하면서 시시콜콜한 잡담이라도 나누게 되는 건 아닐까 싶어졌다. 휩쓸릴 것만 같았다. 너와 나를 우리라 묶을 만한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기 위하여서. 자꾸만 문 너머를 바라면서도 저 아이를 붙들고 싶은 기묘한 이유를 뒤로만 미뤄두면서. 비현실적인 사건 앞에서 저답지 않게 굴고야 만다.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로나마 쓰일 법한 일을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겪을 리가 있겠니.’
‘그러니까 상상을 해보는 거야. 바보 같다는 듯이 쳐다보지는 말고? 그러다 덜컥 잡혀가면 어떡할래?!’
창문에 달린 하얀 커튼이 펄럭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손끝에 과자 부스러기라도 묻은 듯한 착각이 일었고 찝찝하지만 아주 싫지만은 않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목 끝까지 채워둔 교복 긴팔 셔츠의 단추 하나를 풀까 싶어지는 초여름의 길목. 이제 막 변성기를 지나 앳되고도 나직한, 누군가의 웃음이 낭랑했다. ‘네 집에 초대받을 준비가 돼 있어!’ 마트 봉투가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어 품절 대란을 일으키는 과자를 어렵사리 구해왔다면서. 제 눈 색을 닮았다고 바나나 우유까지 사서 온 게 저를 놀리는 건지 그 애 입맛인지 헷갈렸었다.
햇빛에 달궈지는 아스팔트, 거절 대신 열쇠 꽂혀 돌아가는 현관 문고리, 딱딱한 거실 바닥과 푹신한 소파 등받이. 같이 시험 공부를 하다가도 어느새 그 애가 건너편에서 꾸벅 조는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한없이 밑으로 숙여지던 이마에 쥐고 있던 볼펜이 콕 찍히고서야 그 고개가 포르르 떨렸다. ‘멋있어 보이고 싶었는데.’ 입술 댓 발 내밀더니 영화나 보자며 자신을 꼬드겼다. 어차피 함께 있다는 이유로 신경이 쓰이기만 하여서 공부는 물 건너가기도 했고.
고른 영화는 단순히 학교 친구 사이라면 보기 민망한 로맨스 장르였다. 명작인 만큼 꼭 봐둬야 한다고 나중에 저 아닌 누구랑 보겠냐며 서슴없이 그 아이가 틀었다. 연인이 죽던 어제가 계속해서 똑같이 반복되어 흘러가는 하루, 연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하여 죽지 않도록 그 옆에 내내 달라붙으며 고군분투하는 주인공.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이가 연인을 되살리고자 숱한 시도를 하는 내용이었다. 그 수많은 날 가운데서 어느 하루는 연인이 납치되는 사건도 있었고, 아무리 애써도 연인을 구하지 못해서 주인공이 식음을 전폐하는 날도 있었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 얼마만큼 희생하고 애쓸 수 있는지, 그 진심을 시험하는 것처럼. 첫사랑조차 못 해봤을 두 소년에게는 주인공의 간절함을 이해하기에는 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덜컥 잡혀가면 어떡할래?! 나한테서라든가?’
과자 봉지에 남은 부스러기라도 줍고자 손을 넣었다가 피부색 다른 두 손등이 맞닿았다. 시선이 얽혔고 그 애의 손이 과자 대신 제 손을 옭아맸다. 영화의 대사와 질문의 대답 사이, 고요한 적막을 채우는 건 달달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였다.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학창 시절의 어느 날이 떠오를 줄은. 그때 무어라고 답했더라. 답은 했던가.
기이하리만치 주변이 조용했다. 가만히 기다릴 만한 성격은 아니던데. 미로는 의아해져서 고개를 돌렸다. 소리도 내지 않고 언제 나갔다 온 걸까. 손에 하얗고 노란 꽃 무더기를 가득 들고 화병에 꽂고 있는 여려니가 보였다.
“그 꽃은 뭐니?”
“선물.”
“꼭 병실에 두는 것만 같구나.”
“다른 답안은 없어? 요새 병실은 꽃 반입 금지거든.”
