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키산산
분명 낭만주의가 많은 인간을 망쳤다고 했다. 그리고 정성찬은 자신이 이 빌어먹을 낭만주의에 망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분명 그렇게 생각했었다. 빌어먹을 오오사키 쇼타로라는 낭만에 잠겨서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그리고 빠져나오지 않겠다고. 시간이라는 얇고 날카로운 쇠붙이가 세밀한 구멍을 내고 낭만이라는 감정이 서서히 빠져서, 그로 인해 호흡이 가능해져 선택권이 생긴다고 해도 질식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싶다고.
보통의 사람들은 우기의 시작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정성찬도 그런 부류 중 하나였을 테다. 눅눅하고, 축축하고, 운동화가 젖는 그런 감각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모든 취향은 한순간에 바뀐다. 비 냄새를 맡던 오오사키 쇼타로, 비가 좋다고 말하던 오오사키 쇼타로. 그렇게 사고가 재정립된다. 그 애가 원한다면 해가 두 번 다신 뜨지 않아도 괜찮다고. 모든 원망은 제가 들어도 좋으니 이별한 기간에도, 우리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 긴 시간 속의 낭만에게 비를 자주 내려 달라고, 그렇게 성찬은 빌었다.
마지막에 했던 약속처럼 성찬은 쇼타로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테루테루보즈도 달아보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엔 일부러 더 바쁘게 살았으며, 성인이 된 순간부터는 술에 절어서 벌겋게 타오르는 얼굴로 침대 위에 쓰러지듯 눕곤 했다. 오오사키 쇼타로 생각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고....... 다짐과 다르게 정성찬은 오오사키 쇼타로의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상상한다. 하필 마지막 얼굴이었다. 등신같이 옷을 벗어서 다 젖은 머리를 덮어줄 게 아니라, 뺨에 묻은 피를 닦아줄 걸. 눈을 보고 사랑한다고 해 줄 걸. 같이 도망가자고 헛된 희망이나 한번 뱉어볼 걸. 모든 선택이 다 후회로 남는다.
비가 창문을 거세게 때리는 소리에 정성찬은 아주 가끔 흐느껴 울곤 했다. 약속했잖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잠겨 죽을 것 같은 날에만 네 생각 하라고. 성찬은 내일 바다에 가기로 다짐한다. 분명 숙취와 함께 퉁퉁 부은 얼굴로 집을 나설 것이다. 비를 맞으면서 오오사키 쇼타로를 마음껏 생각하고 싶었다. 그리고 비와 함께 바다의 가장 깊은 곳에 묻어야 했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자신의 곁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는, 허상 같은 존재였으니까.
계절의 순환처럼 우기의 시작이 있다면, 우기의 끝도 있을 것이다. 우기가 끝나는 건 더 지옥 같았다. 오오사키 쇼타로를 생각할 수 있는 핑계가 사라진다는 뜻이었으니. 핑계를 하나만 더 만들걸. 우리가 함께 눈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雪燦々, 유키산산
눈이 찬란히
이번 여름은 우기가 꽤 길대. 운명은 다시 한번 사랑의 손을 들어준다. 성찬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 볼품없이 울게 될 거 같아서. 그럼 자신의 눈앞에 있는 쇼타로가 당황할 수도 있으니까. 성찬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아는 사람이냐며 뒤에서 아르바이트생이 묻자 쇼타로는 입꼬리를 예쁘게 당겨 올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응, 내 친구. 성찬은 여기서 또 그 '친구' 라는 단어에 한번 집착한다. 배가 불렀지.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는데 친구보다 더 적절한 단어가 어디 있겠는가. 성찬은 한 손으로 꽃다발을 안고, 남은 한 손으로는 쇼타로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그래, 내가 쥐고 있는 건, 허상이 아니다. 정말 오오사키 쇼타로다. 수도 없이 바다 밑에 묻었던, 그토록 사랑하던 오오사키 쇼타로였다. 자신과 달리 쇼타로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마치 이 만남을 예상한 사람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사람처럼.
