空=/=有
후회않는 인생은 없다지만
아, 실수했다.
“츠루기!”
누가 들으면 죽는 게 넌 줄 알겠어. 너무 그러진 마. 아직 전부 끝난 것도 아니야…. 너는 마저 할 일이 있잖아…. 상황에 맞지 않는 실없는 생각을 하고, 귓가에서 짧게 맴돈 비명 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짧은 삶도 끝났다.
평생을 무던한 칼날로 살아 칼답게 부러졌다.
이름은 삶을 대표한다고도 하지, 그렇다면 정말 그렇게 살았다. 자라오며 많은 것을 잘라내고 비운 마음은 쇳물처럼 녹아 단단해졌다. 나는 무던한 마음으로 나를 벼르고, 날을 세우고, 무언가를 겨눈다. 그리고선 벤다.
그건 나쁜 삶은 아니었다. 아마 세상 전체에서 평균을 내보면, 나는 꽤 성공한 삶이 아니었던가. 지구는 얼마나 넓고 또 네이버후드는 그보다 얼마나 넓은가. 셀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삶들 가운데 불행하고 나쁜 삶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세상 가운데 ‘나쁘지 않았다’라고 진심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것, 이 사실이야말로 나의 인생을 증명하는 것이겠다. 나는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만나 몇가지 행운을 통해 괜찮은 삶을 꾸렸다. 죽음은 허무했으나, 그것은 무서울 정도로 공평해서 모두에게 그렇다. 내 인생은 나쁘지 않았다. 한 치의 거짓없는 진심으로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나쁘지 않은 삶에도 후회는 있는 법이라, 나는 내 인생의 몇가지 후회를 되짚는다. 결국엔 사람이라 비워지지 않는 마음은 교류가 되어 흔적을 남긴다. 유有는 공空이 될 수 없어서 칼날은 상처를 새긴다. 끝난 삶에 더이상 미래란 없고 흘러가는 시간은 공유되지 못한 채 고이고 고이고…
그래서 나는 여기에 전해지지 않는 사과를 남긴다. 죽음이라는 단절이 전부 허무하게 흩어낼 조각들을 생각한다.
미안합니다.
지키지 못한 것들이 참 많군요.
사람과 생명, 그리고 약속. 많은 것들을 후회합니다.
항상 보이는 곳에 있겠다고 했는데 미안해. 기다리겠다고 약속했는데 미안해. 쭉 라이벌로 있자고 했는데, 더는 지킬 수 없어. 같이 보기로 한 영화도, 외롭지 않게 해주겠다던 다짐도, 더 큰 미래를 축하하기로 한 약속도, 함께 더 높은 곳을 향하기로 한 맹세도, 괜스레 해보던 나아간 시간들 속 가정들도,
전부 미안합니다.
용서도 바라지 않겠습니다. 어겨버린 것은 저니까요.
책임은 무거워진다. 이렇게 무거운 것들을 많이도 지고 다녔구나, 새삼 깨닫는다.
그 동안 이 무게를 다 지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큰 착각을 했다. 책임은 실패했을 때 진정한 무게가 드러난다. 그리고 끝에 도달한 나는 실패했다…. 실패한 무게가 몸을 누른다. 하지만 그것이 책임이라는 것이기에,
나는 얕은 숨을 뱉고, 이 무게를 감내하고,
문득 한 얼굴을 떠올리고,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존경하는 할아버지. 무심하고 매정했던 할아버지. 나를 키워주신 할아버지. 아플 때 호토를 끓여주신 할아버지. 밭을 맬 땐 어깨가 수그러드는 할아버지. 조용한 걸 좋아하시던 할아버지. 아이를 좋아하지 않던 할아버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그렇게 생각했던…
날 차갑게 바라보던 어린 시절을 생각한다. 조용히 가라앉은 집의 공기는 파란색이다. 적막은 목구멍에 달라붙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당신은 방에, 나는 거실에. 나는 소파 위에 다리를 쭈그려 올리고 무릎에 코와 입을 댄다. 그러면 숨소리는 작아진다. 창 밖에는 풀벌레가 운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소란스런 상황 속 찾아간 고향집에서 당신이 조심스럽게 건냈던 저녁은 먹고 가라는 그 말을 떠올린다. 그 말에 어땠던가, 기뻤던가. 문득 속에서 치고 올라오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키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었는데 집의 싱크대는 처음 떠났을 때보다 작게 느껴지고, 창밖의 풀벌레 소리는 여전하고, 끓였던 호토는 맛있었다.
아주 무던한 눈으로 나의 선택을 존중해준, 그 모습을 생각한다. 잘 지내란 나의 인사에 문득 살짝 떼었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돌아갔던 손을 기억한다. 그걸 보았지만 아무런 생각도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던 나를 안다. 그래, 우린 어쩌면 서로에게 겁을 먹었다. 타인처럼 한 발짝 물러나 서로를 대했다. 우리가 타인이 아닌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당신이 날 책임졌다. 내가 당신의 책임이었다.
할아버지는 실패한다, 나라는 책임을.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어깨에도 이 같은 무게가 얹어지는가. 밭을 맬 때면 굽어지는 그 곧고 단정한 그 노인의 등을 더욱 무겁게 내리찍을까. 세월의 흔적으로 자글한 주름 사이사이마다 후회가 끼게 될까. 여러 상처로 울퉁불퉁한 손마디가 늙은 눈물을 조용히 훔치게 될까. 그 노인이 이런 고통을 짊어지게 되는가.
“할아버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이 무게를 지지 마세요. 당신의 책임을 무시해요. 이 무게를 견디지 마세요. 부탁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감히 일평생 입 밖으로 내지 못했지만,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눈치 챌 수도 없었지만,
저는,
“죄송해요.”
사랑해요.
사랑해요, 할아버지. 언제나 그랬어요.
건강하세요. 오래오래 사세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건 이해하지만, 가끔은 회관에도 들러서 누군가를 만나요. 할머니가 죽은 날에 술은 적당히 마셔요. 아프면 병원에 꼭 가요. 아버지랑도 화해하세요, 아버지도 당신도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걸 서로가 뻔히 안다는데.
제 생각을 해도 좋지만, 너무 많이 하진 말아요.
나의 무심했던 할아버지.
나는 당신에게, 당신만큼은,
어리광을 부릴게요. 평생 하지 않았으니 이정도는 괜찮잖아요.
나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만은,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요.
당신을 용서해요…
용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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