또 맞춰봐 놀이였다. 관찰할 대상이 한 명밖에 없었고 이름 말고서는 정확한 답을 해주지 않아, 저 미묘한 대화 방식에 걸린 제한과 특징 몇 가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첫째, 탈출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화제는 저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다는 점. 둘째, 비로소 질문할 때만 설렁설렁 답을 하거나 물어볼 방향을 안내하듯 다른 식으로 되돌려 묻는다는 점. 셋째, 자신은 기억 못 한다는 우리의 추억마저도 정확히 짚어야만 알려준다는 점이었다. 같은 색과 종류로 조합한 꽃을 저 아이에게서 받았던 걸까? 축하하거나 기념하면서?
“무엇 때문에 주는지 맞추라는 거니? 차라리 줄 거라면 손에 들 수 있는 꽃다발이 낫단다.”
미로의 대답을 듣던 여려니는 그대로 멈추고야 말았다. 두어 번 느리게 깜빡이는 눈꺼풀. 목구멍에 무언가 턱 걸린 것처럼 쉬이 말을 못 하고 입을 달싹거렸다. 호흡을 갈무리하고서야 묻는 게, “꽃 색은 마음에 들어? 내가 보고 싶은 거랑 네가 들고 싶은 색이 다를 수도 있으니까….” 였다.
너를 해칠 만한 짓은 하지 않는다는 여려니의 진솔한 말씨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저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애라서, 상처 받은 표정을 지으면서 의견을 묻는다고 치부하기에는 숨통이 먹먹하게 조여왔다. 어떠한 섭섭함. 단지 아는 사람으로만 그치지 않기를 바라던 여려니의 바람이 저에게로 옮은 걸까. 기억의 공백이 괜스레 실감 났다. 있다가 사라진 걸 체감하니 허전하고 미안했다. 어쩌면 상대는 아는데 저만 모른다는 사실이 부채감으로 남아 무거운 걸 수도 있겠다. 저 애가 그냥 가엾은 거라고.
“꽃 색이 중요하니?”
“밖으로 나가야 한다며? 우리 그걸로 싸웠었거든.”
“주고 싶은 사람이 고르는 게 낫단다.”
“그때도 그렇게 말했었어. 맹해가지고 말이야. 네 의사는 어디갔는데?”
“네 마음대로 하렴.”
해가 저물어가야 할 텐데도 창밖은 아직도 환했다. 빛만 있다면 폐쇄적인 장소에서도 살만하다는 걸 검증하려는 연구실인가? 그렇다면 피실험자로 자신을 선출했을 만도 했다. 잠든 채로 끌려와 백야 현상이 일어나는 타국에서 눈 뜨는 건 가당치 않은 일이기도 했고. 꼬박 한나절은 걸릴 비행시간 동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잠들었을 리가 없으니까. 장소에 관한 가정이 연달아 일어났다. 혹여 거대한 조명을 배치해서 영원한 낮을 연출하였나 싶어서 미로는 커튼을 열어재꼈다. 왜 진작 걷어볼 시도를 안 했을까.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가 중요하니?’
‘첫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단 말이야!’
‘네 마음대로 하렴.’
쏴아.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파도에 자갈 씻겨 흔들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다. 노오란 가로등 불빛이 나뭇잎 사이를 비추고,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두 정수리 위로 딱 그만한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지워지곤 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귀갓길. 집으로 곧장 가는 지름길을 두고서 두 사람은 공원을 거쳐서 멀리 돌아 걸었다. 아침에는 출근하는 인파로 북적거렸던 거리가 밤에는 한적하고 조용했다. 그 적막도 얼마 못 가서 칭얼거리는 목소리로 채워졌다. ‘밖에서 기다리느라 추웠어.’ ‘여름에 웬 추위를 말하는 거니.’ ‘손잡아달라는 거잖아!’ 눈코입 흐릿한 얼굴이 불만을 품었다. 노란빛으로 윤곽이 덧그려지는 낯을 찬찬히 바라보면 다음에 지을 표정이 상상됐다. 입술을 비죽 내밀다가 가볍게 웃겠지. 희미하게나마 그 애의 이목구비가 스쳤으나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깍지를 낀 두 손이 걸을 때마다 살랑거렸고 걸음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따라붙었다. 과자와 우유가 담긴 마트 봉투를 들던 그 거뭇한 손은 어느새 소년의 것을 넘어서 청년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저보다 작기만 하여서 제 손안으로 쏙 들어왔다.
‘우리 고등학생 때 내 연극부 일로 도서실에 늦게 갔던 날에 말이야. 우리 아이스크림을 먹었잖아.’