어설프게 붙잡은 손목과 달리, 작별인사는 성큼 다가온다. 잘 가. 쇼타로의 명랑한 목소리에 성찬은 결국 잡은 손을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또 보자, 도 아니고 잘 가, 라니. 우리 할 이야기가 되게 많지 않았나? 이렇게 가벼운 인사로만 끝낼 관계는 아닌 거 같은데. 둘 다 분명히, 고군분투하면서 살았을 텐데.
"퇴근 언제 해."
"...아홉 시쯤."
"기다릴게."
그때 보자. 성찬은 서둘러 대화를 끝낸다. 여기서 무슨 틈이라도 생긴다면, 이 비틀린 낭만 덩어리는 무슨 말을 어떻게 할지 모르니까. 쇼타로는 당황한 표정을 짓곤 두 눈을 바보같이 깜박였다. 오오사키 쇼타로는 정성찬의 인생 중 가장 큰 낭만과 트라우마로 남았는데, 정성찬은 오오사키 쇼타로의 인생의 수많은 사건 중 하나가 된 느낌이 들었다. 서운하진 않았다. 비참할 뿐. 그래, 비참할 뿐이다. 험난한 삶을 산 오오사키 쇼타로가 나름 덜 험난하게 산 자신의 심장에 상처를 내는 느낌이었다. 그럴 의도가 없다고 해도 피가 뚝뚝 떨어지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으리라. 뒤에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성찬의 얼굴을 긴가민가 알아보려고 할 때쯤 성찬은 자리를 떴다. 혹시 방금 모델 정성찬 아니었어요? 아르바이트생 질문에 쇼타로는 뺨을 손끝으로 긁적이며 속도 없이 웃는다. 에이, 아니에요.
오오사키 쇼타로는 정성찬의 눈빛을 읽었다. 여전한 애정과 그리움이 가득한 따뜻한 눈빛. 지나간 사랑을 담은 눈빛일까, 현재진행형의 눈빛일까. 쇼타로는 그 이상의 눈빛을 읽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울고 싶지도 않았다. 너의 좋은 추억으로 남았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서 두려웠다. 누구나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잖아요. 인터뷰에서 본 활자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오른다. 미안. 네 생각 자주 했어.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오늘 스치지 않았다면 정성찬은 자신의 생사 여부도 몰랐을 테다. 반대로 자신은 정성찬에 대한 소식을 알았겠지만. 이게 아주 영악하고도 둔한 정성찬이 노린 점이었다. 두 번 다시 자신이 연락하지 않아도,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그 자리에서 자신의 존재를 열렬히 알리는 것.
성찬아, 너는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등신 같아. 바보 같고, 그래서 나는 여전히 네가 가장 특별해.
너무 특별해서 더 이상 만남이 끊어진다고 해도 모두 괜찮을 것 같았다. 우연이라는 게 억지로 만들어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이 수많은 꽃집 중에서 자신이 있는 시간대에 꽃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운명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싶은 말도 많았을 텐데, 안녕, 이라는 평범하고도 형식적인 인사가 있으면서도, 성찬은 많이 아팠냐고 자신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 그래, 정성찬은 그런 애였다. 너는 얼마나 아팠어? 쇼타로는 쏟아지는 비를 가만히 바라보며 턱을 괸다.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아니다, 아주 조금은 아팠으면 좋겠다.
하늘에 구멍이 난 게 틀림없었다. 저녁 아홉 시, 쇼타로는 퇴근 준비를 끝냈고 성찬은 그 앞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안녕. 쇼타로가 성찬의 기다림에 반응하자, 성찬도 안녕. 작게 대꾸하곤 우산을 약간 기울여 쇼타로에게 씌워준다.
"여전히 비 맞는 거 좋아해?"
"내가 애도 아니고."
서로의 관계에 선이 그어지는 느낌이다. 어른도 비 맞는 걸 좋아할 수도 있잖아. 이걸 비참하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아님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난 것에 후회를 해야 하는 걸까. 혼란스러운 감정을 붙잡지 못한다. 자신은 여전히 오오사키 쇼타로를 생각하고 싶어서 비를 맞고 다니는데. 바다를 보러 가는데. 네 생각을 실컷 하고 바다 깊이 묻어버리는데. 우산을 접어 그냥 비를 다 맞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성찬은 차마 우산을 접지 못했다. 바다를 사랑하던 사람이 마음이 아파서 바다에 가지 못하고, 더 이상 애가 아니라는 이유로 비를 맞지 않는 사람에게 나쁘게 굴고 싶지 않았다.
성찬은 분명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꽃다발을 품에 안고 나와서 집에 들어갔을 때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을 때도, 하염없이 아홉 시가 되길 기다렸을 때도. 다시 쇼타로의 얼굴을 본다면 너무 그리웠다고, 보고 싶었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나는 여전히 네가 좋다고. 그리고 묻고 싶었다. 너도 나를 여전히 좋아하냐고. 내 생각을 하긴 했냐고. 근처에 조용한 와인바 있어. 성찬은 그토록 하고 싶었던 말 대신 평범한 문장을 알리고, 쇼타로는 응, 좋아. 여전히 다정하게 웃는다. 그 다정함에 성찬은 점점 더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분명 가까이 붙어 있는데, 이 우산 안에 가까이 몸을 붙이고 있는데도 너무 멀게 느껴졌다.
"성찬, 너 엄청 유명해졌더라."
"엄청까진 아니고.…"
와인 한 잔, 두 잔, 세 잔.... 평범하고도 평범한 안부의 대화만 이어진다. 분명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잔뜩 쌓아놓고 있었는데 막상 마주 보고 있으니 말문이 턱 막혀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는다. 평소에 술도 좋아하지 않으면서 성찬은 와인 한 잔을 더 주문해 애꿎은 와인만 벌컥벌컥 마실 뿐이다. 성찬, 너 얼굴 완전 빨개. 큭큭 웃는 쇼타로의 얼굴. 술 못 마시는 것도 역시 너 같아. 속삭이는 목소리. 겨우 와인 네 잔에 취기가 올라온다. 헛소리하지 말아야지, 다짐과 다르게 입술이 쉽게 열린다. 모든 게 취기 탓이다. 아니, 취기를 핑계로 댄 본능이 이긴 것이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너, 취했구나."
"응, 취했어."
유명해졌는데 왜 연락 한 번 하지 않았냐고 묻고 싶었다. 다정한 말투를 가진 사람을 끝도 없이 몰아세우고 싶었다. 어떻게든 자신의 인내심에 대한, 사랑에 대한 보답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쇼타로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안 보고 싶었냐는 문장은 필요없었다.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를 그리워한 것을. 정성찬이 유명해지지 않았어도, 서로의 소식을 전혀 모르면서, 그렇게 우연히 만났다고 해도 답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취한 것 같으니까 이제 집에 가자. 쇼타로는 성찬을 부축한다. 매니저 연락처 없어? 집 주소 알려줘. 성찬은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는다. 부축 따위 필요없으면서, 이 속도 없이 다정한 곁이 좋아서 가만히 있을 뿐이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이 빌어먹을 다정함. 성찬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수를 둔다. 우리 집 멀어, 하루만 재워줘.
쇼타로는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우리 집 좁아서 안 된다는 핑계를 댈 수도 있었고, 이제 우리 그런 사이 아니라고 선을 그을 수도 있었다. 정성찬의 영악한 수에 쇼타로는 영악하게 굴지 못할 뿐이다. 단지 그뿐이다.
삑,삑,삑,삑....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침대가 좁아서, 네가 침대에서 자. 쇼타로의 말에도 성찬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고 집을 천천히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학창 시절에도 매일 만났으면서 서로의 집에 가본 적이 없었다. 우리에겐 바다가 집일 수도 있었다. 매서운 바람에 눈을 뜨기도 힘들었지만 그래도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우리만의 집. 바다가 먼 도시의 이 곳에는 우리만의 집은 없었다. 오오사키 쇼타로의 집, 그리고 정성찬의 집. 교집합 따위 없는 공존. 실례합니다. 성찬은 신발을 벗고 쇼타로의 개인적인 공간에 발을 딛는다.