‘그랬었-…지.’
‘실은 일부러 입에 묻혀가면서 먹은 거야. 날 기다렸다는 말이 듣고 싶었는데, 안 해줘서 약 올랐거든.’
유달리 덥다고 느꼈던 그해, 도서실이 시원해서 공부하기 좋다는 핑계로 그 애를 기다렸었다. 무더위가 한 꺼풀 꺾일 저녁까지 그 애를 지켜봤다가 지금처럼 같이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 기다렸어?’ 무심코 그 애가 던진 한마디로, 저를 곤란하게 만들던 열감이 한낱 햇빛 따위가 아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었다.
‘일부러 입 맞춰달라고 유혹했다는 거니?’
‘덕분에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고백할 기회를 빼앗긴 게 억울해.’
‘……어림없는 말이란다. 누가 먼저 고백했는지가 중요하니?’
마음대로 하렴. 시답잖은 대꾸가 돌아올 거로 생각했다. 평소의 저라면 안 했을 행동을 들추고 부끄럼 주는 걸 좋아했으니까. 정작 대답 대신 저에게서 스며든 향이, 제 것이 아닌 풀내음이 훅 끼쳐 왔다. 제 목덜미가 끌어당겨지고 그대로 입술끼리 포개어졌다. 불빛 따라 길게 늘어뜨려진 두 인영이 하나로 어우러졌다.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어. 나, 지금 너한테 나를 주고 있는 거야!’ 어둑한 두 눈에 제 모습이 가득 담겼다. ‘나와 결혼해 줘!’
영원을 바치는 고백이 풋풋했다. 가까이 맞붙은 심장이 여느 때보다 빠르게 뛰는 게 전해졌다. 열기 오갔던 두 사람의 숨결이 밤공기를 난잡히 덧칠하였고, 코끝끼리 비벼지는 틈으로 옅은 웃음이 샜다.
잊은 기억이 차차 하나둘 서서히 떠올랐다. 저 청혼은 멋스럽지 않았다며 이튿날 반지와 함께 자신은 다시 고백받게 될 터다. 결혼을 올리기 전날까지 좋아한다는 말을 돌림노래처럼 들려주다 못해 길가에 핀 하얗고 노란 들꽃이 보일 때마다 제게 내밀 테다. 미로는 깨달았다. 그게 다 한 사람과의 끝맺지 못한 추억이라고.
그 결혼은 비가 내려서 무산되니까. 빗소리와 웅성거림 그리고 사이렌. 몇 번이고 저 없는 곳에서 홀로 겪었을 격통을 상상했었다. 갑자기 배가 곯기라도 했는지 휑해지고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코를 간질이면, 무얼 하다 잠들었는지 설핏-….
열렬한 시선이 뺨에 닿았다. 여려니가 대뜸 얼굴을 코앞까지 들이밀고 있었다.
“네가 멍하니 있길래 서서 잠든 줄 알았어. 눈 감아볼래?” 입 맞출 꿍꿍이를 숨기지도 않는다. 여려니는 미로의 옷깃을 잡고 재촉했다. “응? 어서.”
“딱 너와 같은 분위기를 가진 친구가 있었단다. 학교 잔디밭에 누운 나를 못 보고서는 그대로 내 다리에 걸려 넘어진 거 있잖니.”
“잠깐만. 이 타이밍에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거야? 눈치도 없이?!”
“매일 점심시간 때마다 도서부로 내게 눈도장을 찍으러 왔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반대가 되었더구나.”
“저기. 내 말 들리지? 나, 이대로 너한테 뽀뽀할 지도 모른다고?”
“그 애가 잡아먹는다는 말을 자주 했었어. 그리고 잡혀주었단다. 결혼을 올리기로 했거든.”
그리고 그날처럼 여려니는 재빨리 미로를 두고서 문밖으로 달음박질을 쳤다.