차 마실래?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사랑의 집에 놀러 온 사춘기 남자애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책상 위엔 향수와 책 두 권 그리고 담배 한 갑이 있었다. 담배 피우는구나. 곁에 있을 때 담배 냄새를 맡진 못했는데. 그리고 시선이 벽에 닿자 아, 성찬은 작게 탄식을 뱉는다.
Q. 모델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어떤 친구 덕인데....... 제 소식을 알리고 싶었어요. 저는 그 친구의 소식을 영원히 모르겠지만, 제가 유명해지면 제 소식은 그 친구가 알 수 있으니까요.
Q. 의미심장한 말이네요.
A. 누구나 살면서 절대 잊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잖아요.
Q. 그렇죠. 그럼 이 자리를 빌어서 그 시절 추억 속의 그분에게 한마디 하신다면?
A. 미안. 네 생각 자주 했어. 안 하기로 약속했는데.
모든 오해가 풀린다. 더 이상 쇼타로에게 대답을 요구하고 싶지 않았다. 대답 따위 필요없었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그리워하고 있었으니까. 비가 오면 적절한 핑계를 찾은 거고, 비가 오지 않는 날엔 핑계를 찾지 못해서 괴로워하고. 서로를 생각하지 않기로 약속했으면서도 삶의 대부분을 차지한 서로의 이름.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 우는 꼴은 얼마나 웃길까 생각하면서도 수도꼭지가 열린 것처럼 눈물이 쏟아진다. 너무 보고 싶었다. 너만 생각하면서 살고 싶었고, 평생 안 만나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만나고 싶었다고. 그렇게 확인받고 싶었다.
"성찬, 무슨 일...…"
"내 생각 자주 했구나."
퉁퉁 부은 눈, 민망함도 없이 엉엉 우는 모습까지. 정성찬은 항상 솔직했다. 오오사키 쇼타로와 정성찬의 가장 큰 간극. 물을 끓이다가 흐느껴 우는 소리에 쇼타로는 다급하게 성찬을 찾는다. 자신이 붙인 인터뷰 잡지의 앞에서 우는 바보 같은 정성찬. 인터뷰를 보고 벽에 붙였으면서 왜 연락 한 통 없었냐는 원망을 뱉는 게 아닌, 뜬금없는 고백을 하는 정성찬. 정성찬은 변한 게 없었다. 여전히 소중하고, 여전히 등신 같고, 여전히 반짝거리는 특별함을 지니고 있었다. 쇼타로는 성찬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쥔다. 그만 울어, 응? 다정하게 말을 해도 한 번 열린 수도꼭지는 닫히지 않는다. 성찬은 핑계를 다시 한번 대기로 한다. 눈 안에 모래가 들어갔나 봐.
쇼타로의 집은 바다 같다. 아니, 쇼타로는 바다 같다. 그러니 모래 하나 없는 집에서도 바람이 불 수 있었고, 모래가 눈 안에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쇼타로는 혀를 내어 성찬의 눈물을 핥는다. 왜 눈물은 바다 맛일까. 차라리 단맛이었다면 우리는 덜 슬펐을 텐데. 눈물이 하필 바다의 맛과 비슷해서, 우리는 이렇게 슬픈 것이다. 바다에 가지 않아도, 평생 바다를 잊고 살고 싶어도 그 이름 하나만 생각하면 바다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니까.
"나 거짓말 하나 했어."
"...뭔데?"
"여전히 비 맞는 거 좋아해."
싫어할 리 없잖아. 쇼타로는 결국 진실을 고백한다. 도저히 이 등신같이 미련한 사람 앞에서 능숙하게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제 비가 좋아. 성찬은 쇼타로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더니 끝없는 고백이 이어진다. 네 생각을 너무 많이 했어, 약속 어겨서 미안해....
쇼타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 약속에, 성찬은 자신의 생존에 대한 약속을 걸었다. 분명히 어긋난 약속이다. 자신은 끝내 약속을 지켰고, 정성찬은 지키지 못한 약속이었으니. 하지만 원망은커녕 사랑이 발생한다. 생존을 한 대가가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성찬아, 내가 좋은 추억이었어? 쇼타로는 한참 뒤 질문하자 성찬은 나는 지금도 행복해. 라고 답한다. 나 때문에 아팠어? 쇼타로는 묵혔던 질문까지 끝내 던진다. 성찬은 고개를 끄덕인다. 강한 척도, 자존심도 다 내려둔 대답. 그리고 마지막 질문.
"나 만난 거 후회해?"
"내가 후회하는 건...."
"......."
"네가 양키들 팰 때 얼굴 안 본 거."
"너 여전히 바보구나."
"우리가 헤어질 때 네 뺨에 묻은 피 한번 못 닦아준 거."
"그만 말해도 돼."
"내가 먼저 사랑한다고 말 못 한 거."
정성찬의 모든 후회는 오오사키 쇼타로의 감정에 묶여 있었다. 쇼타로는 종종 성찬을 떠올리며 너 '때문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 모든 책임을 성찬에게 전가하면서 악착같이 생존했다. 그 약속이 뭐라고. 그냥 죽으면 다 끝나는 일인데. 결국 자신이 사랑해서 선택한 약속이었다. 회피할 곳도 없고, 자신의 뒤엔 바다가 있었다. 오오사키 쇼타로의 바다. 매서운 바람에 모래알이 눈에 들어가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소년이 유일하게 있는 바다. 비가 종종 쏟아지던 바다. 목이 멘 상태로 쇼타로는 천천히 고백한다. 성찬아, 나는... 네 덕분에 살았어.
성찬은 쇼타로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천천히 입을 맞춘다. 기다렸다는 듯 쇼타로의 팔이 성찬의 어깨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장난스러운 말투. 너 술 취했다며. 때아닌 농담에 성찬은 헛웃음이 터진다. 수작이었어, 다시 한번 잘해보려고.
"후회 하나 더 했어."
"뭔데?"
"우리가 함께 눈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에, 나 눈 싫어하는데.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아랑곳하지 않고 뺨과 이마에 여러 번 입을 맞춘다. 왜 싫어해? 예의상 던지는 질문에 쇼타로는 사뭇 진지하게 답했다. 비는 죄를 씻겨주는데, 눈은 내릴 땐 깨끗하지만 곧 더러워지잖아. 성찬은 참 쇼타로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그때 겨울까지 우리가 함께했으면 우기가 끝나도 네 생각을 할 수 있잖아."
"눈이 와도 내 생각 하려고?"
"응."
"욕심두 많다."
원래 인간은 욕심으로 살아가는 거야. 성찬은 쇼타로의 말이 꽤 웃기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 좋아해. 눈 냄새도 맡아. 로 대꾸한다. 눈 냄새라, 눈 냄새.... 쇼타로는 눈의 냄새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비 냄새를 맡을 동안 정성찬은 눈 냄새를 맡았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정성찬은 이제 비 냄새도 맡을 수 있을 테고, 그렇다면 자신도 언젠가 눈 냄새를 맡을 수 있지 않을까?
우기가 끝났다는 일기예보와 함께 계절이 바뀌고 있었지만, 성찬은 더 이상 괴롭지 않았다. 스케줄이 끝나면 매일 쇼타로를 만났고, 쇼타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럼에도 성찬은 아주 가끔 쇼타로가 사라지는 꿈을 꾸곤 했다. 꿈속의 쇼타로는 여전히 다정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내 생각 종종 해 줘. 악몽에서조차 빌어먹게 다정한 오오사키 쇼타로. 예전엔 보고 싶어서 잠겨 죽을 것 같을 때만 생각하라고 하더니, 그 말에 묶여 있는 자신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젠 그냥 '종종' 하라고 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정말 꿈마저도 쇼타로 같아서, 성찬은 악몽을 꿀 때마다 쇼타로의 집에서 마저 잠을 청하곤 했다. 자신의 집에서 쇼타로의 집까지 차를 몰고 가는 내내 심장이 쿵,쿵,쿵,쿵, 엇박으로 뛰는 듯 했다. 혹시나 초인종을 눌렀을 때 아무도 없으면 어떡하지. 내가 꾼 꿈이, 꿈이 아니면 어떡하지. 그렇게 초인종을 급하게 누르고 현관문이 열리면 잠에서 덜 깬 쇼타로가 있었다. 악몽 꿨어? 다정한 목소리도 여전히 자신의 눈앞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악몽의 원인은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오오사키 쇼타로의 업보였다. 정성찬 삶에서 가장 큰 트라우마를 남겼으니까. 하지만 쇼타로는 그 점에 대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땐,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서로에게 주어진 약속을 힘닿는 곳까지 행하는 것.