* * *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은 식 올리기 하루 전날 사사로운 걸로 대차게 싸웠고, 좋은 날을 앞두고서 갈등의 골이 더 깊어지기 전에 여려니는 화를 식힐 겸 집 밖으로 달아났다. 딴에는 상대를 생각한 배려가 예기치 못한 사고에 휘말렸고 죽음은 되돌릴 수 없었다. 뉴스에 몇 줄 실린 교통사고 사망 소식은 사고를 낸 운전자의 혈중알코올농도를 비롯한 사고 경위를 딱딱한 문장으로 일목요연하게 알려주었다. 이런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유감이라는 의사의 사망선고나 인터넷 뉴스 댓글로 줄줄이 달린 짤막한 안타까움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듣는 틀에 박힌 조문 위로말 같은 건, 혼자 남겨진 연인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저승과 이승 사이, 떠나간 이와 남겨진 이가 서로를 그리워하여 만들어진 꿈속의 공간에서 과학적인 법칙이나 인과 관계가 적용될 리가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그토록 찾아 헤매던 누군가가 누구인지 알아차리면, 남겨진 이가 문밖으로 못 나가도록 묶어둔 것 따위는 쉽사리 풀어졌다. 애초에 죽은 자는 산 자를 이기지 못하는 법이다.
잔뜩 열어젖혀진 커튼 뒤로 창문에는 갖가지 풍경이 살아 움직이듯 펼쳐졌다. 미로와 여려니, 온 시절 속 두 사람의 추억이 창문틀마다 영상처럼 끊임없이 반복하여 재생됐다. 도서실로 가는 복도에서 그 아이가 오지 않나 하고 미리 준비한 과자를 꺼내는 양록색 긴 머리칼의 소년 뒤에는, 계단에서 몰래 지켜보던 검정머리 소년이 와락 껴안기 위해 한걸음에 달려가고 있는 장면이. 갓 성인이 된 학생들이 부어라 마셔라 하는 술자리에서 일찍이 벽에 기대어 잠든 척하는 양록색 긴 머리칼 청년 위로, 그 술수도 모르고서 검정머리 청년이 크기 작은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는 광경이. 두 해 동안 나라에 묶인 탓으로 짧아진 머리칼을 하고서 통화로나마 그리움을 달래던 시절이. 우산 두 개를 들고도 굳이 하나로 나눠 쓰겠답시고 꾸깃꾸깃 몸을 욱여넣느라 서로의 어깨 끝이 빗물로 젖어 든 장마철에. 침대가 좁은데도 꾸역꾸역 베개를 들고 와 같이 누우려던 수작이. 인테리어와 어울리지도 않는데 고집부려 선택한 노란 식탁보 위로 매일 얼굴 보며 먹었던 아침 식사가. 입에는 커다란 사탕을 물고 머리에는 유치한 머리띠를 달고서 희게 웃었던 놀이공원이나, 도심에 우뚝 솟은 건물의 꼭대기 전망대에서 바라보던 불꽃놀이나. 어디를 가든 어떤 날씨나 계절에서든 항상 서로가 있었다.
미로는 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토록 열리지 않았던 문이 이제는 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부드러이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다시 닫혔다. 바깥에 있는 여려니가 억지로 문을 막아댔다.
“연아.”
“안 돼! 열지 마. 이곳으로 넘어오면 안 돼.”
이곳은 삶과 죽음의 경계라고, 이 문 너머로는 네가 와서는 안 된다고, 거짓말은 안 했으니 믿어달라고, 제 말을 들어달라고. 마구잡이식으로 뒤엉킨 말이 쉼없이 이어졌다.
“이 시간이 길게 늘어져서 아주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치? 네가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한다면 나도 고집 그만 부릴게.”
“누가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를 따라 곯아 쓰러지는 걸 원하겠어.”
“식사도 잘 챙겨 먹고…. 내 생각도 적당히는, 조금 그렇고? 많이 해주고….”
“어쨌든 남아있는 사람이 끊임없이 기억만 한다면 그만큼 한평생 살아있는 거래. 그걸 반복하면 언젠가는 내 죽음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될 거야. 그으러니까.”
여려니는 눈물로 앞이 희뿌옇게 가렸어도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선연히 그릴 수 있었다. 한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찬란한 감정이 문 너머에서 제 연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고작 문 하나로 서로를 못 보게 되더라도 숱한 추억 속에 품었던 감정은 그대로였고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난데없이 들이닥친 이별로 작별의 말을 하고 싶지만은 않았다. 모든 추억과 감정을 그러모은 한마디가 목 안으로 자꾸만 맺혔다. 살아있었더라면 편히 뱉었을 고백이 유난히 어렵기만 했다.
세계가 천천히 자전하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으러니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고만 약속해. 살아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만나게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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