"사실 네 소식 예전에 한 번 들었어."
"언제?"
의자로 창문 깼다며. 쇼타로는 잠들지 못하는 성찬에게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주곤 했다. 그때 쇼타로는 뭐라고? 소리를 빽 질렀다. 나한테서 나쁜 것만 배운 건 아닌지, 죄책감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왔다. 근데 그 애는, 평온해 보이더라. 소문을 알려준 친구의 말에 쇼타로는 아하하, 힘없이 웃음을 터트리며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평생 자신이 혐오스럽게 여기던 행동을 좋아하던 애가 했을 때, 그 죄책감은 꽤 긴 시간 동안 쇼타로를 괴롭혔다. 그렇게 쇼타로의 손바닥에선 차츰 폭력이 지워지고 있었다.
그 후로 성찬의 손바닥엔 폭력을 걷어내면 아주 작은 다정이 있었다. 자신이 오오사키 쇼타로가 손에 쥐고 태어난 폭력을 훔친 것이다. 쇼타로의 손바닥엔 분명 다정만 있을 테고, 자신의 손바닥엔 이젠 오오사키 쇼타로에게만 허용된 폭력과 다정이 가득했다. 폭력과 다정. 그런 영향의 탓인지 아주 가끔, 성찬은 쇼타로의 발목과 날개를 부러트리고 싶었다. 사라지지 못하게. 도망치고 싶어도 자신이 잡을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을 수 있도록. 죽어도 하지 못할 말. 성찬은 쇼타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겨우 한마디를 뱉는다. 날아가지 마, 제발. 쇼타로는 날아가지 않겠다고 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대답을 할 수 있는 증명이 부족했다. 생존이 아닌, 더 확실한 증명이 필요했다. 부정할 수 없는 증명. 내 사랑이 옳다는 그 증명 말이다.
11월 말, 첫눈이라는 낭만적인 단어와 함께 때아닌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은 내릴 땐 깨끗하지만 곧 더러워지잖아. 쇼타로는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요즘은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비가 오고 눈이 오는구나. 문을 열자 포근한 공기가 느껴진다. 이렇게만 온다면 눈은 곧 발목까지 쌓일 것이다. 이렇게 몇 주, 아니, 몇 개월 내내 오면 바다 표면 위에도 눈이 쌓일까. 쇼타로는 괴상한 생각을 하며 아주 오랜만에 바다가 그리워졌다. 모래사장 위에 쌓이는 눈을 밟는 것도 꽤 좋을 것 같아서. 그리고 때마침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발신자, 정성찬.
[ 눈 오는데 바다 보러갈까.]
눈이 오는 바다. 아무도 없는 고요한 바다. 눅눅하지도 않고 건조한 바다. 성찬은 쇼타로의 손을 잡는다. 서로의 손바닥이 닿고, 시선이 닿는다. 눈이 왕창 쏟아져서 바다가 잠겼으면 좋겠어. 쇼타로는 가끔 자신이 하는 말이 참 헛소리 같다고 생각했지만, 성찬은 그 모든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곤 했다.
"눈 별로 안 좋아한다며."
"바다가 잠길 정도로 쏟아지면 더러워지지 않을 거야."
차라리 헛소리 같다고 웃으면 쇼타로도 유연하게 웃고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성찬은 오오사키 쇼타로의 모든 말을 진심으로 들었다. 나 바다 깊은 곳에 너무 많은 걸 묻어서 아까운데.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그게 뭐람. 웃음을 터트렸다. 오히려 잘된 거 아닐까. 너무 많은 걸 숨겼으니 그 누구도 보지 못하게 눈이 쌓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쇼타로는 대답 대신 쏟아지는 눈과, 바다의 표면에 닿자 녹아버리는 눈을 바라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모든 계절을 다 보냈고, 이별한다고 해도 모든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이별해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쇼타로는 이 사랑이 좋았다. 이별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없는 사랑. 바다 밑에 모든 애절한 기억을 묻어두는 사랑. 정성찬의 바다엔 내 이름이 얼마나 많이 잠겼을까.
"쇼타로, 여전히 생화가 좋아?"
"갑자기?"
"조화는 영원해서 별로라며."
"영원은 좋아."
"그럼?"
"생존의 영원이 좋아. 조화는 가짜잖어."
쇼타로가 악착같이 성찬과의 약속을 지킨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죽어서 정성찬을 안고 가는 것보다 살아서 정성찬을 마음속에 묻고 가는 게 더 가치 있으니까. 성찬은 철썩이는 파도를 묵묵히 바라본다. 쇼타로, 날아가지 마. 내 곁에 있어줘. 파도 소리와 섞인 고백에 쇼타로는 바보 같다며 작게 웃었다.
성찬의 유명세는 점점 더 높아졌고, 쇼타로는 꽃집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후 플로리스트 자격증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정성찬은 참 이상한 인간이었다. 유명해지면 더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은 주야장천 만날 텐데,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터뷰에선 은근히 연애하는 티를 내기도 했는데, 해당 잡지 인터뷰를 읽고 쇼타로는 그날 성찬에게 자신의 존재로 인하여 네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성찬은 그 말이 황당했다. 그럼 떡하니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 솔로인 척 하라고? 무슨 그런 개떡 같은 말이 다 있는지. 성찬은 오히려 이번 기회에 반지 하나 맞추고 싶었는데. 발목을 잡고 싶지 않다는 쇼타로의 말에 괜히 더 억울해진 것이다.
나는, 네 발목을 매일 잡는 상상을 하고, 네가 도망칠 것 같으면 꺾어버리는 상상까지 하는데. 왜 너는 나를 쉽게 포기하려고 하는지. 왜 나만 악착같이 너를 붙잡고 있는 건지.
"나 포기하지 마."
"포기가 아니라...."
"내가 이 직업을 하는 이유도 다 너야."
"성찬, 내 말 좀...."
"네가 내 곁에 있으니, 이제 이 직업도 그만둘 수 있어."
왜 계속 날아갈 것처럼 굴어? 성찬은 오오사키 쇼타로에게 약하고, 오오사키 쇼타로는 정성찬에게 약하다. 이 싸움은 결국 쇼타로가 백기를 드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자신에게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성찬은 종종 자신이 날아갈 것 같아서 무섭다고 고백하곤 했다. 자신한텐 이 빌어먹을 날개가 없는 것 같다고. 따라가고 싶어도, 이렇게 붙잡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하지만 쇼타로의 의견은 달랐다. 만일, 자신에게 날개가 있다면 성찬에게도 날개가 있을 것이다. 단지 우리의 차이는 성찬은 자신의 날개를 꺾고 싶어 했지만, 자신은 절대 성찬의 날개를 꺾지 않을 거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결말은 뻔했다. 정성찬은 자신의 날개를 직접 꺾을 것이다. 왜 자신이 날아가지 않는 걸 바라지 않냐고 불안해하며. 그 사랑을 알기에 쇼타로는 더 이상 다툼을 이어갈 수 없었다. 너무 소중해서 꺾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너무 소중해서 꺾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쇼타로는 성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말을 이어나가려고 할 때, 코끝에서 묵직한 향이 스친다. 포근하고 차가운,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겨울 냄새.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성찬, 내일 눈 올 것 같아."
성찬은 짧게 숨을 참는다. 그리고 쇼타로는 비로소 욕심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내 사랑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어. 쇼타로의 말이 끝나자, 성찬의 입술이 쇼타로의 입술에 닿는다. 입술이 떨어질 때 쇼타로는 겨우 고백한다. 날아가지 않아, 영원히 곁에 있을 거야.
내일 눈이 찬란히 내릴 것이다. 우리는 손을 마주잡은 채 함께 눈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찬란한 우기와 폭설을 기다릴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재난 같은 사랑을 영원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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